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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야는 현관문만이 조용히 배웅하고, 거실에 인기척이라곤 나오토와 라켈의 것만 남자, 두 사람은 나란히 깊게 피로가 배인 숨을 토해냈다.
풀려나가듯 라켈의 손이 나오토의 옷에서 떨어진다.
해방된 나오토는 지겹단 듯이 머리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크게 긁은 후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사야가 체류하고 있던 건 시간으로 따지면 수십 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난 것처럼 피곤했다. 주로,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어 고개를 숙인 나오토의 시야에 하얀 발끝이 들어왔다.
방금까진 거실 입구 근처에 있던 라켈이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모양이다.
발소리도 기척도 없이 다가오다니, 흡혈귀답다. 그런 생각을 장난치듯 했다.
“아―…. 방금은 미안, 수고를 끼쳤네.”
몸은 일으키지 않고, 축 처진 자세로 나오토는 시야 구석에 있는 하얀 발끝을 향해 말했다.
또 라켈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대로 사야의 손을 떨쳐내지 못했더라면 나오토는 두세 번은 죽었을 것이다.
“당신 여동생이라며?”
“어. 하루카한테서 들었어?”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라켈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나오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아직 여기에 남자 하나를 매달아버릴 거라곤 생각 못할 작은 손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어떻게 된 일이야?”
“뭐냐니, 그냥 내가 저녀석한테 죽을 뻔…”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라켈의 짜증내는 듯한 말투에, 나오토는 귀찮아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라켈답지 않은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당황한 듯한, 혼란스런 듯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이야기하는 듯한 말투.
올라온 시야 속에서 찾아낸 라켈은 목소리 이상으로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끌어안듯 꽉 팔을 꼬고 있었다.
“그 애… 당신 여동생이 구사하던 힘. 그건 『드라이브』야.”
알고는 있는 거냐고 힐난하는 듯한 눈으로 라켈은 나오토를 노려본다. 무심코 나오토는 시선을 피했다. 무게를 견디듯 이마에 손을 댄다.
“…역시 그랬냐.”
나오토의 입에서, 말과 함께 섞여 한숨이 새었다.
라켈에게서 이전에 드라이브라는 능력에 대해 들었을 때, 어쩌면 사야도 그런 거 아닌가 하고 한 순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자신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식으로 머릿속 한 구석에 처박아두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그 여동생이란 게 이럴 때 갑자기 얼굴을 내비치다니.
“그것도, 그냥 드라이브가 아니야. 그건… 『최악』의 드라이브.”
타이밍을 맞출 줄 모르는 여동생 때문에 우울한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나오토에게, 라켈은 뜸을 들여가며 경고하는 듯한 날카로움으로 뒤를 이었다.
의아하여 험악하게 미간을 좁힌다.
“최악?”
흘려들을 단어가 아니다.
라켈도 또한 온화하지 못한 눈빛으로 나오토를 보고 있었다.
미간에 새겨진 작은 주름은, 언제나 위엄차게 고압적으로 행동하는 라켈에겐 어울린다곤 할 수 없는 절박한 인상을 주었다.
예쁘게 생긴 턱을 당기고 라켈은 들려주듯 수긍한다.
“그래. 그건… 생명을 흡수하는 드라이브―『소울 이터』.”
색이 옅은 입술이 짠 라켈의 말은 마치 굉장히 불길한 예언처럼 나오토의 가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영혼을 먹어치우는 자.
나오토는 다시 한 번, 이번엔 사야의 손자국에 겹치듯 자신의 목에 손바닥을 댔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사야는 접촉한 자… 특히 입술로 접촉한 자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힘을 가졌다.
마치 먹어치우듯이.
“그―”
메마른 목이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나오토는 무언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나오토의 물음을 가로막듯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튕기듯 나오토와 라켈이 움직인다. 나오토는 몸을 일으켜 복도로 뛰쳐나갔다. 앞길을 막듯 자세를 취하며, 뭣하면 기습을 그 몸으로 받아낼 각오로 앞을 노려본다.
등 뒤에서 라켈이 언제든 나오토를 뛰어넘어 기습을 가할 수 있게 몸을 낮췄다.
하지만 그 경계는 곧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똑바로 뻗은 짧은 복도. 그 끝에서 반쯤 열린 문을 통해 현관으로 들어오려고 하던 건 나오토와 라켈이 동시에 상상한 일본도를 든 기모노 차림의 소녀가 아니라 커다란 눈을 둥글게 뜬 채 놀라고 있는 하루카였다.
“왜, 왜 그래?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나오토는 어깨를 떨어뜨리고 어깨너머로 라켈을 돌아보며 눈썹을 내렸다. 놀래키고 있어.
“뭐야, 하루카였냐….”
“뭐야, 는 뭐야―. 아, 라켈!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다. 어디 갔나 하고 저쪽 편의점까지 찾으러 갔었다구~.”
불만스레 찡그린 얼굴에서 팟 하고 밝은 미소로 표정을 바꾸며 하루카는 나오토 건너에 있는 라켈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흘깃 시선을 던진 나오토가 재촉하자, 라켈은 엉덩이를 빼듯 반걸음 물러나 몸을 작게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저…, 미, 미안, 해… 그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어색하게 말을 구성해 라켈은 어떻게든 거기까지 짜냈다.
‘슬슬 하루카는 익숙해…지기 시작했나?’
처음엔 입도 못 열고 경직된 상태였던 걸 생각하면 진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미소 지으며 옆으로 지나가는 하루카와, 그 하루카가 가까이서 말을 걸자 역시나 딱딱해진 라켈을 바라보며 나오토는 슬쩍 쓰게 웃었다.
익숙해졌다곤 해도 라켈이 하루카를 평범하게 상대할 수 있게 되는 건 아직 꽤나 먼 일인듯 싶다.
“어라, 사야는 벌써 돌아간 거야?”
거실을 돌아보고 탁자에 놓인 찻잔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해 하루카가 낙담한 목소리를 낸다.
“어. 볼일 끝난 모양이야.”
칼로 썰어대려 하기에 내쫓았다곤 말 못한다.
적당히 대답하며 나오토도 거실로 돌아가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자신의 찻잔의 내용물을 단숨에 마셨다.
무심코 후우 하고 안심하는 듯한 숨이 샌다.
지금, 여기에 있는 세계는 정상이었다. 하루카가 나타나자, 나오토 주변은 갑자기 일상의 빛을 되찾는다.
“하아, 왠지 피곤하니 배고파졌다….”
사야도 흡혈귀도 『사냥꾼의 눈』도 잊고, 그저 평범한 게 하고 싶었다.
약간 호들갑스레 어깨를 내리는 나오토에게 하루카가 파앗 하고 표정을 밝게 편다.
“아, 우리 집에 바움쿠헨 있는데. 먹을래?”
“오, 좋은데. 먹을래, 먹을래. 가자, 라켈.”
탁 하고 나오토가 어깨를 밀듯 두드리자 떠밀려 라켈이 한 걸음 내딛는다. 그걸 재촉하듯 하루카가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으, 에, 아, 알았, 어”
저러면 라켈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이끌리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진다.
상대는 하루카다. 라켈이 어떤 성격인지는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괴롭히진 않을 것이다.
갈팡질팡하며 싫은 듯 신발을 신는 라켈과 그걸 바라보는 하루카. 두 소녀의 뒤를 따르듯 걸어가며 나오토는 탁자 옆에 떨어진 메이가 보낸 편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겨우 한 장의 종이쪼가리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편지의 내용은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한 번에 머릿속에 새겨졌다. 애초에 기억하지 못할 만큼 길지도 않았다.
서둘러 쓴 듯한 붓글씨로 쓰인 내용은 거의 용건뿐.
―사야를 이 이상 이쪽에 묶어둘 수는 없다.
네놈 스스로의 손으로 죽여라.
추신·멋대로 죽기나 하고, 이 바보가!―
제 8장 ― 예상
1
좋은 날씨다.
하늘에 펼쳐진 연한 물색에 옅게 이어진 하얀 구름이 줄무늬처럼 늘어서 있다. 흠 잡을 데 없이 시원하게 갠 하늘. 시곗바늘은 맨 꼭대기를 지나 시원한 바람을 부르는 오후가 시작된 참이었다.
신카와하마 제 1고등학교는 점심시간이 되어 학생들은 각자 결코 길지 않은 휴식시간을 보낸다.
나오토와 라켈도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훌쩍 교실을 빠져나와 식사거리를 갖춰 안뜰까지 와 있었다.
식사거리라곤 해도 오늘은 하루카 수제 도시락은 없다.
학생회 임원인 하루카는 가까워진 문화제 준비로 바빠져 요즘은 매일같이 아침 일찍부터 등교하고 있었다.
그런 바쁜 아침에 3인분이나 되는 도시락을 준비할 시간은 도저히 없어 어제도 오늘도 나오토와 라켈, 그리고 지금도 학생회실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하루카의 점심식사는 매점에서 산 샌드위치나 빵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화단 연석을 벤치 대신으로 삼아 걸터앉아 하루카의 도시락에 비하면 아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오토는 식후 커피로 마시려고 산 카페오레 팩에 빨대를 꽂는다.
이 주변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낮에도 교사와 가로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지 약간 축축하기도 하다 보니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 식사 장소로 굳이 이런 델 고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덕분에 자신들 이외의 사람이 없어 조용히 식사할 수 있었다.
라켈은 나오토보다 한 발 먼저 식사를 마치고 지금은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지면의 넓이를 확인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수상한 저 행동의 이유는 이런 어두침침한 장소에서 식사를 한 이유도 된다.
여긴 이전에 라켈이 교내를 조사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장소다. 그리고 오늘도 또한 같은 목적을 위해 여기 와 있다.
나오토는 역시 전과 같이 라켈의 마법이 방해받지 않도록 망을 보는 역할이었다.
긴 금색 포니테일을 꼬리처럼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는 라켈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오토는 느릿느릿 카페오레를 마신다. 저렴한 단맛을 삼키자 우울한 무게의 한숨이 새었다.
‘하아, 속 쓰려….’
실제로 아픈 건 아니고, 설령 위장이 상하더라도 슬그머니 고쳐져 아무렇지도 않게 되겠지만 어쩐지 줄곧 그런 기분이었다. 어제부터다.
사야가 돌아가고, 하루카와 라켈과 함께 바움쿠헨 같은 걸 먹고. 그 즈음부터 계속 뱃속이 더부룩하다.
라켈은 그 이후 사야에 대해 캐물으려 하진 않았다.
하지만 흥미를 잃은 게 아니다. 나오토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듯한, 재촉하는 듯한 기색과 시선이 몇 번이나 느껴졌다.
하지만 나오토는 아직 라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 화제를 피해 입을 다물고 온종일 버텼다.
그 탓인지 어제부터 쭉 나오토와 라켈 사이의 공기가 어색하다. 조금 전까지의 식사 시간만 해도 그렇다. 나란히 앉아 식사하면서도 대화 같은 건 한 번도 오가지 않았다.
‘이대로 서먹서먹하게 구는 것도 좀 아닌가….’
한동안은 이대로 같은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는데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면 숨이 막히고 산만해서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여동생 일로 끙끙 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오토.”
갑자기 눈앞에서 말이 걸려와 나오토는 몸을 뒤로 젖히듯 고개를 들었다.
“우옷, 깜짝 놀랐네.”
어느새 이동한 건지 라켈은 눈앞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희미하게 미간을 좁혀 이쪽을 노려보듯 내려다본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허?”
“『허?』가 아니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음침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건지 묻고 있는 거야.”
흐트러지지 않았어도 라켈의 목소리는 명백히 토라져 있었다. 빨대 끝을 물고 있던 나오토는 멍해졌다가 곧 얼굴을 경련하듯 하여 웃었다.
‘뜬금없이 폭발하셨구만…’
라켈 입장에선 뜬금없지도 않았을 테지만, 몇 분 전까지 옆에서 샌드위치를 깨물던 때의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하듯 갠 얼굴을 떠올리자 맥이 다 빠졌다.
나오토도 자신이 상당히 욱하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라켈은 그 이상인 모양이다.
“아―…. 역시, 말 안하면 안 되겠지?”
쑥스럽다. 카페오레 빨대를 깨물며 묻자 라켈의 눈빛의 온도가 또 확 내려갔다.
“우문이네. 오히려 이 상황에서 말하지 않는단 선택지가 있는 게 놀라워. 이제 와서 자신만의 문제라 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만들다 만 머리는. 우둔한 것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이쪽에 민폐라고. 비천한 하인 주제에.”
마구 찌르는 말에 나오토는 좀처럼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듯 카페오레를 빨아 마셨다.
토해낸 『하인』이라는 한 마디에 업신여김이 아니라 분노가 담겨 있는 점에서 낙담이 아니라 마음을 열지 않는 나오토를 향한 짜증이 느껴진다.
라켈은 작은 한숨과 함께 가느다란 어깨를 약간 내렸다.
“그녀는 드라이브 능력자야. 그런 이상 언젠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아오』를 원하게 돼.”
아오.
조건반사처럼 나오토는 표정을 굳혔다.
말로 듣는 건 며칠만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오토와 라켈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 공통된 목적. 무슨 일을 하던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부동의 무게중심.
그것이 『아오』다.
『아오』를 쫓는 나오토와 라켈에게 있어 드라이브 능력자는 예외 없이 라이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야는 라켈에게 있어서도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있다면 정보는 필요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오토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당신의 피를 빨았을 때, 동시에 쿠로가네 나오토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왔어. 하지만 그 중에 테르미 사야에 관한 정보는 없었어. 나오토가 테르미 사야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의식에서 잘라냈기 때문이야.”
숙여진 시야 밖에서 라켈의 목소리가 내린다. 마치 나오토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혼잣말 같은 그 목소리는, 오히려 나오토의 귀와 의식을 끌어당겼다.
나오토는 빨대를 어금니로 깨물어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무엇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거야? 고집스레 마음을 닫고 있는 건 어째서?”
힐문하는 게 아니라 나오토 앞에 늘어놓듯이 라켈은 물었다.
“테르미 사야는, 나오토에게 있어 대체 뭐야?”
그건 순수한 질문이었다. 불쾌함도 악의도 없다.
아마 어제부터 줄곧 라켈은 나오토에게 그렇게 묻고 싶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은 참았다. 묻지 않은 채로 두었다.
라켈답지 않은 배려다. 신경을 다 쓰다니. 나오토는 괴롭게 표정을 비틀고 작은 종이팩의 남은 내용물을 마시며 눈만을 들어올렸다.
라켈의 금색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피는 듯한 나오토의 시선을 지긋이, 똑바로 바라보며 붙잡는다.
마주보며, 라켈은 희미하게 괴로운 듯이 표정을 흐렸다.
“나오토는 내게 뭐든지 말해야 해. 당신은 내… 하인이잖아.”
“…왜 거기서 그런 얼굴 하는데.”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거짓말. 무슨…”
무슨, 마음에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오토는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팩을 찌그러뜨렸다. 숨을 깊게 마시고, 그걸 뱃속에서 토해낸다.
“알았어.”
나직이 중얼거린 자신의 목소리가 실로 거칠고 무뚝뚝해, 그걸 정정하듯 나오토는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정면에서 라켈을 보았다.
“말할게. 확실히 이대론 아오는커녕 스피너 일에도 집중 못 하겠지.”
조만간, 나오토는 스피너 스페리올이라는 마술사와 한탕 맞붙어야 한다. 사야 일로 라켈과의 사이에 괴리가 생기면 그게 얼마나 사소한 것이던 커다란 걸림돌이 되리라.
그런 감상적인 일에 발목을 잡혀있을 여유는 없다.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가르쳐 줘. 나도 궁금하거든. …소울 이터라는 건, 결국 뭔데?”
라켈이 최악이라고 말한, 사야가 가진 드라이브.
여동생에게 특수한 힘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것이고, 거기다 그런 흉흉한 이름까지 붙어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라켈은 그 정체를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와 갈망은 나오토에게도 똑같이 있었다.
라켈은 약간 난색을 내비쳤다. 나오토에게 있어서의 사야와 같이, 결코 밝은 기분으로 다룰 수 있는 화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긴 속눈썹이 둘러쳐진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이고, 라켈은 알았다고 확실히 끄덕였다.
2
“…소울 이터라는 건, 최악이자 최강의 드라이브. 다른 자의 목숨을 무진장하게 빨아들여 자신의 힘으로 바꿔, 최종적으론 아버님마저도 뛰어넘는 『괴물』이 되는 힘.”
연석에 걸터앉은 나오토 곁에 살짝 주저앉아 라켈은 앞쪽으로 트인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클라비스 알카드보다?”
“그래.”
의심하듯 물은 나오토에게 시원하게, 당연하기라도 하단 듯한 말투로 대답한다.
나오토는 작게 숨을 삼킨다. 라켈의 아버지, 클라비스를 떠올리며 몰래 전율했다. 만난 건 한 번뿐이다. 하지만 그 때 느낀 정체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공포는 잊을 수 없다. 존재감 그 자체에 죽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더한 괴물이 된다. 그런 건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여동생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니.
“그렇다곤 해도”
스치는 듯한 숨을 흘리며 라켈이 옆머리를 귀에 걸었다.
“드라이브 능력자 본인의 신체가 버티면, 말이지만.”
“…못 버티면, 어떻게 되는데?”
“무진장하게 모은 힘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어, 자기붕괴를 일으켜.”
“자기붕괴….”
그건 즉 어떤 상태인가, 나오토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적어도 행복한 결말이 아닐 거라는 정도만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라켈의 불온한 설명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차라리 나아. 만약 신체가 힘을 견뎌내서, 능력자가 『괴물』이 되면… 도시 하나가 소멸하는 정도론 끝나지 않는, 재앙이 태어나는 거니까.”
자기붕괴 다음은 재앙이라. 이번엔 말도 하지 못한 채 나오토는 삼키듯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실감 따위 요만큼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말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물론 과장 또한 되어있지 않다는 건 라켈의 냉정한 말투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사야가 그 드라이브를 계속 쓰면, 그렇게 된다…는 거야?”
“어제 상태로 보자면, 당장 그럴 위험이 있다곤 하기 힘들어. 원래 소울 이터는 가까이 있는 자에게서 있는 대로 생명력을 빨아들여. 나오토의 여동생은 아무래도 접촉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빼앗을 수 없는 모양이고, 그 정도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는 레벨이야.”
말하고, 라켈은 스스로 확인하듯 턱을 당겼다.
나오토는 갑자기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찡그린 얼굴을 무릎에 괸 손으로 가렸다.
‘쓰러뜨릴 수 있는…이라.’
작은 가시처럼, 스스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 가슴에 걸렸다.
그건 그렇다. 나왔어야 할 말이었다.
어제, 목으로 맛본 여동생의 손의 감촉을 떠올린다. 이 목에 닿은 그 손은 나오토에게서 목숨을 빼앗을 작정이었다. 그 때 끼어든 라켈에겐 주저 없이 진검을 뽑아 해치기 위해 덤벼들었다.
라켈은 아오를 손에 넣기 위해 나오토가 필요하며, 나오토는 아오를 손에 넣기 위해 라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둘 중 하나를, 어쩌면 양쪽 모두를 없애려 드는 상대는 배제해야 할 적이자 장해물이라 할 수 있다.
적은, 덤벼든다면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니까 나오토는 망연히 자각한다. …자신은 사야를 쓰러뜨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단 것을.
약한 바람이 눈앞을 지나가 나오토의 번진 감상을 흩날린다. 곁에서 라켈의 금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이걸로 내 얘긴 끝이야. 다음은 나오토 차례.”
금색 눈동자가 빤히 나오토를 바라본다.
물론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다. 나오토는 기분을 전환하듯 숨을 토해내고, 앉은 자세를 고쳤다.
“응. 그러니까―…”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좀 생각하고, 일단 큰 줄기부터 짚어나갔다.
“알기도 힘들고 귀찮은 얘기부터 할게. 우선… 엄―청 옛날, 진짜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아마노호코사카』라는 겁나게 큰 가문이 있는데.”
“알고 있어. 하루카도 그 이름을 말했거든. 분명… 이 나라의 봉마의 일족.”
조용히 돌아온 라켈의 말에 나오토는 「오」하고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역시나라고 해야 하나. 그런 지식은 있구나.”
나오토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이름을 모른다. 나오토가 일상적으로 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이라는 토지를 꺼림칙한 것으로부터 지키고, 해를 끼치는 마를 봉해온 일족. 그것이 아마노호코사카다.
그 핏줄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도 존재와 명성은 역사의 표면엔 나오지 않고, 대중에 알려지는 일 없이 비밀스레 역할을 다해 왔다.
“그럼, 이해도 빠를 테니 잘 됐네. 그 봉마의 일족, 종가의 중심 『아마노호코사카』 아래에, 곽주(郭柱)라고 해서 『하죠(破城)』, 『카게타츠(影辰)』, 『히카가미』, 『테르미』라는 네 개의 가문이 있거든. 난 그중 『테르미』 가의… 직계 장남으로 태어났어. 말하자면 후계자란 거야. 그런 특수한 일족에 태어났다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체술을 배우곤 했지.”
“흐응. 그래서 어느 정돈 싸울 줄 아는 거구나.”
“싸울 줄 안다, 고 인식해 주는 건 영광이네요.”
농담하듯 말하고 나오토는 어깨를 움츠렸다. 훈련해온 체술도 라켈이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준 초인적인 움직임에 비하면 그저 어린애 장난이다.
“내 이름은 쿠로가네지만, 그건 어머니의 옛 성이야. 가문 가지고 따지면 테르미 나오토이기도 해. 뭐 그렇게 돼서, 쓰는 성은 달라도 사야는 내 친여동생 맞아. 그리고… 요 몇 년 동안 아마노호코사카 가에 유폐돼있었어.”
“…유폐?”
그 의미를 라켈도 알고 있었다. 묻는 목소리가 사정을 몰라 의아해한다.
그런 얼굴 안 해도 말 할 거야 하고, 흘긋 표정을 살핀 나오토는 금색 눈썹이 복잡하게 찡그려진 것을 보고 생각했다.
“사야는 있지, 옛날엔 병약하고 얌전한, 평범한 어린애였어. 그런데 5년 전, 갑자기 변했어. 그 알 수 없는 힘… 소울 이터에 눈뜬 거라고 생각해.”
여기서부턴 배에 힘을 주고 이야기해야한다.
나오토는 구긴 종이팩을 양손으로 더욱 세게 쥐고, 똑똑한 어조로 뒤이었다.
“사야는 그 힘으로, 테르미 가의 인간을 거의 전부, 먹어치웠어. 다 죽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때 죽었고…. 어머니는, 사야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그러고도 사야는 멈추질 않았거든. 그쯤 되니 슬슬 위험하다 싶었는지 아마노호코사카의 당주가 찾아와 사야를 가둔 거야.”
그리고 사야는 유폐당해 5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어제, 그 유폐가 끝나 그녀는 나오토의 앞에 나타났다. 5년 전 참극 이래의 재회였다.
“사야는 조그말 때부터 테르미 가에 긍지를 가졌었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한다, 고 나한텐 보였고. 그 녀석은 자신이 테르미 가를 이을 생각인 거야. 그러기 위해선, 테르미 가의 힘의 증표라는 『사냥꾼의 눈』이 필요해. 이게 없으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단 모양이니.”
그리 말하고, 나오토는 눈꺼풀 위에서 자신의 눈을 손끝으로 눌렀다.
나오토에게 있어 테르미 가는 긍지라곤 도무지 할 수 없는, 그런 것과는 머나먼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가문의 존속이니 부흥이니 하는 것엔 흥미도 없고, 솔직히 어떻게 되던 상관없다.
사야는 그 정반대다. 나오토를 죽여서 눈을 빼앗아 테르미 가를 잇는다. 그 목적을 위해 살아있다.
‘아직… 꼬맹이면서.’
학교도 안 다니고 친구도 안 만들고, 공부도 놀이도 잘 모르면서. 사람을 죽이는 기술과 사람을 죽이는 힘밖에 가지지 못한 여동생을, 나오토는 불쌍하다고도 생각한다.
“어제 그 편지. 그건 뭐야?”
나오토의 설명에 지금 당장은 불만 없는 듯하다. 라켈은 미간에서 주름을 지우고 새 질문을 던진다.
그 물음에 나오토는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다. 세탁기에 들어가기 전에 빼 둬야 한다.
“사야를 억눌러둘 수 없게 됐댄다. 사야를 유폐해 줬던 아마노호코사카의 당주님께서.”
“『빠져나갔다』도 『봉인이 깨졌다』도 아니고 『억눌러둘 수 없게 됐다』구나.”
“응?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테르미 사야가 아마노호코사카에서 나온 건, 사고가 아니라 묶어둔 목줄을 풀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거야. 억누를 수 없게 됐으니, 억누르는 것을 그만뒀다…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잖아?”
“…뭐어.”
분명히 그렇다.
우리가 강제로 돌파당한 것과, 이 이상 목줄을 붙잡고 있다간 손이 해질 것 같으니 그 손을 놔 버렸다는 것은 의미와 상황이 좀 다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주님께 물어보지 않는 한 모르지.”
저쪽의 자세한 사정 따위 편지엔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건지, 말할 생각이 없었던 건진 모르겠다만.
나오토의 낯빛에 그늘이 진다.
아마노호코사카에 사정이 있었다면 그건 분명 온건한 일이었을 리 없다. 5년 전, 나오토의 눈앞에서 모친이 죽었을 때도 그랬듯이.
스치듯 되살아나는 기억이 나오토의 뇌리에 과거의 광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두운 방 안. 숨 막히는 피 냄새. 기모노를 입은 어린 사야와, 쓰러진 어머니였던 것. 젖은 바닥에 꽂힌 차가운 칼.
그것들을 망연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하고 꼴사나운 자신―.
“나오토?”
다음을 재촉하는 라켈의 목소리에, 큭 하고 숨을 목에 가두고 나오토는 고개를 들었다.
“어, 어어,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사야 얘기는 이 정도야. 그 녀석은 가문을 잇기 위해 나를 죽이고 싶어해. 그게 다야.”
난폭한 끝맺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오토가 알고 있는 지금의 테르미 사야는 그런 소녀다.
말로 하자니 약간 괴롭다. 옛날엔 달랐다.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옛날엔.
“그래…. 뭐 됐어. 테르미 사야의 뒷면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이상 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은 걸. 쓸데없이 목을 들이밀 생각은 없어.”
탁 하고 허리를 털며 라켈이 연석에서 일어섰다. 나오토의 시야에서 긴 금발과 짧은 스커트가 뒤집힌다.
“만약의 상황엔, 내가 테르미 사야와 싸워줄게.”
전방으로 시선을 향하며,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라켈은 그리 말했다.
갑자기 속을 알 수가 없어 나오토는 고개를 든 채 떡 하고 입을 벌렸다. 몇 초가 지나도 아무 말도 없는 나오토를 라켈이 불편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야. 얼빠진 얼굴을 내걸곤 보기 흉하게.”
“아니…”
흉하다고 할 것까진 없잖아 하고 입까지 올라온 반박이 나오토의 마음속에서 사라진다.
놀랐다. 라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좀 의외라서… 너라면, 그런 무른 태도는 곤란해, 같은 말이나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럼 신경 쓰인다면서.”
그런데 방금 한 말로 보자면 마치 나오토가 사야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신경 써준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인간적인 배려가 가능한 인물이었던가, 라켈 알카드란 소녀는.
‘아, 것도 그런가…. 언제나 이 녀석의 몰상식에 휘둘리다 보니 실감은 안 났지만.’
응, 하고 나오토는 속으로 납득했다.
라켈은 언제나 중요한 때엔 스스로 움직였다. 클라비스가 찾아왔을 땐 떨면서도 나오토 앞으로 나서려 했고, 하루카가 휘말렸을 땐 그녀를 장벽으로 지켜주었다. 나오토가 스피너 스페리올에게 죽을 뻔했을 때도 스스로 목소리를 높여 말려주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라켈은 운 나쁜 난입자에 지나지 않았던 나오토를 스스로의 힘을 쪼개 구해준 것이다.
‘그런 놈이구만, 이 녀석.’
통 하고 가슴속에 내려앉은 납득은 기분 좋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나오토는 숨이 빠지는 소릴 흘리며 입 끝으로 살짝 웃었다.
“그거, 믿음직스럽네.”
“그렇지?”
아주 밉진 않은 자랑하는 듯한 태도로 라켈은 다시 원래 용무인 마법진에 집중하기 위해 교사 뒤의 빈 공간으로 발을 향했다.
그 모습에, 나오토는 웃음을 거뒀다.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있잖아, 라켈.”
라켈은 대답하지 않는 대신 발을 멈춘 채 고개만 돌렸다.
“『아오』가 있으면… 사야도 고칠 수 있어?”
『아오』라 함은 수많은 가능성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 그렇다면 사야가 소울 이터에 눈뜨지 않았을 가능성만 있으면, 아오는 사야의 운명을 고쳐 쓰는 게 가능할 것인가.
“…구하고 싶어?”
약간 신기하다는 듯 라켈은 묻는다. 물음을 받았으니, 나오토는 생각한다.
구하고 싶은 것인가, 자신은.
사야를.
가족을, 친척을, 부모를 죽게 한 사야를.
생각한 뒤, 고개를 들고 대답한다.
“구하고 싶어. 그 녀석은 내 가족이니까.”
아무리 그 손으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나오토는 오빠고 사야는 여동생이다.
망설임 없는 나오토의 대답에, 라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냉정하고 올곧은 눈으로, 긍정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아오에 불가능은 없어.”
“그러냐. …결국, 아오구나.”
자신이 인간으로 있기 위해서도, 라켈이 나오토가 모르는 그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야에게서 다른 자의 목숨을 빼앗는 무서운 힘을 거두기 위해서도.
다시 목표를 향해 선 라켈에게서 머리 위의 푸른 하늘로 시선을 옮기고, 나오토는 점심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일어섰다.
3
점심시간이라는 많은 학생이 교내에 있는 상황에서 사람 눈에 띌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안뜰에서 마법을 행사하는 데엔 물론 이유가 있었다.
라켈이 지금부터 사용하려 하는 마법은 아오의 기척을 찾아 교내에 있는 드라이브 능력자의 수와 동향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교내에 아오의 잔재가 느껴지는 장소, 혹은 사람이나 물건이 없는지 조사한다.
전에도 같은 마법으로 교내에 몇 명의 드라이브 능력자가 있단 사실과 아오의 잔재가 느껴지는 학생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번 것은 그 재조사다.
조사대상은 이 학교의 학생과 교사 전원. 한 명이라도 많은 대상자를 마법의 영향 하에 두기 위해 점심시간이란 때를 골랐다.
“…후우.”
안뜰의 공터에 한가득 그려진 붉은 마법진 중앙에서, 발끝을 땅바닥에서 약간 띄운 채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라켈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선녀의 날개옷처럼 모여 있던 바람이 흩어지며 떠 있던 발끝을 땅 위로 내려준다. 그러자, 그때까지 바람에 흩날려 춤추던 긴 머리카락이 흔들 하고 부드럽게 등으로 내려앉았다.
“어때? 뭣 좀 알아냈어?”
펼쳐진 마법진을 밟지 않도록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망을 보던 나오토는 라켈의 착지 소리와 자그마한 한숨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마법을 쓰는 중엔 라켈을 보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아직 괴로운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다루는 바람에 휘날려 펄럭인 스커트 아래에서, 말 그대로 환한 햇빛 아래에 드러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하얀 피부.
‘…멈춰, 떠올리지 마.’
스스로 자신의 도덕심에 대해 고찰하고 싶지 않다. 나오토는 기억에 굳게 자물쇠를 걸었다.
“드라이브 능력자들의 상태에 변화는 없어. 아오의 잔재의 반응도 딱히 없음, 이야.”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에 걸며 나오토 쪽으로 걸어오는 라켈의 발치에서 물이 지면에 스며들듯 붉은 마법진이 사라져 간다.
몇 번 봐도 신기한 광경이다. 저 손가락으로 덧쓰는 것만으로 나타나는 붉은 잉크 같은 건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오토는 허리에 손을 댄다.
“그러냐, 그거 다행이네.”
“다행은 아니야. 스피너를 쫓을 단서가 없다, 는 거니까.”
알고는 있는 거야, 하고 금색 눈동자가 질책하듯 노려본다.
나오토는 벅벅 하고 머리를 긁었다. 좀 쑥스럽다.
“그래도 그놈, 또 지가 찾아올 모양새더만. 내버려 두면 조만간 알아서 슬렁슬렁 튀어나오는 거 아냐?”
“정말이지, 대단한 바보네. 스피너가 스스로 나타나는 건 놈에게 있어 좋은 상황의 준비가 다 끝난 다음이야. 당신, 만전의 태세의 스피너와 정면으로 겨루고 싶은 거야?”
“당치도 않습니다요.”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듯한 기분으로 나오토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확실히 라켈 말대로다. 스피너가 스스로 나오는 걸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안 기다려도 된다면 기다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직 학교에서 누가 말려드는 게 아니라 다행이잖아. 우선, 당분간은… 이겠지만.”
말하고, 나오토는 약간 지저분한 교사를 올려다보았다.
딱히 모든 이와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는 얼굴이나 같은 장소에서 하루의 반을 보내는 누군가가 흉흉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기뻐할 성질도 아니다.
“단서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스피너의 사도는 전부 남자였댔지.”
문득 떠올린 이야기를 옆에 선 라켈에게 던진다.
2초 정도 부자연스런 간격을 두고 라켈은 나오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남자와 여자는 감각기관이 너무 다르거든. 사도로서 누군가를 사역한다면 동성이 아니어서야 감각공유를 하는 건 어려워.”
“어, 그렇다고 들었어. 그리고 술자한테 엄청난 부담이 가해지니까 기껏해야 최대 15명이 한계…라던가.”
그렇다는 건 얼마 전까지 사도로서 쓰인 지학교사 이사 외에도 최악의 경우 14명의 사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이미 이사의 빈자리도 보충되어 15명이 갖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사를 사도로 골랐을까. 남자여서라는 건 알겠지만, 뭔가 그 외에도 선정 기준이 있으려나.”
“사도로서 잘 동조할 수 있었으니, 겠지만…. 만약 달리 이유가 있다면 스피너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모르겠지.”
“그것도 그런가.”
이쪽에서 아무리 상상해봤자 답을 맞춰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마법도 무사히 완료했고, 이제 이런 음침한 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 생각하고 슬슬 안뜰에서 철수할까 하고 있던 나오토에게 느릿느릿하게 라켈이 운을 떼었다.
돌아본 나오토를 기다리던 건 아주 약간, 겨우 느껴질 정도로 불쾌함을 띈 라켈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지금 그 얘기. 그 여자한테서 들은 거지?”
그 여자라는 건, 히카가미 키이로를 말하는 거다.
미츠루기 기관… 라켈 같은 불사자를, 혹은 세계에 잠재된 위협을 배제하기 위한 조직에 소속된, 수수께끼의 드라이브 구사자.
“…아직도 화난 거야?”
묘하게 비난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나오토는 뺨을 긁었다. 라켈은 보여주듯 크게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긴 머리가 꼬리처럼 흔들린다.
“화 같은 거 안 났어. 당신 혼자서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경솔함엔 질렸지만, 그것과 분노는 다른 감정이잖아? 그저… 그 여자랑 단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직 똑바로 못 들었거든.”
“단둘이라니, 이상한 의식 시키지 마. 좀 봐달라고.”
“하지만 사실이잖아.”
“알았어, 알았어. 아니, 얘기 안 한다고 한 적도 없잖아.”
딱히 라켈에게 타의는 없겠지만, 힐문하는 듯한 말투와 마주하니 괘씸한 불성실함을 비난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장난 아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정도로 좋은 일 따위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제 오전중의 일이다.
갑자기 사야가 찾아오기 몇 시간 전, 점심을 먹기엔 이른 듯한 시간에 나오토는 전날 연락을 받아 역 근처에 있는 호텔에 불려나갔다.
호텔이라곤 해도 비즈니스맨이 묵거나 할 간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밤의 거리가 어울리는 저속한 호텔도 아니었다. 자동문 건너에서 눈부신 샹들리에가 빛나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로비가 맞이하는 본격적인 호텔이었다.
지정된 장소는, 그 최상층에 있는 회원 전용 바 라운지였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이물질을 보는 듯한 웨이터의 시선을 견디며 안내받은 라운지 안쪽에서, 나오토는 히카가미 키이로와 만났다.
빙글 하고 바깥쪽 벽 한 쪽에 커다란 창문이 설치된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휴일이라곤 해도 대낮이라 바 라운지에 손님은 적었고, 성기고 조용해 BGM으로 깔린 절제된 클래식 재즈가 잠기운을 일으켰다.
그런 가게의 몸이 파묻힐 듯한 부드러운 소파 위에 안자 나오토는 키이로에게서 스피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전 하루카를 덮친 이사가 목숨을 건졌다는 것. 사회에 복귀하더라도 두 번 다시 나오토 앞엔 나타나지 않도록 수배해 주겠다는 것. 이사가 모은 하루카의 사진을 전부 처분해주겠다는 것.
그런 사후보고를 대강 듣고.
―그 후 키이로는 소파 위에서 달라붙듯 접근해 억누르는 듯한 힘을 담아 나오토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확 하고 그곳의 공기가 열을 띤 것이 느껴졌다.
즉시 몸을 빼려고 한 나오토를 겹친 손 하나로 꿰매버리고, 키이로는 입맞춤이라도 조르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있지…, 나오토 군.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때까지의 성실한, 이라곤 해도 키이로가 상대다 보니 완전히 성실한 분위기가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시리어스했던 무드를 내팽개치고 키이로는 대놓고 교태를 부리듯 눈에 물기를 띄었다.
그만큼 나오토는 경계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나오토 군이 바라는 걸 뭐든지 해줄게. 지켜 줄게. 스피너 스페리올도 처분해줄 거고… 그 몸도, 낫게 해줄게.”
나오토의 손을 붙잡은 채로, 키이로는 다른 한쪽 손을 나오토의 가슴에 대었다. 손끝이 요염하게 옷 위에서 나오토의 몸을 더듬어 쇄골을 지나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오한 같기도 하고 전율 같기도 한 떨림이 나오토의 등에 달린다. 나오토는 그것을 혐오감이라고 해석했다.
키이로에게 만져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굉장히, 불온한 기분이 든다.
“있잖아. 하나 묻고 싶은데.”
“응, 뭔데에?”
“당신, 왜 그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그것이, 나오토가 키이로와의 접촉을 기분나빠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키이로와의 관계는 옅다. 적어도 나오토에게 있어선.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에 대한 이해도 지식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키이로는 그 관계에 맞지 않는 친밀함으로 나오토를 대한다. 마치 그렇게 나오토를 타락의 늪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 같아 발을 내딛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당연하다, 바로 앞에 늪이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걸어 들어가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키이로는 응석부리듯 나오토의 어깻죽지에 뺨을 대고 립스틱을 칠한 입술로 미소 지었다.
“나오토 군은, 한 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
“안 믿어.”
“그럼, 운명.”
“장난치지 말고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나오토는 질린 듯한 눈으로 키이로를 보았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얼마나 농담을 섞을 셈인 건가.
나오토의 대답에 키이로는 불만스레 입술을 뾰족이 했다.
“정말. 이쯤 되면 눈치채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뿌우 뿌우.”
“『뿌우 뿌우』라니…”
설마 얼굴을 마주본 상대한테 그런 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진절머리가 난 나오토의 정신적 초췌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이로는 육감적인 몸을 가까이한 채 부드러운 입술에 검지를 대고 생각한다.
“응~, 곤란해라. 말로 설명해도, 분명 나오토 군은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야, 바보 취급하기냐?”
“아, 그래!”
나오토의 말을 가로막듯, 키이로가 입술에 댄 손을 떼고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빠르게 나오토의 손을 가슴에 댄다.
“잠깐…!”
나오토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다. 붙잡힌 손은 아까까지만 해도 제일 위쪽 단추까지 확실히 잠겨 있던 블라우스의 가슴팍을 크게 벌리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대놓고 드러난 가슴의 풍만하게 부푼 부분을 직접 손바닥으로 느낀다. 촉촉한 피부의 감촉, 자신보다 약간 높은 체온, 안이 꽉 찬 탄력과 무게.
이건 아니다. 나오토의 직감이 위험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당기려는 나오토의 손을 키이로는 반대로 꽉 강하게 자신의 가슴에 눌러 붙인다.
“안 돼, 똑바로 만져 봐. 들어 봐.”
“당신 뭔 생각으로… 허?”
그렇게 말한 키이로의 목소리에 평소의 교태가 없었기에 나오토는 멍청히 입을 다물었다.
손바닥엔 여전히 나오토가 일상적으로 접할 일 없는 특수한 부드러움이. 손 안에 채 가둘 수 없는 부푼 부분 안쪽에서 키이로의 심장이 맥동하고 있었다.
“응, 알겠어?”
“뭐, 뭐를…?”
“차―암, 어쩔 수 없다니까아.”
희미하게 향수 냄새를 풍기며 키이로는 놀리듯 웃고서 나오토의 다른 한쪽 손을 들어올린다. 그 손을, 나오토의 가슴에 대었다. 왼쪽 가슴에.
“응?”
다시 한 번, 적자색 눈동자가 유혹하듯 웃는다.
그 순간, 오싹했다. 무심코 나오토는 숨을 멈춘다.
키이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다.
나오토의 양손바닥에, 두 사람 몫의 심음이 전해졌다. 그 고동은 완전히… 같은 리듬으로, 동기되어 있었다.
나오토의 맥이 빨라진다. 그러자 키이로의 심음까지 빨라진다. 마치 둘이 같은 것이라는 듯.
“나와 나오토 군은 쪼개진 조각. 둘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거야. 나는 나오토 군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어. 아니, 내가 아니면 네 전부를 사랑해낼 수 없어. 이 오른팔이 그 건방진 흡혈귀의 일부라도 상관없어. 그게 『쿠로가네 나오토』라면 난 사랑할 수 있어. 미츠루기 기관도 클라비스 알카드도 아무래도 좋아. 내가 원하는 건…”
정욕에 젖은 목소리로 나오토의 목덜미에서 뜨겁게 숨을 내쉰다. 음란한 행위를 연상시키는 거친 숨결이 피부를 간질였다.
고동이 빨라진다. 나오토의 것과, 키이로의 것이. 뒤섞여 머릿속에서 혈액이 맥동하는 소리가 쿵 쿵 하고 울린다.
“원하는 건, 쿠로가네 나오토 뿐. …앗, 으응…!”
눌러 붙는 듯한 목소리로 황홀하게 애욕에 잠긴 듯 말하곤, 키이로는 찔러드는 쾌락에 감전되어 몸을 떨었다.
평정과는 너무나도 먼 윤기 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키이로가 음란한 웃음을 띤다.
“괜찮아… 나오토 군. 그대로… 으스러뜨려도.”
속삭이는, 유혹하는 목소리.
무슨 말인가 하고 한 순간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눈치 챈 나오토는 뜨거운 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키이로의 손을 떨쳐냈다.
당황해 소파에서 몸을 끌어낸다. 키이로에게서 도망친 손끝은, 방금까지 부드러운 유방을 쥐고 있던 손끝은, 약간 붉게 젖어 있었다. 오른손이다. 아주 약간 묻은 피는, 물이 스며들 듯 스윽 하고 사라진다.
“후후… 이걸로 내가 아주 약간, 나오토 군의 일부가 됐네.”
거친 숨을 내쉬고 뺨을 분홍색으로 상기시킨 키이로는 꿈이라도 꾸는 듯이 속삭이고 육감적인 입술을 혀끝으로 덧쓰듯 핥았다.
그 모습에 외설스러움이나 성적 흥분은 느끼지 못했다.
키이로의 피를 빨아들인 오른손을 강하게 쥐고, 더욱 가빠지는 호흡을 이를 악물어 억누른다.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바닥을 짓밟듯 발꿈치를 돌려, 나오토는 도망치듯 바 라운지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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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켈이 귀여움.
역시나 온갖 떡밥과 세계관 해설로 점철된 하권 초반부입니다.
아마노호코사카 관련 얘기가 더 나왔네요.
곽주 4가문 중 하죠와 카게타츠는 듣도보도 못한 이름이지만 히카가미랑 테르미라니...
그리고 설명을 보아하니 사냥꾼의 눈은 테르미 가에 유전으로 전해지는 능력인가 보군요.
그리고 사야의 능력에 대해.
소울 이터라 하면 본편에선 불쌍한 주인공이 가진 드라이브인데, 설명이 살벌하네요.
하지만 설명을 보면 본편의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납득이 됩니다.
그리고 히카가미 키이로도 역시 알 수 없는 떡밥을 뿌리고 있습니다.
하는 짓이 야한 거야 그렇다 치고, 심장박동이 동기되어 있다니, 무슨 뜻일까요.
캐릭터들 특징에 대조해 보면 본편의 라그나-뉴 사이의 라이프링크가 떠오릅니다만...
솔직히 이 소설 시리즈가 더 나오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CF는 발매가 너무 멀었음...
일단 블루라지로 공개되는 정보나 기대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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