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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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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잠기운처럼 생겨났다.
그 번뜩임은 『자각』이기도 했고 『눈치챔』이기도 했다. 동시에 『학습』이기도 했고 『깨달음』이기도 했으며… 사소한 『흔들림』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아직 어떠한 말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있던 건 작은 상자 안이었다. 그것을 관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역시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죽은 자를 재우는 장소이며, 그녀를 깨우는 장소.
그 안에서 조용히 가로누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건 부드러운 쿠션과 농밀한 어둠의 기척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그저 자신이 존재한단 인식만을 지닌 채 눈을 감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감이 떨린다. 의식을 당기는 건 울림이다. 그것은 울림이었다. 깊고 조용한 울림이 달콤하게 속삭여 재촉하듯 부른다.
처음에, 그녀는 그 울림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울림은 목소리가 되고, 목소리는 말이 되었다.
“―라켈.”
부른다. 그렇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떴다.
금색 눈동자로 바라본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홍색 눈동자다. 촉촉한 눈동자를 색칠한 세상에 비할 것 없이 아름다운 마성이, 그녀가 눈에 담은 최초의 것이었다.
“라켈. 네 이름이다. 너를 의미하는 말이다.”
“나를… 의미, 하는”
부드러운 억양으로 고해진 말을, 작은 입술이 따라한다. 이름. 그 짧은 말은 그녀의 의식에 윤곽을 더했다. 그저 그뿐인 무게가 그녀의 존재에 바닥을 제공한다.
그것은 하나의 마법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려내는, 정말로 짧고 정말로 무거운 마법의 주문.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강고한 구속의 봉인이기도 했다.
그 한 순간에 그녀는 『라켈』이 되었다.
라켈을 바라보는 진홍빛 눈동자는 그 눈을 좁히고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상냥함과 따듯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색채로 흔들리는 감정을 나타내는 말을 라켈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눌러 붙은 연민이며, 차가운 결의였다.
처음 수개월은 교육의 나날이었다.
진홍색 눈동자의 주인은 라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하늘과 땅에 펼쳐진 무수한 이름. 생명과 죽음. 이성과 본능.
세계. 섭리. 아오. 깊고 어두운 장소와 희고 공허한 장소.
진홍색 눈동자의 주인은, 자신을 라켈의 아버지라고 했다. 라켈을 자신의 딸이라고 했다.
교육의 시간은 길고 영속적이었으며, 그것은 끝없는 꿈속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다음 수개월은, 지옥의 나날이었다.
쌓아올린 면학에 의해 라켈이 자기인식에 충분한 정보를 얻자, 진홍색 눈동자의 주인은 그녀를 데리고 주거지인 고성의 지하 깊은 방으로 찾아왔다.
인식을 개방시키기 위해.
진홍색 눈동자의 주인은 라켈의 정신을 『경계』에 접속시켰다.
『경계』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곳을 말한다. 그곳엔 수많은 순간, 수많은 사상, 수많은 가능성이 떠돌고 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라켈에게 인식시킨다. 그러기 위한 접속이었다.
라켈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홍색 눈동자의 주인은 라켈에게 경계의 정보를 주입했다.
…아니, 경계의 정보에 라켈의 정신을 던져 넣었다.
순간, 방대한 양의 정보가 라켈의 전 신경을 덮쳤다. 그녀의 감각기관을 삼키고, 자아를 지키려 하는 뇌 안쪽까지 강제로 파고든다. 그곳에 차례차례로 지식이 새겨졌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공포이기도 했다.
라켈은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라고 한 진홍빛 눈동자에.
하지만 그녀의 비명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라켈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놓으려 하는 정보라는 이름의 폭력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라켈은 저항할 방법도 모른 채 그저 발버둥이치며 계속 괴로워했다.
지옥의 끝은, 빛이 가져다주었다.
끝의 순간을, 라켈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 같은 걸 도저히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후에 아무리 평정을 되찾더라도 라켈은 이 때의 일이 몽롱한 의식이 그려낸 망상인지, 혼탁한 경계선 속에서 실제로 겪은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주변은 어두웠다.
라켈의 자아의 실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아 버르적거릴 기운도 잃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 때에… 빛이 보였다.
작고 먼 빛이다. 그 속에서 라켈은 한 사람의 인물을 발견했다. 누군지 라켈은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좋으니, 구해주길 바랐다. 너무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라켈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 요구에 응하듯 빛은 라켈의 곁까지 다가와 주었다.
빛 속에 있는 것은 남자였다. 하지만 라켈이 고통 속에서 몇 번이고 부른,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모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너무나 그리웠다…. 아주 오래 전에 만난 듯한, 먼 미래에 만날 듯한… 뒤얽힌 실 같은 기시감.
“……, ……, ……”
무의식적으로 라켈의 입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부름에 대답하듯, 빛 속에서 그는 손을 뻗는다. 커다란 손이 라켈의 손을 붙잡아, 강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쥔다.
남자는 웃었다. 요령 없고 어색하게. 뒤틀리듯 좁혀진 붉은 눈동자는, 라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부르려고 라켈은 입술을 연다.
하지만 그 전에, 남자의 모습은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쥐고 있던 손은 흔적도 없이… 하지만 라켈의 눈에는, 지금은 다른 것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아오.
빛나는 세계의 심연이자 근원.
눈을 크게 뜨는 라켈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오의 고동을.
그 순간, 라켈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1
돌발적인 사태에, 나오토는 말을 잃었다.
그것은 휴일 오후. 말게 갠 하늘을 조용한 바람이 지나가는 일요일에, 볕이 잘 드는 좋은 베란다에선 좀 너무 쌓인 빨랫감이 기분 좋은 듯이 흔들리고 있다.
그런 아무 색다를 것 없는, 그래서 더욱 고마운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듯 한 명의 소녀가 찾아왔다.
당돌한 방문객은 현관 바닥이라는 점에도 신경 쓰지 않고 몇 개의 신이 늘어선 차가운 타일 위에 무릎을 댄 채 등을 바늘이라도 꽂은 듯이 곧게 세운 자세로 정좌해 있다.
높은 위치에서 꽉 묶은 긴 검은 머리카락은 매끄럽고, 사소한 흐트러짐도 없다. 하얀 피부 속에서 강렬히 시선을 끄는 눈동자는 선명한 붉은 색이었으며, 그 눈동자가 지긋이 나오토를 올려다보고 있다.
몸에 걸친 기모노는 연분홍과 연보라를 바탕으로 금실이 부채꼴 모양으로 수놓인 것으로,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공주님 같은 분위기다.
연지를 바른 것도 아닌데 붉게 물든 입술로 얌전하게 웃는다.
소녀의 이름은 테르미 사야. 나오토의 친여동생이었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오라버니. 아니면, 여동생의 존재를 잊으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허벅지 위에서 심하게 흰 손을 겹치고 사야는 놀리듯이, 하지만 단아하게 묻는다.
“아, 아니….”
나오토는 겨우 그 만큼 겨우 짜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긴장감, 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땀이 스미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이 손끝까지 퍼져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나오토의 머리는 답을 찾지 못하고 얼어붙어있었다. 놀라움과 곤혹이 너무 커 망연해진 상태였다.
그런 나오토의 옷을, 쫑 하고 옆으로 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오토의 소꿉친구이자, 나오토가 살고 있는 맨션의 방을 기꺼이 싼 값에 빌려준 맨션 오너의 외동딸.
“나오, 일단 들어오게 하지 그래? 차 준비할게.”
응, 하고 어르는 듯한 말에 나오토는 그저 끄덕 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긍정에 힘을 싣듯 하루카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미소를 띄운다. 심플한 방식으로 묶은 부드러운 질감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온화한 성품을 더욱 따듯해 보이게 했다.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하루카는 한 발 먼저 주방으로 향한다.
그것을 곁눈으로 배웅할 여유도 기다리지 못하고, 나오토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현관으로 얼굴을 돌렸다. 정좌한 채인 사야에게 시선을 던진다.
내키지 않는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여기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지만, 내쫓기라도 하듯 사라지라고 소리치는 것도 좀 그렇다. 뭣보다, 하루카에게 너무 살벌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하고 자조하듯 속으로 투덜대며 나오토는 턱으로 쿡 하고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와. 용건 정돈 들어주마.”
평소엔 그다지 목에서 나오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 나오토는 무거운 다리를 끌 듯 하며 자리를 잘못 찾은 듯 개방적인 창문이 기다리는 거실로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기분 좋은 바람을 실내로 불러들이던 창문은 꼭 닫힌 채 레이스 커튼까지 쳐져 밖과 안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저녁이 되어 기운 해를 등으로 느끼며, 나오토는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았다.
밝은 갈색의 탁자를 낀 반대편엔 소파를 무시하고 납작한 쿠션을 방석 대신으로 삼아 정좌한 사야가 있었다.
사야는 가지런한 얼굴을 하고 있다. 화사하다기보다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용모는 13세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체격은 실제 연령의 평균과 비교해도 조금 작고, 그 가늘음과 흐트러짐 없는 행색 하나하나가 마치 인형과 대면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사야를 두고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말할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토는 그다지 여동생의 모습을 호의적인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으음, 홍차로 괜찮을까?”
부엌 조리대 건너편에서 하루카가 신경 쓰듯 묻는다.
아무거나 괜찮아, 하고 나오토는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빠르고 빈틈없이, 사야가 돌아보며 멋대로 주문한다.
“저, 홍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녹차로 해주실 수 있사온지요.”
“네에, 알겠어요.”
하루카가 보기엔 사야는 아직 어린애다. 뚜렷한 요구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하루카는 작은 차통을 뽕 하고 열었다.
솜씨 좋게 차를 준비하는 하루카 발치에서 무언가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시선이 이끌려 나오토는 그곳을 주시한다.
조리대 뒤에서 금색 리본 같은 머리가 보였다. 머리뿐만이 아니다. 그 주인인 소녀, 라켈 알카드의 금색 눈이 불신감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또 뭐 하는 건데, 쟨.’
무심코 나오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곧바로 이해한다.
인지를 초월한 생명력을 지니고, 바람의 드라이브를 다루는 흡혈귀. 그런 상식을 벗어난 존재인 라켈이지만, 그녀는 여성을 상대하는 데엔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약했다.
갑자기 본 적도 없는 소녀가 찾아와, 그게 또 나오토와 하루카와는 명백히 면식이 있는 태도로 대화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설명도 듣지 못하고 남겨졌으니, 평소의 뻔뻔한 태도로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 기다렸지.”
나오토의 시야를 가로질러 하루카가 작은 쟁반에 찻잔을 두 개 얹어 다가온다.
사야는 꼿꼿이 등을 편 채 딱 45°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눈앞에 놓인 뜨거운 찻잔을 집어 한 모금 마신다.
“맛있습니다, 하루카 양.”
“다행이네.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마치 훌쩍 찾아온 친척과 그를 기꺼이 맞이하는 집주인, 같은 대화였다.
확실히 그 말대로인 구도였다. 하지만 나오토만은 초조함 같은 감각에 신경이 떨려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사야가 말하면 말할수록, 웃으면 웃을수록, 나오토의 속마음에 위기감과 경계심의 바늘이 스친다. 왜냐하면 사야는….
“사야. …너 어떻게 나온 거냐?”
다리 위에서 깍지를 끼고 나오토는 심문하는 듯한 격한 말투로 물었다.
뜨거운 차를 맛보고 있던 사야는 옅은 증기 건너편에서 시선을 올리더니 천천히 찻잔을 놓으며 당기듯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라니요. 마치 제가 감금이라도 되어있던 듯한 말투로군요.”
“『듯한』이 아니잖아….”
분명히 그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대로의 상태였을 터.
하지만 나오토는 뒤이으려던 말을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바로 옆에 하루카가 있다. 있는 대로 다 떠벌려가며 얘기할 수는 없다.
쓰디쓴 얼굴로 노려보듯 바라보는 나오토의 시선을 사야는 정면에서 받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얼 그렇게 화내시는 건가요, 오라버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갑지 않습니까.”
“그, 그래 나오, 그렇게 무서운 얼굴 안 해도….”
나오토의 태도에 놀라 하루카도 당황하며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나오토는 하루카를 보지 않았다. 걸려온 말도 듣지 않은 것으로 했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이 돌발사태에 임할 수는 없다.
“사야, 됐으니까 용건이나 말해.”
“정말이지. 오라버니도 성급하시네요.”
막돼먹은 오라비를 나무라는 듯한 쓴웃음을 흘리며 사야는 연보라색 기모노 소매에 손을 넣었다.
꺼낸 건 하얀 봉투다. 그것을 조용히 탁자 위로 내민다.
갑자기 나오토는 확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봉투엔 우표도 수신인 표기도 없이, 하지만 그것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중앙에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마노호코사카(天乃矛坂)』―인장은 그랬다.
“메이 님이 직접 보내신 서한입니다.”
다시 양손을 똑바로 무릎 위에 겹치고 사야는 붉은 입술을 희미하게 당겼다.
고해진 이름에 나오토는 무심코 얼굴을 들어 쭈뼛쭈뼛 사야를 본다. 눈 안쪽은 곤혹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 사야가 입에 담은 이름은, 아마노호코사카라는 어떤 오래된 가문의 현 당주 이름이다.
메이, 라는 이름의 여성당주와는 나오토도 몇 번인가 면식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거나 할 사이냐고 물으면,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현 당주는 구태여 사야를 통해 나오토에게 편지 같은 걸 보내온 것인가.
나오토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깊어진다.
“하루카 양. 실례되오나 잠시간 오라버니와 둘만 있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갑자기 사야가 고개만 움직여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설마 이 타이밍에 말이 걸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리라. 하루카는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뜨고 거기에 당혹을 띄웠다.
“난 상관없는데… 괜찮아?”
물은 상대는 나오토다. 나오토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린 채 복잡하게 수긍했다.
“괜찮아. 라켈 부탁해.”
“응, 맡겨둬. 무슨 일 생기면 불러, 바로 올 테니까.”
한 번 끄덕이고, 하루카는 부엌에 쟁반을 두러 돌아갔다. 그 때까지도 조리대 뒤에 숨어있던 라켈을 끌어올려 일으켜 세우고는 손을 당겨 함께 나오토의 집을 뒤로한다.
거실을 나가는 도중 라켈이 한 번 크게 나오토를 돌아보았다. 납득되지 않는다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지만, 바로 하루카에게 등을 떠밀려 시선이 떨어진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곁눈으로 배웅하며, 나오토는 쓴 것을 목 안쪽에서 느꼈다.
‘일이 성가셔졌구만… 제기랄.’
사야에 대해 라켈이 알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애초에 사야와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될 거라곤 생각 안 했다. 적어도 아마노호코사카 저택 이외에선.
사야와 둘만 남자 주변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사야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무거움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마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저항감을 떨쳐내듯 나오토는 거친 손놀림으로 봉투를 집었다.
엄숙한 인장을 보고 손끝이 약간 긴장한다. 아마노호코사카에서 직접 전해온 편지. 열기 부담되는 게 이만한 것도 없다.
그래도 봉투 사이즈로 가늘게 접힌 종이를 열자, 거기엔 가느다란 붓으로 쓰인 달필이 있었다.
편지 자체는 짧다. 그러다 보니 더욱 나오토는 곧바로 내용을 보고 숨을 삼킨다.
“메이 님은 뭐라시죠? 그 편지엔 메이 님의 술법이 걸려 있으니 오라버니 이외엔 아무도 내용을 읽을 수 없다는 모양입니다.”
흥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기 힘든 말투로, 어딘가 즐거운 듯이 사야가 묻는다. 나오토는 편지를 원래대로 접으며, 사뭇 신중하게 되물었다.
“너, 이 편지 내용 몰라?”
“예에. 그렇다곤 해도, 메이 님이시니까요. 어렴풋이 짐작은 갑니다.”
희미하게 입가를 들어 올려 미소 짓고, 다시 사야는 찻잔에 입을 댄다.
나오토는 접은 편지를 곁눈으로 흘겼다.
아마노호코사카 메이는 분명히, 사야에게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을 사야가 짐작할 거라고 알고 있었더라도.
그 편지는, 기뻐할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손에 든 종이를 구겨 버릴까 하고 생각하던 나오토의 고개를 사야의 목소리가 들어 올렸다.
“조금 전의 낯선 분은 누구시죠? 그, 그림자 뒤에 숨어서 이쪽을 보고 있던 우스꽝스런 여성분.”
라켈을 말하는 거겠지. 그건 그렇다 쳐도 우스꽝스럽다니. 나오토는 무심코 입가를 비틀었다. 라켈이 들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루카가 데려가 줘서 다행이었다.
“너랑은 상관없어. 것보다 용건은 이게 다야?”
사야에게 라켈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라기 보다, 참견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접은 편지지로 탁탁 하고 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나오토는 재촉하듯 말을 서둘렀다.
“그럼 빨랑 꺼져. 내 앞엔 다신…”
“농담도.”
잘 정돈된 시원한 얼굴로, 사야는 싱긋 하고 만면의 웃음이라 부를 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오토의 말이 너무 이상해서 참을 수 없었다는 듯.
“제가 무엇을 위해 오라버니네 댁까지 왔는지, 오라버니라면 알고 계시겠죠? 저는… 받으러 온 거라고요.”
웃음 짓는 붉은 입술 안쪽에서 더욱 붉은 혀가 움직인다.
나오토는 깊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사야 말대로였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야가 뭣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같은 건.
편지를 한 통 전하러 온 건 결코 아니다. 편지는 덤이다. 사야가 반드시 나오토에게 갈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메이가 가는 김에, 하고 전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라버니.”
싱글벙글… 아주 기쁜 듯이 고하고, 사야의 모습이 번쩍였다.
동시에 텅, 하고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번쩍임은 발구름이다.
다음으로 나오토의 눈이 사야를 포착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나오토의 눈 아래에 있었다.
크게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나오토의 반사 따위, 신속으로 뻗어진 사야의 팔에 비교하면 멈춰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컥…!”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나오토의 목에서 찌그러진 소리가 흘렀다. 그 때엔 이미 나오토의 다리는 바닥에 없었다.
하얀 뭔가가 나오토의 목을 쥐고 있었다. 사야의 손이다.
명백히 인간의 피부색이면서 놀랄 정도로 하얀 팔이, 그 가느다란 모습에 걸맞지 않는 힘으로 나오토의 몸을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검은 앞머리 건너로 사야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웃는다.
“『사냥꾼의 눈』…오라버니의 양 눈을, 받아가겠습니다. ―오라버니를 죽여서.”
낭랑히, 붉은 눈동자에는 살의가 불붙어 있었다.
2
마음에 안 든다.
상황도 잘 모르는 채로 하루카에게 재촉당해 몇 층 위의 하야미 가에 끌려와, 라켈은 쿠션을 안고서 알기 쉽게 삐져 있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그 갑자기 나타난 기모노 차림의 소녀.
“…하루카.”
부엌에서 홍차를 준비하는 하루카에게, 라켈은 2인용 소파 위에서 말을 걸었다.
“그 소녀는 누구야?”
가시 돋친 말투에는 대놓고 불만이 서려 있었다.
솔직히, 하루카와 둘만 있고 달리 아무도 없다는 상황은 라켈에게 있어 상당한 중압이다. 하지만 그런 중압을 밀어낼 정도로 마음속 불만은 크다. …라곤 해도, 고개를 들어 하루카를 바라보는 것까진 못 했지만.
“으―음….”
홍차 찻잎을 티 포트에 넣으며 하루카는 조리대 너머에서 말을 고르느라 짧게 신음했다. 홍차 캔을 닫고, 그리고 탁 하고 조리대 벽을 쳤다.
“그 애는 테르미 사야라고 하는데, 나오네 친여동생이야. 좀 사정이 있어서 생가가 아니라 종가인 『아마노호코사카 가』라는 집에서 살았거든. 거기서 나오진 않을 거라고, 들었는데 말야….”
어째선지 오늘, 그녀는 나오토의 집으로 찾아왔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하루카는 라켈에게 등을 돌리고 머그컵을 두 개 꺼냈다.
홍차용 물은 아직 끓지 않았다. 하루카는 조리대 위에서 물을 끓이려 일하는 전기 주전자를 바라보곤 밝은 색 앞머리를 쫑 하고 당겼다.
“나오네 집은 꽤 오래된 집안이래. 몇 개인가 분가… 같은 게 있어서. 아마노호코사카는 그런 분가계를 묶은 엄청 큰 집안이라던데.”
나오토의 친척인 이상 하루카도 아마노호코사카 가와 전혀 무관계하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루카는 나오토보다도 오래된 큰집과 멀리서 태어났기에, 각별히 인연 있는 관계를 쌓아 오진 않았다.
나오토의 어머니 사후엔 완전히 소원하다. 연하장조차 주고받지 않는다.
“테르미 사야…. 아마노호코사카….”
확인하듯 곱씹고, 라켈은 생각에 빠지듯 무릎에 안은 쿠션을 꼭 쥔다. 이해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성이 달라. 나오토 이름은 『쿠로가네』라고 했었는데.”
“아아, 그건 나오네 어머니의 옛날 성이거든.”
어째서 나오토가 자기 이름을 쿠로가네라고 해둔 건지, 하루카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나오토와 가족들 사이에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더욱, 하루카는 스스로 파고들어 묻지는 못하고 있었다. 과거는 나오토에게 있어 아프고 괴로운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카는 쓴웃음을 띈 얼굴로 어깨를 주무르곤, 끓은 물을 컵과 티 포트에 부었다.
“이 이상은 난 설명 못 해. 그다지 자세히 알진 못하거든….”
사정을 더 알고 싶으면 나오토 본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다지 시시콜콜 캐묻지는 말아달라고, 힘없이 떨어진 하루카의 눈초리가 말하고 있었다.
“맞다, 어제 있지, 엄마가 바움쿠헨 사다 줬어. 같이 먹자.”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으리라. 평소의 밝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 하루카는 부엌 안쪽에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머리끈으로 묶은 하루카의 뒷머리가 조리대 아래로 사라진다.
그 때였다.
“…윽.”
강렬한 힘으로 죄는 듯한 아픔이 라켈의 가슴을 둔하게 쑤셨다.
무심코 흘릴 뻔한 신음을 어떻게 삼키고, 라켈은 쿠션 아래로 강하게 자신의 가슴을 누른다.
이 고통은 무엇인가… 라켈은 바로 깨달았다.
‘목숨이… 빨려나가고 있어….’
라켈의 목숨이, 아니다. 나오토의 목숨이다. 라켈이 자신의 것을 나누어 상시 공급하고 있는 생명력이 어째선지 급속도로 소실되고 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을 곧바로 떠올려, 라켈은 뭉친 숨을 토해버리듯 해방하고 안고 있던 쿠션을 소파에 던졌다.
“라켈, 얼마나 먹을래… 어, 어라?”
바움쿠헨이 들어있는 하얀 상자를 조리대에 올린 하루카가 휙 하고 얼굴을 내밀었을 때, 소파가 놓인 거실엔 누구의 모습도 없었다.
나오토의 의식에 두꺼운 구름이 끼기 시작할 때까지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 윽…”
무겁게 신음하며 자신을 붙잡은 작은 손을 떼어놓으려 버둥거린다. 공중에 뜬 손끝이 허무하게 허공을 긁는다.
하지만 사야의 손을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이라도 들고 있다는 듯한 안정감을 보이며 손쉽게 나오토를 죄어 올린다.
“으극, 크… 놔, 라…”
“오라버니,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죠, 방심하시면. 제게 접촉을 허락하시다니, 그 빈틈 많은 점은 변함없군요. 안심했습니다. 아니면 혹시 제게 죽기를 기다리신 건가요?”
“그럴 리… 있, 냐…!”
어두워지기 시작한 눈으로 사야를 노려보며, 나오토는 거의 목소리가 되지 않는 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말하면서 사야의 손과 손목을 마구 낚아챘다. 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에 파고드는 사야의 손가락은 먹이를 붙잡은 야수의 손톱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피부와 근육을 물어뜯을 듯한 그 손끝을 통해 뭔가가 빨려나가는 감각에, 나오토의 몸이 떨린다.
빼앗기고 있는 건 호흡이 아니었다. 더욱 근원적인 것. 생명 그 자체다.
그것은 결코 과장된 비유 따위가 아니다. 사야의 손은 의도적으로 나오토의 생명력을 빨아가고 있었다.
그 증거라도 된다는 듯이, 나오토의 눈은 보아 버린다.
『사냥꾼의 눈』. 사야가 그렇게 부른 나오토의 눈은, 사람의 생명력을 수치라는 형태로 볼 수 있게 한다.
그 눈에 비치는, 사야의 머리 위에 뜬 생명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조금씩 늘어난다.
“커… 헉…!”
나오토의 목이 휘익 하고 쉰 소리를 낸다.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하고 사지의 감각이 멀어져간다.
그런 고통에 뒤틀리는 오라비의 표정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며, 사야는 싱긋 하고 날카로운 웃음을 짓는다.
“『쿠로가네 나오토』였던가요. 하하, 오라버니가 쿠로가네란 이름을 쓰다니 웃기는 일도 다 있군요. 어머니의 묘비라도 짊어졌단 겁니까?”
“시, 끄러… 너하곤, 상관… 없잖아”
“아아, 그게 아니면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는 뜻인가요.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증표로서 이름을 획득한다…고.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조롱한다기보다 즐기는 듯한 사야의 말투에, 나오토는 고통이 아닌 다른 감정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가능하다면 분노에 맡겨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중요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사, 야아아아…!”
겨우 짜낸 나오토의 격앙을 사야는 짧게 웃어넘기고, 오라비의 목을 잡아당겼다.
저항하지 못하고 다리가 끌리듯 흔들려, 발끝이 바닥을 스친다. 나오토는 갑자기 부자연스런 자세로 스스로를 떠받쳤다.
목을 붙잡은 사야의 손은 나오토의 뺨으로 올라오고, 관자놀이를 지나 두개골을 붙잡는다.
양손으로 좌우에서 끼우듯 하고, 자유분방하게 뻗친 거친 질감의 머리카락을 가르며, 나오토의 얼굴을 강제로 자신의 눈앞으로 옮겨온다.
마치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듯한 거리였다.
나오토는 짧게 숨을 삼키고, 사야의 손목을 붙잡아 필사적으로 당긴다. 어떻게 된 건지 사야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화사한 어깨를 혼신의 힘을 담아 붙잡아 힘을 낼 만큼 내 잡아떼려고 한다. 그래도 사야는 균형조차 잃지 않았다.
그 뿐이랴 나오토의 머리카락 안을 쓰다듬기라도 하듯 손끝을 꼬물거리며 붙잡은 오라비를 더욱 가까이 당긴다.
“그만둬…!”
나오토의 코끝을, 다가오는 사야의 코끝이 스쳤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누군가의 숨이 너무나 좁은 서로의 입술 사이에 녹아 사라진다.
사야는 살짝 입술을 열었다. 소녀의 붉은 입술이 오라비의 입술을 탐하며 마시듯 닿았다.
손바닥 따위로 접촉하는 것보다도 더욱 많이 오라비의 생명력을 먹어치우기 위해.
하지만 실제로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에, 사야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죠? 오라버니가… 아냐?”
“뭐…”
뭐가, 라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나오토의 목소리는 저지당했다. 갑자기 발밑에서 몰아친 거친 돌풍에.
이번엔 사야가 숨을 삼킬 차례였다.
돌풍은 사야와 나오토 사이에서 터져 두 사람의 몸을 용서 없이 튕겨낸다. 사야는 TV 옆에 놓인 작은 서랍장에, 나오토는 식탁에, 각자 세게 등을 부딪혔다.
“끅, 아야…”
둔한 충격에 신음하며 나오토는 식탁 구석에 손을 대고 일어선다. 그 발치에서, 바로 전의 돌풍 같은 기세로 이번엔 사람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하얀 블라우스에 까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 라켈이다.
“라켈?!”
놀라 목소리를 높인 나오토를, 라켈은 어깨 너머로 한 번 보았다. 하지만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공기가 움직인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사야가, 바닥을 차고 일직선으로 라켈에게 돌진했다.
어느 샌가 그 손은 칼집에 들어간 채인 칼을 쥐고 허리 위치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눈 깜짝할 순간에 거리를 좁혀, 일섬. 날이 미끄러지는 소리마저 조용하게 뽑힌 칼은 섬광과 같은 속도로 허공과 라켈을 베었다.
“피해!”
나오토의 경고는 너무 늦어, 목소리가 되었을 땐 이미 사야는 칼을 휘두른 뒤였다.
하지만 라켈도 경고 없인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이 아니다. 휘감아 올리듯 일으킨 바람으로 사야의 칼을 크게 쳐올리고 자신은 몸을 빼 차가운 칼날을 피한다.
붉은 물방울이 허공으로 튄다.
튄 건 라켈의 피다. 하얀, 사야보다도 더욱 하얀 도자기 같은 매끄러운 뺨에 한 획 붉은 선이 달린다.
감싸진 나오토에게도 보였다. 스친 칼끝이 가른 완만한 호를 그리는 상처와, 그곳에서 가늘게 흐르는 붉은 실이.
“…예의가 없구나.”
한 걸음 물러난 라켈이 혐오감을 담아 내뱉었다. 겨우 그 사이에 라켈의 뺨에 생긴 상처는 피부의 흰색에 빨려들듯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발견하고, 사야의 움직임이 한 순간도 되지 않게 아주 잠깐 멈췄다. 가볍게 뛰어 자신의 손끝이라도 된다는 듯 경쾌하게 칼을 칼집에 꽂는다.
“상처가, 사라졌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사야는 눈빛에 날카롭게 가시를 돋웠다. 그 눈빛보다 날카롭게 숨을 토해내고, 호흡에 맞춰 다시 달린다.
미끄러지듯 파고든 발을 바닥에서 빙글 하고 돌려, 몸을 낮추며 발치를 쓸듯 사야는 칼을 번뜩였다.
노린 건 이번에도 라켈이었다.
망설임 없는 참격은 라켈의 무릎을 절단하기 직전에 라켈의 방호마법에 의해 튕겨났다. 딱딱한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뒤이어 구부린 자세에서 단숨에 뛰어올라 다시 일격. 라켈의 어깨보다 높은 위치에서, 순식간에 칼집에 꽂은 칼을 휘어지는 채찍처럼 휘둘러 내린다.
“읏… 큭!”
신음하는 듯한 소리는 라켈 쪽에서 난 것이었다. 이번엔 방호 마법이 아니라 바람을 직접 칼에 부딪혀 은빛 궤도를 흐트러뜨린다.
하마터면 위험했을 방어를 강제당한 보답이라는 듯 라켈이 긴 머리와 짧은 스커트를 뒤집으며 날카롭게 발차기를 날린다. 참격에도 지지 않는 기세의 발차기가 도려내듯 사야의 몸통에 파고들었다.
작게 사야의 목에서 숨이 막히는 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얌전히 무릎 꿇을 소녀가 아니다. 뒤로 빼 두었던 왼손의 칼집을 휘둘러 라켈과의 사이에 충분한 간격을 만들었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은 사야는 다시 칼을 칼집으로 되돌리고 허리를 낮춰 거합의 태세를 취했다.
“당신이로군요. 오라버니 안으로 파고든 이물질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손을 두고, 사야는 지금까지의 경쾌함과 시원함을 버리고 노골적인 악의를 담아 라켈을 노려다봤다.
하지만 라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발을 바닥에 끌 듯 하며 한 걸음 물러선다.
또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결국 쥐새끼 같이 재빠르게 후퇴해선, 어깨를 움츠리고 나오토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야, 야…?!”
방패가 된 나오토는 당황해 라켈을 살폈다.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라켈의 크게 뜨인 금색 눈이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경직되어 있는 것을 보고, 풀썩 하고 어깨를 떨어뜨렸다.
‘아 네… 이럴 때 그놈의 소통장애요…?’
문득 이 자리에 있던 긴박감을 몇 초간 잊는다. 나오토는 조금 전 부딪힌 등을 어루만지며, 흉흉한 자세의 사야를 향했다.
발견한 여동생의 모습에, 나오토는 작게 눈썹을 모았다.
사야의 태세는 견제나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끝장내기 위한, 죽이기 위한 태세.
그것이, 사야라는 소녀였다.
소름이 돋는다.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듯 마신 숨을 삼키고, 나오토는 몇 가지를 포기했다. 원래는 사야에게 이쪽의 사정 따위 요만큼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럴 순 없게 됐다.
사야는 이미 느꼈을 것이다. 맛봤을, 이라고 해야 하려나.
사야는 그 손으로 나오토를 『만져』 버렸다.
나오토 안에 있는 생명력을 먹어 버렸다.
계속 보충되어, 죽여도 죽지 않는다. 변이한 나오토 안에 흘러든 라켈의 목숨을, 그 손을 통해 빨아올려 버렸다.
“사야. 난 한 번 죽었어.”
나오토의 말에, 사야는 눈을 크게 떴다.
“죽었어? 오라버니가?”
묻는 목소리는 그 나잇대 소녀의 음색을 하고 있었기에, 나오토를 약간 당황시켰다. 그런 식으로 생각지도 못한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는 건 그만둬 줬음 한다.
귀찮다는 듯, 나오토는 몇 번 작게 끄덕인다.
“그래. …좀 최근에, 거시기한 데 말려들어서. 그래서…”
“그 여자한테… 말입니까?”
즉시 사야의 목소리는, 칼끝처럼 자비 없이 차갑게 예리해졌다.
나오토는 얼굴을 굳힌 채 바로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아냐.”
사야는 라켈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가로막듯, 나오토는 오른쪽으로 반걸음 움직였다.
“라켈은 그때 내 목숨을 구해준 거야. 다만 그 대신 난 이 녀석과 목숨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 같아.”
말하자면 라켈에게 목숨을 빌려 살아있는 이 상황을, 사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채로 말한다. 슬슬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말로 표현하자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가.
‘사실 이 라켈이 흡혈귀라서, 같은 얘긴 안 하는 게 좋겠지.’
일을 괜히 귀찮게 할 뿐이다. 그리 판단하고, 나오토는 큰 줄기 이외의 이야기를 숨겼다.
사야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
잠시 뒤.
“그래서, 다른 자의 목숨을…”
뱃속에서 끌어낸 듯한 목소리를, 사야가 냈다.
불온한 그것은 둔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운 붉은 눈동자가, 여기엔 없는 누군가를 노려보듯 허공을 응시한다.
“오라버니에게서 흡수한 목숨이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던 건, 그 탓…. 그럼, 오라버니를 죽인 자가 있다는 것이로군요. 제…”
제 오라버니를.
목소리로 내지 않았지만 사야의 입술은 분명하게 그리 중얼거렸다.
나오토는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피어오르는 감정을 쥐어 부순다.
‘진정해. 여긴… 하루카네 맨션이라고…’
주문처럼 나오토는 자신에게 들려준다. 쓸데없는 감정을 휘두를 순 없다. 휘두를 장소도 아니다.
“라켈이 살아있는 한 난 안 죽어. 라켈에게서 빌린 목숨이니까, 나도 죽을 생각은 없고. 너한테 『사냥꾼의 눈』은 못 넘겨.”
강한 마음을 담은 나오토의 『사냥꾼의 눈』에는, 사야의 머리 위에 뜬 불가사의한 기호의 나열이 보이고 있었다. 이걸 숫자로서 읽는다면 『7946』이다.
나오토에게서 상당히 생명력을 빼앗았을 텐데도, 사야의 머리 위에 보이는 숫자는 꽤나 낮았다.
옛날부터 사야는 이랬다. 몸이 약해 곧잘 감기에 걸리고, 그럴 때마다 급격히 낮아지는 생명력에 나오토는 여동생이 죽기라도 할까 걱정했었다.
이제 그 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다. 사야도, 자신도.
“꺼져라. 사야.”
강하게, 라기보단 떼밀듯 나오토는 고했다. 위장 근처가 시큰했다. 입에 담아서 기분 좋은 말이 아니다.
사야는 냉소한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분노의 기색은 눈 깜짝할 새에 옅어졌다.
“박정한 말이로군요, 오라버니.”
정 같은 거 담아 주겠냐. 나오토는 속으로 토해버린다.
사야의 손이 다시 칼자루 위를 덮었다.
그것에 대한 주의를 재촉하듯 갑자기 나오토의 옷이 꾹 당겨진다. 옷을 쥔 건 라켈이다. 나오토의 등 뒤에서 몸을 반만 내밀고, 라켈은 사야를 향해 말한다.
“정 그 칼을 뽑겠다면, 난 네가 어떤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봐줄 생각은 없어. …이 이상은 그만두는 게 네게 있어서도 좋지 않겠어?”
직접 대치하는 게 무서워 숨어서 하는 말이라지만 라켈의 말에는 견제로선 충분하고도 남을 무게와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냄새가 가득했다.
사야는 무정한 말을 탓하는 눈으로 라켈을 본다.
라켈은 바로 나오토 등 뒤에 숨어 사야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위압 승부에선 명백히 라켈의 패배다.
하지만 사야는 다시 입가에 웃음을 짓고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천천히 태세를 풀었다.
“확실히, 좀 장난이 지나쳤군요. 애초에 오늘은 인사와, 메이 님의 서한 전달을 위해 온 것 뿐.”
“거짓말…”
갑자기 맑아진 사야의 태도에 나오토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장난이었다고 하기엔, 목에 남은 손가락의 감촉은 너무나도 살의로 가득 차있었다.
나오토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사야는 왔을 때처럼 기품 있고 예의바르게 등을 편 채 작게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훗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까 전까지 사람 눈을 빼가려고 하던 인간의 태도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질리다 못해 나오토는 얼굴을 찡그리고 두통을 견디듯 머리에 손을 댄다.
“두 번 다시 오지 마.”
“그럴 순 없죠.”
마치 이쪽이 잘못 생각했다는 양 말하며, 사야는 바닥에 떨어진 칼주머니에 예리한 무기를 넣었다. 가느다란 끈으로 확실히 묶고, 나오토를 향해 무겁게 눈을 감았다.
“제 사명은 테르미 가의 재흥. 그걸 위해서라도 오라버니의 그 『눈』은 양도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건 즉, 꼭 죽여주마, 라는 선언이었다.
청순한 얼굴로 지은 미소와 함께, 기어오는 듯한 살의가 향해진다. 오싹 하고 나오토의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다.
‘이게 문제라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흉흉한 빛이 타오르는 눈동자를 눈꺼풀로 덮고 예절바르게 인사를 남기곤, 사야는 칼주머니를 소중한 듯 가슴에 안고 조용히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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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작해버림. CF가 잘못함.
하지만 CF에 나오토가 참전하는 이상 다들 이걸 볼 수밖에 없는 거셈ㅎ
전에 말하던 대로 시작부터 막나가는 하권입니다.
라켈의 얄팍한 과거와 나오토의 집안 얘기가 약간 나왔네요.
라켈 과거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요.
그냥 부르려던 이름이 3절로 끊기는 거 보고 이런저런 뻔한 추측만 할 뿐.
그리고 나오토 집안 얘기입니다만...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아마노호코사카라고 하면 본편 시대의 황제 가문이었죠.
언급된 여성 당주 메이 양은 엑스블레이즈에서 히로인으로 출현하신 바 있습니다.
그 때는 고딩이었는데, 여기서 묘사되기로는 딱히 어리단 묘사는 안 나오네요.
그런데 그럼 나오토는 그 아마노호코사카 가문의 친척인 테르미 가의 장남이라는 건데
이놈 역시 금수저였음. 죽창! 죽창은 어디 있느냐!
어쨌든 이런 화려한 뒷배경을 가지고 본편에 참전했으니 스토리에서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사야가 오빠를 너무 야하게 죽이려 들어서 웃었습니다.
타오보다도 2000쯤 낮은 저 생명력 수치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강한 우리 여동생양은 또 무슨 떡밥을 물고 계신 걸까요.
그런데 나는 죽여도 다른 놈은 죽이면 안 된다니... 이쪽도 얀데레였음...
아 맞다, 떡밥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점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나오토의 사냥꾼의 눈 말인데... 이게 양쪽 눈 다 그런 건지 오른쪽 눈만 그런 건지가 확실치 않아요.
상권 뒷면 개요 부분과 CF기사에서는 오른쪽 눈만 그런 것처럼 말하는데 사야는 양 눈이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면 라그나는 오른쪽 눈만 붉었었는데요.
이게 사소한 오타나 설정구멍이 아니면 사야가 괜히 오빠 죽여서 양눈을 다 빼가려한다는 게 되는데
엄청 후자 쪽일 것 같은 건 나만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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