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 간식을 좀 들어요. 이것들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Capezzoli di Venere! 비너스의 젖꼭지라고 하지요."
- 밀로스 포먼 감독. "아마데우스(1984)" 중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이를 질투하는 살리에리의 고뇌를 담은 영화, 아마데우스.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인 만큼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장면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가 남편의 취업을 부탁하기 위해 살리에리에게 악보를 들고 찾아옵니다.
콘스탄체에게 간식을 건넨 살리에리는 악보를 보며 깔끔하게 그려진 완벽한 음악이 어떠한 수정 작업도 거치지 않은 초고라는 사실에 감탄하고, 연이어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질투를 느끼며 절망합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순진한 표정의 콘스탄체가 눈치를 보며 과자를 집어먹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도대체 무슨 맛이기에 저렇게 도토리 삼키는 다람쥐 마냥 볼이 미어져라 집어먹는 건지 궁금해 하며 언젠가는 한 번 먹어보고 싶었던 그 간식.
비너스의 젖꼭지를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일단 시작은 밤 껍질을 까고 삶은 다음 술에 절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살리에리도 이 과자가 로마산 밤과 브랜디, 설탕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강조했으니까요.
체리 브랜디와 오렌지 브랜디, 두 종류를 사용해서 밤을 절여줍니다.
레시피에 따라서는 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집에 있는 럼이라고는 도수가 무시무시한 바카디 151 뿐인지라 이걸 사용했다가는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이 아니라 녹아웃드롭스(Knockout drops: 마시면 기절하게 만드는 약)가 되어버립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 절여주는데,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그냥 브랜디를 따로 첨가해도 상관없습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오렌지 브랜디를 넣은 병에는 딸내미 책가방에서 업어 온 오렌지 스티커를 한 장 붙여줍니다.
술에 절인 밤을 푸드 프로세서에 갈아서 퓨레를 만들고, 여기에 버터와 설탕을 휘핑한 버터크림, 녹인 밀크 초콜릿을 넣어서 섞어줍니다.
사실 비너스의 젖꼭지는 정확한 레시피 찾기가 참 힘든 간식이기도 합니다.
일단 모차르트가 살던 18세기 중후반에는 아직 유럽에 고형화된 초콜릿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신대륙에서 들어온 초콜릿을 커피 마시듯 마시는 초콜릿 카페만 곳곳에 넘쳐났지요.
따라서 콘스탄체가 비너스의 젖꼭지를 먹었다면 초콜릿이 들어가지 않은 버전일텐데, 오리지널 레시피는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나마 비슷하게 생긴 레시피는 성 아가타의 가슴 (Saint. Agatha's breasts)이라는 과자의 변형된 버전인 경우가 많구요.
이럴 경우에는 영화에서 만들었던 음식의 레시피를 활용할 수 있으면 편할텐데, 정작 아마데우스 영화에서는 그냥 대충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만든 설탕 절임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너무 달기만 하고 맛이 없는 설탕반죽인지라 콘스탄체 역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베리지는 촬영 중에 이 과자를 15개나 먹어야 해서 고역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지요.
그냥 먹는 척 하다가 뱉었으면 될텐데 말입니다.
이런 관계로, 오리지널이라고 여겨질만큼 오래 된 비너스의 젖꼭지 레시피는 보기만 해도 입이 오그라들 정도로 달고 맛없어보이는 것들만 가득합니다. 설탕과 달걀 흰자를 반죽해서 만드는 마지판에, 설탕 아이싱에, 설탕에 절인 밤 퓨레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뒤로 설탕과 궁합이 잘 맞는 초콜릿을 활용한 레시피들이 대세로 자리잡았고, 지금은 비너스의 젖꼭지라고 하면 대부분 초콜릿이 들어간 레시피를 떠올린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영화 "쇼콜라(2000)"에서도 주인공이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여인을 도와주며 함께 만드는 초콜릿이 비너스의 젖꼭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갈등이 생깁니다.
영화에서는 초콜릿을 짜서 뾰족한 가슴 모양을 만든 다음, 그 끄트머리를 화이트 초콜릿에 살짝 찍어서 젖꼭지를 표현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이탈리아식이라기 보다는 프랑스식 비너스의 젖꼭지인 "teton de venus"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사실 세월이 흐르면서 레시피가 워낙 뒤죽박죽 섞여있는지라 어떻게 만들어도 상관이 없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뾰족한 가슴보다는 둥근 가슴이 더 비너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기에, 또 다른 레시피를 차용하기로 합니다.
무슨 탱크걸도 아니고, 미사일마냥 뾰족한 가슴을 달고 있는 비너스는 잘 상상이 되지 않네요.
밤과 버터크림과 초콜릿의 혼합물을 살짝 식힌 다음 비닐장갑을 끼고 동글동글하게 말아줍니다.
초콜릿 경단을 냉장고에 넣어서 식힙니다.
이렇게 만든 경단을 코팅용 초콜릿에 빠트려서 비너스의 젖꼭지를 만듭니다.
장점이라면 상대적으로 더 둥글고 매끈한 초콜릿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이라면 초콜릿 경단이 수영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초콜릿을 녹여야 한다는 점이지요.
코팅용 초콜릿을 템퍼링 합니다.
초콜릿을 녹였다가 온도를 낮춘 후, 다시 온도를 높이는 작업을 템퍼링이라고 하는데
분자들의 결정화에 영향을 미쳐서 식감이 좋고 잘 녹으며 윤기있는 초콜릿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예전에는 중탕으로 녹였다가 얼음물에 식혔다가 다시 가열하느라 힘들었는데 히팅 보울로 온도 설정해서 템퍼링하니 편하네요.
특히 초콜릿은 녹였을 때 물이나 수증기가 들어가면 망했다고 봐야 하는지라 물 끓일 필요없는 가열 기구가 굉장히 유용합니다.
온도를 낮추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는데, 찬물을 이용하는 수냉법, 대리석에 초콜릿을 펼쳐서 식히는 대리석법, 그리고 초콜릿을 추가로 투입해서 온도를 낮추는 접종법이 있습니다.
대리석을 이용하는 방법이 제일 멋있고 효과적인지라 어지간한 쇼콜라티에 공방을 가 보면 커다란 대리석 판이 하나씩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팅 보울을 이용할 때는 저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지라 접종법을 사용합니다. 신경을 따로 안 써도 되는지라 편하긴 한데 방 온도가 높을 경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뭐, 결국엔 고생해서 템퍼링한 게 삽질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만.
밤 페이스트가 들어간 초콜릿 경단을 녹은 초콜릿에 던져넣고 포크를 이용해서 건져낸 다음 식힙니다.
그랑 마르니에가 화이트 초콜릿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오렌지 브랜디 반죽은 화이트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체리 브랜디 반죽은 다크 초콜릿으로 코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템퍼링 된 초콜릿은 실온에서 천천히 식혀야 하는데 초콜릿 경단이 워낙 차가워서 급속 냉각이 되는 바람에 뿌옇게 변해버린다는 사실이지요.
그렇다고 초콜릿 경단의 온도를 올려버리면 녹은 초콜릿에 넣자마자 녹아서 풀어져 버립니다.
어쩐지 전문적으로 비너스의 젖꼭지를 파는 상점들도 템퍼링이 제대로 안 되어있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반짝거리는 초콜릿 표면을 원한다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초콜릿 쉘을 사서 밤 페이스트를 채워넣는 수밖에 없겠네요.
검은 색 초콜릿에는 화이트 초콜릿을 살짝 짜주고, 하얀 색 초콜릿에는 핑크색 아이싱을 올렸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완성한 비너스의 젖꼭지.
애초에 초콜릿은 카사노바가 애용할 정도로 사랑의 묘약으로 칭송받은데다가 술이 들어가서인지 훨씬 더 어른스러운 맛입니다.
비너스의 젖꼭지라는 이름이나 가슴 모양을 본딴 겉모습에서부터 이미 ㅅㅅ 어필은 잔뜩 들어가 있긴 하지만요.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으로 선물하더라도 매우 친한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나 줄 법한 초콜릿입니다.
그러고보니 영화 아마데우스 (감독판)에서도 살리에리가 콘스탄체에게 은밀히 찾아와서 불륜 상대가 되어줄 것을 강요하는데, 어쩌면 비너스의 젖꼭지가 갖는 성적인 메세지가 이를 암시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입 크게 베어물면 초콜릿 코팅이 깨지며 기분 좋게 씹는 식감을 주고, 그 안쪽에서는 부드러운 필링이 강렬한 브랜디의 첫인상과 달달한 초콜릿 페이스트의 뒷맛을 보여줍니다. 조금 씹다보면 고소한 밤 맛이 이어지지요.
그런데 아무리 맛이 있어도 크기가 워낙 크다보니 한 개만 먹어도 어지간한 초콜릿 한 판 먹은것과 비슷합니다.
한 번에 두 개 이상은 먹기 힘들 것 같네요.
어쩌다보니 한국에서는 발렌타인 데이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 주는 날'로 자리잡았는데, 이게 상업화가 두 번이나 진행된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재미있습니다.
원래 발렌타인 데이는 발렌타인이라는 성자가 황제의 명을 어기고 사람들을 결혼시켜 주다가 처형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군인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탈영할 것을 염려해서 결혼 금지령을 내렸었지요.
목숨바쳐 커플들을 맺어주던 성 발렌타인을 생각하며 연인들이 소소한 선물을 주고 받는 날이 원래의 발렌타인 데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영국의 캐드버리라는 사람이 발렌타인 데이 선물용으로 하트 모양의 초콜릿 박스를 선보이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마치 80년대 우리나라에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나면 그 빈 병에 보리차를 담아두는 게 유행이었듯이
캐드버리의 초콜릿 박스는 박스 자체도 예쁘고 실용성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석함이나 정리 상자로 두고두고 활용합니다.
그 이전에도 초콜릿은 사랑의 묘약이라는 말도 있었고, 꽃과 카드처럼 초콜릿 역시 선물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캐드버리의 하트 모양 초콜릿 박스가 "발렌타인 초콜릿"이라는 개념이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한 거지요.
그리고 두 번째 상업화는 일본의 모리나가 초콜릿에서 시작됩니다.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발렌타인 초콜릿을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주는 것"으로 광고하는데,
여기에 여성운동이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사랑 고백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들도 능동적으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 더해져서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발렌타인 데이 풍속도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좀 억울한 마음도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제과점에서 파는 발렌타인 한정 초콜릿이 너무나도 먹어보고 싶은데, (남자중학교인 관계로) 사 줄 사람은 없는지라 내 돈 내고 샀던 기억이 있거든요.
손님이 돈 내고 물건 사겠다는데 그냥 초콜릿 주면 되었을 것을, 종업원은 또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인데요."라고 확인 사살을 하더군요.
얼떨결에 "어머니 드리려고 그래요. 아버지께 선물하시라고."라고 대답해서 센스있는 아들처럼 굴었지만 그 때의 심정은 초콜릿만큼이나 시커멓게 어둠에 물들었었지요. 중학생 때였으니 중2병도 걸리고 그럴 무렵이었거든요.
서양이었다면 초콜릿 사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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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에 한 번 놀라고 글솜씨에 두 번 놀랐습니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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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일뿐 실제 살리에리는 엄청난 대인배였죠. 누구나 다 아는 그 시대 유명한 음악가들의 은사이기도 했구요.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체르니, 마이어베어,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들까지) 모차르트를 싫어했지만 그의 재능을 질투하는 영화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 그저 '싫어한건 맞는데 나만 싫어한게 아니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모차르트를 싫어한 사람들은 많았다'라고 말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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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가타라면 귀스타프 모로 그림에 나오는, 로마 시대에 가슴이 도려내지는 형벌을 받은 성녀라고 들었는데... 그런 이름의 과자가 있다니 블랙유머(?) 같은 느낌이네요.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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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맞은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 17.02.14 1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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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항항항항항 | 17.02.15 0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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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황제 손이 움찔하는게 더 웃겼던.....ㅋㅋㅋㅋ | 17.02.15 13: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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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인성이 워낙 개차반이었던지라 다들 싫어했다고 하죠. 살리에리는 성공한 궁중음악가였으니 굳이 인생 실패한 모차르트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거란 말도 있구요. 근데 또 어찌보면 저런 망나니에게 축복받은 재능이 있다는 사실때문에 미워했을수도... | 17.02.14 2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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