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벌써 아흐레나 굶은 채로 눈 쌓인 산을 걸어 왔습니다.
우리가 이리 고생을 한다해서 우리의 투쟁을 누가 알아준단 말입니까?
공화국이 노랑개 놈들과 휴전모략을 하면서도 우리에 대한 언급을 한 마디라도 했답디까?
이렇게 좁쌀 한줌 못 얻어먹고 얼어서 뒤져버린다면
투쟁이 무어고 인민의 해방은 또 무엇입니까!!"
마당에 나가서 빨간 완장을 차고 얼추 머릿수를 맞추어 서 있으면 누군가가 끌려와 바닥에 꿇리고 그럼 역시 완장을 찬 청년 몇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겁에 질린 혹은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이 옳소! 라고 외치면 그 꿇린 사람이 총을 맞아 나자빠져 죽는 것. 그것이 내가 밥벌이를 하는 과정이었다. 사람이 나 자빠져 죽는 것을 보고 마당에 모인 인민들 보다 좀더 빨리 박수를 치면 좁쌀 한 됫박정도가 떨어졌으므로 그것을 들고 쭐래쭐래 집에가서 밥을 지어 먹었다. 그게 노조미가 지정해준 무슨 위원회인가 청년회인가가 하는 일이었다.
마당에 주로 끌려나오는 것은 그 지역에 땅 많고 돈 많은 지주들이었는데 일정때 그것들이 농민을 상대로 해댄 패악질을 보면 이 인민재판이라는 것이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눈 앞에서 사람이 칠혈에서 피를 뿜어대며 죽어 자빠지는 것을 보는 일이란 절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고역이었다. 아무리 포악한 놈이라도 눈앞에서 피거품을 몰아쉬며 죽어가는데 그 꼴을 보며 즐거워 웃을 사람이 조선 팔도에 몇이나 되느냔 말인가?
마당에서 꼼짝없이 주검이 될 뻔한 나를 건져낸것은 노조미였다. 노조미가 나를 일정때부터 자신과 동고동락한 혁명동지라며 나를 추켜세워주었고 목숨을 구해 준것도 모자라 이런 좁쌀 한 됫박이라도 배급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앉혀준 것이다. 마당에 끌려나온 자식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만 혼절해 버린 어머니를 등에 업고 노조미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 작은 장독에 숨겨둔 청주를 한병 꺼내서 노조미를 대접했으나 노조미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둘러맨 총대를 문간에 풀어두고 지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로당 활동은 이승만 정부의 집요한 공작으로 서서히 힘이 약해지고 있었고 그러던 찰나 제주에서 4.3 사건이 터진 것을 계기로 당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조미는 빈 잔을 매만지며(노조미의 잔은 원래 비어 있었고 나의 잔은 이야기 내내 연거푸 비워지고 있었다.) 입산을 한 이야기와 몇번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입산한 뒤로 흡족하게 먹어본적이 없었는데 공화국 군대가 내려온 뒤 통신의 역할로 남로당과 인민군 사령부를 왔다갔다 하며 그래도 배는 채웠다고 속빈 농지꺼리를 했다.
술기운이 얼추 오르자 나는 노조미에게 우미와 호노가의 소식을 물어 보았고 노조미는 우미는 자신과 같은 부대에서 기관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며 호노가는 여수로 간 뒤로 그럴싸한 소식이 없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을 했다.
청주 병도 다 비고 분위기도 어두워질때쯤 어머니가 깨어나셔서 나의 얼굴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셨고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의 고맙다는 인사를 큰 절로 대답하며 노조미는 부대로 복귀했다. 위원회에 나오라고 연락이 온것은 다음날 점심쯤이었다.
일은 말했던 것과 같이 간단하였다. 인민군 대장이 인민해방이 어쩌고 혁명투쟁이 어쩌고 무상 분배와 모두가 잘먹고 사는 세상이라는 도통 어려운 말을 늘어놓을때 나무판을 어줍잖게 못질 해 만든 연설대 옆에서 대나무 봉에 매단 빨간 깃발이나 공화국 기를 들고 서있거나 때때로 옳소라고 외쳐주는 것, 그리고 인민재판때 콩볶는 총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엎어지면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박수를 치는 일 정도였다. 그것으로 배급쌀을 구해다가 밥을 지어 먹었으니 인민군의 이런저런 공사에 끌려가서 노역을 지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한 일이었다.
기존의 패악질을 일삼던 지주들과 친일파 잔당들이 전부다 고꾸라지자 새로운 놈들이 튀어 나와 꼬장을 부려댔는데 마을에서 머슴살던 청년 몇과 보도연맹 학살을 겨우 피해간 연맹원 가운데 몇명이었다. 머슴들은 그 이름이 잘 기억나지는 않으나 중길이라는 놈을 대장으로 하여 인공군이 마을에 몰고 들어왔을때 자기 집 지주의 머리채를 끌고 온 것의 공을 사서 빨간 완장을 얻게 되었다.
원래 중길이네 패라고 부르는 머슴 무리들은 말이 좋아 머슴이지 갑오년 이후에 신분이 해방된 노비들의 자식들이었는데 마을에서 모진 멸시를 받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물 만난 고기처럼 인공군 치하에서 활개를 치게 된 것이었다. 한글조차 쓸줄 모르는 일자무식인 그들은 어줍잖게 주워들은 주체사상과 혁명정신을 앵무새처럼 외쳐대며 툭하면 농민들을 이 꼬투리 저 꼬투리 잡으며 못살게 굴었다. 특히 그들이 제일 미워한 건 많이 배운 사람들과 돈이 좀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임따리당자(인텔리젠차를 몰라 잘못 말한 것이다)들은 게으른 도야지 같느니 근성이 빌어먹었다느니 성분이 고약하다느니 하며 자신들이 그동안 들어온 욕을 가져다 붙이며 괴롭혀댔다.
보도연맹 생존자중에 가장 열성적으로 인공군에게 협조한 몇몇은 해방후에 조금이라도 좌익운동을 한 경력이 있던 사람들인데 사상성과는 관계없이 인공군에게 개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 더더욱 난리를 치고 다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인공군의 입장에선 공화국의 배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꼬투리로 끌려갈지 모르는 인공군의 치하에서 그나마 나는 노조미의 덕으로 편안한 생활을 안위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노조미와 같이 만났던 몇명의 군인들에게 내가 대학 다닐 적에 라지오를 좀 다뤄 봤노라는 자랑을 아무생각도 없이 했다가 그들에 의해 라지오병으로 천거 되어 노조미를 따라 전남도당에 파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동분자로 숨통이 달아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따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소식을 전해드리고 애써 전선이 아니라 본부에 편히 않아서 전파나 받아치는 일이라며 안심을 시켜드렸으나 그것이 실소가 나올정도의 핑계라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느끼고 있었다.
어머님께 큰절을 올리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렸으나 그것은 불효자식의 지키지 못할 거짓말이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라지오 병으로 전남도당에서 일을 하는 중에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문을 하나 타전하였는데 그것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은 반토막이 났으며 내가 속해있는 전남도당을 비롯한 삼팔선 아래는 본부와 완전히 단절 된 것이다.
국군은 남쪽에 고립된 인민군을 파죽지세로 몰아 붙였고 나와 노조미는 전세에 밀려 입산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은 유격부대에 소속이 된것이 린이었다.
라지오 수신기가 망가져 버리고 대장동무의 명령으로 나는 일반 전투원이 되었는데 우리 분대에 소속된 사람이 린이었다. 헤실헤실 웃어대는 얼굴이 멍청해 보이면서도 썩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농사말곤 해본 일이 없는 일자무식이었다. 보도연맹 학살때 우익 청년회에게 훈계를 했다가 미움을 산 아버지가 끌려나가 총살을 당한 뒤 눈알이 뒤집혀 복수를 꿈꾸고 입산했다는 린은 평소에는 얌전했으나 전투만 벌어지면 눈깔을 뒤집고 광분한 살쾡이처럼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린이 하동무 하동무 하며 제일 따르는 것은 나였는데 내가 때때로 린에게 입산 당시에 보따리 속에 챙겨온 책 몇권과 당내 기관지를 소리내어 읽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린과의 인연은 후에 계속 이어져 내가 남부군에 배치되어 골짜기를 찾아갈 때도 린은 나의 옆에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