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는 나의 조국을 모른다 내게는 정계비 세운 영토란 것
이 없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용악의 쌍두마차를, 전라도 가시내를 읽는 밤이다
밥이 없어서 별을 먹었다 구전 아리랑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의 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여기는 비 내리는 원
동의 고려극장
무엇으로부터 먼 동쪽인가 여기는 조국도 전라도 가시
내도 없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북관의 계집도 없는
여기는 무엇으로부터 먼 동쪽인가
다락방의 창문을 열면 52일째 비가 내리는데 빗소리를
뚫고 고려극장의 공연 소리 들려온다
차창 대신 판자를 덧댄 수송열차에 실려 블라디보스토
크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곳으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있었다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세운 고려극장의 배우들도 이때
강제이주당했다 1937년의 일이다
「고려아리랑, 천사의 디바」를 보는 밤이다 비 내리는 다
락방엔 비에 유폐된 영혼이 하염없이 빗방울들의 공연을
바라보는데
고려극장 야간수위 아저씨는 아리랑 악극단의 노래를
들으며 어떤 꿈에 잠겨 있는 것일까
중앙아시아의 황량하고 거대한 벌판에 세워진 초라한
야외무대 위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목소리로 이함덕은 무
엇을 노래했던 것일까
함덕의 남산골 다방골을 들으면 여전히 가슴이 저려 오
는데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고 무엇
인가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은 하나의 위대한 기록이 되
는 밤
밥이 없어서 별을 먹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전생에서 이생으로 추방당한
디아스포라였으니 되돌아가지는 못하리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들이민 듯한 러시아 연해
주땅 뽀시에트 구역에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
되돌아가지는 못하리 언젠가 두고 떠나온 머나먼 해변
으로
머나먼 해변은 어디인가 어디로부터 머나먼 해변인가
우리의 춤은 슬프고도 느리며 우리 노래는 오로지 애원
뿐이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은 ‘운명’
예술가는 일종의 사회적 파업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술가는 운명을 거스르
는 자 일종의 자발적 디아스포라
시를 쓰겠다고 노래를 부르겠다고 허공을 떠다니던 유령
들이 고난의 인간 속으로 스스로 다이빙했으니 오 영혼의
유목민들이여
카자흐스탄에 원동에 서울에 다락방에 고려극장에 52일
째 비가 내리고 우비를 입은 기상캐스터는 오늘도 비가 올
거라 말하는데 원동은 무엇으로부터 먼 동쪽인가
나의 다락방은 무엇으로부터 먼 다락방인가
고려극장의 야간 수위 아저씨는 왜 여전히 꿈을 꾸는가
함덕이 부르는 남산골 다방골이라는 노래에는 왜 아름
다운 계집이 있고 계집은 왜 여전히 튼튼하고 아름다운가
52일째 비는 내리는데 밥이 없어서 별을 먹었다
별을 먹으며 안개 자욱한 깊은 밤 횃불을 밝힌 시라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출렁이는 밤 강물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이다
시인에게 끝없이 계속되는 밤은 없다 시인은 밤을 끝내
는 사람 아침의 햇살을 끌어와 만물에 되돌려 주고 스스
로 다시 어둠이 되는 사람
눈포래를 뚫고 온 사내가 헤매던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
을 기어간 오솔길로도 어둠이 왔다
북관의 계집은 튼튼하고 아름답지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절망 속에서도 밥이 없어서 별을 먹었다
비 내리는 원동의 고려극장 누군가는 시를 쓴다
누군가의 시란 이런 것이다
* 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 北關에 계집은 아름답다
―백석,「絶望」에서
**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들이민 듯한/ 러시아 연해주땅 뽀시에트
구역에/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 되돌아가지는 못하리/
언젠가 두고 떠나온/ 머나먼 해변으로
우리의 춤은/ 슬프고도 느리며/ 우리 노래는/ 오로지 애원뿐이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은 ‘운명’
―이 스따니슬라브,「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에서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