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이 주거버린 것 같기에 이런 졸문이라 해도 도움이 될까 싶어 올립니다.
원본은 이글루스에 끄적거린 글입니다. 전 시리즈에 관해 서술한 글을 보시려면 링크로.
령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요. 관련 저작물에서는 타계, 이번 작품에서는 은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시리즈의 대를 이어 작품에 드러나는 타계에 관한 관점은 신토의 관념에 퍽 부합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번 작품의 무대는 히카미 산. 과거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영산으로 여겨졌지만, 언제부터인가 무녀들이 자취를 감추고 신사가 비어버린 데다 관광지로 개발하려던 시도마저 무산되어 작품 시점에서는 자살명소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본디 히카미 산 일대에서 신앙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히카미 산에 흐르는 맑은 물. 일대에서는 '사람은 물에서 태어나 물로 되돌아간다'라고 믿고 있어서, 히카미 산의 물 또한 '미코모리 님'이라고 여기며 아이가 태어나면 그 물로 씻어주고 장례를 치를 때에도 고인을 그 물로 씻기는 등 각별히 다루었다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히카미 산의 물은 '미코모리 님'만이 전모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히카미 산 일대의 사람들은 저승- 그들이 은세라고 부르는 곳에도 요미夜泉라는 물이 흐르고 있고, 그것이 신령스러운 히카미 산의 경계를 넘어 현세로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요미는 황천에 흐르는 검은 물. 몸에 닿으면 살을 검게 문드러지게 만들고, 그 넋까지도 침범하여 결국 닿은 자를 은세로 끌어들이는 무서운 것-
이러한 관념은 일본 신토에서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신토의 신들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니기타마和魂와 아라이타마荒魂. 같은 신일지라도 니기타마의 성격이 드러날 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신이지만, 아라이타마의 일면이 드러나면 난폭하고 거친 신. 칭하는 이름도 다르고 간혹 제례를 올리는 신사도 따로 두는 등 신토의 우지코들은 아라이타마를 섬기는 데에도 마음을 쓰면서 신의 거친 본성이 진정되기를 기도했다던가요.
한편으로는 아라이타마의 거친 에너지가 생명을, 창조를 자아내는 근원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복합성이 신토의 매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하지만 히카미 산에서 요미는 오로지 죽음- 꺼리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 결국 히카미 산의 신앙세계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격리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의식이 인주人柱. 히카미 산의 무녀들은 죽음을 바라고 물로 되돌아가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위로해줍니다. 그녀들이 봄으로서 담아낸 죽음이 가득 찼을 때, 그녀들은 요미를 채운 상자에 넣어져 물에 가라앉아 경계를 수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역할은 무녀. 즉 여자에게 맡겨져 있는가? 이번 작품에서는 민속학자의 문서를 통해그에 대한 의문도 제시하고 있습니다.(민속학자 와타라이 케이지 씨에게 감사... 령 시리즈에서 발군의 사망률을 갱신하는 위험직업군은 민속학자일 것 같군요. 3편 자청의 소리의 카시와기 아키토 씨 외에는 올킬!)
그러나 여성이 황천과 쉽게 결부되는 이유는 간단히 찾을 수 있지요. 바로 [고사기]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자나미가 직접 쫓아왔다. 이자나기가 황천국과 이 세상의 경계에 천 명이 끌 수 있는 커다란 바위를 놓아 오갈 수 없도록 하고 있을 때, 이자나미가 말했다.
"사랑스러운 당신, 어째서 그랬습니까? 이제부터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하루에 천 명씩 죽여버리겠습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여,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오백 명의 산실을 세우리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천 명씩 죽게 되고, 하루에 천오백 명의 사람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자나미를 황천대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사기](지만지판)
황천의 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신 이자나미. 살아있는 자를 증오하는 여신. 황천에 연결된 데에 더하여 또한 같은 여성인 무녀를- 사람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또한 눈여겨봄직한 것은 이자나미의 증오의 근원이 사랑에 대한 배신- 바로 애욕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카미 산 정상의 히간 호수,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쿠로키사와에 가라앉혀져 경계를 지키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대인주는 유혼幽婚이라는 의식을 치릅니다. 두 명분의 상자에 들어가, 에마에 그려진 신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린 남자의 영혼과 함께 봉납되는 것이지요. 신랑과 함께 바쳐진 무녀는 그 의지가 더욱 강고하게 되어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려워하고 멀리하고 꺼림칙스러워해 가두어버리는 그 길에 정녕 구원은 있었는가-
과거 어느 때에 의식은 결국 파탄에 이릅니다. 쿠루루기 코조라는 사내가 무녀를 사모하여 마음을 고백했는데, 무녀에게 거절당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이고 말았지요. 헌데 죽은 무녀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사내는 미치고 말아 히카미 산의 무녀를 참살하고 그 눈을 파내었다던가.....
사내가 어째서 광기에 빠져버렸는지, 그 답은 간단합니다. 무녀들이 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죽음이었지요. 그것을 직면하자 사내는 두렵고 또 두려워서, 없애버리고자 했던 겁니다. 마치 무녀들을 상자에 가두어 가라앉히는 길을 택했던 신사의 사람들처럼.
그 결과 살해당한 무녀들의 원한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품고 상자에 들어간 대인주의 무녀- 쿠로사와 오우세에게로 흘러들어가 결국 경계는 무너지고 요미가 넘쳐흘러 히카미산을 뒤덮게 되었음은 여러분도 익히 아실 터.
비록 남아 있는 무녀들의 의지가 경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살자를 끌어들이고 여성들을 카미카쿠시해 무수한 상자를 만들어내었지만, 한 번 흘러넘친 요미는 검은 안개로 산을 뒤덮고 태양을 석양과 같은 황천의 불길한 태양으로 변모시키며 본디 죽음을 선택한 이들을 위로해야 할 무녀들의 원령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끝내.... 오우세의 아픔에 공감해 목매도록 울어주었던 유우리의 눈물 때문에, 오우세는 자신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하얗고 아름다운 신부 모습으로.
그리고 그녀는 황천의 문을 열어 요미를 흘려보내고, 숱한 원령들과 함께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과거 신령스럽다고 칭송받았던 히카미 산의 맑은 물뿐.
알아주길 바랐을 뿐. 사실은, 함께 살아가고 싶었노라고.
니기타마가 아라이타마로 변하고, 아라이타마의 그 난폭한 에너지가 새로운 생명을 낳는- 물의 흐름처럼 양양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신토의 관념은 호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본은 이글루스에 끄적거린 글입니다. 전 시리즈에 관해 서술한 글을 보시려면 링크로.
령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요. 관련 저작물에서는 타계, 이번 작품에서는 은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시리즈의 대를 이어 작품에 드러나는 타계에 관한 관점은 신토의 관념에 퍽 부합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번 작품의 무대는 히카미 산. 과거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영산으로 여겨졌지만, 언제부터인가 무녀들이 자취를 감추고 신사가 비어버린 데다 관광지로 개발하려던 시도마저 무산되어 작품 시점에서는 자살명소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본디 히카미 산 일대에서 신앙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히카미 산에 흐르는 맑은 물. 일대에서는 '사람은 물에서 태어나 물로 되돌아간다'라고 믿고 있어서, 히카미 산의 물 또한 '미코모리 님'이라고 여기며 아이가 태어나면 그 물로 씻어주고 장례를 치를 때에도 고인을 그 물로 씻기는 등 각별히 다루었다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히카미 산의 물은 '미코모리 님'만이 전모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히카미 산 일대의 사람들은 저승- 그들이 은세라고 부르는 곳에도 요미夜泉라는 물이 흐르고 있고, 그것이 신령스러운 히카미 산의 경계를 넘어 현세로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요미는 황천에 흐르는 검은 물. 몸에 닿으면 살을 검게 문드러지게 만들고, 그 넋까지도 침범하여 결국 닿은 자를 은세로 끌어들이는 무서운 것-
이러한 관념은 일본 신토에서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신토의 신들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니기타마和魂와 아라이타마荒魂. 같은 신일지라도 니기타마의 성격이 드러날 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신이지만, 아라이타마의 일면이 드러나면 난폭하고 거친 신. 칭하는 이름도 다르고 간혹 제례를 올리는 신사도 따로 두는 등 신토의 우지코들은 아라이타마를 섬기는 데에도 마음을 쓰면서 신의 거친 본성이 진정되기를 기도했다던가요.
한편으로는 아라이타마의 거친 에너지가 생명을, 창조를 자아내는 근원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복합성이 신토의 매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하지만 히카미 산에서 요미는 오로지 죽음- 꺼리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 결국 히카미 산의 신앙세계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격리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의식이 인주人柱. 히카미 산의 무녀들은 죽음을 바라고 물로 되돌아가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위로해줍니다. 그녀들이 봄으로서 담아낸 죽음이 가득 찼을 때, 그녀들은 요미를 채운 상자에 넣어져 물에 가라앉아 경계를 수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역할은 무녀. 즉 여자에게 맡겨져 있는가? 이번 작품에서는 민속학자의 문서를 통해그에 대한 의문도 제시하고 있습니다.(민속학자 와타라이 케이지 씨에게 감사... 령 시리즈에서 발군의 사망률을 갱신하는 위험직업군은 민속학자일 것 같군요. 3편 자청의 소리의 카시와기 아키토 씨 외에는 올킬!)
그러나 여성이 황천과 쉽게 결부되는 이유는 간단히 찾을 수 있지요. 바로 [고사기]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자나미가 직접 쫓아왔다. 이자나기가 황천국과 이 세상의 경계에 천 명이 끌 수 있는 커다란 바위를 놓아 오갈 수 없도록 하고 있을 때, 이자나미가 말했다.
"사랑스러운 당신, 어째서 그랬습니까? 이제부터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하루에 천 명씩 죽여버리겠습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여,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오백 명의 산실을 세우리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천 명씩 죽게 되고, 하루에 천오백 명의 사람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자나미를 황천대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사기](지만지판)
황천의 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신 이자나미. 살아있는 자를 증오하는 여신. 황천에 연결된 데에 더하여 또한 같은 여성인 무녀를- 사람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또한 눈여겨봄직한 것은 이자나미의 증오의 근원이 사랑에 대한 배신- 바로 애욕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카미 산 정상의 히간 호수,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쿠로키사와에 가라앉혀져 경계를 지키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대인주는 유혼幽婚이라는 의식을 치릅니다. 두 명분의 상자에 들어가, 에마에 그려진 신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린 남자의 영혼과 함께 봉납되는 것이지요. 신랑과 함께 바쳐진 무녀는 그 의지가 더욱 강고하게 되어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려워하고 멀리하고 꺼림칙스러워해 가두어버리는 그 길에 정녕 구원은 있었는가-
과거 어느 때에 의식은 결국 파탄에 이릅니다. 쿠루루기 코조라는 사내가 무녀를 사모하여 마음을 고백했는데, 무녀에게 거절당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이고 말았지요. 헌데 죽은 무녀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사내는 미치고 말아 히카미 산의 무녀를 참살하고 그 눈을 파내었다던가.....
사내가 어째서 광기에 빠져버렸는지, 그 답은 간단합니다. 무녀들이 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죽음이었지요. 그것을 직면하자 사내는 두렵고 또 두려워서, 없애버리고자 했던 겁니다. 마치 무녀들을 상자에 가두어 가라앉히는 길을 택했던 신사의 사람들처럼.
그 결과 살해당한 무녀들의 원한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품고 상자에 들어간 대인주의 무녀- 쿠로사와 오우세에게로 흘러들어가 결국 경계는 무너지고 요미가 넘쳐흘러 히카미산을 뒤덮게 되었음은 여러분도 익히 아실 터.
비록 남아 있는 무녀들의 의지가 경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살자를 끌어들이고 여성들을 카미카쿠시해 무수한 상자를 만들어내었지만, 한 번 흘러넘친 요미는 검은 안개로 산을 뒤덮고 태양을 석양과 같은 황천의 불길한 태양으로 변모시키며 본디 죽음을 선택한 이들을 위로해야 할 무녀들의 원령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끝내.... 오우세의 아픔에 공감해 목매도록 울어주었던 유우리의 눈물 때문에, 오우세는 자신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하얗고 아름다운 신부 모습으로.
그리고 그녀는 황천의 문을 열어 요미를 흘려보내고, 숱한 원령들과 함께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과거 신령스럽다고 칭송받았던 히카미 산의 맑은 물뿐.
알아주길 바랐을 뿐. 사실은, 함께 살아가고 싶었노라고.
니기타마가 아라이타마로 변하고, 아라이타마의 그 난폭한 에너지가 새로운 생명을 낳는- 물의 흐름처럼 양양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신토의 관념은 호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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