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에서
백석 씨에게
벽지 안쪽 풀 냄새 마르기 전에 당신은 경성(京城)의 오퓌
쓰로 간다 하였지요 저는 이마 끝에 돋은 솜털처럼 떨었습
니다 머리를 감고 가르마를 타고 쪽을 찌었으나 명경(明鏡)
에 비춰볼 제 얼굴을 잃었습니다 기별은 기러기들이나 주고
받는 울음소리 같은 거라 여겼지요 차령(車嶺)의 골짜기를
인두로 다림질한들 베갯잇으로 미호천을 끌어와 일없이 문
지른들 제 심사에 물기가 돌겠습니까 녹의홍상(綠衣紅裳)은
바스락거리는 볕으로도 남지 않았는데요 매년 겨울날 눈 내
리면 먼 북쪽의 산기슭에 당신의 으등등한 발자국도 찍히겠
거니 하냥 생각했습지요 제 겨드랑이 읍울(悒鬱)한 몇가닥
털도 관(棺) 속에서 늙었습니다 당신의 어깨 바깥에서 몇자
적을 따름입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