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5. 정원
식물원.
오르카 내에서 신선한 산소와 허브, 그리고 꽃의 유통을 담당해주는 중요한 곳이지만 정작 승조원들에게 있어서는 소외당하는 곳. 하물며 점심시간을 아득히 지난 오후의 식물원은 더욱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쮸, 쥬인님?!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오늘을 제외하고 말이다.
오후에 식물원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리제는 전투에 사용하는 살벌한 밧줄이 매달린 커다란 붉은 가위 대신, 작은 식물 관리용 가위를 들고 날아다니다가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멍한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리제, 혀 꼬였어.”
“핫?!”
“풉, 푸흐흐흡…….”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탓인지 발음이 꼬인 그녀를 보며 따라온 리리스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서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리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으, 그, 이건.”
“진정해, 진정해. 천천히 말해도 되니까.”
리제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머리에 쓴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붉은 눈동자와 뒤에서 바쁘게 붕붕거리는 날개는 확실히 리제가 맞았지만, 이렇게 밀짚모자를 쓴 모습을 보니 그녀와 다프네가 확실히 많이 닮았다는 게 체감되었다.
“리제 언니, 오늘 탐색에서 돌아오신 분들이 가져오신 씨앗을 심어야 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어떻게 하질 못하는 리제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씨앗들이 담긴 봉투를 들고 나긋나긋하게 날아오던 페어리의 일원은 이내 깜짝 방문객들을 보고 얼어붙었다.
“주인님……?! 경호대장님도 같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안녕, 다프네. 연락도 없이 찾아왔지? 아침에 레아랑 리제한테 한번 오겠다고 했었거든.”
푸른 눈동자의 정원사가 잠깐 멍하니 있던 찰나, 리제가 무언가 떠오른 듯 급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다, 다프네. 레아 언니한테 연락했어?!”
“아, 아뇨. 왜요?”
“언니 아까 운동 갔잖아, 만약 그 복장으로 주인님 앞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다프네는 손에 쥐고 있던 씨앗 꾸러미를 떨어트렸다.
“아…….”
-음? 레아가 운동? 이 시간에?
“후후후, 역시 오후에 하는 케겔 운동은 기분이 상쾌해~”
“......”
“......”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삼선 츄리닝을 입고 땀을 닦는 레아가 서 있었다. 후줄근한 그 모습에 사령관과 리리스가 입을 딱 벌리고 있자, 레아는 땀을 닦던 수건도 툭, 떨어트린 채 입을 떡 벌리고 팔을 축 늘어트렸다.
“우와……. 예상은 했지만……. 많이 깨네요, 레아…….”
“리, 리리스 양? 주, 주인님까지? 하, 하와와와…… 모, 모두 고개를 돌려주세요! 어서요!”
옆에서 블랙 리리스가 다소 정색한 표정으로 말하자 레아의 표정은 더욱 볼만해졌다. 두 눈은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뱅글뱅글 돌고 그녀 주변의 마이크로 로봇 역시 혼란스러운 궤도를 그리며 그녀 주변을 돌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주변 공기는 더욱 습해진 것 같고, 번개 불꽃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해충 제압비기, 한 방에 꿈나라로!”
“헉!”
리제는 레아가 부끄러움을 못 버티고 정원을 번개로 지지기 전에 큰 언니의 목 뒤를 가위의 손잡이로 빠르게 쳐서 기절시켜 제압했다. 그렇게 앞으로 풀썩 쓰러진 레아를 보며 식은땀을 쓸어내린 그녀는 자매에게 말했다.
“다프네, 레아 언니를 숙소로 데리고 가줘. 씨앗 파종이랑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아, 네. 부탁할게요, 리제 언니.”
의도치 않게 사고가 일어날 뻔한 것을 막아낸 리제한테 고개를 숙인 후,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쓰러진 레아를 부축한 다프네는 사령관과 함께 온 부관한테도 인사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혹시나 이야기하실 것이 있으시면, 나중에 다시 오시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번엔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레아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
“네, 꼭 전해드릴게요.”
레아가 떨어트린 수건을 주운 리리스는 꽤 고민 끝에 다프네한테 말했다.
“그 체육복, 음…… 실용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본인이 저리도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까…… 음, 오드리 양한테 말해서 괜찮은 디자인으로 바꿔주겠다고 전달해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레아 언니한테 전해드릴게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리리스에게 쓴웃음과 함께 공손히 답해준 다프네는 레아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후우……. 큰일 날 뻔했네…….”
겨우 상황을 진정시킨 리제는 자매인 다프네와는 달리 붉은 리본이 장식된 밀짚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붉은 눈으로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기다리셨죠, 주인님. 기왕이면 혼자 오셨으면 좋으셨겠지만, 리리스도 같이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시고 가세요.”
“괜찮겠어? 혼자서 일하느라 바쁠 거 같은데.”
그의 말에 리제는 모자로 살짝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히히힛, 엘리자베스 A형 모델에게 있어선 이 정도는 일도 아니랍니다. 리제랑 자매들이 가꾼 정원에서 쉬시다 가세요.”
과거의 시저스 리제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그 모습에 신선한 충격과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견함을 느낀 사령관은 놀란 눈이 되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답해줬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럼 부탁한다.”
“네, 오후에 맞게 캐모마일로 준비해드릴게요.”
공손하게 답한 그녀는 사령관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연신 즐거운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빠르게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런 리제를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리리스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구나, 정말로 근본은 착한 애였어.”
“후후, 그렇죠? 리리스의 보는 눈은 정확하답니다?”
수면 위의 태양광과 똑같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인공조명 아래 오르카의 사령관과 그 부관은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
한편 컴패니언의 숙소.
“페로, 이 정도면 될까?”
“거품이 약간 덜 올라왔긴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구우세요.”
“응, 알겠어!”
“필링의 레시피는 아우로라에게서 배운 대로 해야 합니다, 하치코. 이상한 거 넣으면 큰일 납니다.”
“하치코를 믿어줘! 언니랑 주인님한테 줄 테니까 망치면 안 되는걸!”
컴패니언의 동물 자매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펜리르, 맡은 건 잘하고 있습니까?”
“응, 포장도 다 끝내고 이제 리본을 묶고 있어. 근데 힘 조절이 힘들어서 그런지 잘 안 돼.”
“도와주겠습니다, 줘보세요.”
페로는 빠르게 자신들의 숙소로 건너가서 방의 안으로 들어와야만 눈에 들어오도록 교묘하게 배치한 상자들을 받아서 리본을 묶는 걸 도와줬다.
“근데 이거 정말로 언니가 좋아할까? 너무 과하다고 야단맞을 거 같은데…….”
페로는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언제나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던 언니도, 한 번쯤은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주인님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분명히 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지? 언니도 이런 걸 좋아하겠지?”
페로는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보다 말한 대로 펜리르가 줄 것도 포장해뒀습니까?”
고양이의 그 말에 늑대는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헤헷, 당연하지, 딱 좋은 걸 마련해뒀다구.”
쾌활한 늑대 소녀의 그 모습에 안심이 되는 듯, 페로는 눈을 살짝 감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걸 보면 분명 언니가 기뻐할 물건이겠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드아이의 고양이는 다시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몰두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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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레아줌마 심정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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