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정부의 임시 수도 부산
47만이었던 부산 인구가
1.4 후퇴 이후 100만으로 늘어났다.
부산 전체가
하나의 피난민 수용소가 됐다.
피난민들에게 추위를 피해
제 한 몸 뉘일 수 있는 한 뼘 공간이 절실했다.
깡통집과 C-레이션 상자집
그리고 가마니 움막집 등
폐품으로 만든 임시 집들이 등장했다.
피난민들이 하나 둘 집을 짓기 시작하자
영주동 산비탈은 삽시간에
4만여 채의 판잣집들로 빼곡히 메워졌다.
산비탈은 물론 다리 밑 어디에서도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 집조차 마련하지 못해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집이 없는 것보다 더 서러운 건
비울만큼 비워 더이상 비울게 없는 허기였다.
배고픔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루 세끼 식사는 사치였고
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고 2-3일을 굶는게 다반사였다.
피난민이 부산에 물리자
정부에서는 긴급조치로 식량 배급을 실시했다.
집을 떠나올 때 가져온 식량이 바닥난 피난민들에게
그것은 생명줄과 다름 없었다.
식량 배급을 할 때면
사람들 사이엔 으레 아귀 다툼이 벌어졌다.
부산 YMCA에서는 우유죽을 끓여
매일 피난민들에게 배급했고
근처 교회에서는 강냉이와
우유가루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식량 배급만으로는
오랜 허기를 채울 수가 없었다.
굶는 날이 많아지자
미군 부대 음식쓰레기로 끓인 꿀꿀이죽도 먹을만 했다.
"저녁 때 되니깐 그걸 버리러 나오더라고. 그걸 먹는 사람들이, 뭐 그냥... 저, 용변보고
여름에 저 많은 구데기 들끓듯이요, 그 정도로 (음식쓰레기에서 구데기가) 끓더라고."
"그러니 미군놈들이 뭐 그 한국사람들 인정하겠어요?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기서 막 줏어 먹는데도 거기서 쏟아요. 그 위에서. 차 위에서 쏟더라고.
참으로 고건 못 먹겠더라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겠다고."
"기냥 다 간 다음에 한 번 맛을 봤어요. 맛있더라고.
냄새 맡을 적에는 더러운 냄새가 났는데,
간 다음에 손가락을 핥아서 보니까 맛있더라고."
"첫번째는 손가락으로 조금 찍어봤지만... 깡통에다 쏟아지는대로 그냥 퍼 담는거죠, 뭐.
그거 가지고 이틀도 먹고 그냥 든든하게 뭐... 어우 든든하더라고요, 그냥."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움직여야 했다.
피난민의 대다수가 장사를 시작했다.
봇짐 속에 자기 물건을 하나씩 내다 팔던 것이
좌판이 되고
좌판이 모여 북적이는 시장이 됐다.
전쟁 전 남한 사람의 80%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그러나 이제 농사를 천직이라 여기는 농부는
풀빵장수가 됐다.
미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거나
회색으로 탈색해서 팔기도 했다.
염색한 군복은 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다.
싸고 질기다는게 인기의 비결이었다.
불법으로 미군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시장에 흔했고 단속은 허울이었다.
피난민들은 삶의 의지를 보였지만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정부는 유엔군 대여금 지불 명복으로
새 화폐를 찍어냈고 물가는 5-60배 까지 뛰었다.
피난지에서 돈만큼 귀한 것이
물이었다.
물은 3-4일에 한 번 받을 수 있었고
두세동이로 다음 급수날까지 생활해야 했다.
공동 급수전 앞에 물이 나오기 몇 시간 전부터
피난민들이 길게 늘어서 그 길이가 수백미터에 달했다.
제대로 씻을 수 없는 환경에서
질병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순리였다.
피난지에 전염병이 돌자
미군은 맨몸에 DDT를 뿌려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미군과 구호 물자가 부산항에 도착하면서
미국의 문화도 함께 상륙했다.
부산에선 미국 냄새가 났다.
미군이 나눠주는 구호품을 받기 위해
아이들은 낯선 미국의 언어를 목청껏 외쳤다.
기브미 초콜릿
기브미 껌
영어로 말하면 미군이 한 번 더 돌아본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피난의 고단함을 잊을만큼
아이들에겐 미군이 나눠주는 구호품의 달콤함이 컸다.
그것은 초콜릿과 캔디의 맛이었다.
한편 암달러상과 같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직업들도 생겨났다.
미군이 한국 여자와 결혼하면서
국제결혼이라는 단어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낯선 문화가 익숙한 문화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