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은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10월 1일, 38선을 넘었고
며칠 뒤에는 원산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참혹한 현장이 드러났다.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민간인 1,700여 명을 학살한 것이었다.
적에게 협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
즉, 불순분자 색출이 학살의 명분이었다.
우익 인사나 종교인의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
"내가 들어갔을 땐 벌써 앞에 한바탕 죽였는데. 내가 그 굴 절반에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게 됐습니다.
네 층만 내가 올라갔는데 왼쪽 다리가 신경이 죽어서 올라 엎었을 때에..."
"첫 사람 죽이고, 둘째 사람 죽이고, 셋째 사람, 내 차례인데
그때 앞에 줄에서 학생이 하나가 덜 맞고 머리를 들었어요. 고걸 쏘려고 나가면서..."
"...내 머리와 목을 발로 밟았기 때문에 다시 나를 쏠려고 할 때, 날 쏜 줄 알고
곁에 사람을 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거기서 살아 남았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의 통곡소리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10월 20일
유엔군의 평양 입성을 축하하는 환영기념식이 열렸다.
시민들은 북에 온 이승만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유엔군의 북한 통치는 12월까지 지속됐다.
북한은 이 기간동안 많은 수의
북한 주민들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알려진 것이 신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또한 좌우이념 대립의 산물이었다.
"북진할 때 저 사람들이, 빨갱이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반동분자를 많이 죽이고 갔어.
죽이고 막 도망간거라. 그니까 국군들 들어오니까 우리 편에서는 가만히 있겠어요?"
"자기 부모가 죽었는데 복수하는 거지. 그래 갖고 빨갱이들, 도망 못 간 부모들이 있었거든.
그걸 또 죽인거라. 자기 네가 먼저 죽였으니까, 우리가 또 죽였거든."
"그런데 다시 국군들이 후퇴하니까. 저놈들 나오니까 또 가만 있겠나? 또 죽이는거 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도망가야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런 식이라. 그거이 복수전이지."
명분없는 동족 간에 학살극
그것은 처절한 앙갚음이자
깊게 드리운 전쟁의 그늘이었다.
전선은 톱질하듯 오르내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북에서 후퇴하게 되면서
북한 주민들도 유엔군을 따라 피난길에 나섰다.
중국군이 원산을 점령해 남으로 탈출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한 곳,
흥남 뿐이었다.
흥남부두는 10만여 명의 군병력과 북한 동북부 주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발딛을 틈 없이 가득찼다.
"홍수가 났을 때 둑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사람이 후퇴해서 탁 무너질 때에
그 사람들이 일시에 몰리는게 꼭 그걸 연상하게 되더라고."
"둑이 무너져서 물이 그냥... 이야, 엄청 쓸려갑니다. 그 다음에 내가
흥남에서 배를 탈 때에도 내가 배 타려고 노력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에 밀려서, 내 몸이 사람에 밀려서
배에 올라가 버려다니까. 하아... 그 때 생각하면..."
태어나 자란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북에 남는다고 생각하니 유엔군의 폭격이 두려웠고
또한 새로운 주인을 맞을 자신이 없었다.
살기 위해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군수송선은 약 10일 동안 병력과
피난민 수십만명을 남쪽으로 실어 날랐다.
마지막 배가 떠나자
부두에 폭약이 설치됐다.
그것이 고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와중에도 뱃고동 소리 놔두고 마, 그때는 자연적으로 내가 눈물이 납니다.
고향아, 잘 있거라, 뭐 노랫말처럼 이쁘게 잘 계시라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누가 뒷통수를 쳐도 그렇게 눈물이 아이 날 겁니다. 그땐."
"그런데 그렇게 많이 나온 가운데서, 나는 내가 거느리고 있던 철도원들,
그 죽을라 살라카고 일하던 사람들, 한 사람도 못 데리고 나왔다고."
"가족도 물론하고... 하아, 그렇게 한이 맺힌 일이 없다고 지금...
이거 마, 우리가... 이런, 음... 그 내가 얘기해서 말... 참 안됐습니다."
피난민 모두가 가족과 함께
남으로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잠깐의 이별이라 생각한 그것이
긴 이별이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12월 5일날, 이른 새벽이거든. 12월 5일날, 그거는 기억이 뚜렷하다고.
새벽에 인제 남쪽으로 올라고 출발했기라.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도 다 출발했는데.
강이 딱 끊었으니까, 넘을... 강을 건널 수가 없는거이 거든."
"이거 도저히 안되니까. 니 혼자 가란 말이야, 갈려면...
갈 수가 없거든. 애들도 쪼그만 애들이고, 물 속에 못 들어간다고. 굉장히 추웠어."
"어머니, 이렇게 사연이 되어서 내가 가야 되겠습니다.
안 그러면 인민군들 다시 돌아오게 되면 내가 잡혀 죽을테니까.
'그려' 어머니가... 울어요. 울면 '왜 우냐?'... 들어가시더니까
보따리 조그만거 양말 몇 개 하고, 먹을거 좀 넣어가지고 축구공만한 보따리를 해서 나를 줘요.
그걸 받아 가지고 바깥에 나와 가지고..."
"어머니가 막 끌어안고 '동규야, 내 하나 밖에 없는 동규야.'
내가 외아들이야, 어? 외아들인데...
'내 하나 밖에 없는 동규야, 네가 떠나면 어떠니, 어떻게 하느냐.'
어머니, 내가 온다고 그랬잖아요. 3일이면 돌아오겠다는데 왜 우세요? 하니
어머니를 집에 확 밀고 그러고 거기서 나왔어요."
1월 4일은 남한 정부가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정한 날이었다.
서울 시민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 역으로 몰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기차는
먼저 온 피난민들로 만원이었다.
지붕을 비롯해 매달릴 수 있는 기차의 모든 부분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쟁 직후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치뤘던 모진 경험은 어느 한쪽을 따라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로인해 첫 피난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아우, 추웠죠... 꼭대기니까, 춥고 얼어도 그 추운 거를 춥다고 느낄 수를 없어.
저 마음으로 긴장이 되서 뭐 죽느냐, 사느냐. 이걸 타고 내려가야 산다는거 밖에 정신이 없으니까."
"추운거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요. 그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요.
왜냐면 6.25 때 서울에 남아서 갖은 고통을 다 겪으며 너무 혼이 났으니까."
"어찌됐든 이걸 타고 내려 가야지. 못 내려가면 죽는 길 밖에 없으니까.
죽느냐, 사느냐. 두 가지 길 밖에 없으니까. 미쳐 춥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요..."
기차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두 발로 걸어가야만 했다.
한강의 인도교와 철교는
이미 끊어진 상태
피난민들은 매서운 한겨울 강바람을 헤치며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다.
피난민들에게 추위는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 이북에서 시작된 피난 행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