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게 모르게 PSP라는 휴대용 기기를 통해 그리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은, 실험적인 요소가 중시된 독특한 장르의 저예산 게임을 제법 많이 발매해온 SCEJ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게임이 발매되었습니다. 총성과 다이아몬드라는 이색적인 제목과 교섭 어드벤쳐 노벨 장르라는 생소한 장르의 이름을 달고 나온 본 게임은 과거 유명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을 다수 제작한 아사노 카즈야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제작 스태프가 다시 한 번 모여 제작한 게임입니다. 사실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는 물론 총성과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시기에 PSP로 제작된 미디어 비전의 원격수사 -진실로의 23일간-은 정식 발매조차 되지 않았기에 한글화가 아니라면 정식 발매의 의미가 거의 없을 총성과 다이아몬드 역시 한국 비디오 게임 시장과는 거리가 먼 타이틀로 여겨졌으나 의외로 자막 한글화를 거쳐 일본 발매일과 약 한 달 정도 뒤인 7월 17일 정식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아사노 카즈야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우) 제작 스텝이 참여한 총성과 다이아몬드(좌). |
사실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게임을 한다는 감각보다는 소설책을 읽는 듯한 감각에 가까운 방식의 게임입니다. 특히 자동 메시지 넘김 기능을 이용하면 교섭 파트가 나오기 전까지 조작할 필요 없이 그저 화면에 새겨지는 텍스트만 읽을 정도로 유저가 참여하는 부분은 적은 편입니다. 플레이어가 선택해서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대화할 상대를 고르고 이야기의 화제를 몰고 나가는 능동적인 게임이 아니라 거의 강제 진행에 가까운 구성이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흥미로운 소재를 활용하지 않으면 그만큼 플레이어는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오래 플레이할 수 없게 됩니다.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부분을 연속적인 사건 발생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 흥미로운 캐릭터들 간의 관계 구축을 통해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덕분에 비단 교섭 파트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화 파트에서도 긴 시간 플레이어들을 잡아둘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게임 시작에서부터 엔딩까지 로딩다운 로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총성과 다이아몬드가 PSP 성능의 한계를 보여주는 엄청난 그래픽을 자랑한다거나 풀 보이스 지원으로 쉴 새 없이 캐릭터들이 떠드는 게임이 아닌, 지극히 수수한 느낌의 게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가끔가다 UMD를 읽느라 모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뿐, 따로 준비된 로딩 화면도 없고 시간을 질질 끄는 연출도 없이 그저 막힘 없이 대화가 이어지고 화면이 바뀌고 사건이 발생하고 결말로 치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딱히 게임을 한다는 감각은 거의 사라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책을 읽는 듯한 감각만이 더욱 강조됩니다.
이러한 게임의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는 것은 BGM입니다. 따로 성우들의 음성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임이기에 본 게임에 사용된 사운드는 배경 음악과 효과음 정도입니다. 얼핏 대단히 심심할 듯한 인상이지만 제법 풍부한 느낌의 BGM이 귀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며 스토리의 몰입도도 좋은 편이라 느긋하게 텍스트를 읽다 보면 음성 지원에 대한 아쉬움은 꽤 줄어드는 편입니다. 특히 교섭 돌입 시에 흘러나오는 음악(일본 공식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도 흘러나오는 바로 그 음악)은 느슨하게 텍스트를 읽느라 풀린 긴장감을 단번에 올려줄 정도로 인상적인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역시 음성 미지원은 아쉬운 편입니다. 음성 지원은 게임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데에도 꽤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주요 대사에서도 전혀 음성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최근 발매되는 게임치고는 너무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교섭 파트 외에는 편하게 술술 읽어나가면 된다. |
본 게임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사보이. |
플레이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닙니다. 날 잡고 플레이하면 하루 만에 1차 클리어는 가능할 정도이기에 볼륨적인 측면에서는 조금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차 클리어는 어디까지나 1차 클리어일 뿐, 클리어 이후에 진행되는 숨겨진 시나리오와 사건의 진정한 결말, 다양한 엔딩 수집과 랭크 도전까지 따지면 꽤 오랫동안 붙잡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볍게 즐기려면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지만 총성과 다이아몬드라는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 클리어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춘소프트에서 제절초(원안, 시나리오), 카마이타치의 밤(감독), 거리 -운명의 교차점-(총감독) 등의 명작에 참여해온 아사노 카즈야가 시나리오 감수와 연출 전반을 맡은 게임답게 무리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끊어줄 부분은 확실히 끊어주는, 절제된 느낌이 강한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5명을 죽인 경험이 있는 광견 칸자키(!). |
제로과를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수사1과의 오야마다. |
게임 안에서는 여러 챕터로 이루어진 몇 가지 에피소드가 준비되어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사건을 완성하면서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의 작은 연결점이 이어지면서 총성과 다이아몬드라는 게임에서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되는 방식입니다. 마치 짤막한 단편 드라마를 대여섯 편 정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지나치게 블록버스터적인 측면으로 가지 않아서 오히려 더욱 현실적인 느낌입니다. 편의점을 습격한 범인과의 교섭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교섭을 진행해야 하는 은행털이범과의 대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는 상황에 맞게 교섭, 혹은 협박이 이루어지며, 이야기 전체로 따지고 보면 교섭 파트 자체의 비중은 작은 편이지만 상당히 굵직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하지만 작은 비중임에도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교섭 파트가 가지는 신선함의 힘이 컸기 때문입니다.
몇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에피소드 형식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
본 게임에 포인트를 진하게 찍어주는 교섭 파트. |
교섭 파트에 들어가기 전 수사를 위해 돌아다니며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때 대화 도중 중요 키워드가 등장하면 자동으로 키워드 리스트에 해당 내용이 추가됩니다. 이렇게 모인 키워드는 교섭 직전 제로과의 프로파일러인 나카무라와의 대화를 통해 프로파일링에 사용되며, 플레이어가 어떤 키워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교섭에 있어 주의해야 할 사항을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키워드 리스트는 많이 쌓이게 되지만 보다 사건에 중요한 키워드를 선택해야 적절한 프로파일링 결과가 나오며, 교섭 도중 프로파일링에 근거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대답인가, 반대로 부정적인 반응을 초래하는 대답인지 대답 위에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대화 도중 중요한 이야기는 자동으로 키워드 리스트에 등록. |
이렇게 모은 키워드 리스트는 나중에 프로파일링에 활용된다. |
리얼 타임으로 이루어지는 교섭은 비록 호화스러운 연출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화면을 나누고 단순히 양옆으로 움직이며 일러스트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건의 긴박함을 전달해주며, 상당한 긴장감을 이끌어냅니다. 간간이 상황에 따라 그에 걸맞은 대답을 선택해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며, 때로는 대답을 하는 것보다 침묵을 유지하며 상대의 반응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강압적으로 대화를 밀어붙이거나 혹은 상대에 따라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대로 교섭이 실패로 끝나는 등 상대의 성격과 사건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판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대화마다 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교섭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유지하기 때문에 더욱 실감 나는 교섭 파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섭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프로파일링 선택. |
가끔은 교섭 외에 심문과 협박을 하기도. |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필수적으로 교섭에 실패하게 되는데, 게임 오버 상황이 되면 무조건 마지막으로 세이브한 장소로 돌아가는 일 없이 교섭 파트에서부터 바로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도 유저 편의적인 측면을 중시한 부분입니다. 물론 그러한 재도전 시스템 덕분에 때로는 너무 가혹하다 생각될 정도로 대답 선택 하나로 게임 오버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에 따라 엔딩이 하나씩 모이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기보다는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어떤 대답을 선택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교섭 내용에 따라 랭크가 부여되며, 이야기의 진정한 결말과 엔딩 리스트 수집 등의 이유로 다시 교섭을 시도해서 교섭 랭크를 올리는 작업이 거의 필수라 할 수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 실수가 게임 오버로 이어지니 주의. |
교섭 실패 엔딩의 숫자가 무시무시할 정도. |
담담한 느낌의 일러스트는 꽤나 현실적이면서도 과장된 느낌을 극도로 절제한 느낌으로, 최근 발매되는 게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느낌을 플레이 내내 느끼게 해줍니다. 마치 실제 인물의 사진을 찍은 후 리터칭을 통해 만든 듯한 느낌의 일러스트가 사용되기 때문에 크게 튀는 듯한 인상도 없으며, 전체적으로 무덤덤함에 가까운 깔끔한 화면을 보여줍니다. 덕분에 취향에 따라 게임에 대한 인상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고 혹은 거부감까지 들 수 있다는 것은 본 게임이 가지는 부족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일러스트에 대한 거부감 없이 게임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챕터가 진행되고 에피소드가 겹쳐질수록 소소하지만 귀여운 개그와 아웅다웅하는 대사로 인해 캐릭터들의 개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인공이 소속되어 있는 제로과의 구성원들과 멋진 저격반, 귀여운 사보이 등 생각 이상으로 캐릭터들의 매력이 강조된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면이 전환될 때에도 굳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새로운 장소를 먼저 보여주고, 몇 가지 비주얼/사운드 연출이 이어진 다음에야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드는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고 장면 A에서 장면 B로 바로 이어지는, 속도감 있는 연출과 음악 연출(화면이 전환되기도 전에 먼저 음악부터 내보내는 식)로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진행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게임입니다. 아사노 카즈야가 인터뷰를 통해서도 속도감 있는 연출과 빠른 템포에 상당히 집착했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최근 게이머에게는 너무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총성과 다이아몬드라는 게임만의 독특한 느낌을 부여하는 데에는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곧잘 비교되곤 하는 캡콤의 역전재판 시리즈와는 달리 캐릭터들의 대사에서부터 행동, 사건의 기승전결과 풀어나가는 방식은 과장된 느낌을 거의 전부 배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전재판 시리즈는 역전재판 시리즈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유저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면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그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게임을 이끌어나가고 있습니다.
충실한 감정 표현이 매력적인 사와다. |
칸자키 : 웃고 싶으면 웃어도 돼. |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교섭을 한다는 주제에 걸맞게 캐릭터들의 대사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한 게임이기에 한글화가 아니면 한국 정식 발매의 의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액션 게임이나 RPG 같은 경우는 최악의 경우 남의 나라말로 플레이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재미를 느낄 부분이 존재하지만 텍스트가 게임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게임에서 비한글화는 외국어에 서툰 유저들에게 최소한의 재미조차 보장할 수 없게 마련입니다. 정식 발매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와 원격수사와는 달리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다행스럽게 SCEK를 통해 자막 한글화가 이루어졌으며, 일본판을 해보지 못했기에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어색한 부분 없이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내용을 이해하고 수월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기에 한글화 자체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편입니다.
특히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게임의 템포를 중시해서 버튼을 누를 때마다 각각 한 사람씩 순서에 맞게 넘겨가며 정해진 대사칸을 통해 대화를 한다는 개념에서 벗어나 현실성 부여와 빠른 게임 진행을 위해 거의 동시에 미묘한 타이밍으로 복수의 캐릭터들이 제각각 다른 위치의 대사칸을 통해 대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대사를 캐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물론 지나간 대사를 다시 볼 수 있는 백로그 기능은 지원하지만 어디까지나 본 게임에서 중요시되는 적절한 템포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대사가 나온 시점에 이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깔끔한 자막 한글화는 이러한 부분도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대사가 나오는 타이밍도 다른 게임과는 다르다. |
일본어라면 그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교섭 파트. |
요즘 발매되는 게임과 달리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자극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모습은 독특하긴 하지만 최근 게이머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을 만한 요소를 찾기 힘들며 멋진 동영상과 호화 성우진에 의한 음성 수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임이라는 매체의 이점을 활용한 과장된 연출과 스토리 전개도 거의 배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게이머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 화면만 쳐다봐야 하는 지루한 게임에 불과하며 자극적인 요소를 원하는 게이머들에겐 지극히 심심하고 무덤덤한 게임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한계가 명확한 게임이며, 대중적인 게임과도 거리가 먼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그간 사운드 노벨 게임을 즐겨 플레이했었고 해당 장르에 호감이 있는 게이머라면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근래 보기 드문, 잔잔하지만 클리어하고 나면 묵직한 인상을 남기는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게임이라 생각하지만 취향에 맞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없을 지루한 게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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