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카리나다. 카리나는 민간군사기업 그리폰&크루거에서 근무하고 있다. 직책은 S09지역 작전사령부의 행정보급관이다.
사령부의 아버지가 지휘관이라면, 어머니는 바로 행정보급관인 카리나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로 S09사령부는 모두 카리나의 보살핌 아래 관리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리나는 아직 21살의 젊은 나이지만 일찍이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하고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카리나양. 머핀을 구웠는데 괜찮으시다면 어떠신가요?”
“머핀! 마침 배고팠는데! 고마워요. 스프링필드씨!”
S09사령부에서 카리나가 일에 치여산다는 것은 머릿속이 꽃밭인 IDW도 아는 사실이다. 초창기부터 함께 한 원로인형 ‘운명이’ M1911이 말하길, “보급관님은 일과 결혼하실 운명이에요!”
“아직 식사도 못하신 거예요?”
“우물... 우물.. 먹을 시간이 우물.. 없어서....”
“저런.”
스프링필드의 눈이 글씨가 휘갈겨져 있는 서류더미로 향한다. 꿀꺽-하며 울대를 넘긴 카리나는 지난 번 작전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신지 걱정되네요.”
“하하. 역시 스프링필드씨밖에 없다니까요. 지휘관님은 어떻게 하면 절 더 부려먹을까 생각밖에 안 하시는데.”
일견 장난스럽게 말한 카리나가 작성중인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는다.
“그래도 이게 제 일이니까요. ‘제 역할’에 충실해야죠.”
카리나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서류더미 속에 파묻혔다. 묵묵히 문서들을 검토하는 푸른 눈동자가 어쩐지 애상적으로 보인다고 스프링필드는 느꼈다. 과도한 업무... 탓일까?
카리나의 업무는 다양하다. 카리나는 주 업무인 부대 관리 외에도 사령부의 후방지원 및 지휘보조, 그리고 상기한 작전 기록등을 위시한 사무처리와 본사의 물품을 거래해주는 도매업자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21살의 어린 행정보급관에게 주어질 만한 책무는 아님에도 모두 ‘만성적인 인력부족’이라는 미명 아래 오늘도 카리나는 갈려나간다. 한 편으로는 그만큼 카리나가 유능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후아아~ 지휘관님. 부탁하셨던 작전보고서에요..”
“어어. 수고했어. 역시 카리나밖에 없다니까.”
“네엣?! 고마우시다면 이 참에 쇼핑은 어떠세요? 싸게싸게 해드릴 게요!”
눈을 달러($) 모양으로 바꾸고 판촉원의 자세로 돌변한 카리나에게 지휘관은 질린다는 눈빛을 보낸다. 벌써 이 앙큼한 애교에 몇 번이나 홀라당 넘어가 지갑이 홀라당 벗겨졌는지. 물론 구매대금의 일정 퍼센트는 카리나의 성과급으로 돌아간다니 이해는 하지만서도.
“카리나. 이거 어떻게 쓰더라?”
지휘관이 작전보고서가 담긴 플로피디스크를 노려본다. 카리나는 짐짓 한숨을 픽 내쉬고 지휘관의 옆으로 다가간다.
“저번에 알려드렸었잖아요. 이래서 요즘 분들이란~”
“아니. 그러는 넌 요즘 사람 아니냐? 한 세기 전의 물건을 내가 어떻게 알아.”
“네엣?! 플로피디스크가 불편하시다구요? 그런 지휘관님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있죠. 바로 이 신형 광자기 디스크는 어떠세요?!! 기록과 삭제가 그야말로 무한대! 지금이라면 단돈...!”
“아줌마! 안사요! 저리 가요!”
쳇. 혀를 찬 카리나가 악어의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애원한다.
“지휘관니임~ 제 사정도 좀 생각해 주세요오~!”
카리나 입에서 흘러나온 사정이란 눈물겹다. 낙후된 S09지역의 사령부 설비는 2060년대가 아니라 1960년대라 봐도 무방한 만큼 처참하다. 저장용 매체로 한 세기 전의 물건인 80KB 플로피디스크가 굴러다니는 것이 그 증거요, 자료실은 더더욱 가관이라 그 흔한 문서작성용 타자기도 없어서 카리나는 작전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동방의 옛 서예가들 마냥 자필을 휘갈길 수밖에 없었다. 바로 방금처럼.
심지어 그것을 다시 앞서 말한 용량도 적은 구식 플로피 디스크로 옮기느라 애로사항이 꽃폈다. 카리나는 신형 광자기 디스크가 절실했다. 어쩌면 지휘관보다도 더.
“으음. 그, 미안한데 거기 컴퓨터 하나 있지 않았어? 그... 뭐더라?”
역시나 한 세기 전의 구질구질한 컴퓨터가 하나 있던 걸로 기억한다.
“Apple II Plus요?”
“그래. 그거. 자필로 쓰지 말고 그걸로 쓰면 되잖아. 너 그걸로 그림도 그릴 줄 안다며.”
카리나는 유능하다. 그 중에서도 특출난 점이 하나있다면 바로 구식 디지털 제품들을 잘 다룬다는 것이다. 한 세기 전의 골동품들이 굴러다니는 이 S09지역에서 카리나의 그러한 재능은 행정보급 못지않게 가치있다.
“RAM이 16KB밖에 안 되는 그걸로요?”
“........”
“...언제쯤 자료실 설비 바꿔주실 건가요?”
“시, 시간과 전지를 주신다면 어떻게든..”
“전지를 늘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겠지요?!”
변명은 죄악이라고 일갈하듯 눈을 달러($) 모양으로 바꾼 카리나에게 한 차례 시달린 지휘관은 끝내 지갑을 열고야 말았다. “이히히히히... 매번 감사합니다아~” 용무를 마친 카리나는 지휘실을 나가려고 했다.
지휘관이 나직이 카리나를 부른다.
“카리나.”
“예?”
큼. 큼. 헛기침을 한 지휘관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매번 고마워.”
맥락을 알 수 없는 감사에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휘관은 플로피디스크를 만지작거린다.
“카리나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나 고생했을지 몰라.”
“하하, 뭐에요. 쑥스럽게시리. 지갑이 얇아지시니 현자타임이라도 오신 거예요?”
"얘는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엉덩이라도 두들길 기세로 말한 지휘관이 민망함을 감추듯 농을 건넨다.
“너 실은 막 한 세기 전의 인물이었다던가 그런 거 아냐?”
“어머, 지금 레이디한테 올드하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정말이지 지휘관님은 못하는 말이 없네요! 귀엽게 혀를 내밀며 응수한 카리나가 이내 지휘실을 나갔다. 지휘관은 한숨을 픽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쿵. 지휘실을 나간 카리나는 몇 발자국 채 내딛지 못하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다. 장갑을 벗자 손바닥은 기분 나쁜 땀으로 흥건하다. 고비를 넘긴 듯 가쁜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그 모습은 방금까지의 능글맞고 천연덕스럽던 소녀와 마치 별개의 인물같다.
카리나는 역시나 지휘관님은 통찰력이 대단하시다고 속으로 자조하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지, ‘연기’는 완벽했을 터인데. 멈춘 걸음을 서서히 떼면서 카리나는 다시 한 번 ‘설정’을 되새긴다.
카리나는 유능하다. 그 중에서도 특출난 점이 하나있다면 바로 구식 디지털 제품들을 잘 다룬다는 것이다. 바로 한 세기전의 인물처럼.
“당연하지. 한 세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카리나가, 아니 ‘카리나의 모습을 한 그녀‘가 씁쓸하게 읊조린다. ’카리나‘가 구식 제품들을 잘 다루는 건 ’공식설정’이다. 따라서 설정에 맞춰 해박한 지식을 뽐내었던 건데, 설마 거기서 발목 잡힐 줄이야.
카리나는 2040년대에 태어났다. 미래의 인물이 한 세기 전의 기술에 대해서 전문가도 아닌데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그녀’는 가이드라인에 새로이 한 줄을 추가하기로 했다. ‘너무 티내지 말기.’
그녀는 한참을 거울을 마주하며 자기암시를 하고 나서야 다시 카리나가 될 수 있었다. 앙증맞은 오렌지 블론드의 사이드테일, 명랑한 물빛 눈동자, 귀염성 넘치는 미소, 털털한 성품이 드러나는 자유분방한 차림새, 거울 속의 소녀는 누가 봐도 카리나였으며 카리나는 곧 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카리나다. 또한 카리나의 이름을 빌려 쓰는 ‘환생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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