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름: 엔리코 키에사
영문이름: Enrico Chiesa
국적: 이탈리아
생년월일: 1970/12/29
포지션: FW
키: 176Cm
몸무게: 70Kg
등번호 : 10
- 2000-2001시즌에 키에사가 22골을 기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가 그는 '지는 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32세의 나이에 Serie-A 득점 3위에 올랐고, 크리스티안 비에리, 필리포 인자기를 포함한 어떤 이탈리아 선수도 그보다 많은 득점을 하지 못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스피드가 특히 뛰어난 키에사는 삼프도리아의 유스팀 출신이다. 2년의 임대기간을 거친 그에게 클럽은 92-93시즌에 25번이나 되는 기회를 주었지만, 고작 1골을 득점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삼프도리아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 Serie-B의 모데나로 임대시켰다.
키에사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한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36경기에서 15골을 성공시킨 뒤, 이번엔 Serie-A의 크레모네세로 임대되어 14골을 집어넣었다. 당장에 그는 삼프도리아로 컴백했고 95-96시즌에 22골을 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유로96에 참가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그는 체코와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켰다.
유로96을 마친 뒤, 키에사는 1400만$의 거액에 고향 제노바를 떠나 파르마로 이적했다. 파르마에서의 3시즌동안 에르난 크레스포와 호흡을 맞추며 33골을 성공시켰고 막차로 98'월드컵 대표팀에도 합류했다.
그후 99-2000시즌엔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의 '키에사-바티스투타-미야토비치 3톱 체제'라는 원대한 구상에 초함되어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하지만 트라파토니의 이같은 계획은 미야토비치의 부상과 키에사의 부진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2000-2001시즌 초반엔 새로 영입된 누노 고메즈와 레안드로에 밀려 벤치로 내몰렸다. 그러나 9라운드 레체전에서의 첫골(페널티킥)을 시작으로 내리 5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4월달에도 또한번 5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는 괴력을 과시했고, 22골이라는 최종 성적표를 받았다.
그는 이처럼 봇물 터지듯이 터지는 골에 대해 "사실 나는 그동안 득점보다는 투톱 파트너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올시즌엔 원톱으로도 기용되는등 득점에만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의 득점행진은 2001-2002시즌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개막이후 얼마 되지도 않아 일명 호나우도 부상이라고 불리우는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고 말아 일짜감치 시즌을 접어야했고, 그시즌에 피오렌티나가 강등당하자 2002년 여름에 라치오로 자유이적했다. 그가 이적할 당시에 키에사의 부상을 염려한 라치오는 "최초 계약일로부터 60일안에 경기에 뛰지 못하면 계약을 무효화한다."는 조항을 삽입시켰다.
2003년 여름, 시에나로 이적해 30경기 출장, 10골을 넣으며 팀의 세리에A 잔류에 힘을 보탰다.
플레이스타일:노장이지만 항상 공을 쫓아 뛰는 체력을 소유하고있으며
전성기 시절의 프리킥은 미하일로비치 다음이었음.
영문이름: Enrico Chiesa
국적: 이탈리아
생년월일: 1970/12/29
포지션: FW
키: 176Cm
몸무게: 70Kg
등번호 : 10
- 2000-2001시즌에 키에사가 22골을 기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가 그는 '지는 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32세의 나이에 Serie-A 득점 3위에 올랐고, 크리스티안 비에리, 필리포 인자기를 포함한 어떤 이탈리아 선수도 그보다 많은 득점을 하지 못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스피드가 특히 뛰어난 키에사는 삼프도리아의 유스팀 출신이다. 2년의 임대기간을 거친 그에게 클럽은 92-93시즌에 25번이나 되는 기회를 주었지만, 고작 1골을 득점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삼프도리아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 Serie-B의 모데나로 임대시켰다.
키에사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한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36경기에서 15골을 성공시킨 뒤, 이번엔 Serie-A의 크레모네세로 임대되어 14골을 집어넣었다. 당장에 그는 삼프도리아로 컴백했고 95-96시즌에 22골을 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유로96에 참가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그는 체코와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켰다.
유로96을 마친 뒤, 키에사는 1400만$의 거액에 고향 제노바를 떠나 파르마로 이적했다. 파르마에서의 3시즌동안 에르난 크레스포와 호흡을 맞추며 33골을 성공시켰고 막차로 98'월드컵 대표팀에도 합류했다.
그후 99-2000시즌엔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의 '키에사-바티스투타-미야토비치 3톱 체제'라는 원대한 구상에 초함되어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하지만 트라파토니의 이같은 계획은 미야토비치의 부상과 키에사의 부진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2000-2001시즌 초반엔 새로 영입된 누노 고메즈와 레안드로에 밀려 벤치로 내몰렸다. 그러나 9라운드 레체전에서의 첫골(페널티킥)을 시작으로 내리 5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4월달에도 또한번 5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는 괴력을 과시했고, 22골이라는 최종 성적표를 받았다.
그는 이처럼 봇물 터지듯이 터지는 골에 대해 "사실 나는 그동안 득점보다는 투톱 파트너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올시즌엔 원톱으로도 기용되는등 득점에만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의 득점행진은 2001-2002시즌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개막이후 얼마 되지도 않아 일명 호나우도 부상이라고 불리우는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고 말아 일짜감치 시즌을 접어야했고, 그시즌에 피오렌티나가 강등당하자 2002년 여름에 라치오로 자유이적했다. 그가 이적할 당시에 키에사의 부상을 염려한 라치오는 "최초 계약일로부터 60일안에 경기에 뛰지 못하면 계약을 무효화한다."는 조항을 삽입시켰다.
2003년 여름, 시에나로 이적해 30경기 출장, 10골을 넣으며 팀의 세리에A 잔류에 힘을 보탰다.
플레이스타일:노장이지만 항상 공을 쫓아 뛰는 체력을 소유하고있으며
전성기 시절의 프리킥은 미하일로비치 다음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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