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길지께서 피성으로 옮겨가시는게 언제인고?"
"보름정도 뒤에 가신답니다."
노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첫째 아들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잃었고 둘째 아들은 용맹이 남달라 장수까지 되었지만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갔다. 막내아들은 몸이 약해서 동네 울타리를 떠나지 못하고 슬하에 남았건만 이제 그 아들이 낳은 손주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다고 끌려갔다. 석달이나 지나서 돌아온 손주는 머리에 시커먼 쇠투구를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보드라웠던 손은 굳은살이 박히고 찢어져 늙은이의 쭈글쭈글한 손을 쥐고 있는 모양이 거칠었다.
"장가 들기로 한 건 어찌할꼬?"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처자댁도 급하다고 난리인데..."
개선장군들이 신라인 포로를 끌고 대로를 지나쳤던게 어제 일 같았는데 왕궁이 함락되고 왕이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는 신라군이 군량미를 싣고 대로에 나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당병들과 신라병들은 앞다투어 몹시 약탈을 해댔고 결국 마을 청년들은 몽둥이를 들고 도첨스님이 이끄는 군대에 들어갔다. 대문밖으로 소나 말이나 금붙이를 담은 상자가 끌려나가는 일은 더는 없었지만 이젠 집안의 남자들이 끌려나갔다. 나라를 되살릴때 군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간다고?"
"안부 여쭙었으니 이제 돌아가야됩니다. 진지까지 이십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빠듯합니다."
"이웃에서 말을 빌릴테니 저녁밥은 먹고 가거라"
평소보다 절구질과 키질을 더 세심하게 해서 옥처럼 하얀 쌀밥을 지어 먹였지만 고기반찬이라곤 된장에 섞은 꿩고기 밖에 없었던 것이 노인의 마음에 크게 걸렸다. 이웃집 절름발이 청년에게 쌀과 술병을 두둑히 챙겨주고 말을 태워주게 했다. 손주가 절름발이 청년의 등에 매달려 손을 흔들며 대로 끝으로 사라지는데 노인은 결심했다는 듯 호롱불과 낚시대를 들고 강으로 나갔다.
동네에 젊은이가 없어 고기잡는이도 없었다. 낚시바늘을 던지기만해도 물고기들은 기다렸다는듯 술술 낚였다. 노인은 고기를 망태기에 주워담으며 슬슬 웃음을 지었다. 그녀석이 그래도 떠나기 전에 장가는 가겠다고 했으니 다행이다. 밀밥은 전혀 없이 달무리만 물위에 출렁이는데 물고기는 정신없이 바늘을 물었다. 노인은 묵직해진 망태기를 등에 이고도 버들로 엮은 물고기를 한 손에 들고 집에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부터 노인의 집이 분주했다. 간밤에 독에 넣어두었던 물고기를 꺼내 머리를 떼고 배를 따서 내장을 꺼내고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자르느라 노인의 주름진 손이 쉴틈 없었다. 노인의 부인은 꼬부라진 허리를 두드리며 그 옆에서 항아리며 함지박을 열심히 씻고 있었다. 함지박에 물고기를 닦고 물로 깨끗히 씻어낸 노인은 비늘이 벗겨진 보드라운 물고기를 소금에 버무려 항아리에 잔뜩 담았다.
노인과 노인의 부인이 낑낑대며 무거운 항아리를 부뚜막의 한 켠에 세워두고 꼬박 열흘이 흘렀다. 그사이 노인은 하얀 눈썹에 땀이 마를날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쌀을 서 말 가져가서 대추며 밤, 배 같은 것을 장만하고 부인의 낡은 가락지 몇 개를 거울과 옥비녀와 맞바꾸었다. 부인은 참 고운걸 가져오셨다며 몹시 기뻐했다. 팔뚝만큼 마른 허벅지를 날쌔게 놀리며 소 등에 쌀을 한 푸대 싣고 나가서 밀 세 푸대와 바꿔오는 날엔 노인의 야윈몸에 힘이 하나도 안남아서 사람이 모두 떠난 을씨년스러운 절에서 하룻밤을 쉬고 가기도 했다.
노인의 부인은 아주 어렵게 구한 비단에 수를 놓느라 바빴다. 노인이 다른 준비를 하는 동안 디딜방아로 밀을 곱게 빻는 것도 부인의 일이었다. 부인은 굽은 무릎을 몇 번이고 주물러 가며 그 많은 밀을 다 가루내었다. 열흘 째 되었을 땐 두 내외가 모두 집에 있었다. 첫 닭이 울기도 전에 잠에서 꺤 노인은 조심스럽게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생선이 숨이 죽고 물이 고여 있었다. 노인이 생선을 잡고 살점을 뜯자 부드럽게 살이 딸려나왔다. 노인은 대청마루로 가서 벽에 걸어둔 마늘을 끌어내리고 껍질을 벗겼다. 그동안 노인의 부인은 쌀항아리 옆에 둔 항아리에서 조를 꺼내 조밥을 지었다.
노인은 돌절구를 오금에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늘을 빻았다. 마늘을 부엌에 넘겨주곤 조밥이 익는 가마솥 옆에서 노인이 무채를 썰었다. 조밥은 금방 익었다. 고슬고슬한 조밥을 소쿠리에 넣고 식히며 노인과 노인의 부인은 보리밥에 된장을 비빈 나물로 아침을 먹었다. 그날 아침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번개가 몇 번 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조밥은 다 식었고 두 내외는 함지박에 무채와 조밥과 마늘과 엿기름을 식혀 만든 가루를 비비며 손주의 색시 이야기를 했다. 소문도 좋은 처자고 듣자하니 참하단다. 노인은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노인은 빈 항아리에 물고기를 깔고 그 위에 잘 버무린 소를 깔았다. 항아리는 모가지까지 소와 물고기로 가득 찼다. 혹시 부정한게 들어갈까봐 노인은 깨끗한 천으로 항아리의 입구를 가린다음에야 뚜껑을 닫았다. 말라붙은 조 하나 남아있지 않을때까지 마른수건으로 항아리를 깨끗하게 문지르기까지 했다. 항아리는 부엌 구석에 조심스럽게 자리잡았다. 그날은 일이 없었으므로 노인은 퉁소를 불었고 노인의 부인은 예단으로 보낼 비단옷을 곱게 다림질했다.
다음날은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젊은이라곤 이웃집 절름발이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놈이 재주가 아주 기가막히는 놈이었던 것이다. 예단과 패물을 넣은 함을 멜빵해서 등에 져줬더니만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며 춤을 추는 모습이 여간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오랜 전쟁에 주름살 가실날이 없던 마을사람들도 그날만큼은 실컷 웃었다. 그동안 동네 잔치라곤 장례와 제사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당군의 창에 죽은 박박이의 부인이 흥에 겨워 북을 매고 나왔다. 함진아비의 쭐레쭐레 흔드는 우스운 춤 뒤로 마을사람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나흘째 아침이 밝았다. 내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주 장가가는날, 병으로 죽은 부모대신 그놈을 자식처럼 키웠다. 노인의 부인은 부엌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물고기 살을 조금 찢어 입안에 넣었다. 턱을 움직일때마다 고소한 즙이 혀를 감쌌다. 조밥도 알맞게 부스러졌다. 내친김에 부인은 작은 것 한 토막을 입안에 넣었다 생선뼈가 오독오독 씹혔다. 전혀 거슬리지 않고 잘 물러있었다. 이번 식해는 아주 맛있게 성공이구나하고 부인의 주금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내외는 식해로 맛있게 아침밥을 먹었다. 노인의 집 앞에 솥단지를 싣고가는 소달구지가 있길래 멈춰 세워서 조심스럽게 식해 항아리를 실었다. 부인은 항아리와 함께 먼저 가고 노인은 집을 정리하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우울한 시기에 큰 경사여서 혼례는 노인의 마을과 신부의 마을 가운데의 큰 공터에서 하기로 했던 것이다. 마을 아낙네들은 분주하게 돌을 쌓아 부뚜막을 만들고 남편들이 가져다주는 장작을 듬뿍 넣고 물을 끓였다. 한 쪽에선 밀가루를 반죽해서 틀에 넣고 면을 짜고 다른 한 쪽에선 애호박이며 마늘을 썰고 다른 한 쪽에선 닭을 잡았다. 사방이 분주했고 물도 끓기전에 손님들이 술독을 열었다.
노인의 집에서만이 아니라 다른집에서도 밀가루를 내놓아서 국수그릇이 몇 번씩 돌았다. 다들 허리춤을 풀고 앉아서 국수맛을 칭찬했다. 코흘리게들은 저들끼리 어울려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배고프면 국수를 얻어먹고 다시 뛰어놀다가 배고프면 또 국수를 먹으러 왔다. 오랫만에 모든것이 풍족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아직까지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불안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노인의 부인은 면을 다 뽑고도 국수틀 앞에 쭈그려 앉아있다가 마른 수건으로 자꾸만 독을 문질러 댔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려고 하고 모두들 불안해졌다. 아직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떠들고 웃던 사람들은 자리 위에 파김치처럼 앉아서 대로의 끝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저길로 절름발이가 신랑을 데리러 말을 타고 갔다. 장군이랑 병사에게 줄 주전부리까지 잔뜩 싸가지고 갔다.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고 누군가가 부뚜막에서 숯을 꺼내 호롱에 불을 붙였을 때야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산그늘속에서 절름발이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신이나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귀퉁이에 따로 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신부도 일어났다. 하루종일 어두웠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말을 타고 돌아오는 절름발이는 울고 있었다. 절름발이는 말에서 내릴 생각도 못하고 안장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떠났소, 이미 떠났소, 오늘이 아니라 어제 떠났소. 쫒아갔는데 중간에 신라군이 있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소. 오는길에 시체 한 무더기가 있길래 한참 뒤지고 오느라 늦었소. 죽은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우리 총각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더구려.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는데 분명 신부였으리라.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우는 소리를 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전쟁통에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박이 부인이 먼저 울었고 누구누구가 따라 울었다.
노인은 손주에게 입히려 했던 새 옷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지 말고 밥들 먹읍시다. 저녁먹을 시간이오. 오늘내가 식해를 담갔는데 참 맛있소. 노인의 부인이 항아리를 열자 고소하고 쿰쿰한 식해 냄새가 우울한 잔칫마당에 퍼져나갔다. 노인은 한 덩이를 잡아 조밥을 넉넉히 바르고 박박이 부인에게 건냈다. 박박이 부인은 울음을 삼키고 식해를 받아 먹었다.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맛있소. 참 맛있소. 몇 년이 지나도 내외 손맛은 변하질 않아. 낙담하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낙들은 쌀을 씻기 시작하고 남편들은 장작을 가져다 주고 절인 무를 썰고 국수먹은 그릇을 깨끗하게 닦았다. 뜨거운 밥이 금새 지어졌다. 모두들 국수그릇에 가득 밥을 받았다. 노인이 소매를 걷고 항아리에서 식해를 꺼낼때마다 맛있는 냄새가 뭉클 나고 탄성이 터졌다. 고소하고 새콤한 맛. 입안을 가득 감싸는 깊은 맛. 맛있소, 참 맛있소. 몇 년이 지나도 내외 손맛은 변하질 않아. 모두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한 주걱씩 더 받았다. 술잔이 쉴새없이 돌았고 아이들은 부른배를 두드리며 뛰놀았으며 횃불 아래서 북과 피리가 다시 바쁘게 놀았다.
솥단지와 빈 항아리와 취한 사람을 싣고 소달구지가 마을로 돌아갔다. 신명나게 놀고 피곤해진 사람들은 이불을 파고 들어 푹 잠을 잘 생각에겨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행렬의 뒷자리에서 걷던 노인이 부인의 손을 잡았다. 당신 고생 많았소. 당신도 고생 많았소. 오늘 참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았구려. 내일은 내가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아놓고 그다음날엔 어물전에서 바닷고기도 사올테니까 그놈이 다음 번에 돌아오면 그땐 꼭 식해 맛을 보고 돌려보냅시다. 네 그럽시다. 달은 벌써 산 뒤로 숨어버렸고 횃불을 따라 마을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따라 노인 내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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