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국군은 계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해야만 했다.
제대로 훈련시킬 여유조차 없었다.
학도병들은 겨우 3-4시간 기본적인 소총 사격 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후에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군번도 없는 어린 군인들이 수도 없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어갔다.
다부동 전투가 한창일 때 인민군 탱크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다.
기존에 쓰던 2.35인치 로켓포로는 인민군의 전차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이제 인민군의 탱크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새 대전차 무기의 등장으로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물고 물리는 전투 끝에 8월 20일
국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공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지상 전투부대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을 위해 전장 상공에는 늘 2대 이상의 비행기가 떠 있었고
일본에서 15분 간격으로 날아와 지상의 긴급 요청에 응했다.
오키나와의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한 B-29와 B-26 중폭격기 편대는
인민군의 거점과 보급로를 맹렬히 강타했다.
이 때문에 쉴틈없이 전선을 압박하던 인민군의 공격은 크게 둔화됐다.
특히 다부동 전투에서 융단폭격은 인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북한은 전선에서 소모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의용군 모집에 혈안이 됐다.
낙동강 전투 막바지에는 인민군 전력의 반 이상이 이들 의용군이었다.
북한은 의용군을 바탕으로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8월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 전선은 점점 조여 들었다.
최후의 위기가 영천에서 찾아 왔다.
영천이 뚫리면 남한은 대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6일 새벽
치열한 공방 끝에 마침내 인민군이 영천을 점령했다.
대구가 위기에 빠졌다.
국군은 재반격에 나서 영천을 일시 탈환했지만
인민군의 공세에 다시 영천을 내주고 만다.
이제 국군의 전력도 한계에 달했다.
마지막 힘을 내 전선을 사수하려 하지만
투입할 병력도 무기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50년 9월의 영천은 국군에게 너무나 가혹한 곳이었다.
영천 탈환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모든 화력을 동원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맞서 인민군은
마지막 남은 한방울의 전력마저 다 쏟아 부었다.
하지만 8월 15일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희망은 사라졌다.
폭풍처럼 다가왔던 여름은 그렇게 물러갔다.
이제부터는 유엔군이 반격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