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48년 2월 조선 인민군이 창설됐다.
북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7개월 전이었다.
(김일성 연설)
38선 이남이 단독 선거 준비로 혼란스러울 때
3개의 보병 사단을 기간으로 하는 2만 7천명의 군사조직을 완비한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정부의 역할을 하는 인민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46년 2월에 조직된 임시인민위원회는 11월 선거를 통해 대의원을 뽑았다.
위원장으로는 김일성이 선출됐다.
북한내 민족주의 계열의 지지를 받았던 조만식은
신탁 통치안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이후 인민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강력히 추구해 나갔다.
많은 지하자원과 수력발전소, 일제 강점기 때 남겨진 산업시설 등
여기에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개혁을 가감하게 실시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해 갔다.
38선 이북 지역의 실질적인 정치책임자였던 스티코프는
당시의 경제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해 놨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1947년 북한은 석탄, 화학, 경공업, 발전소, 수확량, 어획량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목표량을 100% 이상 달성하고 있었다.
해방 1여년 만에 38선 이북은 이남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 가고 있었다.
47년 11월엔 헌법제정위원회가 구성돼
북한 헌법의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 인민군 창설, 공화국 헌법 기초 작업 등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실업율은 높았고 물가는 뛰어 올랐다.
식량과 생필품은 부족했고 전력난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 제안에 대한 북한의 거부 이후
남한 만의 단독 선거 실시 여부를 놓고 남한 사회는 분열됐다.
남한 만이라도 단독 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통일을 하자는 이승만
반면 김구는 남북한 통일 총선거를 주장했다.
중도우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규식 역시
단독 선거는 분단이라며 김구와 뜻을 같이 했다.
남로당은 무력 투쟁으로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총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제주도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제주도는 4.3 사건이라는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미 해군 함정이 섬을 봉쇄한 가운데 국방 경비대와 경찰이 동원됐다.
당시 미 군정은 제주도의 사태를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제주도는 해방 후 부터 군정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횡포
그리고 육지 사람들에 대한 불만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에 단독 선거 반대와 좌익의 개입 등 사태의 원인은 복잡했다.
4.3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에서는
국회 선거를 제대로 치룰 수가 없었다.
군경의 토벌 작전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 됐다.
진압과정에서 좌익으로 몰린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면서
제주도는 오랜 세월 고통의 섬으로 남았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협박과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피살됐다.
하지만 선거 당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선거가 진행됐다.
유권자 80% 이상이 등록한 가운데 투표율은 95.9%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참여 의식을 경험하고 있었다.
총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된 가운데
보수적인 한민당계가 약 80여석, 이승만계가 60여석,
임정(임시정부)계가 57석을 차지했다.
남한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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