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밤의 음악제
―옛날은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예술가는 일종의 사회적 파업 상태에 있다, 말라르메는
말한다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있다(1)
밤새 무서록 무서록 눈이 내리고 시니피앙, 누군가 웃
었다
밤새 눈은 외딴 곳으로만 내리고
밤새 눈은 자꾸만 옛날처럼 내리고
옛날은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없다, 다만 시가 있을 뿐이다
김사량의「빛 속에」는 1939년 일본어로 발표되었고『칠
현금』은 1949년 북한에서 출간되었다
이태준은 1933년에 29세로 ‘구인회’에 참여하고 1940년
에『문장강화』를 1941년에『무서록』을 간행한다
김사량은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1950년 10월 원주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6년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이태준은 언제 사망했는
지 알 수 없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통해 나의 경험, 나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하는 자의 열정이 예술을 창조한다
모든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엔딩 크레디트겠지
만 모든 시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본질이다
시는 어느 날은 인류를 위한 감정적 광대로서 존재한다
어느 날은 그것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복무이기도 하다
『무서록』에 나오는「만주기행」을 읽는 밤이다
만주벌판으로 이주해간 조선인들은 어떡하든 반을 논
으로 만들려고 봇도랑을 파고 만인(滿人)들은 자신의 밭이
망가질까봐 봇도랑을 메운다
생존을 위한 쟁투의 일면이다
산문을 보면 나는 자꾸만 행갈이를 하고 봇도랑을 내며
시로 바꾸려 한다
이것은 독립적 영혼의 본질인가
삶의 쟁투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려는 부단한
시도인가
부단한 시도와 무한의 실패가 끝내 한 줄의 문장으로 남
으리니
얼음장 같이 차가운 허공을 미끄러지며 떠돌다 끝내 겨
울 벌판으로 돌아와 우는 까마귀여
나는 이제사 겨우 한 줄의 문장을 받아 적는다
생각하면, 바다는 얼어 파도 소리조차 적막하던 ‘우라지
오스토그’의 겨울밤(3)
평양에서 출발하는 봉천행 야간열차를 타고 가며 그는
어떻게 문장을 강화했을까
과연 문장은 강철처럼 강화되고 더 단단해졌을까
이토록 깊은 밤이면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덜컹거리며 끝내 어느 생에 닿고 싶은 것일까
밤새도록 눈발을 헤치며 백무선 열차는 달려가는데
밤새도록 눈이 내려 무서록이 쓰여지는 밤이다
순서도 없이 쏟아지는 이것을 무어라 부르랴
누군가는 이곳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시를 읽다가 잠들 테지만
누군가는 저곳에서 사랑의 재구성처럼 흩어지나니
눈이 내린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눈이 내리는 밤은 모두 옛날이었다
*
(1)빅토르 최(2)의 말이다
(2)빅토르 최(9)―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대중
의 인기를 사로잡은 언더그라운드 록 그룹이 있었다
특히 그룹의 보컬인 빅토르 최에 대한 인기가 뜨거웠는
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좌절된, 그러나 우리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희망을
노래한 선구자였다
오만불손하고 고약한 성미에 어둡기까지 한(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빅토르 최(1962~1990)는 독특한 음색의 한
국계 러시아 록 가수다
가공되지 않은 가사(내면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상징
적인 가사였다)를 쓰던 그는 선배 가수 기타리스트 싱어 블
라디미르 비소츠키(1938~1980)나 이소룡을 추앙하며 짐짓
그 행동이나 몸짓을 따라 하기도 했다
빅토르 최는 구소련 말기의 유명 록그룹 리더였으나 페
레스트로이카가 이뤄질 때까지 오래 살진 못했다
그럼에도 빅토르 최와 그의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굉장
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 록 음악은 1960년대에 맨 처음 태동했으나 이후
로도 20년간 대학생이 아닌 이상 러시아에서 록 그룹을 결
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들이 음악을 할 경우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제도권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것이
었다
전자의 경우 보컬 파트 및 악기 파트 일체로 이루어진
그룹으로서 모든 곡에 대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후자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음반을 자가 제
작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당국이 정한 비속어 사용 금지 및 복장 제한 등
의 규정 그리고(일부 뮤지션들이 지나치게 서구권 음악의 영향
을 받고 있는 만큼) 애국주의 성향을 지녀야 한다는 규칙에
저촉되는 경우라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러시아에서 아티스트는 타의 귀감이 돼야 하는 존재였
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권 음악이 허용된 팝그룹이라고 예외는 아
니었다
이에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 뮤지션들은 제도권을 거부
하는 여느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라는 호칭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 최도 그런 뮤지션들 중 한 명이었다
한국계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
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최는 1970년대에 미술학교에서 퇴학
당한 후 목각기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초창기 곡들을 써
나갔다
아직 재학 중이던 시절 빅토르 최는 (안톤 체홉의 단편
「6호실」에서 정신병동을 의미했던 동명의 병실) ‘6호실’이란 이
름으로 맨 처음 그룹을 결성한다
1981년에는 ‘가린의 살인광선’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그
룹을 만들었는데 1982년 이 그룹의 이름은 ‘영화’ 혹은 ‘영
화관’을 의미하는 독일어 ‘키노(Kino)’로 확정된다
여타의 비제도권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빅토르 최
또한 생업을 병행해야 했는데 이에 1982년 상황에선 마리
안나 최의 말마따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이었
음에도” 보일러 기사 일을 계속한다(4)
그해 여름, 그룹 키노는 (수록곡 전체의 재생 시간이 45분
이란 이유로)「45」란 타이틀의 첫 앨범을 발표한다
이로써 처음으로 인기 그룹의 반열에 오른 키노는 모스
크바와 레닌그라드 무대에도 서기 시작하고 홈 콘서트도
개최한다
이 음반 작업에서 키노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이 저 유
명한 그룹 아쿠아리움의 지원 사격을 받았는데 보리스는
콘서트 후 교외 기차 안에서 다가와 말을 건 빅토르 최에
게 그의 노래를 들었던 당시의 소감을 전했다
“그 자체가 좋고, 쓸모까지 있는 노래를 들으면 남보다
먼저 고대의 유물을 채굴한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 내가
그랬다”(5)
이후 빅토르 최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사람들은 몰래 키노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홈 콘서트
같은 자리에서 이들의 음악을 접하기도 했는데 특히 레닌
그라드 록 클럽 같은 무대를 통해 키노의 음악을 들었다
1981년에 생긴 록 클럽은 구소련 시대 록 음악의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었다
영화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개혁의 붐이 일던 1986년에
는 빅토르 최도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특히 맨 처음 그를 영화계로 끌어들인 건 당시 학생감독
이었던 라시드 누그마노프였다
라시드 누그마노프는 카자흐스탄 알마아타 출생이다
모스크바 8진이었던 김종훈과 양원식, 한대용은 나중에
최국인이 거주하는 따뜻한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이 바
로 알마티라고도 불리는 알마아타이다
알마아타가 카자흐스탄 남동부 쪽이라면 크질오르다는
남서부 쪽인데 빅토르 최는 어린 시절 크질오르다에서 살
았던 적이 있다
또한 크질오르다에는 말년에 고려극장의 야간수위를 했
던 홍범도 장군 거리와 묘역이 있다
누그마노프는 모스크바 영화 학교(VGIK) 재학 중 제작
한 단편 영화에서 빅토르 최를 등장시켰다(6)
젊은 부부와 그 친구들이 빅토르 최의 콘서트에 가길
원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이후 빅토르 최에게는 출연 섭외가 쇄도했고 같은 해 그
는 다수의 영화 촬영에 참여한다
알렉세이 우치텔 감독도 ‘록’이란 간결한 타이틀로 언더
그라운드 그룹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누그마
노프 감독과 마찬가지로 보일러실에서 일하는 빅토르 최
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키예프 영화학교 학생이었던 세르게이 리센코도 자신의
졸업 작품「휴가의 끝」촬영을 위해 빅토르 최와 그룹 키
노를 섭외했는데 키노의 여러 곡을 일종의 장편 뮤직비디
오처럼 담아낸 저예산 단편 영화였다
하지만 당시 빅토르 최를 촬영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빅토르 최는 검열에서 우선순위에 놓인 인물이었고 누
그마노프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도 경찰에 체포돼 수차
례 구금되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누그마노프 본인 또한 레닌그라드 콤소몰(구소련의 공산
주위 청년 동맹) 문화위원회에 소환돼―이에 수긍하진 않
았지만―“적절한 뮤지션 그룹”을 촬영하라는 권고를 받
았다
리센코 역시 학위 발급이 거부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영화계에서는 1980년대 말 두
편의 장편 영화가 제작됐는데 먼저 누그마노프의 첫 장편
영화「이글라(바늘)」(제작연도 1989년, 국내개봉 1999년)에서
는 빅토르 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유분방하고 광기 어린 삶을 담아낸 이 영화는 구소련
시절 2년 만에 1,500만 관객을 동원한다
이 작품으로 빅토르 최는 1989년 <에크랑 소비에티크>지
의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최우수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이어 개봉한 세르게이 솔로비오프의 작품「아사」는 개혁
개방 시대의 대표작으로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 분야
의 대표적인 인사들(화가나 뮤지션)을 한데 모아 기존의 규
칙과 질서를 강요하는 기성세대에 맞선 젊은 세대들의 모
습을 담아냈다
이 영화에서 빅토르 최는 마지막 한 시퀀스밖에 등장하
지 않음에도 실질적인 비중은 꽤 큰 편이었다
흐릿한 실루엣으로 그가 등장한 어느 초라한 식당은 곧
거대한 무대로 뒤바뀌고 빅토르 최는 군중들 앞에서 그의
히트곡「우리는 변화를 원한다」를 들려준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또한 이 곡에서 정치적 변화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읽었다고 할 만큼 페레스토로이카 시
대의 비공식 주제가 같은 곡이었다(7)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이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의 웃음과 눈물 속에는, 그리고 요동치는 우리의 핏
줄 속세서는
오로지 변화, 그저 변화만을 원한다!
이렇듯 개혁과 쇄신에 대한 젊은 세대의 요구가 컸던 만
큼 구소련의 개혁정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빅토르 최는
이런 젊은이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선다」는 곡에서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신시가지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기워 준 옷을 입고
우리는 이미 마음이 조급해진 듯하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해 줄 말은
이제는 우리가 나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록 음악사를 연구하는 안나 제이체바의
지적처럼 빅토르 최는 개혁을 염원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이런 입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이런
면은 혁명 시인 마야콥스키와도 비슷하다)
물론 그가 현실에 대한 암묵적인 저항과 당대의 답답한
심경을 그 누구보다도 훌륭히 노래로 소화한 건 사실이지
만「편안한 밤」같은 노래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사들이 눈
에 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고, 내가 기다리던 그 순간이 찾
아왔다
입을 다물던 이들은 더 이상 입을 다물지 않았고
더 이상 기대할 게 남지 않은 이들은 말 위에 올라타 전
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미처 따라잡을 겨를도 없이 이들은 멀리 떠났지만
잠을 청하는 이들이 있다면 부디 좋은 꿈 꾸길
편안한 밤이 되기를
사실 빅토르 최는 내면을 노래한 가수였으며 소소한 일
사의 감정적 동요를 음악으로 표현해 내곤 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를 포함해 그는 자신이 즐겨 노래
하던 우울과 실의 정서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줄곧 삶의 힘겨움과 더불어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작
업의 어려움을 노래해 온 것이다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이것은 참으로 간단한 계획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있다
그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모스크바 도심 아르바트 거리의 한 벽은 온통 그를 추모하
는 메시지로 뒤덮여 오늘날 거의 역사적 기념물에 준하는
곳이 됐다
벨라루스의 민스크,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카자흐스
탄의 알마티 역시 비슷했고 1992년부터는 그의 곡「마지막
영웅」과 동명의 타이틀로 제작된 우치텔의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여섯 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인기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
었던 건 라디오 전파나 온라인 조회, 길거리 버스킹, 그 외
다른 팝 가수들의 헌정 공연 등을 통해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온 덕분이다
그의 곡인「혈액형」의 경우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가 많
이 된 동영상 세 편의 조회수를 합하면 무려 2천만 뷰가
넘는다
영화 또한 그의 인기가 지속되는 데 한몫했다
유리 비코프의 영화「바보」(2011)에서는 주인공이 부패
한 시정의 간계에 훼방을 놓아 붕괴가 임박한 건물 주민들
을 구하는 대목에서 빅토르 최의「편안한 밤」전곡이 흘러
나온다
안드레이 자이세프 감독도 영화 전체를 그의 노래로 구
성하는 패기를 보였다
「할일 없는 사람들」(2011)이란 제목의 이 작품에서는 그
의 노래들이 오늘날 러시아의 일상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지 보여준다
세르게이 로반의 영화「샤피토 쇼」(2011)의 경우 프랑스
에서는 하계 시즌 동안 슬며시 개봉돼 버렸지만 러시아에
서는 컬트 무비로 자리 잡았다
이 영화에서는 ‘구소련 최고의 낭만적 영웅’이라 불리던
한 인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위트 있게 담아낸다
하지만 빅토르 최의 전설에 관심을 둔 것은 영화계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후에 관련 도서들도 다수 출간됐으며 낭만주의
의 표상이자 최후의 반항아, 빅토르 최의 모습을 담은 조
각상도 여럿이다
200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그의 조각상 외에도
2018년에는 영화가 촬영된 알마티에서「이글라」에 등장하
는 떠돌이 자객 모로의 모습으로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도처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공원
이 존재한다
2018년 말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레토(여름)」(8)에서
키릴 세레즈렌니코프 감독이 빅토르 최의 초창기 시절에
대해 짚어 보는 한편(나는 이 영화에서 빅토르 최가 기타를 메
고 숲을 지나오던 장면이 가장 좋았다), 그의 사망 1년 후 세
상을 뜬 언더그라운드 록 가수 마이크 나우멘코와의 만남
에 대해 다룬 이유는 단지 과거 속에 잊힌 한 인물을 되살
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모두에게 친숙하고 모두가 아끼는 이 인물이
오늘날 가지는 의미를 재해석하려던 의도가 더 컸다
우울하면서도(아니다, 그는 상징적이고도 시적인 가사의 노
래를 묵직한 저음으로 아름답게 노래한다) 변화에 대한 열망
을 담은 그의 노래는 오늘날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을 예리
하게 파고든다
감미로우면서도 서글픈 순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것
또한 감독 나름의 의도가 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빅토르 최의 세대가 꿈꾸던 혁
명은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최는 이제 막 변화의 조짐이 이는 세상 앞에서
무너진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자기 안으로 파고 들고
자 하는 자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표상한다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있다
(3)이태준,「고완(古翫)」, ‘우라지오스토그’는 ‘블라디보스
토크’
(4), (5)Alexandre Jitinski & Marianna Tsoi,『빅토르 최
의 시와 기억, 그리고 관련 기록들 Viktor Tsoi, Poemes,
souvenirs, documents(러시아어)』, Novy Gelikon, Saint
Petersbourg, 1991
(6)Rchid Nougmanov, ‘야하 Yahha', Yahha.com 사이트 인
터뷰(러시아어)
(7)Lev Gankin, ’나는 변화를 원한다! 키노의 노래는
어떻게 러시아에서 정치적 슬로건이 됐으며, 빅토르 최는
왜 이를 원하지 않았나?‘(러시아어), , 2017년 6월
20일, https://meduza.io
(8)영화「레토」는 감독의 두 번째 프랑스 개봉작으로, 앞
서 2016년「사제」가 프랑스에서 개봉된 바 있다, 하지만 키
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영화계에 입문한 건 1990년대
로 거슬러 올라가며「레토」는 2001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
수 OST 부문의 상을 받았다, 국내에「레토」가 개봉될 당시
에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수감된 상
태였다, 빅토르 최 역으로 나왔던 유태오가 참여한 시사회
에서 나는 이 영화를 봤다
(9)(2)빅토르 최는 외제니 즈본키네 Eugenie Zvonkine가
르몽드에 발표한 것을 변형하여 인용한 것이다, 몇 구절을
읽고 외제니 즈본키네 역시 불란서 고아인 것을 바로 알았
다, 불란서 고아들은 언젠가는 만난다, 무한의 창가에서,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두고서
ⓒ장드파
*
펑펑펑 눈이 내리는 암살의 시대다(10)
눈은 오브제 오마주 오랑캐
눈은 먼 곳으로부터 왔다가 다시 먼 곳으로 사라진다
(10)아르튀르 랭보,「암살의 시대(Voici le temps des
Assassins)」
「암살의 시대」를 쓴 랭보에 대해 말라르메는 이렇게 말
한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어느 문학 모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키가 컸으며 운동선수처럼 강인해 보였다
갸름한 얼굴은 추방당한 천사와 같았고 빗질하지 않은
밝은 갈색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옅은 푸른색
이었으며 출판되지 않은 아름다운 시를 써 나간 손은 농부
의 손처럼 커다랬다
짐 모리슨을 죽음으로 데려간 건 무엇이었나(11)
빅토르 초이(12)는 이 시에 왜 다시 등장하는가
눈은 밤새도록 내리고 도마뱀의 왕은 짐을 바라보는데
빅토르 최는 빅토르 초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나는 어찌하여 그대와 다르고 그대는 왜 나와 달라야
하는가
눈을 들어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발을 바라보면
떨어지던 눈발은 왜 잠시 허공에 멈춰 서서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가
눈의 이름을 묻는다
눈의 이름을 묻는다
시는 시에 대한 일종의 파업 상태에 있다
(11)1971년 3월 13일 짐과 그의 여자 친구 파멜라 커슨은
센강과 바스티유 구역 사이에 있는 보트레이 거리 17번지
의 수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가 파리에서 살기로 한 이유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였다
외모가 바뀐 탓에 사람들은 짐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오후가 되면 그는 카페 드 플로르의 테이블에 앉아 혼자
서 맥주를 마셨다
간혹 누가 말을 걸어 오면 그는 공손한 태도로 조용히
대꾸했다
그는 매일매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공책과 신문 기사 오
려낸 것들에 둘려싸인 채 타자기 앞에서 시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감독이었던 아네스 바르다는 그가 노래를 멈추고
무대 한 켠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럴 때면 관객들은 숨을 멈췄다
공연자에는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과 같은 침묵이 잠
시 흘렀다
죽기 얼마 전인 6월 말경 플로르 카페에서 짐을 만났던
친구들은 짐이 주로 시에 대해서 애기했다고 기억한다
7월 3일 짐의 사망에 대한 두 가지의 상반된 기록이 있다
첫 번째 내용은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였고 기분도 좋아
보였던 짐이 욕조 안에서 잠든 것처럼 죽었다는 것
두 번째 내용은 짐 모리슨이 7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까
지 파리 시내의 로큰롤 서커스에 있었는데 몸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헤로인을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로큰롤 서커스의 화장실은 옆의 알카자르 클럽의 화장
실과 통해 있었고 짐은 그곳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됐
다는 것
그러나 나는 분명한 진실을 알고 있다
짐 모리슨의 죽음은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돌연사가
아니다
짐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개인의 의지도 타인의 계략
도 아니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단 한 편의 시였다(13)
(12)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
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
계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
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 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크질오르다에서 잠시 유
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빅토르 초이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
한 세상을 살아 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
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
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
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
고 관영 매체에 의해 ㅁㅇ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
에 입학하였으나 결국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
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
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기사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
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
던 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
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
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
고 이 테이프는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
의 록 마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
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
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로크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
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라는 노래는
전차에 실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
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
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
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
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내 집을 비핵화
지대로 선포한다」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
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
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마니아’라 불리
는 사회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
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
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
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로 데뷔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
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캄차트카라 불리는 아파트의 보일러실에서 살며 일
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
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
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5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
라드에서는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 오
던 버스와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
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
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
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버스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
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 낚시를 좋아하던 초이는
졸음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버스가 초이의 차
로 돌진했다는 것,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가족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채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
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스몰스카야 프
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
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
한 로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였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고 러시
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
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빅토르 초이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에 대한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고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에게 헌정되
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수시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
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2010년 8월 16일은 그의 20주기로 러시아 곳곳에서 추도
식이 있었다
또한 2018년에는 그와 그 주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레토」가 개봉되었으며 한국에는 2019년 1월 개봉되었다
「레토」는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필름 어워드를 수상
하였다
빅토르 초이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13)삶은 일종의 삶에 대한 파업 상태를 유지할 때 충분
히 고독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짐의 관심사는 보들레르와 랭보를 불러낼 수 있는 도시
인 파리에서 시를 쓰는 데 있었다
짐은 샤를르 보들레르가 멋쟁이 댄디 청년 시절을 보냈
던 케당주 17번지의 로쟁 호텔을 보기 위해 일 생 루이 지
역을 돌아다닌 바 있다
센강의 왼쪽 둑에 있는 몽파르나스는 짐이 파리에서 제
일 좋아했던 지역이었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때 살다가 죽은 보자르 거리의
조그만 호텔에서 잠시 묵기도 했다
짐은 생제르맹데프레 구역의 카페 거리와 카페의 단골
손님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카페 르슬렉의 피카소 카페 되 마고의 장드파 그리고 카
페 드 플로르의 자기 자신까지도
헤밍웨이가 그랬고 에즈라 파운드가 그랬고 헨리 밀러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미국을 떠나 파리로 자발적인 유배를 떠났고 7월
3일에서 4일 사이 삶을 마감했다
1971년 죽기 전까지 파리에서 보낸 몇 달이 짐의 가장
아름다운 삶이었다
짐은 페르라셰즈에 묻혔다
묘비에는 ‘짐 모리슨 1943~1971’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것이 그가 남긴 단 한 편의 시였다 만 27세였다
*
옛날은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눈이 내리는 밤은 모두 옛날이었다
시는 일종의 시적 파업 상태에 있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