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는 급박해진 전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수원 비행장에는 대전에서 올라온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미국대사가 맥아더를 마중 나왔다.
7월 1일
맥아더는 일본에 있는 미 24사단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선발대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일명 스미스 부대를 먼저 파병했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성과는 달리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은
대폭적인 군비삭감과 주둔군 임무 수행으로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540명은 대전을 거쳐 오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인민군이 미군을 보기만 해도 되돌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7월 5일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인민군과 최초의 교전을 벌였다.
그들은 죽미령 고개에 3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다.
미군과의 첫 번째 교전에서도 인민군은 변함없이 탱크를 앞세웠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의 대전차 무기는 효과가 없었다.
인민군의 탱크 부대는 스미스 부대를 간단히 돌파 해버렸다.
미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최초의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540명의 부대원 중 150명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냈고
72명이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그들은 겨우 6시간 동안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했을 뿐이었다.
미군과의 첫 교전에서 승리한 인민군은 더욱 기세등등했다.
남한을 구하기 위한 미군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이들이 무기와 장비를 배에 싣는 동안 우선 태평양에 있던 해군 함정들이 출동했다.
드루먼은 공산주의자들의 기습 공격을 막아 내자며 유엔군의 파병을 독려했다.
그리고 7월 10일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에게 유엔기가 전달됐다.
유엔이 사상 처음으로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7월 14일
유엔군 참전에 고무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때부터 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전선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미 8군에게 한국 전선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사령관이 워커에게는 최대한 북쪽에서 인민군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다.
대구에 8군 사령부를 설치한 워커는 24사단장 딘에게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단 며칠 만이라도 대전에서 버텨줄 것을 당부했다.
미군은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금강교를 비롯한 금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전진을 지연시킬 수는 없었다.
정규 사단끼리 맞붙은 대전의 공방전에서 미군은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던 미군은
인민군의 맹렬한 공격과 우회 침투를 당하자 혼란에 빠졌다.
인민군은 대전과 옥천 사이, 대전과 금산 사이 요충지를 차단함으로써 미군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다.
미군은 전후방 좌우측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을 받고 혼전에 휘말리고 말았다.
인민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밀려 미군은 미처 철수 보고도 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7월 20일
결국 대전은 함락됐다.
이곳을 지키던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실종됐고 산야를 헤매다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스미스 부대와 24사단의 패퇴로 미군은 인민군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