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결
복사꽃 살구꽃은 모두 물 내음새 쪽으로 기울어져 있네
누군가 강원도 산골의 작은 강물에 술잔을 씻고
떨어져 내리는 꽃 이파리 곁에서 고요히 한 잔의 술을
치고 있네
그대 깊은 눈동자로부터 솟아나 지금 내 앞을 스치며 지
나가는 한 줄기 강물을 무어라 부르랴
강물은 흘러서 하늘로 가고 하늘은 눈부시게 그대에게
로 오는데
꽃 그림자 출렁이는 눈동자 속 강물을 어찌 사랑이라 부
르지 않으랴
한 잔을 마시면 마음이 춤추고 두 잔을 마시면 물결이
춤추나니 석 잔을 마시면 우리는 서로에게로 망명하는 것
이냐
바람이 불어와 꽃 이파리들 환한 햇살 속에서 밀서처럼
나부끼는데
누군가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어느 마음이 베어 낸 고
독의 영지인 것이냐
세상은 온통 한바탕의 꿈결 같고 만사는 오롯이 한바탕
의 춤사위 같은데
불취불괴라
꿈결에 그대가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나니
오롯이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으리라
나 이곳에서 몇 잔의 술을 마시고 한 천년 잠들어 있으
리니
가령 가랑잎에 묻어오는 소식이여
이제는 나를 깨우지 마라
나 깨어나는 날 이미 그대에게 당도해 있으리니
그대 곁으로 한 줄기 바람 불고 비 내리거든
그토록 기다리던 한 줄기 바람과 비가 당도한 줄 알라
시호시호 이내시호 누군가 휘파람 신호를 하면
검은 밤의 한가운데로 눈발은 꽃잎과 함께 무장무장 쏟
아지고
갓 피어난 눈꽃은 영원한 현재처럼 누군가의 불망을 전
하리니
이토록 낯설고 아름답게 우리에게 당돟는 밤을 혁명
전야라 하자
잠든 오랑캐는 잠든 채 아름답고
깨어난 오랑캐는 깨어나 더욱 아름다우리니
바람의 기도문을 외며 또 다른 신생의 바람이 불엉ㄹ 때
새벽의 이마 위에서 깨끗하게 빛나는 별빛이여
말안장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한 편의 시를 쓰면
누군가는 그렇게 별빛 아래서
누군가는 그렇게 한 마리 시를 데불고
누군가는 그렇게 혁명 속으로 간다
* 검결(劍訣)수운 최제우의「검결」에서 차용했다, ‘시호시호 이내시호’는
‘때가 왔노라 때가 왔노라 드디어 때가 왔노라’ 정도의 뜻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