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쩝! 오늘 여러 번 당신을 불러서 저도 참 미안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도대체 어쩌자고 제 등에 업혀있는 이 소녀에게 술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무모함을 주셨습니까?
제미니를 업고 숲길을 돌아오며 나는 악을 쓰고 싶어졌다.
카알이 빚는 술은 맛은 좋았지만 진짜 독했다. 그런 걸 마치 사과 주스처럼 마셨으니 제미니는 그대로 기절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나 또한 그렇게 말짱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제미니를 떨어트리지 않고 걸었다.
이미 해는 져서 숲 속은 캄캄해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돌아다닌 숲이라서 취한 정신에도 얼마든지 자신 있게 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다. 특히 등에 업힌 제미니가 간혹 발작적으로 '잇힛히힛!' 하고 고스트 같은 웃음소리를 내서 나를 질겁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못 견딜 노릇이었다.
"이히히힛! 히힛!"
"좀 그만 웃어!"
"음냐, 거 참 우습네, 냠."
"뭐가?"
"몰라. 그냥 우스워. 까르르륵."
크아아악! 이 망할 계집애, 늑대가 물어가든 말든 집어던져 버리고 튀어 버릴까?
풀뿌리에 걸려 거의 쓰러질 뻔 하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그 때 제미니가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려주우!"
"넌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 찬물 뒤집어쓰고 자야 돼."
"이대로 들어가면 나 맞아 죽어."
음. 그건 맞는 말이군. 아무래도 술이 좀 더 깬 다음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난 제미니를 내려놓고 그 옆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제미니도 내 옆에 다가와 우리 둘은 나무를 기대고 나란히 앉았다.
"후와! 넌 10살 이후로 키는 안크고 몸무게만 불렸냐?"
온 몸에 땀이 끈적거렸다. 얼굴에 가랑잎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나는 그것을 떼어내었다.
제미니는 꿈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들어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자기 어깨에 척 얹었다. 즉, 내 겨드랑이에 파묻혔다.
"추워, 제미니?"
"우키기기키긱!"
"…."
내가 허공을 향해 소리 없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제미니가 내 겨드랑이에 대고 말했다.
"정말 우스워. 냠냠, 드래곤 라아자아."
"뭐가 우습냐?"
물론 절대로 내 겨드랑이가 대답한 것은 아니다.
"우습잖아."
"그러니까 뭐가?"
"우스운데."
"…으악! 저게 뭐야?"
"엄마야!"
제미니는 마을 대로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그녀 앞에서 영주님의 늙은 사냥개가 하품을 했을 때 이후로 항상 그래왔듯이 나에게 덥썩 안겨 들었다. 난 껄껄 웃었고, 제미니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습다는 것은 이런 걸 말하는 거지."
"후치 네드발! 너!"
"술이 확 깨지?"
제미니는 사과 향기가 나는 한숨을 쉬며 내게서 떨어졌다.
조금 후 숲속에서 우석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제미니는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바람 소리야."
"내가 바람 소리도 모를 것 같아?"
난 잠시 얼이 빠져서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밤만 되면 집 밖에도 못나오는 겁쟁이지만, 분명히 제미니는 숲지기의 딸이며 숲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제미니가 바람 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 절거럭거리는 소리. 마지막은 검을 찬 사람이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였다. 눈 앞이 빙 돌면서 다리가 풀렸다.
나는 나무를 짚으며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제미니도 일어서서는 내 등 뒤에 숨었다.
나는 제미니를 나와 나무 사이에 서게 만들고, 앞을 살폈다. 숲 속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분명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숲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사, 산적인가봐!"
나는 제미니의 상상력에 깊은 경의를 보내었다.
"새로운 형태의 산적이군. 이름은 횃불단 정도 될까?"
횃불을 저렇게 밝히고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산적일 수는 없다.
제미니는 내 말 뜻을 알아듣고는 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흠. 여기는 영주의 숲이고, 내 뒤에는 영주의 숲지기의 딸이 있으니, 나로선 산적이 아니라면 별로 겁날 것은….
"아차, 들키면 끝장이다!"
"응?"
"우리 둘은 취했잖아? 네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히이익!"
제미니는 당장 나무를 타고 올라갈 자세를 취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발상이 가능한 거지?
예상대로 제미니는 취해서는 도저히 나무를 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나무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는 소리 높이 비명을 지른 다음에 깨달은 것이다.
아이고,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이젠 정말 지겹사옵니다.
"누구냐!"
사람들의 다급한 걸음 소리에 박자를 맞춰 그들이 차고 있을 칼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사방에서 한손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엔 롱 소드(Long sword)를 뽑아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영주의 숲에 밤중에 돌아다니다니, 넌… 아니, 뭐야? 후치, 제미니?"
나와 제미니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했다.
"에헤헤헤…."
병사들은 모두 하드 리더(Hard Leather)를 입고 있는 영주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롱 소드를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다.
병사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샌슨 퍼시발이 피식거리며 다가왔다.
샌슨 퍼시발은 성의 대장장이의 아들로 성의 경비대 대장이다. 성에 초를 상납하는 초장이 아들인 나와는 잘 아는 사이다. 나보다 10살이나 더 많아서 롱 소드도 차고 병사도 인솔하지만, 속마음은 나와 별 다름없는 악동이다.
샌슨은 웃으며 내게 다가오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응? 뭐야, 이건? 너희들 술 마셨구나?"
"에헤헤헤…."
샌슨은 나와 제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를 퍽 불안하게 만드는 웃음을 지었다.
"음. 후치. 드디어 네가 이 정도의 일을 벌이게 되었군. 돈이 어디서 나서 술을 샀냐? 하긴 사랑의 힘으로, 아니 욕망의 힘이랄까? 어쨌든 술을 구했군. 그리고 제미니를 잔뜩 취하게 했단 말이지. 의외로 소심하군. 취하게 해놓지 않으면 자신이 없었나 보군?"
"오해예요!"
제미니의 비명은 잘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위의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건 넘어가 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번엔 샌슨을 불안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조금 전 샌슨의 입가에 있던 웃음을 이번엔 내가 지어보였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아소리 요란한데…"
샌슨은 당장 내 말을 잘라들어왔다.
"위험한데 밤중에 돌아다니면 쓰겠냐? 크험! 흠.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오늘도 웬 처녀 남의 눈길 피해 방아소리를 찾네."
"후치!"
이번엔 주위의 병사들이 샌슨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일부는 내게 다가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해… 부탁이야."
"달빛에 드러난 처녀, 눈에 익은 걸음걸이."
샌슨은 내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재빨리 샌슨을 껴안았다. 샌슨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세 명이나 되는 병사가 샌슨을 꽉 잡은 채 껄껄거리고 웃었다.
"미풍에 스치는 처녀, 코에 익은 향기."
"후치! 임마! 형님! 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샌슨의 애타는 외침을 못들은척 하며 계속 여유있게 노래를 했다. 제미니마저 그런 샌슨을 보며 키들거렸고, 병사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혀가 매끄러웠다.
"부엌의 음식냄새? 빨래터의 잿물냄새? 저장고의 와인냄새?"
병사들은 손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바짝 긴장했다.
'주방의 마가렛인가?'
'빨래터라면 그 금발머리, 그래. 앤이다.'
'저장고라면 설마 그라디스인가?'
병사들은 재빨리 의견을 교환했다. 확신하건대 루트에리노 대왕이 영광의 7주 전쟁 때 가졌던 작전 회의도 이보다는 덜 진지했을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노래를 계속했다.
"셋 중 하나 확실한데, 이 냄새는… 이 냄새애애애느으으은…."
병사들은 할딱거리며 날 응시했고, 샌슨은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못해 이제 눈물을 뽑을 지경이 되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한 달은 샌슨 옆에 가까이 못가겠는걸.
그때였다.
"어랏? 이게 무슨 냄새야?"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분명 냄새, 독특한 듯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때 제미니도 눈을 껌뻑거리더니 말했다.
"꽃향기 같은데… 무슨 꽃인지 모르겠네?"
병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 병사들 등 뒤의 숲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제게서 나는 향기일 거예요."
숲을 헤치고 예닐곱 살 정도의 꼬마가 걸어 나왔다. 난 취한 상태에서 그 꼬마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는 제미니가 확실히 사람을 잘 알아본다.
"드래곤 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