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3일
인민군은 38선 인근에 집결을 완료했다.
6월 24일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국군에 대한 최근접 정찰명령이 떨어졌다.
마지막 정찰이 완료되자 인민군 각 부대에는 공격신호를 알리는
전투명령 1호가 하달됐다.
공격개시 암호명은 폭풍이었다.
그것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이전에도 38선에서 잦은 충돌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인민군은 서쪽에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춘천, 강릉에 걸쳐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상대는 지금까지 만났던 적과는 전혀 달랐다.
강력한 화력을 갖춘 포병과
따발총으로 무장한 현대화된 군대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탱크가 있었다.
그날 남쪽은 사병들의 농번기 휴가와 장교 파티까지 겹쳐 있던 주말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병력이 부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전선은 급작스럽게 무너졌다.
국군은 제대로 방어할새도 없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남한 수뇌부는 평소에 무책임한 북진통일 구호를 남발해 왔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군에게 전투기를 비롯한 중화기는 물론이고 탄약마저 제한해 왔다.
인민군의 무차별 공격은 개성과 포천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미국도 남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것은 탱크였다.
무서운 기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제 T-34 탱크 앞에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포를 맞고 꿈쩍도 안하는 탱크 앞에서 일선 부대는 차례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지형상 탱크 사용이 적합하지 않다는 미국의 판단으로
국군은 한 대의 탱크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대전차용 지뢰조차 부설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