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은 나이트모드로 밝기가 조정된 스마트폰 화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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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은 통화가 끊긴 아이폰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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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지옥을 방불케 하는 기업 부스를 통과해 애플 소다 파는 편의점을 찾아 헤메길 무려 30분.
지금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하늘.
현준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는 걸 바라보며 가슴 속을 헤집고 지나간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고개를 내리고 땅을 한 번 걷어찬 뒤 현준은 입을 열었다.
“한예원씨 폰이죠?”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뜸을 들이는 건 아니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그런 기색.
음, 어, 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가 싶더니
“전화 잘못 거신 건 아닌가요?”
라고 상대가 말했다.
“아뇨. 제대로 걸었는데요.”
현준은 틈을 두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상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 음. 하는 소리가 또 들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시간이 없다고.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세요?”
“아, 전 전화 주운 사람인데요. 혹시.......”
답답한 놈.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뭘 그리 고민하시나?
현준은 가벼운 짜증을 느꼈다.
전화가 연결되나 싶더니 또 단서를 놓쳤다.
“저 폰 주인 오빠 되는 사람인데요. 폰 받으러 갈테니 어딘지 알려주실래요?”
일단은 폰을 회수해 놓자.
“정말로 오빠 맞아요?”
그런데 답답한 놈이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맞는데요?”
이 놈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무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려는데 상대가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순간 현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발신인 표시에 박현준이라는 이름이 떴었다면?
성이 다르니 오빠란 이야기도 거짓말이라고 여기겠지.
그럼 폰을 넘기지도 않을테고.
일을 서두르느라 괜히 오빠라고 했다.
사촌 오빠라고 해야겠다. 이종 사촌.
그러는데 상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 동생은 이름으로 저장 안 하거든요? [나쁜 새끼] 였던 적도 있고.......”
누군지도 모를 녀석의 자학 개그를 듣고 있자니 현준의 눈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물론 본인은 더없이 진지한 말투다.
이런 별 시덥지도 않은 일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니.
“아, 동생이랑 사이 나쁜 건 아니고요. 이쁜 짓 할 때도 많고.......”
그만해.
네 놈 가족 관계엔 전혀, 하나도, 눈꼽 만큼도 관심 없다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나. 어쩌라고 임마.
그 때까지 단단히 죄어져있던 긴장과 얼굴 근육이 삽시간에 풀려버렸다.
“사촌이에요. 사촌. 이종 사촌.”
싱글싱글 웃으면서 현준이 말했다.
“동생이...... 예원이가 잃어버린 폰, 주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바탕 웃게 해줘서 더 고맙다만은.
“혹시 옆에 있나요?”
상대가 물었다.
오빠 인증. 아직 안 끝났나?
폰 받으러 오려면 본인이 오라는 건가?
“지금 만나기로 했는데 엇갈려서 찾고 있어요. 왜요?”
또 침묵.
으이구.
“그게...... 동생 분 지금 좀 급한 일 있는 거 같아서....... 빨리 알려드리는 게 좋겠다 싶어서.......”
“무슨 말이죠?”
“......사촌 오빠 맞아요?”
하핫. 이 새끼 좀 재밌네.
뭐, 이치에는 맞다만.
대화가 엉망진창이잖아.
이래서야 아무 것도 안 되겠다.
뭔가 알고 있나 본데....... 우선은 만나야겠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죠? 그 쪽도 전화기 주웠다고 하셨는데 제가 못 믿겠다고 하면 어쩔 거죠?”
“.......”
어차피 너도 귀찮은 일 말려들기 싫잖아? 나한테 넘기고 편해지라고.
“저 지금 청산엑스포에 있는데 어디세요?”
현준의 물음에 상대는 순순히 대답했다.
“저도 거긴데요.”
“마침 잘 됐네. 거기 어디에 있어요?”
“컨퍼런스동 2층 로비요.”
“지금 바로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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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은 통화가 끊긴 아이폰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상했다.
첨엔 장난 전화인줄 알았다. 아무런 말없이 듣고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입을 여는가 싶더니 굉장히 고압적인 태도여서 반감이 확 들었다.
전화를 받으러 온다는데 본인도 아니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폰을 넘길 수도 없었다.
정말로 그냥 분실물 센터에 넘겨버릴까 고민했다.
거기선 본인 확인 착실하게 하고 넘겨주겠지.
그래도 상대가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것만 같았다.
마침 같은 곳에 있기도 했고.......
찾고 있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사촌끼리 같이 일하는 개발자일지도 모르고.
예상이 맞다면 그냥 아이폰을 넘겨주면 그만이다.
뒤는 알아서 잘 하겠지.
svn 데이터에서 업체명이나 팀 명 알아낸다고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는데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게 시원의 눈에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면서 로비를 둘러보는 모습이 아무래도 방금 전화한 상대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도 그렇게 짐작했는지 까닥 하고 목례를 한 다음 시원에게 다가왔다.
“전화 받으신 분 맞죠?”
“네, 네.......”
그림에 그린 듯한 훈남이었다.
옷차림도 산뜻했다. 청바지에 니트, 패딩으로 무난한 캐주얼 차림이었지만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옷이 비싸서 그런지 엄청나게 세련되어 보였다.
나이는 대학생, 그쯤?
전화할 때만 해도 최소한 30대는 되는 줄 알았다.
“예원이 폰 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그, 별 것도 아닌데요.”
고작해야 10대 중반인 자신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상대에게 시원은 당황해서 손사레를 쳤다.
“전 박현준이구요. 예원이 사촌 오빠 됩니다.”
탁자 위에 놓인 아이폰을 힐끗 쳐다본 현준은 지갑에서 꺼낸 명함을 시원에게 건넸다.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시원은 받아든 명함을 읽었다.
팀 샹그릴라
시스템 기획 (System Planning Leader)
박현준
Tel. xxx-xxx-xxxx / Fax. xxx-xxx-xxxx
C.P. 010-xxx-xxxx / E-mail. xxxx@xxxx.xxxx
시스템 기획 (System Planning Leader)
박현준
Tel. xxx-xxx-xxxx / Fax. xxx-xxx-xxxx
C.P. 010-xxx-xxxx / E-mail. xxxx@xxxx.xxxx
파란색 배경에 팀 로고가 박힌 명함이었다.
샹그릴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게임 개발 팀이에요. 이번에 인디 게임 컨테스트에 A팀으로 나왔어요. 오후부터 시연이니까 꼭 한 번 들러서 해보시고 좋은 평점 부탁드립니다.”
받아든 명함을 읽고 있는 시원에게 현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럼 폰 주인....... 동생도 같은 팀 개발자인가요?”
“팀은 달라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현준의 말에 시원은 목을 살짝 움츠렸다.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 혹시 아이폰에 무슨 짓이라도 했냐?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팀원들이 보낸 메시지 같았는데 좀 급해보이더라구요. 그... 잠겨있어서 알림으로만.......”
USB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제 별 상관도 없을 것 같기도 했고 괜한 설명을 더 하기도 귀찮았다.
“빨리 알려주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아...... 좀 전에 전화로 했던 말이 그 말이구나.”
시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현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폰 주인이 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신경쓰지 마세요. 지금 제가 찾고 있는 것도 그 일 알려주려고 하는 거라."
"아, 네."
시원은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이런데서 svn 파일이나 뒤질 수 밖에 없는 자신보다야 몇 백배는 더 믿음직해 보였다.
“게임 개발자에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 현준에게 시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메시지 알림 내용을 보고 긴급하단걸 알아보았다는 건 같은 개발자라는 걸 의미한다.
그걸 상대도 알아챈 거 겠지.
“아뇨. 그냥 취미로.......”
“코딩? 그래픽? 기획?”
“코딩을 조금.......”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해볼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명함 버리지 말고.”
“네.”
시원은 상대가 아이폰을 집어드는 걸 그대로 지켜보며 대답했다.
“오후에 꼭 오세요. 지금은 좀 급해서 먼저 가볼게요.”
“네.”
상대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 시원은 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하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일단 명함에서 압도당했다.
대학생처럼 보였는데 벌써부터.
거기에 본선 진출작 만든 팀의 메인 시스템 기획자.
이번 컨테스트는 예선과 본선으로 나누어 예선은 서류와 게임 동영상을 활용해 일차적으로 걸러낸 후, 2차 기능 테스트를 거쳐 3차 심화 심사에 통과한 게임들만 본선에 나간다.
본선에서 토너먼트 방식으로 심사위원 채점과 일반 공개를 통한 인기투표를 병행해 우승작을 가린다고 했다.
듣기로는 학생부 출품작만 몇 백 개는 된다고 했다.
그 중에서 본선에 올라가는 게임은 8개.
아주, 아아아주 행복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학생부 게임만 다 올라왔다고 치고 출품작이 200개라 가정해보자.
그래도 200대 8.
상위 4퍼센트다.
본선에 올라가기만 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누가 봐도 이런 서브 컬쳐 쪽과는 거리가 먼 엄친아 분위기가 풀풀 나는데도 게임 기획자.
거기에 잘 나가는 게임 개발팀 소속.
일도 무지 잘할 것 같았다.
예의도 발랐다.
나 같은 어린애에게 끝까지 공손했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그야말로 재능의 축복을 한껏 받은 인간.
세연이 같은 천재나 저런 사람들이 앞으로 게임 업계를 주도해 나가겠지.
뭐, 이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 개발자냐고 물었을 때 오히려 안도했다.
난 이제 더 이상 게임을 만들지 않기로 했으니까.
비교될 필요도 없다.
그닥 우울한 감상을 품은 건 아니다.
포기하면 편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는 당연히 공치사.
오후에 들릴 생각도 없고 연락할 생각도 없다.
이제 기업 부스에 들러 열쇠고리를 사고 편의점에서 애플소다를 산다.
머릿 속에 뜬 퀘스트 미션 창을 다 읽은 시원은 확인 버튼을 있는 힘껏 꾹 눌러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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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지옥을 방불케 하는 기업 부스를 통과해 애플 소다 파는 편의점을 찾아 헤메길 무려 30분.
스탭 티켓이 없었다면 열쇠 고리를 구하긴 커녕 회장에 발도 못 붙일 뻔했지.
순식간에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기분에 젖은 시원은 한 손으로 허리를 톡톡 쳤다.
부딪히고 난 직후엔 곧 괜찮아져서 몰랐는데 무릎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아파왔다.
눈이 오려나? 하며 농담처럼 중얼거렸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전시동에서 나오니 정말로 눈이 오고 있었다.
아직 창창하다고!
꽃다운 방년 16세라고?
한바탕 투덜거린 다음 점점 쌓이고 있는 눈을 밟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곧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차도도 한적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조용했다.
펑펑 쏟아지는 그런 눈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는둥 마는둥 하는 눈도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올 것만 같은 그런 눈이 소리도 없이 쌓이고 있었다.
드라마라면 강연장에서도 봤었지.
두 부녀의 격렬한 충돌.
얼핏 보기에도 아버지 쪽은 높으신 양반 같았다.
출생의 비밀이라도 얽혔나?
시원은 킥킥 거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딸의 장래를 멋대로 정해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는 씬이었다거나.
그런데 그것도 오해로 CGS 전체가 휘말린 거대한 음모의 일각이었다거나.
그 여자애와 부딪혀 음모에 휘말려 들어가는 젊고 유능한 프로그래머.
싹트는 사랑.
하하.
웃기는 이야기다.
아니 웃기지도 않는다.
드라마로 나와도 씨도 안 먹힐 이야기다.
요즘은 기본 초능력자에 북한 특수부대원 같은 엄청난 것들이 나온다고?
한국 막장드라마 무시하냐!
애당초 [유능한] 이란 부분도 글러먹었다.
유능하면 컨테스트 떨어지겠냐고.
애들한테 그런 소리 듣고 있겠냐고.
크큭.
웹소로는 더 구리지.
일단 트럭에 부딪혀야 뭐가 굴러가니까.
어?
눈 길에 미끌어진 트럭.
가슴에 낚여서 열쇠고리나 사들고 돌아가는 찌질한 남주.
필요조건 채운 거 아냐?
이제부터냐?
내 이세계 하렘 라이프는 지금부터냐?
시원은 눈 때문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 가에 마련된 벤치에서 치마를 털며 일어나던 어느 여자애와 눈이 딱 마주쳤다.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물방울 팬티의 소유자인 그 여자애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이고.
또 만나버렸다.
I go.
집에 가야지!
- 이세계 하렘 라이프 시작!
다음화도 서비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