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소박한 행복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낯선 바람이 불었다.
인민군의 서울 입성
서울은 재빠르게 바뀌었다.
태극기가 내려지고
새 깃발이 올라갔다.
서울의 새 주인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곧이어 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
그들은 사람들을 좌와 우,
두 부류로 나누기 시작했다.
거리에선 인민재판이 열렸다.
군중이 죽여라 외치면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피난 가지 않은 서울 시민들은 새 주인에게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사방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고 아우성 소리가 나는데, 석양이 해 진 다음에 걸어야지,
내 얼굴을 못 알아 볼테니깐. 해지기를 기다려 가지고, 이제 좀 그물그물 할 때 내려오니깐요."
"아무튼 전부 길에는 그냥 파출소 앞마다 이렇게 사슬에 맨 사람,
노끈에 맨 사람, 허리에다 매서 이렇게 전부 연달아서 매가지고 행렬을 해 섰더구만요."
"근데 저기 섰는데 내가 아는 문인들 몇이 거기 옆얼굴이 뵈이더란 말이야.
근데 참 인간이란게 우습더군요."
"척 보자, 물론 그이들이 저기 잡혀 갔구나, 하니 가슴이 철렁하고 기가 멕히면서도
저 사람들이 혹시 돌아다 나를 보면 어쩌나.
내 얼굴을 보고, 뭐 나도 잡힌 이상에 모현숙이도 저기 있다는 말을 하면 어떡하나."
"사람이란 건 그 급할 때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 자기 자신이 어떻게 방어를 해야 할까,
그 생각이 정말 먼저 난다는 걸, 내가 그 때 느꼈어요."
"나를 돌아다 보지 말아다오."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건장한 청년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의용군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남한 청년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민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선으로 나갔다.
어쩌면 내가 총을 겨눈 군인이
어릴 적 내 친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50년 7월
전선에서 뒤걸음질만 치고 있던 국군은 병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전장에 내보낼 청장년층 남자가 부족하자 국군은
병역의무가 없는 앳된 소년들에게 군입대를 권유했다.
"부모님은 가는 걸 반대, 극구 반대죠.
'니가 2대 독자라는 사실을 모르느냐' 하며는 알고 있는데..."
"...'가서 만일의 경우 잘못되면은 손이 끊긴다.'
그때는 손 끊긴다는게 굉장해집니다. 젊은 어무이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아부지는 아예 돌아서가지고..."
"단대 독자라 해도 그게 힘든데, 2대 독자라 하면은 더더욱이나 불가능합니다.
군대간다 하는 거는. 그렇다고 그걸 묶어가지고 방에 가둬놓을 수도 없고..."
어머니들도 귀한 자식의 입대를
막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소년들은 연필 대신 제 키만한
총자루를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160이 조금 안되는 걸로 기억을 합니다. 150 얼마되는 걸로...
158이던가, 160이 안됐거든 내가."
"총만 들면 야, 하지마라... 몸에 완전무장을 하면
보통 무게가 24-5kg 되거든, 그 다 하면은.
"거기가다 탄피를 십자로 걸치면 더 합니다. 어쩌지를 못해요.
근데 그거를 메고 산으로 들고 뛴다는게 그건 뭐, 거의 죽음이지."
훈련기간은 단 1주일
서툰 병사가 알아차리지 못 할 복병이 전장 곳곳에는 숨어 있었다.
"내가 50년 10월 13일에 입대했단 말이야.
그 때 군번 다 받고 입대했는데..."
"그럼 내가 51년 1월 20일이니까.
뭐 개월 수는 4개월 밖에 안되잖아요."
"그래가지고 부상받고 결국은 인자, 내가 다리...
이거까지 잘리고 고행이 많았지..."
"너무 억울한기라, 내가 군대 갈때는 뭐 죽고 사는 그런거는 생각지도 못했지.
가서 병1신이 된다 이런 것도 생각지도 못했고..."
전장으로 나간 14,400명의 소년병 중
2,268명이 전사했고 많은 수가 팔다리를 잃었다.
삶은 그렇게 불시에 방향을 바꾸었다.
유엔군이 북상함에 따라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다시 서울길에 올랐다.
한강 가에 이르렀을 때
생소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은 종이조각,
그것은 도강증이었다.
도강증이 있어야만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했다.
이름과 직업, 주소 등이 적힌 도강증은
남한 시민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건너 다니던 한강이
아무나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떠난지 석 달 만에 돌아온 서울
그러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흉측한 몰골로 변한
서울이 거기 있었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뒹굴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공기 중에 자욱했다.
군인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왔고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군인과 경찰이 돌아오면서
서울은 또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부역자 처단이 시작됐다.
"국군이 진주해 가지고, 그 다음서부턴 경찰들이... 그 부역자라고 그러지.
빨갱이하던 사람들 불러다가 인제... 때리고..."
"우이동 지금 그린파크 뒤에 가면, 옆에 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거기다가 트럭으로 실어다가 막 죽이고, 그런 비극이 있었죠..."
인공 3개월 동안 공산주의 체제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잔인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인공 치하에서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폐허 더미 속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무너진 집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폭격으로 가게를 잃었던 수선공은 가게가 있었던
새로운 시작
그때까진 그게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