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38선 분쟁을 자주 겪었던 서울 시민들은 불안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혼란을 부채질한 것은 신문과 방송의 오보였다.
국방부는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해주에 돌입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훗날 북한이 남한의 북침을 주장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안심하라는 방송과는 달리 전선의 포성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의 외곽지대로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자
서울 시민들의 불안은 가중됐고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관리들과 재빠른 사람들은 이미 한강을 넘은 뒤였다.
28일 새벽 1시
1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선두 부대가 수유삼거리 미아리 고개를 거쳐 전진해 왔다.
전쟁 발발 후 불과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서울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로부터 한시간 반만에 한강 다리는 폭파됐다.
폭파 시간은 새벽 2시 28분
국군 주력부대와 대부분의 장비를 한강 이북에 남긴 채였다.
이 폭파로 다리 위에 있던 피난민, 군대, 차량이 한강 다리와 함께 날라갔다.
한강교 조기 폭파로 인한 엄청난 희생과 손실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28일 오전 5시 개전 4일 만에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다.
수도 서울을 함락한 인민군은 곧 전쟁을 끝내고 승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북한방송)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지대에 돌입하여..."
"...이승만 괴뢰 정부의 서울 중앙청을 비롯하여 ...(중략)... 주요기관들을 차지하였다."
"28일 11시 30분 영웅적 인민군대는 반공격을 개시한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수도 서울의 함락은 지도상의 손실 이상으로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지니는 것이었다.
국군은 전선을 수습하려 해보지만
이미 조직적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인민군의 초기 전략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주력부대는 서울로 진격하고 동시에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인민군 2개 사단은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3개 방면으로 나눠서 남한을 완전히 점령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인민군은 6월 25일 12시까지 춘천을 장악하고 즉시 수원으로 이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민군 2사단은 27일이 되어서야 춘천에 입성했다.
그것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지연된 것이었다.
38선 부근에서 잦은 충돌이 있을 때부터 국군 6사단은 실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중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해 미리 참호를 파고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제때 춘천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포위의 위험을 피해 소양강 일대로 후퇴한 국군은 소양강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이틀동안 격전을 벌였다.
국군 6사단의 필사적인 방어는 하루 만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인민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3일이란 시간을 지연시켰다.
결국 인민군 2사단은 7월 1일 새벽이 되어서야
춘천을 거쳐 양평 쪽으로 한강 도하를 감행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주력부대도 같은 날인 7월 1일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