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일부 증언 장면에 자막이 없습니다>
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공세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 전선만 돌파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야만 했던 유엔군에게는 이 무렵이 가장 괴롭고 힘든 시기였다.
8군 사령관 워커는 시간을 벌기 위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맥아더는 그에게 9월 중순까지만 낙동강에서 버텨줄 것을 요구했다.
워커는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었다.
워커가 낙동강에서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맥아더는 전쟁을 반전시킬
새로운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이른바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처음 구상한 것은 6.25가 터진 나흘 뒤였다.
한국 전선을 시찰했을 때
그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상륙작전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서 미 국방성과 합동참모본부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특히 육군참모총장인 콜린스는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지형적 여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대신 참모본부는 상륙작전을 펴기에 조건이 나쁜 인천보다 더 안전한 상륙지점으로 군산을 권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의 성공 가능성을 5천대 1의 도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인천 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인천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기만 한 지역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맥아더의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
단, 인천이 어려워질 경우 군산을 고려해 본다는 조건부 허가였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10군단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자신의 직계인 알몬드 소장을 임명했다.
9월 11일
작전 준비를 끝낸 미 제 1해병사단이 고베에서 승선했다.
한국군 해병대와 제 17연대도 부산에서 인천으로 향했다.
"배를 타긴 탔는데... 내가 작전장교인데 말이죠. 좀 창피스런 얘기인데 어데 가는지도 몰랐어요.
다음 날, 날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중략)...그래서 오키나와 정도로 내려가는 거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
"... (중략) ... 13일 날에 배에서 브리핑을 하는데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로서 알았습니다."
"17연대는 유엔군에 배속된다는 작명을 제가 받았어요. 그 이튿 날 6시에 출항을 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 밤에 상선을 해야죠."
"상선을 하는 도중에 대통령 각하께서 부두에 오셨어요."
"오셔서 그 선장실에서 절 만나고 그쪽에서 서울에 들어간다는 것을 그 암암리에 말씀하셨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서 모두 261척의 함정이 동원됐다.
일본 요코하마, 고베, 사세보 그리고 부산에서 출발한 함정들은 제주도 남쪽에서 집결한 뒤
서해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인천 앞바다에서 미 첩보대가 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영종도를 근거지로 이들은 인천의 방어태세를 미리 탐지했다.
수심이 낮고 섬이 많은 서해 지형상 함정들을 위한 안전한 안내가 필요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점지는 인천항에서 13km 떨어진 팔미도였다.
인천으로 향하는 함대를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팔미도의 등대를 밝히는 일이
첩보대원의 중요한 임무였다.
인천상륙작전의 디데이는 9월 15일
모든 함대는 팔미도 옆을 지나 인천 앞바다에 모였다.
시각은 새벽 2시였다.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월미도였다.
인민군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맥아더는 사령선인 마운틴 매킨리 함선에서
자신이 연출한 세기의 대작전을 지켜 보았다.
상륙부대가 월미도에 도착한 것은 새벽 6시 31분
예정보다 1분 늦은 시각이었다.
월미도에서의 인민군과의 접전은 1시간 반만에 끝났다.
"우리가 얼마나 맹렬한 폭격을 가했나면은 월미도 산 높이가 아마 한 2-3m는 키가 줄었어요."
"그 때 상륙해 가지고 올라가 보면은 무릎까지 거의 빠졌어요."
"얼마나 많은 화력을 퍼부었던지 그냥 나무고 뭐고 뭐 묵사발이 된거야."
"그러니까 푹푹 빠져요. 먼지가 되어 가지고."
"그럴 정도로 엄청난 화력을 집중해 가지고... 적이 뭐 거기서 견뎌 나가요?"
월미도를 시작으로 해서 상륙부대는 인천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유엔군의 집중 포격으로 인민군은 1,400 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작전개시 하루 만에 유엔군은 인천 시내에 진입했다.
그러나 도심에 진입하자 유엔군은 치열한 시가전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