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공터가 나왔다.
적당한 몸집에 갈색 머리, 사람 좋게 생긴 중년의 얼굴. 거리에서 만났다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평범하게 생긴 사나이가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네드발군 왔는가?"
갈색 머리 중년 남자는 도끼를 내려놓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저것은 제미니에겐 불가사의한 일이다. 영주의 숲지기의 딸인 제미니로서는 숲지기인 자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땔감을 해 쓸 수 있는 갈색 머리 중년 남자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제미니는 경계하는 눈빛을 띄면서도 다리를 살짝 구부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알."
나도 인사했다.
"참 게으르군요, 카알. 해가 질 때 밤에 쓸 장작을 쪼개다니."
"하하하! 네드발군, 진짜 게으른 건 그게 아니지. 장작 쪼개기도 귀찮아서 그냥 떨면서 자는 게 정말 게으른거라네. 오래간만이군요. 스마인타
그양."
스마인타그양이라고?
카알은 제미니의 부모나 마을사람 대부분이 '제미니', 아니면 '젬'이라고 불러서 나도 가끔 잊어 먹는 제미니의 성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며 제미니를 이렇게 불러준다.
제미니는 배시시 웃었다.
어이구! 징그러워.
"말이 되는 말을 해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냐, 네드발군. 내 친구 중에는 그런 녀석이 있어요. 나무 쪼개기 싫다고 벌벌 떨면서 자다가 감기에 걸려서 죽을 뻔한 친구지."
"아니, 감기에 걸린다고 누가 죽어요? 점점 허풍만 느는군요."
"이런, 이런. 도무지 연장자의 말이 통하지 않는 괘씸할 정도로 씩씩한 청년이로고. 허허! 들어오게나. 스마인타그양, 들어오세요. 아름다우신 숙녀께서 내방하셨는데 이렇게 세워둬서야 예의가 아니죠."
"그럼 삼가 실례하겠습니다."
제미니는 우아하고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악! 지상 최대의 닭살!
우리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남아있던 해가 꼴까닥 넘어갔다.
카알은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초를 밝혔다. 제미니는 눈이 부시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하긴 영주의 성이나 초장이인 우리 집 아니면 어디서 촛불을 구경할까?
카알은 우리를 앉힌 다음, 먼저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책보다는 술병이 더 많은 책장으로 걸어갔다. 책장에 있어야 할 책들은 모조리 바닥이나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는 술병과 잔을 들고 와 우리 앞에 놓고는 술을 따랐다.
"들게나, 네드발군. 사과주라네. 잘 익었을 겁니다. 스마인타그양."
아마 제미니의 집에서 보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별로 다를 바는 없다. 하지만 우리 둘은 능청스럽게도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나야 양조장 막내 미티 녀석에게 간혹 술찌기를 얻어다 먹기도 하지만, 제미니는 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앙큼스럽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는 잠시 어떤 말로 건배할지 생각했다.
"어디 보자… 음, 그렇지 두 청춘 남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카알!"
내 비명이 조금 처절했나보다.
카알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어? 싫은가? 그럼 그들의 용기와 미모를 타고날 그 2세를 위해…"
제미니는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어찌 정숙한 요조숙녀인 자신을 나같은 난봉꾼과 연결하여 생각하느냐는 격조 높은 비난이 섞인 눈길이었
다. 나로선 심히 억울무쌍한 일이다.
그 때 내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르타트의 파멸을 위해 건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