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누르하치가 겅기연 한을 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누르하치는 자신의 속하 암반 보지리를 동해 여진 세거지역으로 파견했다. 그 때 누르하치는 보지리에게 주변의 후르하계 동해 여진 암반들을 설득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공격을 해서라도 후금에 복속케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누르하치가 보지리를 선택하여 동해 여진에 파견한 이유는 그가 후르하 출신으로서 동해 여진의 생리에 해박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가 17년 동안 누르하치를 섬긴 인물이라는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동해 여진계 인물로서 그토록 자신을 오래 섬긴 인물이었기에, 누르하치로선 그에 대한 믿음이 각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그를 후금의 대리인으로 세워 동해 여진 지역에 대한 회유 혹은 무력복속을 진행코자 했다. 보지리의 파견에는 후금의 군병이 동참하진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후금의 상인들만이 따라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600년대 초 로툰을 매개로 하여 번호들을 간접복속시킨 전략과 일맥상통하다.1
이 때 파견된 인물. '보지리'에 대해, 그가 누르하치의 어푸(efu, 부마)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누르하치가 보지리를 파견할 당시에 대한 기록상에서 그가'사위(hojihon)'라고 서술되었기 때문이다.2 또한 이 이후 후르하 계통 동해 여진 세력이 누르하치에게 재복속되었을 때에 후르하의 각 마을의 우두머리에게 '딸을 주고' '사위가 되게하였다'는 과거의 일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보지리 또한 이 우두머리들 중 한 명에 속한다는 것 역시 염두점이다.3 더불어 이 이후의 기사에 후르하 국(의 암반들이) 아내를 얻고 사위가 된 것이 20년이 되었다는 표현이 보이기도 한다는 것 역시 고려점이다.4 여기서 언급된 20여년전 딸을 받은 후르하 암반에도 당연히 보지리가 포함되어 있다. 보지리는 1599년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건주에 혼인의사를 내비쳤고 그 결과 실제로 혼인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후르하 암반들 중 최초로 건주와 혼인관계를 구축한 인물임을 생각해 보자면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딸을 받았다'거나 '사위'라는 표현이 보지리 혹은 보지리를 내포하는 집단에 많이 쓰인 탓에 보지리에 대해서 그가 누르하치의 어푸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푸란 누르하치의 딸뿐만이 아니라 조카딸, 손녀등 일족 여성과 혼인한 이들에게 폭넓게 쓰인 호칭이다. 그러나 청의 실록상에서는 보지리가 혼인한 대상이 다만 '나라의 암반들의 딸(gurun i abmasai sargan)'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선은 그리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5만문노당의 기록이 마치 누르하치가 보지리를 포함한 후르하계 암반들에게 본인의 딸을 주었다는 서술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문장구성의 일부가 생략되었기 때문일 뿐이며, 보지리와 다른 후르하계 암반들이 혼인한 대상은 건주/후금의 암반의 딸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실제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보지리는 사료상에서 단 한 번도 부마를 뜻하는 어푸로 호칭되지 않았다. 이렇게 보자면 보지리는 누르하치의 친딸은 물론이고 그의 일족의 여식들과도 혼인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장구성이 지속적으로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 역시도 다소 석연치 않다.
여기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누르하치의 양녀와의 혼인 가능성이다. 누르하치가 자신의 암반들의 여식들을 우선 양녀로 입적시킨 뒤 후르하계 암반들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하면 어떨까? 실제로 누르하치는 양자나 양녀를 꽤 빈번하게 맞이했다. 비록 그 입적 대상자중 확인되는 이들 대부분은 누르하치의 혈족이었으나 누르하치 휘하의 오대신중 한 명이었던 후르한 같은 경우에는 누르하치와 어떤 혈연관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양녀 역시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었지 않을까?
비록 종친의 경우에 해당되는 경우였지만 누르하치가 양녀들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집보낸 경우는 어느 정도 포착된다. 대표적 예시로 슈르가치의 딸이나 손주딸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궁정에서 양육한 뒤 몽골계 세력, 예컨대 코르친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다루기에는 좀 이룬 순서이지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1626년 코르친의 수장 오오바 후왕 타이지가 누르하치에게 딸과의 혼인을 청하자 누르하치는 조카손녀이자 양녀였던 준저를 그에게 시집보낼 것을 약속했다.6
이러한 경우를 보건대 누르하치가 자신의 암반들의 딸들을 양녀로 약식으로 받아들인 후 보지리를 포함한 후르하의 암반들에게 시집을 보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하는 것 같다. 이렇게 된다면 실록과 노당의 기록간 차이 역시도 메꾸어 지게 된다. 암반들의 자식을 시집보낸 것이되, 양녀이니만큼 보지리를 '사위'로 호칭해도 별 문제가 없으며 후르하계 암반들에게 딸들을 시집보낸 것 역시 맞기 때문이다.
보지리에게 '어푸'라는 호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부분이 여전히 지적점이긴 하지만, 보지리 자체가 사료상에서 언급이 그리 많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보니 이 부분 역시도 쟁점의 소지가 있다. 어쩌면 그의 불미스러운 일7과 관련하여 어푸라는 호칭이 쓰이지 않게 제한된 것일 수도 있을 듯 하다.
필자의 추정은 다소 빈약한 부분이 존재한다. 뭣보다도 보지리와 혼인관계를 맺은 여성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기에 결국 결정적인 확증이 존재치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보지리의 위치나 누르하치와 그의 관계가 '어푸'였거나 그에 필적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누르하치가 보지리가 일으킨 '불미스러운 일'에 관하여 상당히 진노한 것도, 그가 자신에게 다시 귀부하자 다소 싱겁게 용서한 것도 결국 그가 '어푸'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마지막에 첨언하자면,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상에서 보지리에게 쓰인 '라고 불리는 사위(gebungge hojihon)'라는 표현은 같은 사료상에서 누르하치의 실제 어푸였던 엉거더르와 사할리얀에게도 쓰였던 표현이라는 점 역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1.이상의 견해는 후금 건국사)184편:1616년 1월 보지리의 동해여진 파견(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179090)의 논지와 동일하다.
2.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1월
3.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11월
4.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2월
5.만주실록 기해년 음력 1월. 정확히 말하자면 보지리를 포함한 여섯 암반이 누르하치에게 혼인관계를 요청했기 때문에 '여섯 암반의 딸'을 그 여섯 암반들에게 처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만주실록 천명 11년 음력 5월 21일
7.이는 추후 서술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