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 자체에 대한 질타도 있었지만, 대체 1학년 때 뭐했느냐는 둥, 이래가지고 대학 갈 수 있겠느냐는 둥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공격했다.
"이건 말이지, 여기에 나온 5개만 외우면 다 풀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외우는 방법은…."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저렇게 잘 알면서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는 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된 지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미의 특강(?)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1시간은 훌쩍 지나고 거의 2시간이 되도록 계속 하고 있을 때 엄마께서 돌아오신다.
"다녀오셨어요."
이, 이걸 기회로 적당히 마무리 지으면 안 될까? 애초에 시험 기간도 아닌데 2시간 이상 공부하는 건 반칙이라고.
엄마는 책상 앞에 모여 있는 우리를 보시고는 활짝 웃음 지으신다.
"어머. 둘이 공부하고 있었던 거니? 다른 집 남매들은 맨날 싸우기만 한다는데 너희는 정말 사이좋게 지내서 보기 좋구나."
사이가 좋은 남매…. 정말 귀에 좋은 울림으로 닿는 소리다.
그렇지만, 선미는 엄마의 말씀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쓰고는.
"무슨 소리야, 엄마! 이런 별 볼일 없는 오빠랑 내가 왜 사이가 좋아?"
라고 말한다. 크흑. 할 말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미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었으니.
"우후후. 수줍어하기는. 가끔은 오빠한테 응석도 부리고 하렴."
"노, 농담 마!"
선미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홱 돌린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린다.
잠시 후 그 애는 멍하니 있던 내 쪽을 쳐다보며 소리친다.
"뭐해! 빨리 책이나 보라고!"
"아, 알았어."
이거, 아무래도 저녁을 먹을 때까지 계속 해야만 할 것 같은 아찔한 예감이 드는군.
별수 없지. 오늘은 1학년 과목 복습하는 날로 정할 수밖에.
그렇게 해서 정말로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식사 후에 재시작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4명이다 보니, 식탁도 4인용이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아침이나 점심은 다 같이 모여서 먹는 날이 거의 없다 보니 이 식탁이 꽉 차는 것은 저녁뿐이라고 할 수 있다. 선미의 자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바로 옆자리지만, 그럼에도 얼마 전까지는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처럼 느껴졌었다. 그렇다 보니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신기하기만 느껴진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선미가 난데없이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뭐야? 무슨 날이었어? 어디 보자. 생일은 아니고, 밸런타인데이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밸런타인데이인데 나한테 무슨 날인지 확인을 할 이유가 없잖아.
"뭐야? 설마 벌써 잊어버린 거야?"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는 눈을 부라린다. 그래 봤자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할 수 없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미안. 무슨 날이더라?"
"뭐라고!?"
선미의 반응을 보아하니 꽤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 애는 목소리를 높인다.
"저번 시험 잘 본 것에 대한 포상으로 오빠가 양파빵 사주기로 한 날이잖아!"
뭐야? 양파빵? 양파빵이라면, 먹어본 적은 없어도 요즘 유행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이름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카페형 제과점 OOOO에서 파는 중인 비싸지만 맛있다는 빵 덩어리지. 그렇지만, 난 당연히 그런 약속 따윈 한 기억이 없다. 뭐, 보나 마나 뻔하다. 이 세계의 내가 멋대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지. 그런 사실을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지만.
이거야 원, 대체 이 세계의 나라는 놈은 어떤 인생을 살았던 거야? 핸드 드립 커피를 만들고 선미한테 양파빵을 사주기로 약속을 하고. 내가 내 인생에 대해 상상이 되질 않으니….
아니, 그나저나 네가 시험을 잘 본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가 사줘야 하는 거지? 나는 이번 시험 완전히 죽 쒔는데?
아무리 투덜대도 어쩌겠는가. 원망하려면 어제까지의 나를 원망해야지.
"그, 그랬지? 미안.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흥. 오빤 나하고의 약속이 소중하지 않다는 거지?"
"아니, 아니. 정말이라니까? 그래서, 언제 만날까?"
그 말을 들은 선미는 입을 삐죽거린다.
"뭐야? 그것도 잊어버린 거야? 수업 먼저 끝난 사람이 연락하기로 했잖아?"
"그, 그랬지? 하하하."
"흥! 이 내가 없는 시간을 내서 오빠에게 어울려주기로 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와하하!"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닌데…. 설명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습관을 들일 걸 그랬네.
그나저나 수업이 끝나고 나서 연락을 한다고?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끄럽게도 난 지금까지 동생의 핸드폰 번호도 정확히 모르고 살아왔다. 내 핸드폰에 기억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지금의 내 핸드폰'에는 등록되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이따 방에 가서 확인을 해 봐야겠다.
그때 엄마가 불쑥 말씀하신다.
"선미가 매일 양파빵, 양파빵하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성관이 너는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니? 너무했구나."
"어, 엄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에엑. 그랬단 말인가? 나는 힐끔 선미를 바라본다. 그 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친다.
"뭐, 뭘 봐! TV나 쳐다보란 말이야!"
으음.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군. 이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을 못 했다는 점이 미안하게 느껴진다.
"미안해 선미야. 오빠가 요즘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아.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흥. 내 일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 이거지?"
"아니. 그렇지 않아. 너와의 관계가 내겐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
"……."
막상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민망한 느낌도 들었다. …그야 사실대로 말한 거지만 지나치게 적나라한 표현이긴 했다.
선미도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한 듯하다.
"바, 바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미는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렸고, 그 후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말한 나 역시 어색했기에 그 이후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생각한다.
처음 점프하고 돌아왔을 때도 많은 일들이 변했었지만, 이번 점프의 영향은 더욱 놀랍게 여겨졌다. 선미가 원래 이런 귀여운 성격이었는데,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아서 모르고 지냈었던 건가? 어쩌면 인간을 판단할 때 제일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친밀도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 많이 달라진 관계로 인해 아직도 적응이 안 될 지경이지만, 어쨌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옹다옹하면서도 사이좋은 남매라는 게 바로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후후. 내일은 양파빵도 같이 먹으러 갈 테고 말이야. 동생과 단둘이 외출한 지가 얼마 만인지.
…생각해보면 처음인가? 대신 지출이 좀 있겠지만 그래 봐야 빵쯤이야 얼마든지 사줄 수 있지 뭐.
그러고 보니 어제 피자도 그렇고, 며칠 만에 안 쓰던 돈을 엄청나게 쓰게 되는 것 같구만. 여자 친구도 아닌데 사이가 좋아질 때마다 돈이 나간다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
자. 어쨌든 내일을 기대하며 이만 자 볼까? 이거, 첫 데이트하기 전날 밤의 기분인걸?
아니지. 가만있어봐.
지금 이 상황에서 한 번 더 점프를 한다면, 그래서 지금보다 더 사이가 좋아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 평범한 남매 사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한 번만 더 바꾼다면…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이가 될 것이 아닌가?
물론, 한 번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건 좋지 못하다. 그런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내가 점프를 함으로써 누군가가 피해를 본다면 몰라도,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역시….
한 번만 더 점프를 해볼까?
.
.
.
좋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심을 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흰색 돌을 다시 꺼낸다. 돌은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암시하듯 하얗고 투명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추억이 나타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돌을 품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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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여동생 만들기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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