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아크윈 펠던스턴이 아직 브리드 공국 소속 라닌 디프로이드의 상관으로 있었을 무렵, 브리드 공국은 카렐 제국과의 기나간 전쟁으로 인해 나라의 기반이 와해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어리석은 56대 브리드인 고저스 크롬웰은 비록 책임감과 의무를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를 관철시키는 의지가 부족했었다. 카렐 제국은 브리드 공국에 한가지 제안을 했었고 브리드는 받아들였다.그것은 차기 군 총 지휘자 로크란드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자 전장에서 당시 수없이 전과를 올리던 17세의 돌격기동대 단장 라닌 디프로이드의 목숨이었다. 카렐제국은 라닌의 죽음을 자신들에 대한 최소한의 호의로 받아들이고 향후 10년간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카렐 입장에서도 로프론 왕국을 견재하기 위해 무의미한 전쟁을 철수할 생각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단순 계산으로 병사 한명의 목숨으로 수많은 병력 손실을 일단락지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브리드는 라닌의 사형을 지시했다.
브리드 공국은 그동안 원칙적으로 사형을 금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정식으로 마련된 형장이 있을 리 없었다. 라닌 디프로이드는 대여섯 명의 병사들에 의해 브리드 궁 대광장으로 끌려나왔다. 수많은 군중과 브리드 수하의 대구족들과 의원들. 그중에는 라닌 디프로이드의 여동생인 테르시아 오르펜 디프로이드도 있었다. 테르시아는 약관 14세의 나이에 당시 경제부 4대 샤를란티스의 직책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귀족 신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라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결박도 없이 무장만 해제 된 채로 광장 중앙에서 무릎을 꿇었다. 뒤쪽에선 다섯의 창병들이 창 끝을 라닌의 등을 향해 겨누었다. 브리드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찔러넣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브리드는 허황된 거만함을 잔뜩 품고 아무런 말도 않고 바로 형을 집행하려 했다. 그동안의 전투의 성과에 대한 찬사도,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변명도 없었다. 라닌은 그 편이 오히려 더 편했다. 지금까지 브리드 공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살아왔다. 라닌은 브리드 공국의 미래에 자신의 생명을 태울 거라 다짐하고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서 첫번째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 손을 내리기만 하면 라닌의 생명은 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대귀족 샤를란티스, 즉 테르시아가 라닌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라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호가 떨어졌다. 창병들의 창 끝은 라닌의 망토 끝을 건드릴 뿐이었다. 라닌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창병들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창병중 한명의 허리춤에서 예비 검을 뽑아들어 단칼에 창병 다섯의 목을 잘랐다. 창병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라닌의 몸에 꽂힐 것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라 미처 대비를 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났다. 피가 공중에 원을 그리며 뿜어졌다.
원의 중앙에는 라닌이 있었다. 광전사의 눈빛을 한 전투의 화신이 시체들을 밟고 대지에 우뚝 선 채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것은 차디찬 밤 안개와 같이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며 동시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공포를 선사했다. 아니. 붉은 빛의 공포 그 자체였다.
누구 하나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가운데 라닌과 샤를란티스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말없이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2) 라이지드
"과거 천도를 피의 무지개로 수놓던 어둠의 일족들은 전쟁에서 패한 뒤에 죄의 댓가로써 자신들의 군주인 프라우져 대제를 절망의 계곡에 영원히 가두어 버렸다. 그의 몸은 어둠과 같고 붉은 갈기의 물결이 몸을 뒤덮어 그 형상이 불분명하며, 대지위에 칠흑의 길을 수놓아 수많은 망자들을 거느렸으니 그가 지나간 길의 모든 생명을 지닌 자는, 그의 그림자를 따라가 다시는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신이 언급한 프라우져 대제에 대해 라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샤르카에게 말해 주었다. 레이버리크의 흔들리는 바구니 속에서 샤르카는 승차감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라닌에게 프라우져 대제에 대해 물었다. 라닌이 말하는 과거의 전쟁이란 라닌과 브리드가 하급 장교였을 당시의 카렐 제국과의 전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00년도 전에, 강대한 제국으로써 번성하던 어둠의 일족이 카린 레이브의 어둠의 성지를 조국으로 삼고 있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에 어둠 일족은 순수한 악마이자 지하세계의 가장 잔혹한 마인인 프라우져 대제의 명에 따라 카렐 제국을 도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으나 지상을 관망하지 않은 천계의 사도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라우져 대제는 어둠계 카오스번 대륙과 맞닿은 저주의 땅에 버려져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수천 수만의 망자들의 죽음이 녹아든 절망의 계곡에 매장되었다.
지금은 살아남은 일족 중 카렐 제국과의 이해타산이 맞은 어둠 일족의 정통 후계자 및 몇몇 수장들에 의해 어둠계 카오스번으로써 지금까지 현존해 나갔다. 자존심과 신념이 강한 어둠 일족의 반란파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배신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유는 바로 그 정통 후계자의 카리스마적 통솔이 큰 역할을 했다. 프라우져 대제를 따르던 순수파 어둠 일족들은 살아 남아 부족 단위로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샤르카는 물론 어둠 일족을 잘 알고 있었다. 몬스트랜에서 만난 그들은 호전적이고 거친 인상이었지만 지성과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순수한 민족이 아니며 마성이 일부 스며든 존재들로써 수천년 전에 아직 지하 세계의 악마(데몬)들이 이 지상과 자유자재로 드나들던 시절에 원주민들과 혈통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외모는 데몬들과 같은 마수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과 아주 유사하며 짙은 감색의 피부에 이마 정 중앙에 개체마다 다른 모양과 길이의, 두개골이 변형되어 생긴 뿔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귀는 매우 가늘고 길며 머리카락 등 체모는 붉고 날카로우며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 점은 데몬들과 공통되는 부분이다.
그들은 체격적으로 근육이 쉽게 늘지 않는 대신에 정밀하고 재빠른 행동이 가능하다. 일반 인간보다는 체력적으로 크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대신 시력과 청각 등 감각등이 뛰어나며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더욱 발전시킨다. 주된 무기는 단검 투척이며 근접전에서도 상대의 급소를 노려 검을 꽃아 놓는데 익숙하다. 열과 추위에는 강하지만 자외선에 약해서 항상 두꺼운 망토로 몸을 가린다. 그들은 용병이나 도적일을 하며 소수 단위로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며 몬스트랜과 같이 눌러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프라우져 대제는 강한가? 그가 배후에서 마신을 조종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 우리가 마신을 쫓다 보면 그에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게다가 프라우져 대제에게는 강력한 적이 있다."
"적?"
라닌의 말에 의하면 프라우져 대제가 실각한 가장 큰 이유 중에는 어둠의 세력의 정통 후계자인 쿠알제가 반란을 일으킨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고 있다. 쿠알제는 프라우져 대제의 피를 잇는 어둠 일족의 왕자인 동시에 순수한 악마인 프라우져와 일반 어둠 일족 여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마인이었다. 외모는 어둠 일족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불멸에 가까운 생명력으로 현재 몇백년 가까이 젊음을 유지하며 어둠계 카오스번을 통치하고 있다.
"프라우져 대제는 쿠알제가 계속 신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떠한 움직임, 예를 들어 이번과 같이 마신을 부리는 기미가 감지 되었다면 그들이 모르고 있을 리 없지. 프라우져 대제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면 우선 쿠알제를 만날 필요가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분명 적당한 시기가 올 거야."
진동이 심해졌다. 조타수인 가루라가 착륙한다고 말해주었다. 정면의 창문으로부터 어두운 하늘 아래에 불빛이 보였다.
변방의 라이지드는 비록 정령과 요수의 땅 젠티브의 영내였지만 소속은 브리드 공국에 속해 있었다. 브리드 공국과 공정 젠티브 국경 근처에 세워진 여행자들이나 상인들,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띤 방문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소도시로서 라닌 일행은 공정의 높은 고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레이버리크가 아닌 특수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라이지드에서부터는 육상으로 공정 젠티브 바로 아래에 위치한 특수한 구조물을 이용하여 일순간에 공정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도의 과학 기술이 젠티브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레이버리크가 선착장에 다가서자 몇명의 인부가 거대 복어(레이버리크)를 잡아 매어두기 위해 움직였다. 등 뒤의 특이한 모양의 등뼈에 밧줄을 감아 고정하는 사이 라닌 일행은 가루라를 선두로 하차했다. 가루라는 인부들에게 몇가지 지시를 한 후 레이버리크의 처리 수속을 하고 있었다.
라닌은 밤이 늦었기에 하룻밤 여기서 보내는 것을 제안하고 샤르카는 마신이 언제 공정 젠티브에 도달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서둘러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젠티브 영내에는 특수한 기기를 이용한 특별한 탐색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될 시에 라닌에게 전파 마법으로 보고가 된다고 레나가 말했다. 전파 마법은 이 세계의 일종의 연락 수단으로 각종 영상이나 목소리, 문서 등을 수신자 뇌에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수신자 자체가 마법 소양이 없다 하더라도 전파를 받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미 브리드에서 보내진 모든 연락 사항은 젠티브에 도달한 상태로 젠티브에서는 마신이 감지될 시 라닌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현재로서는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라닌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 레나는 그렇다치고 샤르카는 아직 마신과의 전투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게 느껴져. 좀 더 쉬는게 좋아."
저번 전투에서 체력적으로 더욱 소모한 레나는 겉으로는 전혀 체력소모의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베이스가 워낙 뛰어난 체력을 지녔기 때문으로 실제로는 본래 능력보다는 많이 뒤쳐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방금 발언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가 아닌가?
한적한 교차로의 한쪽에 세워진 주점에서 라닌은 멈춰 섰다. 샤르카 및 일행들은 라닌이 멈춰선 건물을 바라보았다. 벽면을 회색 벽돌로 굴곡없이 채운 무미건조하고 아담한 느낌의 2층 건물에서 사람들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해가 저문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른 마을의 여행객들과 수다를 좋아하는 주정뱅이들,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열적인 젊은이들, 그리고 또한 마을의 국경을 순찰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들른 민병대들. 그들 전원은 라닌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일순간 대화와 움직임을 멈추고 그들을 쏘아보았다.
워쳐캐스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샤르카는 그렇다치고 라닌은 평소의 은색 갑옷이 아닌 평법한 여행객의 복장에 장검을 등에 차고 있었다. 레나는 브리드 공국 수도 브리드내에서는 유명한 무인이었지만 역시 변두리 작은 마을에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점은 가루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알아볼 확률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의 이질감은 이들이 평범한 여행객이 아니라는 걸 반증했다. 1층의 주점 손님들의 시선이 고정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샤르카는 성큼성큼 카운터로 향했다. 씩씩한 느낌의 단발의 여성이 옮기던 술통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손님. 뭘 드릴까?"
"우선 방 하나, 침대 넷. 모두들 지쳐 있을 거다."
"좋아. 이쪽으로. 난 마치니라고 해. 그렇게 불러줘."
마치니라고 하는 여성은 2층으로 라닌 일행을 안내했다. 체술의 소양이 얕은 샤르카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절제된 마치니의 움직임에서 레나는 자신과 동류의 무도가의 느낌을 받았다. 평범한 주점의 여자가 격투에 능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녀의 머리에는 두 개의 가늘게 뻗은 깃털과도 같은 촉수가 허리까지 내려왔는데 실내에 바람이 없음에도 그것은 마치 생명력을 가진 듯 하늘거리고 있었다. 레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라닌이 마치니가 열어준 방으로 들어섰다.
"당신들. 여행객이야?"
"인생 자체가 긴 여행이다. 조금 쉬려는 거야."
라닌이 되도 않는 철학적인 말을 했다. 가끔 샤르카는 라닌의 이해하기 힘든 말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되었다. 마치니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잘 자라고 말하며 가 버렸다. 아래층의 제법 들어찬 손님들에 비해 투숙객은 거의 없어 보였다. 가루라는 잠시 마을을 정찰한다면서 창문을 통해 날아가 버렸고 레나는 공중 목욕탕에 갔다 온 이후 잠이 들었다. 샤르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져 자 버렸고 라닌은 창가 근처의 탁자에 앉아 투숙객에게 제공된 럼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한 여인이 라닌을 찾아왔다. 가늘고 긴 은빛 머리에 남을 혹하게 만드는 눈빛을 지닌 매혹적인 여자였다. 라닌이 눈빛도 바꾸지 않고 바라보는 사이에 여자가 다가왔다.
"잠깐 앉아도?"
"나쁠 것 없지."
라닌이 술을 귄했다. 여자는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내 이름은 바로니. 여관의 주인이지. 세 자매중 장녀야. 비록 친 남매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어."
"그렇군. 마셔."
라닌은 독주가였다. 술자리에 낀 상대는 비록 그가 적군이든 지하의 악의 군주든 상관하지 않았다. 라닌은 호쾌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방문 근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다가 금새 얼굴을 감추었다. 마치 남자아이 같은 짧은 머리를 했지만 라닌은 그 아이가 세 자매중 막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막내 카운티. 아래층의 마치니와는 구면이지?"
"...........전부 인간이 아니군."
라닌은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지내는 사이, 함께 싸운 아군이나 죽인 적들 중에는 요기를 띈 짐승이 인간의 모습을 한 경우도 많았다. 라닌은 그 세 자매가 바로 그런 부류라는 걸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바로니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요기를 띈 눈빛을 하고 말했다.
"당신, 눈치가 빠르네."
"저 아이는 거미, 당신은 여우, 마치니는..."
"지네야. 우리는 수십 년 전에 만난 이후로 이곳에 정착했어."
"어째서 인간의 모습을?"
바로니는 조금 정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누그러진 모습으로 답했다.
"인간에게 흥미가 있어. 우리들 요기가 충만해진 짐승들은 가끔 자신의 요기를 마력으로 변환해 일생동안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지.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능력을 소비하지만 우리들은 이 능력을 이용해 인간의 모습이 되어 인간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거야.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동경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써 말하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추하디 추한 존재다. 너희가 본받을 존재 따윈 되지 못해."
"우리는 각자 과거에 만난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보았어. 마치니와 나는 동시에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도 있고 카운티는 인간 기사에게 목숨을 구해진 적도 있지. 물론 대부분 편협하고 자신들 이외의 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종족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보다 더욱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거야."
라닌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던 자신의 동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또한 요력을 쌓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으로 대규모 사상자를 내었던 카렐 제국과의 공성전에서 사망했었다. 그는 요괴의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에 동원되었고 라닌은 그가 바로 앞에서 누더기로 죽어가는 걸 지켜보았었다.
라닌은 빈 술병을 몇번 흔들어 보더니 지쳤다는 듯이 내뱉었다.
"너희들은 선량한 마음을 지니고 있군.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치는 게 좋아.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요괴들이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는지 알고 있어. 분명 버림받거나 배신당할 뿐이다."
"당신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어. 실제로 당신은 인간이 아닌 자들과 여행중이잖아."
라닌과 마찬가지로 바로니 또한 인간과 인간과는 조금 다른 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레나와 가루라는 신체적인 특징, 깃털로 뒤덮인 어께와 귀. 야성적인 생김새 등으로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샤르카는 외모로만 놓고 본다면 피부가 조금 창백한 정도로 일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로니는 샤르카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너희가 보면서 걷는 길은 이상일 뿐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 긴 여행이 될 거야."
"긴 여행은 충분히 해 왔고 앞으로도 해올 생각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니는 창가 근처에서 밤 공기를 느끼며 일순간 깊이 있는 눈빛을 했다. 라닌은 그녀가 이미 충분히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억압과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뭘 보며 걷고 있지?"
"뭔가를 찾고 있어."
"누군가...가 아닌?"
"들리는 대로다."
라닌 또한 답이 없는 여행을 해 오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만 하는 순간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고 누구를 위해서 정의가 있는 것인가. 적당할 때 나타나 준 마신은 그런 그의 고뇌의 시간을 잠시나마 줄여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생각할 시간따윈 불필요하다. 자신은 브리드의 명대로 마신의 목을 가져오면 된다. 그리고...
"뭐 좋아, 괜찮다면 도와줄 만한 건 없을까?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와. 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이지."
"사양하지. 그런데 공정 젠티브에서 근래 뒤숭숭한 소문 같은 건 들려오지 않은가?"
바로니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신이 도달했다면 젠티브에서 벌써 알려주었을 것이다. 두번째 목표는 젠티브가 아니었던 걸까?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
"사과할 이유는 없어."
"주위에 물어봐 줄까?"
"내일 일찍 떠날 때까지 만이라도 괜찮은가?"
바로니는 쿡쿡 웃었다.
"어려운 일이 아닌걸. 이 정도는 도와주게 해 줘."
문 저편에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니가 흥미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빈 술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여엇. 다녀왔어."
"밤 늦게 수고했어."
이런 시간에 술 배달을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마치니는 다리까지 내려오는 더듬이를 흔들며 라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당신. 첫 인상처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는 게 좋아. 피와 가까운 사람이다."
"언니가 술을 청할 정도니까. 하하. 자. 이제부턴 내상대를 해주라고."
라닌은 술이라면 굉장히 강한 편이다. 하지만 왜인지 김이 샌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핑계거리를 술에서 찾았다.
"미안하군. 과음했더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약한 소리 하지 마! 남자잖아!"
"마치니. 기껏 분위기를 잡아놨더니..."
"에~근래 여행자가 뜸하니까 단순히 세상 얘기가 궁금했던 것 뿐이잖아."
"난 이만 잘 테니까 결정되면 말해."
라닌은 근처 침대에 뻗어있는 샤르카 옆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 했다. 바로니가 눈을 흘기는 걸 못 본척 하면서 마치니는 라닌을 잡아 끌었다. 라닌은 한숨을 쉬면서 마지막 술병에 손을 뻗었다.
"하아."
창가에 인기척이 일었다. 가루라가 낮은 바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라닌씨. 다녀왔습니다. 가볍게 근처를 돌아봤어요."
일단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가루라는 라닌의 직책을 언급하지 않는 범위 내의 호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미 바로니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라닌의 분위기에서 전장의 기운을 느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라닌씨가 너무 풀어진 거지요. 우린 임무...가 아니라 하여간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자네도 끼도록 해. 명령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가루라는 마지못해 하면서 일단 자리를 같이 했다. 물론 술엔 약하기에 한 모금도 입에 댈 생각은 없었다. 내일 아침의 임무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가루라의 위치에서 문 근처에 얼굴만 내밀고 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여자아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가루라가 뻘쭘해진 가운데 라닌은 갑자기 생각난 듯 작은 카드 용기를 꺼냈다. 어차피 잠은 틀린 것 같으니 이대로 밤을 보낼 생각이다.
라닌이 꺼낸 카드 세트는 지구의 트럼프와 비슷한 용도로 좀더 간략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카오스 이클론에서는 '레이픈'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카드에는 궁병, 기병, 보병 의 3가지 그림이 각각 10장씩으로 되어 있으며 제각기 다른 번호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이픈에서 파생되는 게임은 300 여 가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닌이 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 중 하나인 '포로구출전'으로서 상대와 패를 겨루어 일차적으로 딴 카드를 포로로 하여 수용소를 공격하는 측이 각자 정한 턴 이내에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다.
라닌이 아주 자신있어 하는 게임으로 이 게임으로 지금까지 진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게임은 처음 포로가 되는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해지는데 라닌은 자기가 성을 지키는 역할인 상태에서는 한번도 진적이 없었다. 라닌은 인간이 아닌 요괴가 상대라면 자기의 무패기록에 변화가 있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가루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있었고 마치니는 할 마음이 든 듯했다. 바로니는 룰을 모른다며 자리를 떴다. 방을 나서나 했더니 수면중인 레나의 침대 근처에 앉았다.
"귀여운 아이. 이방인이네."
"얼핏 보고 알아보는 건가?"
라닌은 자기 패를 살피며 말했다. 운 좋게도 자신이 방어하는 입장이다. 분명 지금까지대로라면 질리가 없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반인 반수, 요수, 모든 종족들은 다 보아왔다고 자신해. 이 아이는 특별하네. 이름이 뭐라고 하지?"
"레나라고 부르면 돼.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가 없었군. 난 라닌. 저 닭날개는 가루라. 이 녀석은 샤르카라고 한다."
"레나인가. 예쁜 이름이네."
"잡아먹지는 말라고."
라닌은 게임에 집중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으로 곁눈으로는 바로니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니는 매우 고민하면서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라닌이 배치한 경비병들을 들키지 않고 피해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우으...엄마."
레나가 잠꼬대를 했다. 이방인들은 자신이 살던 세계의 기억은 대부분 사라져 있지만 가끔 잔류 사념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구현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레나는 꿈으로써 과거를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외로울 거야. 이 세계에 적응한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완전히 그렇다고는 못하겠지. 영원히."
"아까도 한 말이지만. 당신. 좋은 사람...아니 요괴구만."
"농담같지만 기분 나쁘진 않네."
라닌은 마치니의 침입을 세번째 저지하면서 말했다. 마치니에게 남겨진 패는 이제 두 개. 기회는 두 번. 방금전의 침입은 저지선을 거의 마지막까지 뜷었다. 의외로 분투하는군.
"방해해서 미안해. 이만 갈께."
"간만에 즐거웠다."
바로니가 방을 나섰다. 예견된 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니의 괴성이 들려왔다.
비슷한 시각에 카렐 제국 근처 일블리드 섬 상공에서는 중, 대형 크기의 공중 구축함이 항행중이었다. 전함의 표면은 전의 몬스트랜을 습격한 제국군의 수상 전함과 같은 다자인 컨셉을 지닌 색상과 문양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제국의 상징이 기수 중앙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공중 전함의 원리는 중력과 반작용하는 신비한 물질을 내부에 생성하는 것으로 추진력 자체는 프로펠러 등으로 얻는다.
이 구축함은 카렐제국의 소속임은 분명하지만 제국 관할과의 교신을 전부 거부한 채 독단적인 움직임을 고수하고 있었다. 공중 이동 경로를 벗어난 곳에서 마치 매복과도 같이 근처 산을 끼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척 기분이 나쁜 듯, 또는 초조한 것처럼 인상을 험상궂게 잔뜩 구기고 있었다. 함대의 지휘관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의 해군 함장을 연상하지 말자. 마치 고대의 비밀스런 마법사의 인상을 풍기는 옷차림의 아저씨였다. 나이는 40대 전후로 그동안 많은 공적을 세운 용사라는 걸 눈빛만으로도 느끼게 하는 맹장이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한 분위기는 어둠에 가려져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무척 부자연스럽게도 함장실을 비롯한 모든 실내에는 불빛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무언가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병사가 다가와 무언가 속삭였다. 그 병사는 정보처리 담당으로 방금 전 카렐 제국의 비밀스런 연락책을 통해 보고 받은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함장격의 남자는 다시 한번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브리드 공국에 습격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정보원이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대통령이 원정대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분명 이쪽, 제국의 소행이라고 생각할테니 언젠가는 마주치겠죠."
마신? 전설로만 전해지던 전투본능의 괴물이 성제의 보물을 노린다? 보고서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함축되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경쓰이는 건 브리드 공국의 원정대라는 4인조.
"그런가. 잘만 하면 그들을 이용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고 목표의 움직임은 변동이 없는가?"
"예. '비바이런 임페르노' 즉 제국이 보관하던 성제의 보물이 수도로 운반된다고 합니다. 분명 무언가 낌새를 채고 장소를 옮기는 거겠죠."
그들의 목적은 바로 조국의 성제의 보물이었다. 카렐 제국의 국왕 필리온은 마신의 습격 소식을 전해받고 난 후 성제의 보물을 좀더 안전한 수도로 두길 원했다. 제국의 배신자들은 그것을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중간에 탈취하려는 것이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수도의 멍청이들도 더이상 나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가 아닌 다른 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래. 이를테면 브리드의 파견자들과도 같은."
라이지드의 아침. 하늘이 점차 밝아올 무렵에 라닌은 2층 복도에 위치한 공중 세면실을 이용중이었다. 창 너머에서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찌르릉'
기계적인 벨 소리가 아침 공기 사이로 울려왔다.
자전거에 술통을 가득 실은 마치니가 이웃 마을에서부터 오던 중에 얼굴을 씻던 라닌과 눈이 마주쳤다. 팔 물건을 공급자에게서 받아 온 듯하다. 인간과 신진대사가 다른지 잠도 자지 않는 듯했다.
"어이."
라닌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무거운 듯한 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 어께에 걸치고 입구 근처에 내려놓으며 마치니가 답해주었다.
"일찍 일어났네."
"아직 젊으니까."
"중년처럼 말 하지마."
마치니가 지하 술 저장소에 연결된 파이프에 술통을 호스로 흘려 놓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 하던 작업인 듯 숙련된 솜씨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펌프질을 반복했다. 감탄하며 바라보는 라닌에게 마치니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당신 편견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어떤 편견?"
"그야.."
마치니는 다음 술통을 호스에 연결하면서 말했다.
"보통은 인간이 요괴와 말한다거나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
"글쎄. 그런 거 일일이 따지는 건 피곤해서 말야. 내게 이득도 되는 게 아니잖아. 인간이든 요괴든 데몬이든 마신이든 구별짓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세상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고. 착하고 나쁜 녀석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녀석과 마음에 안 드는 녀석."
"타산적이네. 당신."
"귀찮은 걸 싫어하는 거라고도 하지."
"보다시피 우린 거의 인간이 되었어. 이젠 본 모습으로도 돌아가지 못할 지경이라구. 하지만 그건 브리드의 법 때문만은 아니야. 다만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가장 안전하고 트러블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가짜를 걸치고 본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갈 수 있는 거지."
라닌은 이미 어젯밤에 바로니와의 대화로 마치니의 본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마치니가 말한 것만으로는 종족을 넘어서려는 생각에 무언가 이유가 부족하다.
"과연 그것 뿐일까."
"무슨?"
라닌은 점짓 내키지 않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투로 말했다.
"요괴들은 지나치게 순수한 일면이 있어. 사악한 건 인간들만으로 족해. 너희들이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던 이유는....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건...."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어째서 창조와 파괴의 업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인지...인간이란 뭔가? 남을 위한 희생이란? 희열은? 분노는? 감정이란 뭘 뜻하는 거지?"
마치니는 통을 비우는 걸 잊었다. 펌프질을 잊었다. 호스의 술이 다시 술통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어..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야?언니와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었던 거야?"
"인간이길 원하는 요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그만둬도 좋아. 마치 꿈속의 상념과도 같지. 조그만 바람에도 날려가고 언젠가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먼지에 불과해."
마치니는 호스 입구를 잠그고 말없이 뒤돌아 도망치듯 걷기 시작했다. 라닌의 눈에 보이는 마치니의 모습이 아침 안개에 가려져 겨우 상반신이 희미하게 보일 즈음에 마치니는 멈춰서서 나직히 되뇌이듯 말했다.
"알고 싶어 라닌. 인간이란 어떤 생물인 거야?"
조용하고 가라앉은 아침 공기를 타고 그 목소리는 라닌에게도 똑똑히 전해져 왔다.
"그건 어려운 질문이군.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지금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라면 마을을 안내해 줄게."
"폐 끼치는 군. 사양하진 않겠어."
"아냐.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 것도 있고....세상 얘기라든지."
라닌은 2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1층 주점 중앙의 홀에서 바로니가 술을 마시는 걸 보고 레나가 정중히 인사하며 내려왔다.
"그래요."
"어제는 폐가 많았네요. 앗. 아침 술은 몸에 나빠요."
"괜찮아. 이걸로 마지막이니까."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참, 샤르카씨 못 보셨나요?"
말하고서 레나는 바로니가 아직 워쳐 캐스터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니는 덤덤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같이 왔던 이방인? 밖으로 나갔던 것 같은데."
다른 두사람을 비롯해서 실로 한시가 급한 상황에 서로간의 위치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뭐 팀웍의 중심이 되는 그 라닌 디프로이드가 거의 반쯤 휴가라도 나온 것 같은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나?
"하아, 먹을 것 좀 주실래요?"
레나는 카운터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얼마든지, 그쪽에 앉아 있어. 카운티. 좀 도와줄래?"
바로니가 조리실로 갔다. 카운터 뒤쪽은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설비가 있었다. 왠지 바로니 외에 누군가 있는 듯하여 잘 보니 흰 두건과 앞치마를 걸친 가루라가 요리보조를 겸하고 있었다. 무언가 아침 일찍부터 도우러 내려온 듯 하다. 뭐 즐거워 보이니 그걸로 됐나?
인기척을 느끼고 레나는 뒤돌아보았다. 짧은 머리의 열살쯤 된 어린 여자아이가 바로니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 안녕."
"............."
무시당했다.
"나, 뭔가 미움받을 만한 짓이라도 한 걸까?"
"아냐. 아냐. 카운티는 원래부터 이래."
바로니가 작은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카운티라고 불린 아이는 저항도 하지 않고 실이 끊긴 인형처럼 언니에 의해 억지로 레나의 옆에 앉혀졌다.
"자. 똑바로 자기 소개하는 거야."
카운티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손에 쥔 걸 보여주었다. 엄지 손톱만한 나방이 날개 가루를 잔뜩 카운티의 손에 뭍힌 채 누워 있었다. 이걸 어쩌라구.
카운티는 나방을 한입에 삼켜서 누구라도 기분나쁠 소리로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레나는 그걸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바로니는 인기척도 없이 카운티의 뒤로 다가서서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댔다.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그렇게 말했을텐데!"
"나방 맛있어."
레나는 반 억지로 방긋 웃었다.
"난 레나라고 불러줘."
"난 카운티."
카운티는 나방의 날개가루가 잔뜩 묻은 손으로 레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레나는 기분나쁜 느낌을 참으며 그 손을 잡았다. 카운티는 의무적으로 붕붕 돌리며 기계적인 악수를 하고서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짚으로 만든 작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찾았다. 그러고는 레나의 손에 아까의 나방과 같은 크기의 이름모를 날벌레를 쥐어주었다. 레나는 그걸 자신의 오른 다리에 차고 있는 가죽 숄더에 넣었다. 기분 탓인지 인형같은 카운티의 표정이 밝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바로니는 접시에 담긴 국수 비슷한 것을 레나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척 식욕을 돋구는 소스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너도 고단수인데."
"네?"
"저 애랑 친해지기는 쉽지 않아. 하긴 너도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바로니는 레나의 거친 털에 뒤덮인 가늘고 길게 솟은 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바로니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몇 명의 이방인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레나의 외모에서 자신이 봐온 이방인들 중 누군가와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언제의 일인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하하. 그렇지 않아요. 틀림없이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선물도 줬는 걸요."
"그런 거 무리해서 받을 필요없어. 내가 타이를게."
레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니는 카운티를 잡아서 다시 아까처럼 질질 끌고 온다. 카운티는 흙바닥에서 무언가를 뒤지던 중이었는지 무릎과 웃옷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자. 도로 가져가."
바로니는 카운티를 종용했다. 카운티는 볼을 작게 부풀리고 있었다. 주먹 줜 손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댄 건 기분 탓인가?
카운티는 레나가 돌려주는 나방을 말없이 받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레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대신 이거 줄게."
"응. 미안해."
레나는 손에 올려진 무언가를 보았다. 커다란 검은 색의 전갈이 꼬리를 흔들며 레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지드 국경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로 레나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응? 방금 무언가가..."
환청 비슷한 것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온 걸 샤르카는 기분 탓으로 돌렸다. 라이지드에서 동쪽의 산에 높게 솟은, 돌로 만들어진 고대의 첨탑 위에서 샤르카는 여명의 햇빛을 받았다. 눈이 찔리듯이 아파 오고 피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순종의 흡혈귀이자 자외선에 대한 저항이 한없이 뛰어난 샤르카에게는 적어도 그 이상의 악영향을 주지 못했다.
샤르카는 근래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괜한 인식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식사만을 했기 때문에 흡혈귀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혈액의 공급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붉은 피가 넘치는 생명체를 흡혈할 목적으로 근처 숲을 돌아 보았지만 예상 외로 자신이 흡혈하기에 적당한 덩치 큰 포유류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샤르카는 샤냥하던 중에 지쳐서 고대 유적 비스무리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샤르카는 이 유적이 어쩐지 자신의 기억 한켠에 자리잡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오랜 여행 끝에서 느끼는 향수인가. 아니면 일말의 꿈에 취한 데자부인가.
별안간 큰 그림자가 샤르카의 모습을 지웠다. 커다란 배와 같은 것이 공중을 부유하며 일순간 산 저편에서부터 나타났다. 샤르카는 그처럼 큰 질량의 건조물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한 구조물의 중앙에 새겨진 문양을 샤르카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익숙하고 또한 자신에게 있어 죽음과 살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파괴적인 인간들의 집단 카렐 제국의 상징이었다.
"무슨 일이지? 밖이 씨끄러워졌군."
라닌은 일단의 무리들의 말 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샤르카에게 카렐 제국의 공중 전함이 북동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아침 식사를 서두르던 차였다. 가루라는 자신의 특기인 요리 실력을 뽐내며 바로니와 함께 일행에게 대접할 각종 진미를 내오던 중이었고 레나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식성으로 몇 접시째 비우던 중이었다.
바로니 자매 또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얼굴이 굳어진 채 주점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곧 거친 발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니 누군가가 문짝이 부서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바로니가 채 문을 열어주기 전에 이미 박살나서 문틀이 통째로 뜯어져 버렸다. 그리고 브리드 공국 근위병의 은색 갑옷을 걸친 군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라닌은 인상을 구기고 자신들의 아침 식사를 방해한 인간들에게 나직히 물었다.
"누구지? 당신들."
근위병중 팔라딘 급의 대장 지위를 지닌 자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팔라딘은 인간들 중 성스러운 마법에 소질이 있는 자를 특별히 교육시켜 성기사로 임명한 자들로써 각 부대의 경미한 부상의 치유와 긍정적인 용기를 심어 주는 능력을 익히고 있어서 각종 전투에서 빠질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다. 팔라딘 자격의 성기사들은 대개 일반 병사들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며 일부는 이번 경우처럼 지휘관이 되기도 한다. 단 그 적성에서 인간적인 인격은 포함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흥, 요수들과 함께 밥을 먹는 건가. 너희들?"
"이게!"
나설려는 마치니를 바로니가 어께를 잡아 제지했다. 라닌 일행에겐 흥미가 없는지 근위병 대장은 바로니에게 다가갔다.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다니. 이거 목에다가 개줄이라도 매는 게 어떤가."
"용건이 뭐죠. 인간 팔라딘?"
혀를 차며 타락한 성기사는 아랫턱을 몇번 굴리면서 지저분한 혀를 몇번 입술 사이에서 굴렸다. 그 비열한 눈빛은 바로니의 자주빛 드레스를 걸친 여체에서 여성적으로 강조된 부분을 중점적으로 흝어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수없이 받아온 모멸감에 익숙해진 듯 바로니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샤르카와 레나, 가루라와 마치니, 키운티들까지 한번씩 라닌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라닌은 일단의 상황을 말없이 관망하고 있었다. 끼어들 타이밍을 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일엔 관심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적당주의의 라닌 디프로이드라면 그럴 가능성도 높았다.
"어젯밤 야생 동물들의 무리가 힐 노스 타운의 주민들을 습격했다."
팔라딘은 짐승같은 손으로 바로니의 목덜미를 잡았다. 바로니의 고개가 억지로 들려지며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마치니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팔라딘 대장의 얼굴을 패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랬다간 문제가 더욱 커질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분노를 극한까지 눌러 참고 있었다.
"네가 이 라이지드의 장로격인 걸로 아는데 이 마을의 너희 족속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 주실까?"
"우리들을 의심한다는 거야!"
마치니가 쏘아붙였다.
"중요 참고인으로서 전부 연행하겠다. 곧 체포하게 되겠지만 말야."
"너희들 보자보자 하니까!"
마치니가 병사들을 뿌리치며 팔라딘 대장에게 다가서서 독기를 품은 이빨을 그 앞에 들이댔다. 인간 팔라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니 그만둬. ````````나 하나로 충분할 겁니다. 라이지드 주민들이 무고하다는 걸 보여드리죠."
"흥, 듣지 못했나 보군. 오늘로써 라이지드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다 만 자들은 전부 철창행이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꿈이라도 꾸던지 아니라면 죽어라."
"크윽, 이````."
보다 못한 샤르카가 교만한 인간들을 패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레나도 팔라딘 대장에게 향했다. 그때였다.
"너희들."
라닌 대장이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에는 어떤 긴장감이나 내색도 느낄수 없었다. 마치 매일 보던 친구에게 하는 인사 같은 말투에 팔라딘 대장 또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다.
"반항할 셈이냐. 여행자. 못 본 척 사라져 주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변방의 일개 하급 장교로서는 설마 한 나라의 군 총사령관이 일반 방랑자 복장으로 허름한 민박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으리라고는 설마 몇 번을 죽는다 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라닌은 비로소 자신에게 향한 관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단순히 바빠질 오늘 하루에 대비해 아침을 먹고 싶을 뿐이야. 너희들이 뭘 하든 상관은 없으나 적어도 분위기는 깨지 말아야지."
"말 잘하는군. 넌 뭐하는 놈이냐. 어디 부유한 가정 자식이냐? 아니면 제법 힘 좀 쓰는 집안인 것 같군. 좋아. 아까의 소란은 사과하지. 원하는 게 뭐냐."
인간 팔라딘은 라닌의 말투에서 저급한 부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패기와 프라이드를 바탕으로 둔 기백을 느꼈던 모양이다. 다소 와일드한 분위기에서 뭔가 모를 높은 신분의 냄새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라닌에게 안면이나 틀 요량으로 적개심을 없앴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류층에 다리를 놓을 기회를 찾기 위해 갑자기 라닌에게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바로니 세 자매는 라닌이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라닌은 그들과 몇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마침내는 유쾌하게 떠들며 독한 럼주를 주문해 마구 퍼 마시기 시작했다.
"대장. 저기.."
"레나. 너희는 잠시 기다려 줘. 잠깐이면 끝날 테니까."
완전히 질려서 말도 안 나오는 샤르카와 가루라를 데리고 레나는 빠져나왔다. 좀 더 떨어진 테이블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샤르카가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 전부 미친거 아니야? 내가 워쳐 캐스터의 이름으로 군기를 잡아주겠어."
"그만두세요. 샤르카님."
오랜 기간 라닌과 지내온 레나는 이미 무언가 느끼고 있는 듯했다. 라닌의 일처리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무척 위태위태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적어도 라닌은 이런 경우에 한해서 자신의 귀찮은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지를 관철시킴과 동시에 부도덕적인 상황을 매듭짓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바랬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성공으로 끝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병사 중 하나가 물었다. 라닌은 레이픈 카드를 꺼내면서 웃었다.
"우리 집안이 좀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지. 사업이 성공하다 보니 나도 여기저기 얼굴이 팔려 있더군."
라닌은 아무래도 자신을 벼락출세한 사업가 정도로 위장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현재 레이픈 카드 게임 중 가장 보편화된 게임인 클로우, 버퍼 등을 제안했다. 둘 다 상대방의 카드를 많이 뺏는 쪽이 이기는 것이나 클로우는 단순히 카드의 장 수, 버퍼는 높은 카드를 조합해서 점수를 만드는 점이 달랐다. 당연히 라닌은 두 가지 게임 전부 자신 있었다. 병사들과 푼돈으로 시작한 게임은 어느새 판돈이 점점 많아졌고 마지막에는 단 한 번의 게임에 완전히 망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팔라딘 대장은 나름대로 게임 실력이 있는 듯 했다. 라닌은 이런 경우 자신과 같은 편이 없음에도 쉽게 이기는 법을 알았다. 어느새 경쟁자는 하나 둘 아웃되어갔고 최후에는 라닌과 대장 둘만 남았다. 팔라딘 대장은 얼굴이 금새 새빨개져서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일대일로 라닌을 이길 수 없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라닌은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이 딴 돈을 대장에게 돌려주었다. 대장이 어리둥절하자 라닌은 말했다.
"그깟 푼돈은 그냥 돌려주겠어. 대신 나하고 한 판만 더 하는 거야. 한 가지씩을 걸고 말이지. 어떤가."
라닌이 딴 돈은 그 가치로는 1년간을 그냥 놀고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 고액을 푼돈으로 취급하자 팔라딘 대장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이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걸 것은 이거다. 무척 가치 있는 거야.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지."
라닌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아까의 돈 자루를 얹어두었다.
"지금은 보여줄 수 없어. 왜냐하면 그걸 보는 순간 네가 지불해야 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
"내가 게임을 더 하길 바라는 건가?"
팔라딘 대장은 라닌의 범접할 수 없는 큰 마음가짐에 도저히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자네 부하들과 전부 덤벼 보라구. 나 혼자 상대해 주겠어."
분명 이쪽에도 승산은 있다. 팀웍만 잘 맞는다면 실력차는 충분히 극복할 수준이었다. 계산을 끝낸 팔라딘 대장은 안면에 미소를 부으며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패를 돌렸다.
게임은 끝났다.
병사들이 몇 차례나 라닌을 몰아세웠지만 막판에 이르러서는 백기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라닌도 이번 게임은 상당히 고되었는지 아무도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라닌이 피곤함과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불안해진 팔라딘 대장은 라닌이 내건 물건을 선뜻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귓속말로 만일의 사태에 이 간 큰 여행자를 때려 눕혀서라도 자신들의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을 의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돈 뭉치를 들어서 그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브리드 공화국 최고통수권자 브리드가 임명한 총사령관 로크란드의 황금사자 표식이 있었다.
라닌이 눈을 떴을 때 주위에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병사들은 한명도 없었다. 병사들은 바닥이 머리에 닿을 새라 조아리고 있었으며 그나마 무릎을 꿇고 자신을 곁눈질로 흠칫거리는 팔라딘 대장만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런 실례를...로크란드 경에게 무례한 언동을 부디 용서하시길!"
"변방의 일개 병사들이여. 우리는 지금 특명을 수행키 위해 잠시 주둔하던 중이었다. 아크윈의 권한을 이런 데 쓰긴 싫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군. 요수들을 멋대로 대하다니 공국의 헌법을 우습게 아는 것도 정도가 있다. 너희들의 영주는 누구지?"
팔라딘 대장은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짜내듯이 말을 이었다.
"자```잠깐, 비록 특명을 수행중이긴 하시나 현재는 군사령관 직책을 일시 반납한 것으로 압니다만```` 이후의 일은 부디 못 본 것으로 해 주시길. 요괴들에 대한 조사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도록."
시원스럽게 말하고 라닌은 일어서 동료들과 바로니 자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무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바람같이 달아나기에 바빴다. 아까까지 꽉 들어찬 듯 했던 주점 로비에 적막이 감돌았다.
"라닌."
마치니가 안절부절 하며 다가왔다. 라닌은 언제나처럼 얼빠진 표정을 하고 가라앉듯이 니무 의자에 파묻혔다. 그 모습은 귀찮은 일은 죽어도 싫어하는, 하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는 목숨을 거는 평소대로의 라닌의 모습이었다. 샤르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바뀐 게 없어. 언젠가 그들은 다시 올 거야."
"아니, 지금은 시간을 번 것으로 좋다. 그리고 바로니."
라닌은 자신의 표식을 바로니에게 건네주었다.
"내 증표가 될 거다. 브리드에게 직접 하사받은 로크란드 대대로 물려지는 문장이다. 잠시 맏겨두도록 하지."
보통 중요한 물건이 아닐 터. 하지만 라닌에게는 자신을 지배하는 그 어떤 무엇도 없었다. 조그만 금속 쪼가리로는 자신의 아주 일부분의 관심도 얻지 못하는 듯하다. 바로니 세자매(카운티는 예외인 것 같다)가 얼어 있는 것을 대신해 샤르카가 말했다.
"라닌, 진심인가? 그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건진 네가 잘 알 텐데!"
"내 결정에 번복은 없어. 그걸 가지고 브리드 공국으로`````수고스럽겠지만 가서 방금 상황을 말하면 공국 법령에 의거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민사부의 버무웰을 찾아가서 내 말을 대신 전해준다고 하면 바로 해결해 줄 것이다."
바로니의 눈에 일순간 빛이 어른거렸다. 남모르게 눈가를 훔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을 수 있겠어? 이렇게 귀중품을 잃어버리거나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그다지 잃어버려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없어지면 브리드에게 귀찮아지니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잠시 맡겨두기로 하지."
"알겠어. 소중히 간직할게. 고마워."
"출발한다. 샤르카. 레나."
술에 강한 라닌이라 할지라도 이미 어제 저녁부터 방금 전까지 술고래도 이기지 못할 만큼 술을 퍼마셨다. 말투는 변함없을지 몰라도 이미 몸속은 엉망일 것이다. 대체 그놈의 자존심이란 건 뭔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억지로 움직이면서 라닌은 자신의 짐을 들었다.
"기다려. 이 상태로 갈 생각인가?"
샤르카가 보다 못해 말했다. 라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예상보다 지체돼 버렸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돼. 공정으로 가는 다음 '통로'를 놓친다."
라닌이 말하는 통로라는 건 공중에 떠 있는 공정 젠티브와 지상을 잇는 빛의 길이다. 순간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이동시키지만 그 능력에 제한이 있어 하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지금. 바로 말을 타고 간다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이다.
"공중전함이 사라져 간 북동쪽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 만약 그것이 마신과의 무언가 연관이 있다면````."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라닌."
"가루라. 네가 전함이 지나간 쪽으로 가서 상황을 보고 말해주길 원한다."
확실히 제국 전함의 일이 신경 쓰인다. 분명 이번 일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라닌 일행이 마신을 쫓아 젠티브의 성지로 향하고 가루라가 따로 전함의 동태를 살핀다면 정보의 손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
말없이 상황을 보고 있던 카운티가 입을 열었다. 바로니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카운티의 발 밑으로 수없이 많은 검은 점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깨알같이 많은 거미떼라는 걸 라닌 일행은 바로 조금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주점의 모든 바닥과 벽이 검은 부분으로 전부 둘러싸였다.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만한 장면이었다.
"우왓. 기분 나빠."
샤르카가 정말로 기분 나쁜 표정을 했다. 레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쓴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가루라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라닌은 말없이 카운티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카운티의 친구들 -작고 검은 수많은 거미들- 은 곧 순식간에 흩어져 건물 틈새 구석구석으로 사라져 갔다. 그것이 너무나 빨라서 마치 검은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카운티는 작게 호흡을 하고 라닌의 눈을 보며 말했다.
"봤어."
시간은 샤르카가 제국군 비상 요새를 보고 나서 한 시간 쯤 뒤.
카렐 제국군 비상 요새가 제국이 지닌 성제의 보물 비바이런 임페르노를 호위하며 바쿠브 섬을 횡단하던 중 아군의 제국군 구축함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함장은 자신들이 지나온 길의 마수들과 부정적인 정령들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바이런 임페르노가 공명하면서 근처의 요수들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선단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패스파인더가 제독에게 보고했다.
"제독님. 근처에 저희 제국군 함선입니다."
"신분을 밝혀라. 그대는 누구인가."
곧 주술적 처리를 한 화면에 화상이 나타났다. 감색 천과 금빛 외장을 두른 늙은 함장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용마기동대 제 17단장 8연성 클랜 케더락 중령이오. 특무부대 사령관 레클린 대령. 제국 국왕의 명에 따라 성제의 보물을 무사히 본국까지 인도할 수 있도록 호위를 하겠소이다."
비상 요새의 함장은 구축함에서 함단의 호위를 맡겠다는 말을 듣고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함의 후위 쪽에서 따라올 것을 명했다.
한적한 수풀림이 계속되었다. 비상 요새를 쫓아가던 구축함의 기수 부위에 어느 순간 무언가 붉은 색의 물체가 튀어나와 비상 요새의 브릿지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리를 좁히고 뒤로 파고든 구축함은 전 화력을 퍼부어 비상 요새를 두 동강내었다. 불타 무너져 내리는 비상 요새의 중앙에서 아까의 붉은 물체가 튀어올라 구축함의 선체에 내려앉았다. 두 손에는 커다란 금색의 구형 물체를 껴안고 있었다.그 붉은 형체는 구축함의 그림자에 가려져 윤곽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밝게 타오르며 추락하는 비상 요새의 불꽃의 빛이 반사하면서 마귀와도 같은 흉칙한 외모가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너무나 손쉽게 손에 얻었군. 성제의 보물은 이 몸이 소중히 사용해 주지. 나 케더락이 카오스 이클론의 지배자. 나아가 신과 동등할 위치에 설 날도 머지 않았다."
비상 요새를 회위하던 소형 전투선들이 기수를 돌려 구축함을 향해 돌진했다. 붉은 괴물은 전투선에 빠른 속도로 접근해 기수의 가장 약한 틈새 부분에 팔을 쑤셔 넣고 강력한 재질의 강철판을 마치 종잇장처럼 뜯어냈다. 그 원리나 전투방식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괴물은 거의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닥치는 대로 공중을 누비며 전투선들을 고철로 만들어 나갔다. 불과 몇 분 사이에 공중에 떠 있는 전투함은 케더락의 구축함 외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케더락은 비웃음을 남기며 구축함의 행선지를 변경하고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강대한 마력이 요수들을 자극하고 있어. 그것이 빛나는 저 구형의 물체."
방금의 상황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카운티의 수하 거미들이 자신들의 시신경에 저장해둔 입체 영상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수 시간 전의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영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카운티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수 억 마리 거미들은 대륙 이곳저곳에 골고루 퍼져 주위 사물을 관찰하고 각종 정보를 모아 두는 역할을 했다. 필요시엔 현존하는 가장 뛰어나고 발달한 마더 스파이더인 카운티의 명에 따라 각종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라닌은 구형의 물체가 제국의 성제의 보물인 비바이런 임페르노임을 확인해 주었다. 샤르카는 성제의 보물을 껴안은, 마신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전투방식과 강대한 파괴력은 비슷하지만 외형면에선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브리드를 습격한 마신이 슬립한 은색의 미끈한 외형이라면 저것은 우락부락하고 좀 더 역삼각의 상체에 근육이 발달한 거대 박쥐와 흡사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저것이 또 다른 마신이라면 마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건 상당한 공포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은색 마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카렐의 전투함대인가. 제국의 성제의 보물 비바이런 임페르노는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는다는 전설의 물건이다. 게다가 구체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일반적으로 지능이 낮은 요수들은 정신에 혼란과 폭력성을 불러온다고 알려져 있지."
라닌은 방금 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워했다. 그 악명 높은 제국 황제의 권위 아래서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제국 함대끼리 전투를 벌이고 게다가 성제의 보물을 빼앗는 것에 마신을 동원했다는 건 이번 사태에 관계가 없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아까 전의 팔라딘이 말한 노스타운의 요수 출몰사건도 그 힘의 일부가 새어나왔기 때문이겠지. 의도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의 영상으로 보건데 제국내의 내분이 일어난 듯하다. 성제의 보물은 소실되었고 그것을 탈취한 집단이 누구인지는 제국에 보고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비상사태다. 카렐 제국은 내분에 대해 알지 못해. 필시 로프론이나 브리드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전쟁에 브리드가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얘기군요."
가루라와 레나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임무 변경이다. 우리는 현 시간부로 정체불명의 제국 반란분자들을 쫓는다. 그리고 제국의 성제의 보물을 황제에게 되찾아주어야 한다. 카운티. 제국의 반란분자들은 어디로 향했지?"
카운티는 말없이 라닌의 손에 푸르고 작은 거미를 쥐어주었다.
"이 아이가 바라보는 쪽으로 가면 돼."
"여기서 남쪽 방향이군. 서두르자.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어. 바로니. 미안하지만 브리드로 갔을 때 우리 대신 상황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 은색 마신에 대한 건 이미 그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알겠어. 라닌. 책임지고 전해줄게."
"그런 이유로 신세졌어."
"잠깐만 모두들."
라닌 일행이 막 건물을 나서려 할 때 마치니가 불러 세웠다.
"우리가 도울 게 더 있을지도 몰라."
마치니가 일행을 데려간 곳은 큰 헛간과도 같은 낡은 목재 건물이었다. 상당히 낡았지만 여러 군데 부수를 꼼꼼히 한 덕분에 구조 자체는 튼튼해 보였다. 일행이 그곳에서 본 것은 레이버리크의 4분의 1 정도 되는, 그러나 일반적인 것보다는 수백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개구리였다. 그것은 공중에서 자신의 뒷다리를 마치 날개처럼 퍼덕이면서 쉴 새 없이 건물의 천장을 쑤시며 날아다녔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장면에 샤르카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이거````뭐야?"
"하늘개구리인가? 나쁘지 않군. 마지막에 타 본 게 언제더라? 가루라. 넌 어때. 면허는 있어? 괜찮으면 시운전을 맡길까 하는데."
"전 대장님하고는 달라서 병영을 폭주족처럼 휩쓸고 다니던 취미는 없었네요."
가루라가 난색을 표했다. 나름대로 나는 행위에도 우아함을 추구한다는 가루라는 하늘개구리에게서 전혀 그러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레이버리크도 그다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마치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래 보여도 속도는 일반 고속정과 맞먹을 정도니까. 카운티 말에 따르면 그 전함은 왜인지 속도를 늦추고 있으니 이거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너희들에게 빌려줄게."
"무사히 돌려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신세졌어."
라닌 일행이 하늘개구리의 등에 붙어있는 가죽 안장에 나란히 올라탔다. 선두인 기수에 의기양양한 표정의 라닌, 그리고 차례대로 샤르카, 레나, 가루라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안한 기색을 띄며 앞 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샤르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리고 레나와 가루라는 과거의 공포 스런 '폭주기관차 라닌'의 명성과 활약상을 일찍이 경험해왔기에.
순간 바람이 이는 것 같더니 하늘개구리의 형체가 사라지다시피 하면서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그것과 한 박자 늦게 세 사람의 비명이 꼬리를 물며 길게 이어져 갔다. 순식간에 점으로 보이는 라닌 일행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요수 세 자매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겠다. 물러가라."
어둠 속에서 금색 갑옷에 흑색 망토를 하고 용을 닮은 기묘한 가면을 쓴 자가 근위병에 의해 탈취당한 성제의 보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다섯 시간 전에 전해졌어야 할 성제의 보물을 운반하던 비상 요새는 수백 명의 제국 병사들과 뒤엉켜 잿더미로 변해 발견되었다. 게다가 믿기 힘들게도 전설에서나 나오던 마신과도 같은 생물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제국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던 제국군 최고 사령관인 그는 생각에 잠겼다.
"성제의 보물을 탈취한 자들. 필시 로프론의 강경분자이겠지. 하지만 뭔가 탐탁치는 않군. 좀 더 다른 느낌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그들 자체가 함정인 건가. 뭐 좋다. 로프론의 성녀와 대화 해 볼 빌미 정도는 되겠군."
(2 end)
어리석은 56대 브리드인 고저스 크롬웰은 비록 책임감과 의무를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를 관철시키는 의지가 부족했었다. 카렐 제국은 브리드 공국에 한가지 제안을 했었고 브리드는 받아들였다.그것은 차기 군 총 지휘자 로크란드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자 전장에서 당시 수없이 전과를 올리던 17세의 돌격기동대 단장 라닌 디프로이드의 목숨이었다. 카렐제국은 라닌의 죽음을 자신들에 대한 최소한의 호의로 받아들이고 향후 10년간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카렐 입장에서도 로프론 왕국을 견재하기 위해 무의미한 전쟁을 철수할 생각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단순 계산으로 병사 한명의 목숨으로 수많은 병력 손실을 일단락지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브리드는 라닌의 사형을 지시했다.
브리드 공국은 그동안 원칙적으로 사형을 금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정식으로 마련된 형장이 있을 리 없었다. 라닌 디프로이드는 대여섯 명의 병사들에 의해 브리드 궁 대광장으로 끌려나왔다. 수많은 군중과 브리드 수하의 대구족들과 의원들. 그중에는 라닌 디프로이드의 여동생인 테르시아 오르펜 디프로이드도 있었다. 테르시아는 약관 14세의 나이에 당시 경제부 4대 샤를란티스의 직책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귀족 신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라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결박도 없이 무장만 해제 된 채로 광장 중앙에서 무릎을 꿇었다. 뒤쪽에선 다섯의 창병들이 창 끝을 라닌의 등을 향해 겨누었다. 브리드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찔러넣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브리드는 허황된 거만함을 잔뜩 품고 아무런 말도 않고 바로 형을 집행하려 했다. 그동안의 전투의 성과에 대한 찬사도,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변명도 없었다. 라닌은 그 편이 오히려 더 편했다. 지금까지 브리드 공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살아왔다. 라닌은 브리드 공국의 미래에 자신의 생명을 태울 거라 다짐하고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서 첫번째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 손을 내리기만 하면 라닌의 생명은 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대귀족 샤를란티스, 즉 테르시아가 라닌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라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호가 떨어졌다. 창병들의 창 끝은 라닌의 망토 끝을 건드릴 뿐이었다. 라닌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창병들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창병중 한명의 허리춤에서 예비 검을 뽑아들어 단칼에 창병 다섯의 목을 잘랐다. 창병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라닌의 몸에 꽂힐 것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라 미처 대비를 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났다. 피가 공중에 원을 그리며 뿜어졌다.
원의 중앙에는 라닌이 있었다. 광전사의 눈빛을 한 전투의 화신이 시체들을 밟고 대지에 우뚝 선 채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것은 차디찬 밤 안개와 같이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며 동시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공포를 선사했다. 아니. 붉은 빛의 공포 그 자체였다.
누구 하나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가운데 라닌과 샤를란티스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말없이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2) 라이지드
"과거 천도를 피의 무지개로 수놓던 어둠의 일족들은 전쟁에서 패한 뒤에 죄의 댓가로써 자신들의 군주인 프라우져 대제를 절망의 계곡에 영원히 가두어 버렸다. 그의 몸은 어둠과 같고 붉은 갈기의 물결이 몸을 뒤덮어 그 형상이 불분명하며, 대지위에 칠흑의 길을 수놓아 수많은 망자들을 거느렸으니 그가 지나간 길의 모든 생명을 지닌 자는, 그의 그림자를 따라가 다시는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신이 언급한 프라우져 대제에 대해 라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샤르카에게 말해 주었다. 레이버리크의 흔들리는 바구니 속에서 샤르카는 승차감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라닌에게 프라우져 대제에 대해 물었다. 라닌이 말하는 과거의 전쟁이란 라닌과 브리드가 하급 장교였을 당시의 카렐 제국과의 전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00년도 전에, 강대한 제국으로써 번성하던 어둠의 일족이 카린 레이브의 어둠의 성지를 조국으로 삼고 있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에 어둠 일족은 순수한 악마이자 지하세계의 가장 잔혹한 마인인 프라우져 대제의 명에 따라 카렐 제국을 도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으나 지상을 관망하지 않은 천계의 사도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라우져 대제는 어둠계 카오스번 대륙과 맞닿은 저주의 땅에 버려져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수천 수만의 망자들의 죽음이 녹아든 절망의 계곡에 매장되었다.
지금은 살아남은 일족 중 카렐 제국과의 이해타산이 맞은 어둠 일족의 정통 후계자 및 몇몇 수장들에 의해 어둠계 카오스번으로써 지금까지 현존해 나갔다. 자존심과 신념이 강한 어둠 일족의 반란파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배신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유는 바로 그 정통 후계자의 카리스마적 통솔이 큰 역할을 했다. 프라우져 대제를 따르던 순수파 어둠 일족들은 살아 남아 부족 단위로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샤르카는 물론 어둠 일족을 잘 알고 있었다. 몬스트랜에서 만난 그들은 호전적이고 거친 인상이었지만 지성과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순수한 민족이 아니며 마성이 일부 스며든 존재들로써 수천년 전에 아직 지하 세계의 악마(데몬)들이 이 지상과 자유자재로 드나들던 시절에 원주민들과 혈통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외모는 데몬들과 같은 마수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과 아주 유사하며 짙은 감색의 피부에 이마 정 중앙에 개체마다 다른 모양과 길이의, 두개골이 변형되어 생긴 뿔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귀는 매우 가늘고 길며 머리카락 등 체모는 붉고 날카로우며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 점은 데몬들과 공통되는 부분이다.
그들은 체격적으로 근육이 쉽게 늘지 않는 대신에 정밀하고 재빠른 행동이 가능하다. 일반 인간보다는 체력적으로 크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대신 시력과 청각 등 감각등이 뛰어나며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더욱 발전시킨다. 주된 무기는 단검 투척이며 근접전에서도 상대의 급소를 노려 검을 꽃아 놓는데 익숙하다. 열과 추위에는 강하지만 자외선에 약해서 항상 두꺼운 망토로 몸을 가린다. 그들은 용병이나 도적일을 하며 소수 단위로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며 몬스트랜과 같이 눌러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프라우져 대제는 강한가? 그가 배후에서 마신을 조종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 우리가 마신을 쫓다 보면 그에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게다가 프라우져 대제에게는 강력한 적이 있다."
"적?"
라닌의 말에 의하면 프라우져 대제가 실각한 가장 큰 이유 중에는 어둠의 세력의 정통 후계자인 쿠알제가 반란을 일으킨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고 있다. 쿠알제는 프라우져 대제의 피를 잇는 어둠 일족의 왕자인 동시에 순수한 악마인 프라우져와 일반 어둠 일족 여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마인이었다. 외모는 어둠 일족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불멸에 가까운 생명력으로 현재 몇백년 가까이 젊음을 유지하며 어둠계 카오스번을 통치하고 있다.
"프라우져 대제는 쿠알제가 계속 신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떠한 움직임, 예를 들어 이번과 같이 마신을 부리는 기미가 감지 되었다면 그들이 모르고 있을 리 없지. 프라우져 대제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면 우선 쿠알제를 만날 필요가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분명 적당한 시기가 올 거야."
진동이 심해졌다. 조타수인 가루라가 착륙한다고 말해주었다. 정면의 창문으로부터 어두운 하늘 아래에 불빛이 보였다.
변방의 라이지드는 비록 정령과 요수의 땅 젠티브의 영내였지만 소속은 브리드 공국에 속해 있었다. 브리드 공국과 공정 젠티브 국경 근처에 세워진 여행자들이나 상인들,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띤 방문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소도시로서 라닌 일행은 공정의 높은 고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레이버리크가 아닌 특수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라이지드에서부터는 육상으로 공정 젠티브 바로 아래에 위치한 특수한 구조물을 이용하여 일순간에 공정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도의 과학 기술이 젠티브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레이버리크가 선착장에 다가서자 몇명의 인부가 거대 복어(레이버리크)를 잡아 매어두기 위해 움직였다. 등 뒤의 특이한 모양의 등뼈에 밧줄을 감아 고정하는 사이 라닌 일행은 가루라를 선두로 하차했다. 가루라는 인부들에게 몇가지 지시를 한 후 레이버리크의 처리 수속을 하고 있었다.
라닌은 밤이 늦었기에 하룻밤 여기서 보내는 것을 제안하고 샤르카는 마신이 언제 공정 젠티브에 도달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서둘러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젠티브 영내에는 특수한 기기를 이용한 특별한 탐색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될 시에 라닌에게 전파 마법으로 보고가 된다고 레나가 말했다. 전파 마법은 이 세계의 일종의 연락 수단으로 각종 영상이나 목소리, 문서 등을 수신자 뇌에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수신자 자체가 마법 소양이 없다 하더라도 전파를 받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미 브리드에서 보내진 모든 연락 사항은 젠티브에 도달한 상태로 젠티브에서는 마신이 감지될 시 라닌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현재로서는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라닌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 레나는 그렇다치고 샤르카는 아직 마신과의 전투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게 느껴져. 좀 더 쉬는게 좋아."
저번 전투에서 체력적으로 더욱 소모한 레나는 겉으로는 전혀 체력소모의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베이스가 워낙 뛰어난 체력을 지녔기 때문으로 실제로는 본래 능력보다는 많이 뒤쳐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방금 발언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가 아닌가?
한적한 교차로의 한쪽에 세워진 주점에서 라닌은 멈춰 섰다. 샤르카 및 일행들은 라닌이 멈춰선 건물을 바라보았다. 벽면을 회색 벽돌로 굴곡없이 채운 무미건조하고 아담한 느낌의 2층 건물에서 사람들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해가 저문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른 마을의 여행객들과 수다를 좋아하는 주정뱅이들,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열적인 젊은이들, 그리고 또한 마을의 국경을 순찰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들른 민병대들. 그들 전원은 라닌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일순간 대화와 움직임을 멈추고 그들을 쏘아보았다.
워쳐캐스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샤르카는 그렇다치고 라닌은 평소의 은색 갑옷이 아닌 평법한 여행객의 복장에 장검을 등에 차고 있었다. 레나는 브리드 공국 수도 브리드내에서는 유명한 무인이었지만 역시 변두리 작은 마을에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점은 가루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알아볼 확률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의 이질감은 이들이 평범한 여행객이 아니라는 걸 반증했다. 1층의 주점 손님들의 시선이 고정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샤르카는 성큼성큼 카운터로 향했다. 씩씩한 느낌의 단발의 여성이 옮기던 술통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손님. 뭘 드릴까?"
"우선 방 하나, 침대 넷. 모두들 지쳐 있을 거다."
"좋아. 이쪽으로. 난 마치니라고 해. 그렇게 불러줘."
마치니라고 하는 여성은 2층으로 라닌 일행을 안내했다. 체술의 소양이 얕은 샤르카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절제된 마치니의 움직임에서 레나는 자신과 동류의 무도가의 느낌을 받았다. 평범한 주점의 여자가 격투에 능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녀의 머리에는 두 개의 가늘게 뻗은 깃털과도 같은 촉수가 허리까지 내려왔는데 실내에 바람이 없음에도 그것은 마치 생명력을 가진 듯 하늘거리고 있었다. 레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라닌이 마치니가 열어준 방으로 들어섰다.
"당신들. 여행객이야?"
"인생 자체가 긴 여행이다. 조금 쉬려는 거야."
라닌이 되도 않는 철학적인 말을 했다. 가끔 샤르카는 라닌의 이해하기 힘든 말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되었다. 마치니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잘 자라고 말하며 가 버렸다. 아래층의 제법 들어찬 손님들에 비해 투숙객은 거의 없어 보였다. 가루라는 잠시 마을을 정찰한다면서 창문을 통해 날아가 버렸고 레나는 공중 목욕탕에 갔다 온 이후 잠이 들었다. 샤르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져 자 버렸고 라닌은 창가 근처의 탁자에 앉아 투숙객에게 제공된 럼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한 여인이 라닌을 찾아왔다. 가늘고 긴 은빛 머리에 남을 혹하게 만드는 눈빛을 지닌 매혹적인 여자였다. 라닌이 눈빛도 바꾸지 않고 바라보는 사이에 여자가 다가왔다.
"잠깐 앉아도?"
"나쁠 것 없지."
라닌이 술을 귄했다. 여자는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내 이름은 바로니. 여관의 주인이지. 세 자매중 장녀야. 비록 친 남매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어."
"그렇군. 마셔."
라닌은 독주가였다. 술자리에 낀 상대는 비록 그가 적군이든 지하의 악의 군주든 상관하지 않았다. 라닌은 호쾌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방문 근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다가 금새 얼굴을 감추었다. 마치 남자아이 같은 짧은 머리를 했지만 라닌은 그 아이가 세 자매중 막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막내 카운티. 아래층의 마치니와는 구면이지?"
"...........전부 인간이 아니군."
라닌은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지내는 사이, 함께 싸운 아군이나 죽인 적들 중에는 요기를 띈 짐승이 인간의 모습을 한 경우도 많았다. 라닌은 그 세 자매가 바로 그런 부류라는 걸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바로니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요기를 띈 눈빛을 하고 말했다.
"당신, 눈치가 빠르네."
"저 아이는 거미, 당신은 여우, 마치니는..."
"지네야. 우리는 수십 년 전에 만난 이후로 이곳에 정착했어."
"어째서 인간의 모습을?"
바로니는 조금 정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누그러진 모습으로 답했다.
"인간에게 흥미가 있어. 우리들 요기가 충만해진 짐승들은 가끔 자신의 요기를 마력으로 변환해 일생동안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지.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능력을 소비하지만 우리들은 이 능력을 이용해 인간의 모습이 되어 인간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거야.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동경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써 말하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추하디 추한 존재다. 너희가 본받을 존재 따윈 되지 못해."
"우리는 각자 과거에 만난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보았어. 마치니와 나는 동시에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도 있고 카운티는 인간 기사에게 목숨을 구해진 적도 있지. 물론 대부분 편협하고 자신들 이외의 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종족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보다 더욱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거야."
라닌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던 자신의 동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또한 요력을 쌓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으로 대규모 사상자를 내었던 카렐 제국과의 공성전에서 사망했었다. 그는 요괴의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에 동원되었고 라닌은 그가 바로 앞에서 누더기로 죽어가는 걸 지켜보았었다.
라닌은 빈 술병을 몇번 흔들어 보더니 지쳤다는 듯이 내뱉었다.
"너희들은 선량한 마음을 지니고 있군.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치는 게 좋아.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요괴들이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는지 알고 있어. 분명 버림받거나 배신당할 뿐이다."
"당신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어. 실제로 당신은 인간이 아닌 자들과 여행중이잖아."
라닌과 마찬가지로 바로니 또한 인간과 인간과는 조금 다른 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레나와 가루라는 신체적인 특징, 깃털로 뒤덮인 어께와 귀. 야성적인 생김새 등으로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샤르카는 외모로만 놓고 본다면 피부가 조금 창백한 정도로 일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로니는 샤르카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너희가 보면서 걷는 길은 이상일 뿐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 긴 여행이 될 거야."
"긴 여행은 충분히 해 왔고 앞으로도 해올 생각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니는 창가 근처에서 밤 공기를 느끼며 일순간 깊이 있는 눈빛을 했다. 라닌은 그녀가 이미 충분히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억압과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뭘 보며 걷고 있지?"
"뭔가를 찾고 있어."
"누군가...가 아닌?"
"들리는 대로다."
라닌 또한 답이 없는 여행을 해 오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만 하는 순간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고 누구를 위해서 정의가 있는 것인가. 적당할 때 나타나 준 마신은 그런 그의 고뇌의 시간을 잠시나마 줄여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생각할 시간따윈 불필요하다. 자신은 브리드의 명대로 마신의 목을 가져오면 된다. 그리고...
"뭐 좋아, 괜찮다면 도와줄 만한 건 없을까?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와. 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이지."
"사양하지. 그런데 공정 젠티브에서 근래 뒤숭숭한 소문 같은 건 들려오지 않은가?"
바로니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신이 도달했다면 젠티브에서 벌써 알려주었을 것이다. 두번째 목표는 젠티브가 아니었던 걸까?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
"사과할 이유는 없어."
"주위에 물어봐 줄까?"
"내일 일찍 떠날 때까지 만이라도 괜찮은가?"
바로니는 쿡쿡 웃었다.
"어려운 일이 아닌걸. 이 정도는 도와주게 해 줘."
문 저편에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니가 흥미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빈 술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여엇. 다녀왔어."
"밤 늦게 수고했어."
이런 시간에 술 배달을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마치니는 다리까지 내려오는 더듬이를 흔들며 라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당신. 첫 인상처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는 게 좋아. 피와 가까운 사람이다."
"언니가 술을 청할 정도니까. 하하. 자. 이제부턴 내상대를 해주라고."
라닌은 술이라면 굉장히 강한 편이다. 하지만 왜인지 김이 샌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핑계거리를 술에서 찾았다.
"미안하군. 과음했더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약한 소리 하지 마! 남자잖아!"
"마치니. 기껏 분위기를 잡아놨더니..."
"에~근래 여행자가 뜸하니까 단순히 세상 얘기가 궁금했던 것 뿐이잖아."
"난 이만 잘 테니까 결정되면 말해."
라닌은 근처 침대에 뻗어있는 샤르카 옆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 했다. 바로니가 눈을 흘기는 걸 못 본척 하면서 마치니는 라닌을 잡아 끌었다. 라닌은 한숨을 쉬면서 마지막 술병에 손을 뻗었다.
"하아."
창가에 인기척이 일었다. 가루라가 낮은 바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라닌씨. 다녀왔습니다. 가볍게 근처를 돌아봤어요."
일단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가루라는 라닌의 직책을 언급하지 않는 범위 내의 호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미 바로니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라닌의 분위기에서 전장의 기운을 느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라닌씨가 너무 풀어진 거지요. 우린 임무...가 아니라 하여간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자네도 끼도록 해. 명령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가루라는 마지못해 하면서 일단 자리를 같이 했다. 물론 술엔 약하기에 한 모금도 입에 댈 생각은 없었다. 내일 아침의 임무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가루라의 위치에서 문 근처에 얼굴만 내밀고 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여자아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가루라가 뻘쭘해진 가운데 라닌은 갑자기 생각난 듯 작은 카드 용기를 꺼냈다. 어차피 잠은 틀린 것 같으니 이대로 밤을 보낼 생각이다.
라닌이 꺼낸 카드 세트는 지구의 트럼프와 비슷한 용도로 좀더 간략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카오스 이클론에서는 '레이픈'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카드에는 궁병, 기병, 보병 의 3가지 그림이 각각 10장씩으로 되어 있으며 제각기 다른 번호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이픈에서 파생되는 게임은 300 여 가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닌이 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 중 하나인 '포로구출전'으로서 상대와 패를 겨루어 일차적으로 딴 카드를 포로로 하여 수용소를 공격하는 측이 각자 정한 턴 이내에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다.
라닌이 아주 자신있어 하는 게임으로 이 게임으로 지금까지 진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게임은 처음 포로가 되는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해지는데 라닌은 자기가 성을 지키는 역할인 상태에서는 한번도 진적이 없었다. 라닌은 인간이 아닌 요괴가 상대라면 자기의 무패기록에 변화가 있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가루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있었고 마치니는 할 마음이 든 듯했다. 바로니는 룰을 모른다며 자리를 떴다. 방을 나서나 했더니 수면중인 레나의 침대 근처에 앉았다.
"귀여운 아이. 이방인이네."
"얼핏 보고 알아보는 건가?"
라닌은 자기 패를 살피며 말했다. 운 좋게도 자신이 방어하는 입장이다. 분명 지금까지대로라면 질리가 없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반인 반수, 요수, 모든 종족들은 다 보아왔다고 자신해. 이 아이는 특별하네. 이름이 뭐라고 하지?"
"레나라고 부르면 돼.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가 없었군. 난 라닌. 저 닭날개는 가루라. 이 녀석은 샤르카라고 한다."
"레나인가. 예쁜 이름이네."
"잡아먹지는 말라고."
라닌은 게임에 집중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으로 곁눈으로는 바로니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니는 매우 고민하면서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라닌이 배치한 경비병들을 들키지 않고 피해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우으...엄마."
레나가 잠꼬대를 했다. 이방인들은 자신이 살던 세계의 기억은 대부분 사라져 있지만 가끔 잔류 사념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구현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레나는 꿈으로써 과거를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외로울 거야. 이 세계에 적응한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완전히 그렇다고는 못하겠지. 영원히."
"아까도 한 말이지만. 당신. 좋은 사람...아니 요괴구만."
"농담같지만 기분 나쁘진 않네."
라닌은 마치니의 침입을 세번째 저지하면서 말했다. 마치니에게 남겨진 패는 이제 두 개. 기회는 두 번. 방금전의 침입은 저지선을 거의 마지막까지 뜷었다. 의외로 분투하는군.
"방해해서 미안해. 이만 갈께."
"간만에 즐거웠다."
바로니가 방을 나섰다. 예견된 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니의 괴성이 들려왔다.
비슷한 시각에 카렐 제국 근처 일블리드 섬 상공에서는 중, 대형 크기의 공중 구축함이 항행중이었다. 전함의 표면은 전의 몬스트랜을 습격한 제국군의 수상 전함과 같은 다자인 컨셉을 지닌 색상과 문양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제국의 상징이 기수 중앙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공중 전함의 원리는 중력과 반작용하는 신비한 물질을 내부에 생성하는 것으로 추진력 자체는 프로펠러 등으로 얻는다.
이 구축함은 카렐제국의 소속임은 분명하지만 제국 관할과의 교신을 전부 거부한 채 독단적인 움직임을 고수하고 있었다. 공중 이동 경로를 벗어난 곳에서 마치 매복과도 같이 근처 산을 끼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척 기분이 나쁜 듯, 또는 초조한 것처럼 인상을 험상궂게 잔뜩 구기고 있었다. 함대의 지휘관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의 해군 함장을 연상하지 말자. 마치 고대의 비밀스런 마법사의 인상을 풍기는 옷차림의 아저씨였다. 나이는 40대 전후로 그동안 많은 공적을 세운 용사라는 걸 눈빛만으로도 느끼게 하는 맹장이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한 분위기는 어둠에 가려져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무척 부자연스럽게도 함장실을 비롯한 모든 실내에는 불빛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무언가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병사가 다가와 무언가 속삭였다. 그 병사는 정보처리 담당으로 방금 전 카렐 제국의 비밀스런 연락책을 통해 보고 받은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함장격의 남자는 다시 한번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브리드 공국에 습격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정보원이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대통령이 원정대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분명 이쪽, 제국의 소행이라고 생각할테니 언젠가는 마주치겠죠."
마신? 전설로만 전해지던 전투본능의 괴물이 성제의 보물을 노린다? 보고서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함축되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경쓰이는 건 브리드 공국의 원정대라는 4인조.
"그런가. 잘만 하면 그들을 이용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고 목표의 움직임은 변동이 없는가?"
"예. '비바이런 임페르노' 즉 제국이 보관하던 성제의 보물이 수도로 운반된다고 합니다. 분명 무언가 낌새를 채고 장소를 옮기는 거겠죠."
그들의 목적은 바로 조국의 성제의 보물이었다. 카렐 제국의 국왕 필리온은 마신의 습격 소식을 전해받고 난 후 성제의 보물을 좀더 안전한 수도로 두길 원했다. 제국의 배신자들은 그것을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중간에 탈취하려는 것이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수도의 멍청이들도 더이상 나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가 아닌 다른 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래. 이를테면 브리드의 파견자들과도 같은."
라이지드의 아침. 하늘이 점차 밝아올 무렵에 라닌은 2층 복도에 위치한 공중 세면실을 이용중이었다. 창 너머에서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찌르릉'
기계적인 벨 소리가 아침 공기 사이로 울려왔다.
자전거에 술통을 가득 실은 마치니가 이웃 마을에서부터 오던 중에 얼굴을 씻던 라닌과 눈이 마주쳤다. 팔 물건을 공급자에게서 받아 온 듯하다. 인간과 신진대사가 다른지 잠도 자지 않는 듯했다.
"어이."
라닌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무거운 듯한 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 어께에 걸치고 입구 근처에 내려놓으며 마치니가 답해주었다.
"일찍 일어났네."
"아직 젊으니까."
"중년처럼 말 하지마."
마치니가 지하 술 저장소에 연결된 파이프에 술통을 호스로 흘려 놓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 하던 작업인 듯 숙련된 솜씨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펌프질을 반복했다. 감탄하며 바라보는 라닌에게 마치니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당신 편견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어떤 편견?"
"그야.."
마치니는 다음 술통을 호스에 연결하면서 말했다.
"보통은 인간이 요괴와 말한다거나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
"글쎄. 그런 거 일일이 따지는 건 피곤해서 말야. 내게 이득도 되는 게 아니잖아. 인간이든 요괴든 데몬이든 마신이든 구별짓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세상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고. 착하고 나쁜 녀석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녀석과 마음에 안 드는 녀석."
"타산적이네. 당신."
"귀찮은 걸 싫어하는 거라고도 하지."
"보다시피 우린 거의 인간이 되었어. 이젠 본 모습으로도 돌아가지 못할 지경이라구. 하지만 그건 브리드의 법 때문만은 아니야. 다만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가장 안전하고 트러블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가짜를 걸치고 본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갈 수 있는 거지."
라닌은 이미 어젯밤에 바로니와의 대화로 마치니의 본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마치니가 말한 것만으로는 종족을 넘어서려는 생각에 무언가 이유가 부족하다.
"과연 그것 뿐일까."
"무슨?"
라닌은 점짓 내키지 않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투로 말했다.
"요괴들은 지나치게 순수한 일면이 있어. 사악한 건 인간들만으로 족해. 너희들이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던 이유는....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건...."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어째서 창조와 파괴의 업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인지...인간이란 뭔가? 남을 위한 희생이란? 희열은? 분노는? 감정이란 뭘 뜻하는 거지?"
마치니는 통을 비우는 걸 잊었다. 펌프질을 잊었다. 호스의 술이 다시 술통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어..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야?언니와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었던 거야?"
"인간이길 원하는 요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그만둬도 좋아. 마치 꿈속의 상념과도 같지. 조그만 바람에도 날려가고 언젠가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먼지에 불과해."
마치니는 호스 입구를 잠그고 말없이 뒤돌아 도망치듯 걷기 시작했다. 라닌의 눈에 보이는 마치니의 모습이 아침 안개에 가려져 겨우 상반신이 희미하게 보일 즈음에 마치니는 멈춰서서 나직히 되뇌이듯 말했다.
"알고 싶어 라닌. 인간이란 어떤 생물인 거야?"
조용하고 가라앉은 아침 공기를 타고 그 목소리는 라닌에게도 똑똑히 전해져 왔다.
"그건 어려운 질문이군.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지금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라면 마을을 안내해 줄게."
"폐 끼치는 군. 사양하진 않겠어."
"아냐.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 것도 있고....세상 얘기라든지."
라닌은 2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1층 주점 중앙의 홀에서 바로니가 술을 마시는 걸 보고 레나가 정중히 인사하며 내려왔다.
"그래요."
"어제는 폐가 많았네요. 앗. 아침 술은 몸에 나빠요."
"괜찮아. 이걸로 마지막이니까."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참, 샤르카씨 못 보셨나요?"
말하고서 레나는 바로니가 아직 워쳐 캐스터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니는 덤덤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같이 왔던 이방인? 밖으로 나갔던 것 같은데."
다른 두사람을 비롯해서 실로 한시가 급한 상황에 서로간의 위치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뭐 팀웍의 중심이 되는 그 라닌 디프로이드가 거의 반쯤 휴가라도 나온 것 같은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나?
"하아, 먹을 것 좀 주실래요?"
레나는 카운터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얼마든지, 그쪽에 앉아 있어. 카운티. 좀 도와줄래?"
바로니가 조리실로 갔다. 카운터 뒤쪽은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설비가 있었다. 왠지 바로니 외에 누군가 있는 듯하여 잘 보니 흰 두건과 앞치마를 걸친 가루라가 요리보조를 겸하고 있었다. 무언가 아침 일찍부터 도우러 내려온 듯 하다. 뭐 즐거워 보이니 그걸로 됐나?
인기척을 느끼고 레나는 뒤돌아보았다. 짧은 머리의 열살쯤 된 어린 여자아이가 바로니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 안녕."
"............."
무시당했다.
"나, 뭔가 미움받을 만한 짓이라도 한 걸까?"
"아냐. 아냐. 카운티는 원래부터 이래."
바로니가 작은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카운티라고 불린 아이는 저항도 하지 않고 실이 끊긴 인형처럼 언니에 의해 억지로 레나의 옆에 앉혀졌다.
"자. 똑바로 자기 소개하는 거야."
카운티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손에 쥔 걸 보여주었다. 엄지 손톱만한 나방이 날개 가루를 잔뜩 카운티의 손에 뭍힌 채 누워 있었다. 이걸 어쩌라구.
카운티는 나방을 한입에 삼켜서 누구라도 기분나쁠 소리로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레나는 그걸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바로니는 인기척도 없이 카운티의 뒤로 다가서서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댔다.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그렇게 말했을텐데!"
"나방 맛있어."
레나는 반 억지로 방긋 웃었다.
"난 레나라고 불러줘."
"난 카운티."
카운티는 나방의 날개가루가 잔뜩 묻은 손으로 레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레나는 기분나쁜 느낌을 참으며 그 손을 잡았다. 카운티는 의무적으로 붕붕 돌리며 기계적인 악수를 하고서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짚으로 만든 작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찾았다. 그러고는 레나의 손에 아까의 나방과 같은 크기의 이름모를 날벌레를 쥐어주었다. 레나는 그걸 자신의 오른 다리에 차고 있는 가죽 숄더에 넣었다. 기분 탓인지 인형같은 카운티의 표정이 밝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바로니는 접시에 담긴 국수 비슷한 것을 레나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척 식욕을 돋구는 소스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너도 고단수인데."
"네?"
"저 애랑 친해지기는 쉽지 않아. 하긴 너도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바로니는 레나의 거친 털에 뒤덮인 가늘고 길게 솟은 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바로니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몇 명의 이방인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레나의 외모에서 자신이 봐온 이방인들 중 누군가와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언제의 일인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하하. 그렇지 않아요. 틀림없이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선물도 줬는 걸요."
"그런 거 무리해서 받을 필요없어. 내가 타이를게."
레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니는 카운티를 잡아서 다시 아까처럼 질질 끌고 온다. 카운티는 흙바닥에서 무언가를 뒤지던 중이었는지 무릎과 웃옷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자. 도로 가져가."
바로니는 카운티를 종용했다. 카운티는 볼을 작게 부풀리고 있었다. 주먹 줜 손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댄 건 기분 탓인가?
카운티는 레나가 돌려주는 나방을 말없이 받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레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대신 이거 줄게."
"응. 미안해."
레나는 손에 올려진 무언가를 보았다. 커다란 검은 색의 전갈이 꼬리를 흔들며 레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지드 국경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로 레나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응? 방금 무언가가..."
환청 비슷한 것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온 걸 샤르카는 기분 탓으로 돌렸다. 라이지드에서 동쪽의 산에 높게 솟은, 돌로 만들어진 고대의 첨탑 위에서 샤르카는 여명의 햇빛을 받았다. 눈이 찔리듯이 아파 오고 피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순종의 흡혈귀이자 자외선에 대한 저항이 한없이 뛰어난 샤르카에게는 적어도 그 이상의 악영향을 주지 못했다.
샤르카는 근래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괜한 인식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식사만을 했기 때문에 흡혈귀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혈액의 공급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붉은 피가 넘치는 생명체를 흡혈할 목적으로 근처 숲을 돌아 보았지만 예상 외로 자신이 흡혈하기에 적당한 덩치 큰 포유류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샤르카는 샤냥하던 중에 지쳐서 고대 유적 비스무리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샤르카는 이 유적이 어쩐지 자신의 기억 한켠에 자리잡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오랜 여행 끝에서 느끼는 향수인가. 아니면 일말의 꿈에 취한 데자부인가.
별안간 큰 그림자가 샤르카의 모습을 지웠다. 커다란 배와 같은 것이 공중을 부유하며 일순간 산 저편에서부터 나타났다. 샤르카는 그처럼 큰 질량의 건조물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한 구조물의 중앙에 새겨진 문양을 샤르카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익숙하고 또한 자신에게 있어 죽음과 살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파괴적인 인간들의 집단 카렐 제국의 상징이었다.
"무슨 일이지? 밖이 씨끄러워졌군."
라닌은 일단의 무리들의 말 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샤르카에게 카렐 제국의 공중 전함이 북동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아침 식사를 서두르던 차였다. 가루라는 자신의 특기인 요리 실력을 뽐내며 바로니와 함께 일행에게 대접할 각종 진미를 내오던 중이었고 레나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식성으로 몇 접시째 비우던 중이었다.
바로니 자매 또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얼굴이 굳어진 채 주점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곧 거친 발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니 누군가가 문짝이 부서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바로니가 채 문을 열어주기 전에 이미 박살나서 문틀이 통째로 뜯어져 버렸다. 그리고 브리드 공국 근위병의 은색 갑옷을 걸친 군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라닌은 인상을 구기고 자신들의 아침 식사를 방해한 인간들에게 나직히 물었다.
"누구지? 당신들."
근위병중 팔라딘 급의 대장 지위를 지닌 자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팔라딘은 인간들 중 성스러운 마법에 소질이 있는 자를 특별히 교육시켜 성기사로 임명한 자들로써 각 부대의 경미한 부상의 치유와 긍정적인 용기를 심어 주는 능력을 익히고 있어서 각종 전투에서 빠질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다. 팔라딘 자격의 성기사들은 대개 일반 병사들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며 일부는 이번 경우처럼 지휘관이 되기도 한다. 단 그 적성에서 인간적인 인격은 포함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흥, 요수들과 함께 밥을 먹는 건가. 너희들?"
"이게!"
나설려는 마치니를 바로니가 어께를 잡아 제지했다. 라닌 일행에겐 흥미가 없는지 근위병 대장은 바로니에게 다가갔다.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다니. 이거 목에다가 개줄이라도 매는 게 어떤가."
"용건이 뭐죠. 인간 팔라딘?"
혀를 차며 타락한 성기사는 아랫턱을 몇번 굴리면서 지저분한 혀를 몇번 입술 사이에서 굴렸다. 그 비열한 눈빛은 바로니의 자주빛 드레스를 걸친 여체에서 여성적으로 강조된 부분을 중점적으로 흝어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수없이 받아온 모멸감에 익숙해진 듯 바로니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샤르카와 레나, 가루라와 마치니, 키운티들까지 한번씩 라닌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라닌은 일단의 상황을 말없이 관망하고 있었다. 끼어들 타이밍을 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일엔 관심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적당주의의 라닌 디프로이드라면 그럴 가능성도 높았다.
"어젯밤 야생 동물들의 무리가 힐 노스 타운의 주민들을 습격했다."
팔라딘은 짐승같은 손으로 바로니의 목덜미를 잡았다. 바로니의 고개가 억지로 들려지며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마치니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팔라딘 대장의 얼굴을 패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랬다간 문제가 더욱 커질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분노를 극한까지 눌러 참고 있었다.
"네가 이 라이지드의 장로격인 걸로 아는데 이 마을의 너희 족속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 주실까?"
"우리들을 의심한다는 거야!"
마치니가 쏘아붙였다.
"중요 참고인으로서 전부 연행하겠다. 곧 체포하게 되겠지만 말야."
"너희들 보자보자 하니까!"
마치니가 병사들을 뿌리치며 팔라딘 대장에게 다가서서 독기를 품은 이빨을 그 앞에 들이댔다. 인간 팔라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니 그만둬. ````````나 하나로 충분할 겁니다. 라이지드 주민들이 무고하다는 걸 보여드리죠."
"흥, 듣지 못했나 보군. 오늘로써 라이지드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다 만 자들은 전부 철창행이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꿈이라도 꾸던지 아니라면 죽어라."
"크윽, 이````."
보다 못한 샤르카가 교만한 인간들을 패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레나도 팔라딘 대장에게 향했다. 그때였다.
"너희들."
라닌 대장이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에는 어떤 긴장감이나 내색도 느낄수 없었다. 마치 매일 보던 친구에게 하는 인사 같은 말투에 팔라딘 대장 또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다.
"반항할 셈이냐. 여행자. 못 본 척 사라져 주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변방의 일개 하급 장교로서는 설마 한 나라의 군 총사령관이 일반 방랑자 복장으로 허름한 민박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으리라고는 설마 몇 번을 죽는다 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라닌은 비로소 자신에게 향한 관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단순히 바빠질 오늘 하루에 대비해 아침을 먹고 싶을 뿐이야. 너희들이 뭘 하든 상관은 없으나 적어도 분위기는 깨지 말아야지."
"말 잘하는군. 넌 뭐하는 놈이냐. 어디 부유한 가정 자식이냐? 아니면 제법 힘 좀 쓰는 집안인 것 같군. 좋아. 아까의 소란은 사과하지. 원하는 게 뭐냐."
인간 팔라딘은 라닌의 말투에서 저급한 부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패기와 프라이드를 바탕으로 둔 기백을 느꼈던 모양이다. 다소 와일드한 분위기에서 뭔가 모를 높은 신분의 냄새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라닌에게 안면이나 틀 요량으로 적개심을 없앴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류층에 다리를 놓을 기회를 찾기 위해 갑자기 라닌에게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바로니 세 자매는 라닌이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라닌은 그들과 몇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마침내는 유쾌하게 떠들며 독한 럼주를 주문해 마구 퍼 마시기 시작했다.
"대장. 저기.."
"레나. 너희는 잠시 기다려 줘. 잠깐이면 끝날 테니까."
완전히 질려서 말도 안 나오는 샤르카와 가루라를 데리고 레나는 빠져나왔다. 좀 더 떨어진 테이블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샤르카가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 전부 미친거 아니야? 내가 워쳐 캐스터의 이름으로 군기를 잡아주겠어."
"그만두세요. 샤르카님."
오랜 기간 라닌과 지내온 레나는 이미 무언가 느끼고 있는 듯했다. 라닌의 일처리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무척 위태위태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적어도 라닌은 이런 경우에 한해서 자신의 귀찮은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지를 관철시킴과 동시에 부도덕적인 상황을 매듭짓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바랬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성공으로 끝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병사 중 하나가 물었다. 라닌은 레이픈 카드를 꺼내면서 웃었다.
"우리 집안이 좀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지. 사업이 성공하다 보니 나도 여기저기 얼굴이 팔려 있더군."
라닌은 아무래도 자신을 벼락출세한 사업가 정도로 위장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현재 레이픈 카드 게임 중 가장 보편화된 게임인 클로우, 버퍼 등을 제안했다. 둘 다 상대방의 카드를 많이 뺏는 쪽이 이기는 것이나 클로우는 단순히 카드의 장 수, 버퍼는 높은 카드를 조합해서 점수를 만드는 점이 달랐다. 당연히 라닌은 두 가지 게임 전부 자신 있었다. 병사들과 푼돈으로 시작한 게임은 어느새 판돈이 점점 많아졌고 마지막에는 단 한 번의 게임에 완전히 망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팔라딘 대장은 나름대로 게임 실력이 있는 듯 했다. 라닌은 이런 경우 자신과 같은 편이 없음에도 쉽게 이기는 법을 알았다. 어느새 경쟁자는 하나 둘 아웃되어갔고 최후에는 라닌과 대장 둘만 남았다. 팔라딘 대장은 얼굴이 금새 새빨개져서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일대일로 라닌을 이길 수 없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라닌은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이 딴 돈을 대장에게 돌려주었다. 대장이 어리둥절하자 라닌은 말했다.
"그깟 푼돈은 그냥 돌려주겠어. 대신 나하고 한 판만 더 하는 거야. 한 가지씩을 걸고 말이지. 어떤가."
라닌이 딴 돈은 그 가치로는 1년간을 그냥 놀고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 고액을 푼돈으로 취급하자 팔라딘 대장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이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걸 것은 이거다. 무척 가치 있는 거야.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지."
라닌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아까의 돈 자루를 얹어두었다.
"지금은 보여줄 수 없어. 왜냐하면 그걸 보는 순간 네가 지불해야 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
"내가 게임을 더 하길 바라는 건가?"
팔라딘 대장은 라닌의 범접할 수 없는 큰 마음가짐에 도저히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자네 부하들과 전부 덤벼 보라구. 나 혼자 상대해 주겠어."
분명 이쪽에도 승산은 있다. 팀웍만 잘 맞는다면 실력차는 충분히 극복할 수준이었다. 계산을 끝낸 팔라딘 대장은 안면에 미소를 부으며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패를 돌렸다.
게임은 끝났다.
병사들이 몇 차례나 라닌을 몰아세웠지만 막판에 이르러서는 백기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라닌도 이번 게임은 상당히 고되었는지 아무도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라닌이 피곤함과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불안해진 팔라딘 대장은 라닌이 내건 물건을 선뜻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귓속말로 만일의 사태에 이 간 큰 여행자를 때려 눕혀서라도 자신들의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을 의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돈 뭉치를 들어서 그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브리드 공화국 최고통수권자 브리드가 임명한 총사령관 로크란드의 황금사자 표식이 있었다.
라닌이 눈을 떴을 때 주위에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병사들은 한명도 없었다. 병사들은 바닥이 머리에 닿을 새라 조아리고 있었으며 그나마 무릎을 꿇고 자신을 곁눈질로 흠칫거리는 팔라딘 대장만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런 실례를...로크란드 경에게 무례한 언동을 부디 용서하시길!"
"변방의 일개 병사들이여. 우리는 지금 특명을 수행키 위해 잠시 주둔하던 중이었다. 아크윈의 권한을 이런 데 쓰긴 싫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군. 요수들을 멋대로 대하다니 공국의 헌법을 우습게 아는 것도 정도가 있다. 너희들의 영주는 누구지?"
팔라딘 대장은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짜내듯이 말을 이었다.
"자```잠깐, 비록 특명을 수행중이긴 하시나 현재는 군사령관 직책을 일시 반납한 것으로 압니다만```` 이후의 일은 부디 못 본 것으로 해 주시길. 요괴들에 대한 조사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도록."
시원스럽게 말하고 라닌은 일어서 동료들과 바로니 자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무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바람같이 달아나기에 바빴다. 아까까지 꽉 들어찬 듯 했던 주점 로비에 적막이 감돌았다.
"라닌."
마치니가 안절부절 하며 다가왔다. 라닌은 언제나처럼 얼빠진 표정을 하고 가라앉듯이 니무 의자에 파묻혔다. 그 모습은 귀찮은 일은 죽어도 싫어하는, 하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는 목숨을 거는 평소대로의 라닌의 모습이었다. 샤르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바뀐 게 없어. 언젠가 그들은 다시 올 거야."
"아니, 지금은 시간을 번 것으로 좋다. 그리고 바로니."
라닌은 자신의 표식을 바로니에게 건네주었다.
"내 증표가 될 거다. 브리드에게 직접 하사받은 로크란드 대대로 물려지는 문장이다. 잠시 맏겨두도록 하지."
보통 중요한 물건이 아닐 터. 하지만 라닌에게는 자신을 지배하는 그 어떤 무엇도 없었다. 조그만 금속 쪼가리로는 자신의 아주 일부분의 관심도 얻지 못하는 듯하다. 바로니 세자매(카운티는 예외인 것 같다)가 얼어 있는 것을 대신해 샤르카가 말했다.
"라닌, 진심인가? 그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건진 네가 잘 알 텐데!"
"내 결정에 번복은 없어. 그걸 가지고 브리드 공국으로`````수고스럽겠지만 가서 방금 상황을 말하면 공국 법령에 의거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민사부의 버무웰을 찾아가서 내 말을 대신 전해준다고 하면 바로 해결해 줄 것이다."
바로니의 눈에 일순간 빛이 어른거렸다. 남모르게 눈가를 훔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을 수 있겠어? 이렇게 귀중품을 잃어버리거나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그다지 잃어버려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없어지면 브리드에게 귀찮아지니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잠시 맡겨두기로 하지."
"알겠어. 소중히 간직할게. 고마워."
"출발한다. 샤르카. 레나."
술에 강한 라닌이라 할지라도 이미 어제 저녁부터 방금 전까지 술고래도 이기지 못할 만큼 술을 퍼마셨다. 말투는 변함없을지 몰라도 이미 몸속은 엉망일 것이다. 대체 그놈의 자존심이란 건 뭔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억지로 움직이면서 라닌은 자신의 짐을 들었다.
"기다려. 이 상태로 갈 생각인가?"
샤르카가 보다 못해 말했다. 라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예상보다 지체돼 버렸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돼. 공정으로 가는 다음 '통로'를 놓친다."
라닌이 말하는 통로라는 건 공중에 떠 있는 공정 젠티브와 지상을 잇는 빛의 길이다. 순간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이동시키지만 그 능력에 제한이 있어 하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지금. 바로 말을 타고 간다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이다.
"공중전함이 사라져 간 북동쪽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 만약 그것이 마신과의 무언가 연관이 있다면````."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라닌."
"가루라. 네가 전함이 지나간 쪽으로 가서 상황을 보고 말해주길 원한다."
확실히 제국 전함의 일이 신경 쓰인다. 분명 이번 일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라닌 일행이 마신을 쫓아 젠티브의 성지로 향하고 가루라가 따로 전함의 동태를 살핀다면 정보의 손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
말없이 상황을 보고 있던 카운티가 입을 열었다. 바로니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카운티의 발 밑으로 수없이 많은 검은 점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깨알같이 많은 거미떼라는 걸 라닌 일행은 바로 조금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주점의 모든 바닥과 벽이 검은 부분으로 전부 둘러싸였다.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만한 장면이었다.
"우왓. 기분 나빠."
샤르카가 정말로 기분 나쁜 표정을 했다. 레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쓴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가루라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라닌은 말없이 카운티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카운티의 친구들 -작고 검은 수많은 거미들- 은 곧 순식간에 흩어져 건물 틈새 구석구석으로 사라져 갔다. 그것이 너무나 빨라서 마치 검은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카운티는 작게 호흡을 하고 라닌의 눈을 보며 말했다.
"봤어."
시간은 샤르카가 제국군 비상 요새를 보고 나서 한 시간 쯤 뒤.
카렐 제국군 비상 요새가 제국이 지닌 성제의 보물 비바이런 임페르노를 호위하며 바쿠브 섬을 횡단하던 중 아군의 제국군 구축함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함장은 자신들이 지나온 길의 마수들과 부정적인 정령들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바이런 임페르노가 공명하면서 근처의 요수들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선단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패스파인더가 제독에게 보고했다.
"제독님. 근처에 저희 제국군 함선입니다."
"신분을 밝혀라. 그대는 누구인가."
곧 주술적 처리를 한 화면에 화상이 나타났다. 감색 천과 금빛 외장을 두른 늙은 함장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용마기동대 제 17단장 8연성 클랜 케더락 중령이오. 특무부대 사령관 레클린 대령. 제국 국왕의 명에 따라 성제의 보물을 무사히 본국까지 인도할 수 있도록 호위를 하겠소이다."
비상 요새의 함장은 구축함에서 함단의 호위를 맡겠다는 말을 듣고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함의 후위 쪽에서 따라올 것을 명했다.
한적한 수풀림이 계속되었다. 비상 요새를 쫓아가던 구축함의 기수 부위에 어느 순간 무언가 붉은 색의 물체가 튀어나와 비상 요새의 브릿지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리를 좁히고 뒤로 파고든 구축함은 전 화력을 퍼부어 비상 요새를 두 동강내었다. 불타 무너져 내리는 비상 요새의 중앙에서 아까의 붉은 물체가 튀어올라 구축함의 선체에 내려앉았다. 두 손에는 커다란 금색의 구형 물체를 껴안고 있었다.그 붉은 형체는 구축함의 그림자에 가려져 윤곽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밝게 타오르며 추락하는 비상 요새의 불꽃의 빛이 반사하면서 마귀와도 같은 흉칙한 외모가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너무나 손쉽게 손에 얻었군. 성제의 보물은 이 몸이 소중히 사용해 주지. 나 케더락이 카오스 이클론의 지배자. 나아가 신과 동등할 위치에 설 날도 머지 않았다."
비상 요새를 회위하던 소형 전투선들이 기수를 돌려 구축함을 향해 돌진했다. 붉은 괴물은 전투선에 빠른 속도로 접근해 기수의 가장 약한 틈새 부분에 팔을 쑤셔 넣고 강력한 재질의 강철판을 마치 종잇장처럼 뜯어냈다. 그 원리나 전투방식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괴물은 거의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닥치는 대로 공중을 누비며 전투선들을 고철로 만들어 나갔다. 불과 몇 분 사이에 공중에 떠 있는 전투함은 케더락의 구축함 외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케더락은 비웃음을 남기며 구축함의 행선지를 변경하고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강대한 마력이 요수들을 자극하고 있어. 그것이 빛나는 저 구형의 물체."
방금의 상황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카운티의 수하 거미들이 자신들의 시신경에 저장해둔 입체 영상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수 시간 전의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영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카운티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수 억 마리 거미들은 대륙 이곳저곳에 골고루 퍼져 주위 사물을 관찰하고 각종 정보를 모아 두는 역할을 했다. 필요시엔 현존하는 가장 뛰어나고 발달한 마더 스파이더인 카운티의 명에 따라 각종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라닌은 구형의 물체가 제국의 성제의 보물인 비바이런 임페르노임을 확인해 주었다. 샤르카는 성제의 보물을 껴안은, 마신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전투방식과 강대한 파괴력은 비슷하지만 외형면에선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브리드를 습격한 마신이 슬립한 은색의 미끈한 외형이라면 저것은 우락부락하고 좀 더 역삼각의 상체에 근육이 발달한 거대 박쥐와 흡사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저것이 또 다른 마신이라면 마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건 상당한 공포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은색 마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카렐의 전투함대인가. 제국의 성제의 보물 비바이런 임페르노는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는다는 전설의 물건이다. 게다가 구체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일반적으로 지능이 낮은 요수들은 정신에 혼란과 폭력성을 불러온다고 알려져 있지."
라닌은 방금 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워했다. 그 악명 높은 제국 황제의 권위 아래서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제국 함대끼리 전투를 벌이고 게다가 성제의 보물을 빼앗는 것에 마신을 동원했다는 건 이번 사태에 관계가 없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아까 전의 팔라딘이 말한 노스타운의 요수 출몰사건도 그 힘의 일부가 새어나왔기 때문이겠지. 의도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의 영상으로 보건데 제국내의 내분이 일어난 듯하다. 성제의 보물은 소실되었고 그것을 탈취한 집단이 누구인지는 제국에 보고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비상사태다. 카렐 제국은 내분에 대해 알지 못해. 필시 로프론이나 브리드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전쟁에 브리드가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얘기군요."
가루라와 레나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임무 변경이다. 우리는 현 시간부로 정체불명의 제국 반란분자들을 쫓는다. 그리고 제국의 성제의 보물을 황제에게 되찾아주어야 한다. 카운티. 제국의 반란분자들은 어디로 향했지?"
카운티는 말없이 라닌의 손에 푸르고 작은 거미를 쥐어주었다.
"이 아이가 바라보는 쪽으로 가면 돼."
"여기서 남쪽 방향이군. 서두르자.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어. 바로니. 미안하지만 브리드로 갔을 때 우리 대신 상황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 은색 마신에 대한 건 이미 그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알겠어. 라닌. 책임지고 전해줄게."
"그런 이유로 신세졌어."
"잠깐만 모두들."
라닌 일행이 막 건물을 나서려 할 때 마치니가 불러 세웠다.
"우리가 도울 게 더 있을지도 몰라."
마치니가 일행을 데려간 곳은 큰 헛간과도 같은 낡은 목재 건물이었다. 상당히 낡았지만 여러 군데 부수를 꼼꼼히 한 덕분에 구조 자체는 튼튼해 보였다. 일행이 그곳에서 본 것은 레이버리크의 4분의 1 정도 되는, 그러나 일반적인 것보다는 수백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개구리였다. 그것은 공중에서 자신의 뒷다리를 마치 날개처럼 퍼덕이면서 쉴 새 없이 건물의 천장을 쑤시며 날아다녔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장면에 샤르카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이거````뭐야?"
"하늘개구리인가? 나쁘지 않군. 마지막에 타 본 게 언제더라? 가루라. 넌 어때. 면허는 있어? 괜찮으면 시운전을 맡길까 하는데."
"전 대장님하고는 달라서 병영을 폭주족처럼 휩쓸고 다니던 취미는 없었네요."
가루라가 난색을 표했다. 나름대로 나는 행위에도 우아함을 추구한다는 가루라는 하늘개구리에게서 전혀 그러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레이버리크도 그다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마치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래 보여도 속도는 일반 고속정과 맞먹을 정도니까. 카운티 말에 따르면 그 전함은 왜인지 속도를 늦추고 있으니 이거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너희들에게 빌려줄게."
"무사히 돌려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신세졌어."
라닌 일행이 하늘개구리의 등에 붙어있는 가죽 안장에 나란히 올라탔다. 선두인 기수에 의기양양한 표정의 라닌, 그리고 차례대로 샤르카, 레나, 가루라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안한 기색을 띄며 앞 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샤르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리고 레나와 가루라는 과거의 공포 스런 '폭주기관차 라닌'의 명성과 활약상을 일찍이 경험해왔기에.
순간 바람이 이는 것 같더니 하늘개구리의 형체가 사라지다시피 하면서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그것과 한 박자 늦게 세 사람의 비명이 꼬리를 물며 길게 이어져 갔다. 순식간에 점으로 보이는 라닌 일행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요수 세 자매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겠다. 물러가라."
어둠 속에서 금색 갑옷에 흑색 망토를 하고 용을 닮은 기묘한 가면을 쓴 자가 근위병에 의해 탈취당한 성제의 보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다섯 시간 전에 전해졌어야 할 성제의 보물을 운반하던 비상 요새는 수백 명의 제국 병사들과 뒤엉켜 잿더미로 변해 발견되었다. 게다가 믿기 힘들게도 전설에서나 나오던 마신과도 같은 생물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제국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던 제국군 최고 사령관인 그는 생각에 잠겼다.
"성제의 보물을 탈취한 자들. 필시 로프론의 강경분자이겠지. 하지만 뭔가 탐탁치는 않군. 좀 더 다른 느낌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그들 자체가 함정인 건가. 뭐 좋다. 로프론의 성녀와 대화 해 볼 빌미 정도는 되겠군."
(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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