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이야! 화이트 드래곤이다! 우와, 멋있어!"
"흥, 달밤에 뱀 밟았을 때의 네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군 그래?"
"후치 네드발!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그랬지?"
나는 피식 웃었다. 제미니는 펄쩍 뛰면서 누가 들었을 새라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계집애. 뱀을 밟았으면 밟았지 왜 그렇게 덥석 안겨? 그렇게 안겨들면서 설마 키스 한 번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그 때를 떠올리고는 조금 전과 좀 다른 의미로 웃었다. 제미니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고, 나는 딴청을 피웠다.
"저것 봐! 후치, 저기, 저 애가 드래곤 라자인가 봐!"
제미니는 어느새 다시 그 화이트 드래곤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모습이니까.
나는 제미니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역시 하얀 말을 타고 걷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고상한 취미군. 흰 드래곤 옆에 백마라.
나는 코방귀를 뀌었다.
"드래곤 라자야 드래곤에게 잡혀 먹힐 염려는 없겠지만, 저 말은 정말 불쌍하군."
"응?"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드래곤 옆에서 저렇게 나란히 걷기 힘들걸."
"어머? 그렇구나."
"어쩌겠어. 자기가 하얗게 태어난 잘못이지. 그러니까 화이트 드래곤 옆에서 '혹시 절 잡아드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라고 묻는 눈으로 걸어
야 되는 것이고."
"하하! 후치,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네."
"하하하! 이 놈, 정말 그럴듯하게 말하는군?"
내 말을 들은 주위의 어른들과 제미니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나는 침을 퇘 뱉었다.
화이트 드래곤을 귀족으로 바꾸고 백마를 평민으로 바꾸면 바로 우리 신세를 표현하게 되는 은유였지만, 우리 마을의 단순한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아듣지 못했다.
제기랄! 내가 이상한 것인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도 좋고 평민들을 괴롭히는 이야기 속의 영주들과는 아무런 유사점도 없다.
제미니는 웃다가 다시 발돋움을 했다. 주위에 몰려선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집애, 도대체 남들 클 때 뭐한 거야?
난 입맛을 다신 다음 제미니의 허리를 잡았다. 제미니는 눈을 부릅 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제미니."
나는 제미니를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 주위의 어른들 틈에서도 좀 더 잘 보이게 해주었다. 제미니는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좀 잘 보이냐?"
"으응. 그러고보니 저 드래곤 라자는 10살도 안 되어 보이네?"
"쳇. 드래곤 라자는 나이와 상관없어. 드래곤이 보기엔 5살 꼬마든 80살 현자든 모두 어린애로 보이니까."
주위의 어른들이 나에게 놀란 눈길을 보내었고,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제미니는 어쩔 줄 몰라하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워서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여러가지 하네.
나는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앞의 광경만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장관이었다.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300 큐빗은 넘을듯했다. 간단히 머리와 목 부분이 100 큐빗, 몸통 100 큐빗, 꼬리가 100 큐빗이었다. 걷고 있느라 날개는 접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 날개는 몸의 길이와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먼 길을 여행해왔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머리는 꼿꼿이 곤두서 당당하게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저토록 거대한 생물이 어쩌면 저렇게 우아하게 걸을 수 있을까?
소나 말도 가끔 자기 목을 무거워하는데, 화이트 드래곤은 훨씬 무거울 저 목을 늘어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람도 간혹 다리를 끌지만, 화이트 드래곤은 사슴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창공을 질주하는 가벼움으로 화이트 드래곤은 인간들의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라면 1,000셀을 준다고 해도 서고 싶지 않을 자리, 즉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는 말을 탄 어린 소년이 걷고 있었다. 말도, 망토도, 입고 있는 옷도 그 소년에겐 죄다 너무 컸다.
소년은 긴 여행에 지친듯 자기를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에게도 별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수줍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 뒤쳐져서는 기사 약간 명과 보병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수도에서부터 화이트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를 호위해온 병사들인 모양이다.
내가 조금 전 말했듯이,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이야 어쩔 수 없이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걸어야 했지만, 그 병사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신히 일행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뒤쳐져서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래곤 라자 할슈타일 만세!"
"할슈타일 만세!"
소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더욱 고개를 숙여 머리 전체를 옷깃 속에 파묻어버릴 태세였다.
만세라고? 10살도 안된 꼬마에게 만세라니 정말 웃기는군. 차라리 '무병장수하소서!' 라고 말하지.
"위대한 드래곤 캇셀프라임 만세!"
"캇셀프라임 만세!"
저 허연 드래곤은 인간들이 외치는 만세라는 의미를 알면 얼마나 웃을까?
저 드래곤의 이름은 캇셀프라임이고, 그 옆의 드래곤 라자 꼬마의 이름은 할슈타일인 모양이다. 가난한 우리 마을의 촌사람들이 그렇게 세상 물정에 해박할 리야 없다. 영주의 성에서 나온 사람들이 먼저 고함을 지르면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따라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아마 오늘이 가기 전에 그 이름을 까먹을지도 모르지.
"아무르타트들 반드시 무찌르십시오!"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요!"
나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아무르타트. 그 이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적어도 이 때만큼은 마을 사람들의 외침에도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나 역시 팔을 휘두르며 외치고 있었을 정도니까.
"빌어먹을, 아무르타트를 죽여버려요! 그 새끼를 박살내!"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제미니는 하마트면 떨어질 뻔한 모양이다. 제미니는 기겁해서 내 머리칼을 쥐어뜯었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서 제미니를 붙잡았다.
"어, 미안해. 제미니."
"내려줘!"
제미니는 화난 목소리로 내려달라고 외쳤고. 난 순순히 내려주었다.
제미니는 잉잉거리며 내 팔을 꼬집었다.
"일부러 그랬지! 응응?"
난 정신없이 꼬집히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제미니의 입을 틀어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쉬잇! 쉿! 제미니, 조용히 해! 드래곤은 계집애를 무척 좋아한단 말이야. 시선 끌 짓 하지마!"
제미니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잔인하게 말했다.
"씹기가 좋아서 그런대…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때는 한 번에 꿀떡 삼키지만 너 정도의 계집애는 저 이빨로 꼭꼭 씹어서 얌얌 먹는다구! 특히 빨강머리 계집애는…"
예상대로 제미니는 발발 떨면서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등 뒤로 숨는 바람에 내가 빙긋 웃는 것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줄도 모르고 화이트 드래곤은 점잖게 걸어가고 있었다. 과연 멋있는 놈이었다. 저렇게 강력해 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그 옆에 있는 조그만 꼬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들 정도로 멋있는 놈이었다.
이윽고 길다란 행렬은 영주의 성이 있는 언덕배기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거나 몇 사람씩 모여서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 영주님, 오늘 잠은 다 잤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허허. 저런 드래곤이 안뜰에 있는데 곤히 잠들 수 있겠나."
난 어른들의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 때 내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근사하더군. 저 정도면 아무르타트도 끝장이야."
"글쎄. 아무르타트란 놈, 워낙히 괴물이라서."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머릿속은 불타듯이 뜨거워진다.
아무르타트, 빌어먹을, 뒈져버릴, 칵! 썩은 두엄 더미에 쳐 박고, 똥물을 뒤집어 씌우고, 석달 열흘 동안만 두들겨 주고… 에잇! 내가 구사하는 말은 왜 항상 이 모양이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욕설이라고는 이 마을의 어른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아무런 생각없이 그 앞에서 뱉어내는 욕설들 뿐이다.
내 눈에 불꽃이 튀긴 모양이다. 제미니가 놀라서 내 팔을 붙잡았으니까.
"후치?"
"아, 제미니. 가자. 해가 저물겠는걸."
"응. 그래. 후아! 멋있었어."
제미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난 갑자기 짓궂어지고 싶어졌다.
나는 제미니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런데 말이야. 드래곤은 너같은 빨강머리 계집애를 몸살나게 좋아한다고 말했지? 아까 네가 내 등 뒤에 숨었을 때 말이야, 저 놈이 입맛을 다시며 널 봤는데, 넌 못봤지?"
제미니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마 오늘 밤에 제대로 못 자는 건 우리 영주님 말고 한 사람 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