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아로는 조선의 기록에서 흔히 노토라고 지칭되는 로툰(로오톤 마파)의 장남이다. 로툰이 누르하치 속하로 들어간 이후 아로 역시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누르하치의 산하로 들어갔는데, 이 때 누르하치는 로툰의 가문과의 연결 강화를 위하여 그와 사돈관계를 맺고 아로를 사위로 맺었다. 다만 이는 청의 기록에 의한 바는 아니며 조선의 정보 수집 결과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다.
누르하치의 속하로 들어간 아로는 1605년 부친과의 반목끝에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로툰은 그런 아로를 죽이라며 조선에 무력시위까지 자행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아로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고심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일단 황급히 죽이지 말고 후에 로툰의 태도를 보아가며 처결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1 하지만 아로를 관리하고 있던 북병사 김종득은 아로를 죽여버렸고 이로 인해 문제가 복잡해졌다. 로툰은 뒤늦게 일을 수습하기 위해 누르하치에게 군대를 빌려 조선에 보복전을 하려 했다.
자칫 전투로까지 발전할 수 있던 사안은 누르하치가 조선과의 충돌을 자제하고 아로의 문제에 대해 이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아마도 아로가 부친을 등진 것을 자신까지 등진 것으로 파악한 것에 더불어, 조선과의 충돌을 꺼려하던 당시의 누르하치의 태도가 해당 사안의 평화적 해결을 만든 것 같다.
이렇게 누르하치의 '사위'였던 아로의 문제는 끝났고 아로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아로가 조선의 정보수집결과대로 누르하치의 사위였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아로가 이르게 죽어버린 데다가, 심지어 죽음의 형태 역시도 로툰과의 반목으로 조선으로 갔다가 죽어버린 것인 탓에 후금/청의 기록에서 아로에 관한 기록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과연 그가 누르하치의 진짜 사위였는지 아니면 그가 누르하치의 사위였다는 것이 그저 조선이 번호들로부터 수집한 정보의 추합결과에 불과했는지에 관하여서는 여러가지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르하치의 친딸 중에서 아로와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딸은 청사고나 다른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로가 본인의 부친과 누르하치를 등지고 조선에 망명한 상태에서 김종득에게 처형당한 탓에 아로의 혼인 자체가 일종의 기록삭제조치를 당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 더불어 과연 로툰의 장남 이라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 누르하치가 딸을 시집보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위치의 인물인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누르하치의 친딸이라 한다면 훨씬 가치있는 정략결혼, 요컨대 거대세력인 울라의 군주(부잔타이)라거나, 명망 높은 하다나라 씨족의 계승자(우르구다이)에 대한 정략혼 매개체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정략혼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로가 누르하치의 사위로 파악된 것은 단순히 번호들의 진고나 로툰의 허장성세를 믿고 내린 성급한 오판이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로툰의 가문은 비록 누르하치가 친딸을 시집보낼 만큼 가치 있는 가문은 아니더라도 정략혼을 맺기에는 충분히 훌륭한 대상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정략혼을 상당한 빈도로 활용한 군주였으므로, 아마도 누르하치가 실제로 로툰과 모종의 결연관계를 맺기는 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 볼 것은 조카딸이나 암반의 딸을 양녀로 맞이하여 시집보내는 경우이다. 특히 누르하치는 정략혼을 맺을 가치는 있으면서도 본인의 딸이나 동생들의 딸, 즉슨 조카딸들을 시집보내기에는 다소 급이 다소 떨어지는 동해 여진계 암반들에게는 자신의 속하 암반들의 딸을 시집보내면서도, 그 암반들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입적시킨 뒤 시집보내는 정략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주목할 만 하다. 1599년 동해 여진의 암반 보지리가 누르하치에게 건주 세력과의 혼인관계를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그에 이어서 다른 동해 여진계 암반들도 보지리와 마찬가지로 혼인관계를 요청했을 때에 누르하치는 자신의 휘하 암반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시집보냈는데2, 이 때의 혼인 역시도 자신의 암반들의 딸들을 자신의 양녀로 입적시킨 뒤 시집을 보낸 것으로 판단된다.3
로툰 역시 보지리, 그리고 그와 함께 건주 세력과의 정략혼인을 요청한 암반들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취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 것을 보건대 누르하치는 아마도 자신의 암반의 여식을 양녀로 취한 뒤 로툰의 장남인 아로에게 시집을 보내는 식으로 로툰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 아닐까 한다. 양녀를 시집보냈다고 해도 조카사위나 손녀사위, 양녀의 사위 역시도 '어푸(부마)'라고 호칭되었던 여진의 특성상 아로가 보통의'사위'로 취급되기에는 충분했고, 그렇기에 조선에도 역시 아로가 누르하치의 보통의, 즉슨 딸의 사위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르하치의 손녀사위였던 피옹돈 역시도 조선에는 일반 사위로 알려졌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앙녀의 사위라면 차별 없이 그냥 사위라고 호칭해도 별 다른 문제가 없기도 하므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9일
2.만주실록 기해년 음력 1월
3.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26946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