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 나이트 앤젤은 생각한다.
“왜 다들 나한테 서약은 언제 하냐고 놀리는 건데에!!! 내가, 내가 그깟 반지 하나 못 받을 것 같냐고오오오!!!”
대체 자신이 모시는 둠 브링어의 지휘관, 존ㅁ… 아니, 멸망의 메이는 왜 뭔 문제가 터질 때마다 저렇게 광견병 걸린 비글처럼 구석에서 울부짖는 것일까… 라고. 하울링은 기껏해야 컴패니언의 펜리르나 하치코 정도만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데이터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저 흉물스러운 가슴, 울부짖을 때마다 출렁출렁 거리는 저 망할 가슴! 복원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쓰인 적 없는 저 가슴! 볼 때마다 거슬렸지만 이젠 더더욱 거슬린다.
나이트 앤젤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어떻게든 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정신연령이 퇴화하는 자신의 부대의 지휘관을 보면서 그녀의 인내심은 또 한계에 달했다. 난 부관이지 보모가 아닌데. 뭔 일만 일어나면 자신을 무슨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여기고 칭얼거리고 있으니 슬슬 유전자 씨앗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꿈틀거렸다.
“대령님……. 메이 대장님… 진정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저러다가… 탈진하면…….”
“탈진하라죠, 어린이는 팔팔해서 기운이 빠지려면 한참 걸리겠지만요.”
어째서 멸망의 메이가 저렇게 통곡을 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가장 최근에 합류하게 된 밴시마저 귀를 막고 옆에서 빼꼼 내다볼 정도로 둠 브링어의 분위기가 개판이 되었는가.
모든 건 그날 아침, 일과처럼 틀었던 그 망할 뉴스에서 시작되었다.
◈
“후우, 출격도 없었고 오래간만에 푹 잤네…….”
이른 아침.
나이트 앤젤은 평소 그녀의 모습에선 상상하기 힘든 느슨한 생활복을 입은 모습으로 하품을 하며 비적비적 걸어 나왔다. 간단히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나이트 앤젤은 세수부터 하기 위해 세면대로 걸어갔다.
일주일 전, 사령관은 둠 브링어 부대를 방문할거라고 했지만, 일정이 긴급 변경되어 사령관은 둠 브링어 부대를 사찰하기 전 급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녀가 메이 대장 대신 그와 접선하여 지휘 프로토콜 갱신 자료를 받아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여기까지만.
‘바보! 멍청이! 멍게! 말미잘! 약골 사령관, 그렇게 몸이 안 좋으면 30분 전에 취소 통보를 날리지 말고 그냥 전날 오늘 일정을 다 취소했어야지, 날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물론 사령관이 온다고 해서 잔뜩 들떠 있다가, 화장이 막 끝났을 때 갑작스레 방문이 취소된 메이 대장의 심정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사령관에게 온갖 심술을 부린 끝에 빠른 시일에 다시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메이 대장의 분노는 그래도 풀리지 않아 둠 브링어 부대 전체가 그녀의 투정에 온종일 시달려야만 했다.
“그 아스널이 이끄는 캐노니어는 잠잠하다던데, 우리 대장님이랑 저쪽 지휘관이랑 바꿨으면 좋겠다…….”
나이트 앤젤은 그녀가 데이터를 받으러 갔을 당시에 만나서 짧은 이야기를 나눴던 비스트 헌터를 떠올리며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로열 아스널이 지휘관으로 있는 AA캐노니어 부대 역시 둠 브링어와 마찬가지로 일정이 바뀌어서 사령관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부대원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메이와는 정반대로 아스널 대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사령관을 보고 싶으면 날 잡아서 쳐들어가면 그만인걸! 아쉽지만 이번은 그냥 우리 손으로 갱신만 하고 끝내야지 어쩔 수 있겠나!’하고 넘어갔다던가?
-생각하니 화나네, 판을 깔아둬도 혼자서 다 말아먹는 주제에 우리한테 성질이냐고.
그 생각에 이르자 양치를 하고 있던 나이트 앤젤의 이마에 힘줄이 투둑, 하고 튀었다.
분명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령관과 만나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밤에 잠자리도 같이 할 수 있지만, 소녀의 마음을 지닌 저 꼬맹이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오르카의 모든 부대가 사령관의 총애를 받기 위해 무한출혈경쟁을 하고 있는 판에 혼자서 비싸게 굴다니, 망하자고 작정한 게 아닌가?
호드의 총잡이는 술을 먹여서 거사를 치르고, 테마파크의 마녀는 이야기하다가 밤을 같이 보내며, 컴패니언의 늑대는 발정이 나서 덮친 데다, 스틸라인의 지휘관은 부대원들이 포장지를 교체해서 방에 밀어 넣었고, 발할라의 지휘관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포장지를 교체한 다음 부대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합방에 성공했다. 배틀 메이드의 하우스키퍼? 그녀는 더 말할 것이 필요한가.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최근에 재생성한 캐노니어의 지휘관은 사령관의 정을 받는 건 당연하고 아예 아이까지 받아낼 기세였다. 발렌타인 때 본 그 무서울 정도로 위풍당당한 모습은 둠 브링어의 부관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망할 놈의 꼬맹이는 그녀를 땅개라고 부르며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비빌 걸 비벼야지, 발렌타인 이후 로열 아스널이 보인 행보를 보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신체조건, 성격, 포부, 그리고 언행까지. 메이와 아스널은 많은 면에서 대조되었지만 그게 메이를 아스널의 경쟁상대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철충 앞에서 인간을 끝없이 낳겠다며 배 팡팡 두드리는 그 미친 패기를 보여주기는커녕 손을 잡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판에 맞수는 무슨, 꿈 깨라 진짜.
저렇게 모두가 사령관을 어떻게든 잡아오려고 출혈경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메이는 혼자서 벼랑 위의 꽃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사령관이 자신에게 다가와 따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왜 이럴 때는 그 냉철한 전략적 판단이 먹히지 않는 것일까, 나이트 앤젤의 머리에 힘줄이 또 하나 솟아올랐다.
-꿈 깨시죠, 가슴에 꿈만 가득해가지고는. 사령관 주변에 저렇게 경쟁자들이 널려있으니 설령 사령관이 대장을 가엾게 여겨 대장을 찾아온다 해도 맹수 같은 여인네들에게 반드시 중간에 빼돌려질 겁니다. 대체 그 냉철한 전략가는 어디에 가고 꿈에 빠진 소녀만 남은 겁니까?
그러나 지금의 그녀가 모시는 대장의 상태라면 저 말을 듣는 순간 여러 가지로 공황에 빠져서 구석에 틀어박혀 버릴 것이다. 분명 ‘나이트 앤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하면서 눈이 접시만큼 커져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겠지.
하지만 그냥 참고 넘어갈 수도 없다. 비록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메이의 감정을 잘 받아주도록, 상호보완이 이루어지게끔 설정되어있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니까.
세상에 판을 깔아두고 조언을 해줬더니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더니 생각한 것이 팔씨름이라니! 남들이 초콜릿을 전달하느라 바쁠 때 기어코 손잡았다고 좋다고 시시덕거리던 그 덜떨어진 모습!
심지어 그걸 한 날이 발렌타인 데이였다, 아자젤 맙소사! 최악도 정도가 있지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아…… 왜 난 저런 꼬마의 부관으로 설정되어선.”
양치를 끝낸 칫솔을 거칠게 통에 던져 넣은 그녀는 짜증스레 투덜거렸다. 저렇게 지지부진하면 나이트 앤젤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텐데. 차라리 스카이 나이츠 소속인게 더 미래가 있지 않았을까? 뭐, 스텔스 기능을 가졌다면서 꼴사납게 출렁출렁 거리는 덩어리를 봐야하니 거기도 거기 나름대로 스트레스는 엄청나게 받았겠지만.
이제는 분노가 치밀기보다 체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가끔은 발할라의 발키리나, 컴패니언의 펜리르처럼 새치기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다간 저 자존심 강한 꼬마 지휘관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길지 뻔했다. 이렇게 마음으로 수없이 욕과 폭언을 퍼붓는다 한들, 그녀도 차마 못 넘는 선이 있었다.
“하아……. 마저 씻고 나가야지.”
푸념 섞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찬물 세수가 나름 도움이 되었으니까.
◈
“흐음, 오늘 아침은 또 오르카에 무슨 뉴스가 있으려나…….”
둠 브링어의 지휘통제실.
땅딸막한 소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패널의 화면을 돌려보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약간 짧은 흑발의 여성은 다소 의아한 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뉴스라고……. 해봤자……. 스프리건 씨의……. 뉴스…….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지휘관으로서 정보 습득을 게을리 하면 안 되니까.”
‘나름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라고 덧붙이며 아침 식사 대신 초콜릿이 코팅된 감자칩을 하나씩 집어서 입에 던져 넣어서 우물거리는 그녀를 보며 다이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부터 묘하게 어린애 같은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종종 이렇게 멋진 말과는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니 묘한 생각을 들게 했다. 같은 부대인 자신조차 이런데 사령관은 어찌 여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것은 덤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침 문안차 방문 드립니다.”
“오, 왔구나. 복구되고 난 후 첫 아침을 보낸 느낌이 어때?”
그렇게 뉴스를 기다리며 초콜릿 감자칩을 오독오독 입안에서 부수고 있는 메이의 귀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린 후, 연두색 장발을 지닌 붉은 눈의 여성이 다소 뻣뻣한 투로 들어왔다.
“뭐라고 해야 할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소모품을 복구시키신 사령관님의 의중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장님.”
A-87 밴시가 주저하면서 답하자 메이는 다소 심드렁하게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망할 캐노니어, 페어리도 그렇게 말한 거 보면 사령관은 어지간히 우리 처지에 신경 쓰는가 봐. 둔해 빠진 주제에.”
“그렇습니까? 그런 인간님은 또 처음인 거 같은데…….”
밴시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메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보다 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아질 거야. 너무 우리를 챙겨주다 보니까 속 터지는 경우도 많거든.”
멸망의 메이의 다소 한탄 섞인 말에 답한 것은 밴시가 아닌, 문을 열고 들어온 날 서린 또 다린 목소리였다.
“답답해서 속 터지는 건 제 이야기고 대장 속은 꿈으로 과포화 되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야겠죠. 곧 죽어도 말은 똑바로 합시다, 꼬맹이 대장.”
“너, 너어!!!! 이제 막 복원된 신참 앞에서 그러기야?! 대장의 체면은 신경 안 써?!!”
목에 핏대를 세운 메이가 반발했지만, 나이트 앤젤의 답변은 정밀 폭격과도 같았다.
“어차피 사령관 앞에 나서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체면, 이참에 미리 없애도 아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너, 이거 하극상이야!!!!!”
“아, 예, 나중에 대장이 사령관에게 대들 때 이게 바로 하극상이라고 신입에게 잘 가르쳐 놓겠습니다.”
“으그그그극…….”
자신이 들어와서 메이와 아침 만담을 하는 와중에도 틈이 보이자 일어서서 깍듯이 경례하는 밴시를 보며 간단히 손짓해서 편히 있으라고 한 나이트 앤젤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의 대장을 내려다봤다.
“나이트 앤젤 대령님, 오셨습니까.”
“편하게 있으세요, 밴시.”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대원이 복원 후 맞이하는 첫날 아침부터 이런 꼬락서니라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모습을 또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트 앤잴을 마음을 독하게 먹고 언어폭격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한 소리 듣는 거 원하지 않으시면 슬슬 행동에 나서주시죠. 언제까지 부관한테 이렇게 잔소리 들으며 사실 겁니까, 메이 대장.”
“크, 크으윽…….”
아침부터 시작된 잔소리에 매이는 치가 떨리는지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도저히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그녀 자신이 한 번 생각한 것을 실행하고 나면 부대 분위기 개판 나는 건 다반사, 생각한 것을 말하면 이젠 부관인 나이트 앤젤이 진짜인지도 의심스러운 고혈압 약을 꺼내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입에 탈탈 털어 넣는데 누가 누구한테 무어라 한단 말인가.
다행히 둠 브링어에는 그녀와 나이트 앤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준 다이카. 비록 말은 느리지만 항상 침착하고 온화한 그녀가 있었기에 둠 브링어는 전투에서도, 일상에서도 파탄 나는 일 없이 유지되었다. 메이는 다이카 쪽으로 눈을 슬쩍 돌렸다. 이쯤이면 다이카가 충분하다고 나이트 앤젤을 말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다이카?”
하지만 든든한 원군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던 37식 다이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이카는 말이 느린 것이지 말이 없는 게 아니었기에, 이런 침묵은 무언가 이상했다.
“다이카, 뭘 보고 있습니까? 꼬맹이 대장이 말하는데 안 들리나요?”
“아……. 그랬나요…?”
그런 그녀가 이상했는지 나이트 앤젤이 말을 걸자 그제야 다이카는 깜짝 놀란 눈이 되어 황급히 채널을 돌렸다.
“뭐야, 뉴스 봐야 하는데 왜 끈 거야?”
“그게… 딱히 보실 건… 없어서요…….”
“흐음,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하는 거잖아. 왜 그러는 건데?”
“음, 그러니까… 그게…….”
나이트 앤젤의 등골을 타고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다이카가 저렇게 무언가를 ‘숨기려는’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던가? 무언가를 ‘찾아내는’ 역할을 맡은 대원이? 적어도 이전의 ‘나이트 앤젤’ 개체들의 기억 속에는 없는 거 같았다.
-이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데.
영화에서 들은 적이 있던가? 그녀의 직감이 머릿속에서 버튼이 망가지도록 경보를 울리고 있었지만 나이트 앤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아르망 모델처럼 예언에 특화된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꼬맹이 대장을 막는단 말인가.
‘삑-.’
“앗, 대장님……!”
그렇게 강렬한 불길함에 사로잡혀 있는 부관과, 다이카의 만류를 뒤로한 채, 멸망의 메이는 패널을 다시 켰다.
[오르카 뉴스의 스프리건 기자가 특보를 계속해서 전해드립니다! 첫 꼭지에서 전해드렸다시피 저희가 우연히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사령관께선 경호대장 블랙 리리스 씨에게 무려! 일주일 전에! 반지를 주셨다고 합니다!]
“에?”
중추 신경이 모조리 다 고장이 난 기분이었다. 분명히 방 안의 조명은 환했는데 주변이 깜깜해졌고, 물로 얼굴을 씻은 지 꽤 되었는데도 물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사령관이 누구한테 뭘 줬다고요?!”
[유감스럽게도 그 소식은 일주일 동안 오르카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두 분 만의 비밀이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꿍꿍이가 숨겨져 있던 걸까요?!]
“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사령관이 블랙 리리스한테 반지를 줬다고? 거짓말이지? 그것도 일주일 전이면…….”
메이는 패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핏기가 나간 얼굴로 자신의 부관들을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이트 앤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다이카는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면서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꿈이다. 이건 꿈인 게 틀림없다. 나이트 앤젤은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것이다. 지금 눈을 다시 뜨면 모든 게…….
하지만 뒤이어 신난 듯이 떠들어대는 스프리건의 목소리가 그 기대를 한 번에 박살을 내버렸다.
[비록 음성 데이터의 복구는 실패했고, 영상 데이터도 추출 중에 손상되었지만, 다시금 시청자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어……? 어……?!”
무슨 이유가 있던 건지는 모르지만, 다소 치직거리는 화면에 음성조차 출력되지 않는 영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그제야 나이트 앤젤의 동공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사고를 쳤다. 그것도 아주 초대형 사고를.
“.......”
“대장님…… 괜찮으신가요……?”
그 영상을 보면서 멍한 표정이 되어있던 메이가 걱정스러운 듯, 다이카가 말했지만 이내 빨간 머리의 꼬마 대장의 고개는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 윽……. 우윽…….”
“대장? 설마 우는 거 아니죠?”
뭔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자 나이트 앤젤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하며 물었지만, 뒤이어 나온 것은 정말 온갖 감정이 뒤엉킨 소리였다.
“용서 못 해, 이 바람둥이 사령과아아안!!!!! 그날 바람맞힌 게 저거 때문이었다니, 반드시 대가를 뜯어내고 말거야아아아아아아!!!!!!”
◈
“그날 결국 아무것도 못 하셨던 주제에 고함만 뻑뻑 지르다니 양심이 있습니까, 젖탱이 대장.”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던 메이를 떠올린 나이트 앤젤이 이마에 힘줄을 투둑투둑 튀어 올리며 말하자, 나름대로 억울한지 둠 브링어의 대장은 항변했다.
“순순히 자신이 숨겼던 걸 인정했고, 다른 애들에게도 기회가 생길 거라고 그 바보 사령관이 말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사령관을 만나고 나서 매일 매일 지적 수준이 퇴화하는 줄 알았는데 인격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셨군요. 이전이었다면 미사일 버튼을 신나게 눌러대셨을 텐데.”
비꼬듯이 말하는 부관의 말에 대장은 욱, 하고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사령관은 거짓말 안 하는 거 너도 뻔히 알잖아. 빨래판 대령!”
“그리고 아직 손 밖에 못 잡아본 대장은 자신에게 그 기회가 올 거로 생각하고 말이죠. 착각도 이 정도면 병입니다.”
“이게 진짜!!!”
메이가 구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이트 앤젤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분노 수치가 한계에 달한 부관은 그녀를 팔을 뻗어서 그녀의 대장이 달려드는 것을 가볍게 막아버렸다. 신장의 격차는 팔 길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메이는 분한 듯이 주먹을 붕붕 휘둘렀지만 나이트 앤젤에겐 당연히 스치지도 않았다.
“그날 그 진상을 부린 게 대장뿐인 줄 압니까? 착각도 유분수지. 온 오르카가 뒤집혀서 비서진을 급하게 불러서 비상 회의를 열어야 했고, 함장실 문이 완전히 박살나서 닥터와 포츈이 긴급 수리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크, 크으으윽…….”
“그렇게 다들 사령관의 총애를 받지 못해 안달인데, 대장은 초콜릿 하나 전해 주는 것도 끙끙거리고, 대놓고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있는데 고작 팔씨름을 핑계로 손만 잡아도 헤실헤실 웃고, 누가 봐도 사령관에게 푹 빠진 게 보이는 데 혼자서만 도도한 척, 고고한 척. 그래서야 아스널 준장에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윽, 으으으으으……!!!”
“그래도 아스널 준장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긴 하니 이제 좀 발전이 있을 것 같아 기대는 했는데, 그날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하아…….”
“나, 나이트 앤젤……? 표정이 왜 그래……?”
“멍청한 대장 때문에 고혈압에 더해 위궤양까지 생기기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입 다물고 듣기나 하시죠.”
표정이 찬찬히 사색이 되어가며 떨기 시작하는 메이에게 나이트 앤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그날의 오후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
-이건 틀려먹었다.
그것이 함장실도 아닌 비서실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나이트 앤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나이트 앤젤은 길길이 날뛰는 메이 대장을 피할 겸 사령관의 해명도 들을 겸 함장실을 찾아갔지만 이미 그 앞에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특히 목소리 크기로 유명한 샬럿이나 앨리스, 백토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드라, 그리고 뜻밖의 인물도 하나 있었는데…….
“음? 레오나 대장님까지?”
발키리를 비롯한 발할라의 자매들이 말리고 있었지만 분노한 모습으로 당장 들어가겠다고 비키라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을 보니 북방의 암사자라는 별명이 헛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보면 메이의 정신연령이 대장 중에서 비교적 어린 것을 좋아해야 할지 나빠해야 할지 참 의문이 들었다.
분명 적당히 구슬려서 자신이 찾아가서 항의하겠다고 틀어막지 않았다면 아마 모두가 모인 데에다가 그 미사일 유모차를 끌고 가서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날뛰지 않았을까?
“잠시만요, 업무 호출입니다! 다들 비켜주세요!”
“죄송합니다, 업무 때문에 들어가야 해서 잠시만 지나갈게요! 기기 고장 날 수 있으니까 조금만 비켜주실래요?”
“엥?”
그렇게 다들 사령관이 나오거나, 해명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조금 의외의 인물들이 함장실이나 비서실에서 호출을 받은 듯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방금 그 둘, 스프리건하고 탈론 페더 같은데…….
오늘 아침에 오르카 뉴스랍시고 특보로 동네방네에 사령관이 반지를 준 사실을 떠든 리포터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꽤 불순한 이유로 영창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 호드의 정찰병이 촬영 도구를 들고 완전 고철이 된 함장실의 문 너머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이트 앤젤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되었다.
저 두 사람이 대체 왜 함장실로 들어간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호출을 받았는지 감도 안 오는데, 왜 둘을 동시에 부른 거란 말인가?
“다들 감정이 복잡하실 텐데, 죄송하지만 잠시 길을 비켜주시겠습니까? 긴급 호출을 받은 터라…….”
그렇게 머리가 이해를 못 하는 사이, 이번에는 붉은 옷과 금발을 지닌 예언자 바이오로이드가 공손히 그들 사이로 지나가며 머리를 숙인 후 종종걸음으로 함장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인원들이 함장실 안으로 쏙쏙 들어가자 모여든 인원들도 행동을 멈추고 얼어있는 사이,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없던 비서실에서 라비아타와 콘스탄챠가 함께 나와서 헛기침을 했다.
“여기에 모인 모두가 아침에 나온 소식 때문에 황당하고, 화가 나고, 슬퍼서 모인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주인님의 입으로 나올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잘 아는 분이 대체 왜 그런 거래요?! 왜 우릴 만나 주시지 않는 건데요?!”
“어허, 앨리스. 언니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보세요.”
앨리스가 항의하듯 말하자 콘스탄챠가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그걸 들으며 라비아타가 작은 한숨을 내쉰 후,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주인님께선 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하고 계시니, 곧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식을 전할 겁니다. 모두가 이해하실 수 있게 해명을 준비하시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어요.”
“으음…….”
그 말에 순간 복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치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라는 느낌이 드는 것만 같았다. 애당초 그녀들에게 있어선 누가 먼저 반지를 받았는지도 중요했지만, 그걸 어째서 숨겼는가도 꽤 거슬리는 문제였다.
“돌아가시면 30분 후에 전체 방송으로 주인님이 직접 공표하시는 걸 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방송을 기다리고, 들으시면서 푹 쉬시길. 주인님께서도 자매들이 이런 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라비아타의 호소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언제든지 사령관한테 쳐들어갈 기세로 흉흉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끄응……. 주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사령관이 그렇게까지 말했다면야…….”
“오늘은 그럼 물러나야겠네…….”
샬럿부터 시작하여, 맹수처럼 날뛰려고 하던 레오나, 그리고 살벌하게 전기톱을 휘두를 기세였던 백토까지 하나, 둘 조용히 자신들을 말리려고 온 이들과 함께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라비아타는 물론 콘스탄챠도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멀찍이 있던 나이트 앤젤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메이한테 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리고 어떤 발표가 나올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수확 없이, 예고 소식만 들고 둠 브링어의 생활관으로 돌아간 지 30분 후.
전체 채널로 사령관이 그 모든 파란의 시작과 원인에 대해서 해명하기 시작했다.
거의 피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은 울분에 찬 표정으로 옷소매를 질겅질겅 어린아이처럼 물어뜯는 메이를 진정시키느라 제대로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아침에 특보를 보고 다들 놀랐을 테고, 일부는 가짜 뉴스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그 소식은 사실이 맞다. 이런 식으로 알리려 하지 않았고 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알리려 했는데, 느닷없이 혼란을 일으켜서 매우 미안하다.]
첫 마디만으로 설마 하던 메이의 표정이 충격에서 절망, 좌절, 분노로 빠르게 변하는 걸 보니, 나이트 앤젤은 이런 폭탄을 던진 사령관이 살짝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뉴스에서 나온 대로 일주일 전에 내가 블랙 리리스한테 반지를 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야. 너희들은 리리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지를 받은 대원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겠지만, 언젠가는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그 이상의 반지들도 만들어질 거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면, 언젠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게 될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이트 앤젤은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는 더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애들에게도 줄 순 있으나 기다려달라.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아직은.
하지만 오르카 인원들의 성향을 보아 할 때, 절대 호락호락 앉아서 그걸 기다릴 사람은 없었다. 분명 한시라도 빨리 사령관의 눈에 들려고 물밑에서든, 그리고 수면 위에서든 경쟁을 시작할 이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걸 은근슬쩍 노리는 것처럼 마지막의 말을 살짝 강조했다. 사령관의 입을 통해, 그의 말투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가 지금껏 보여 왔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방송은 분명 누군가와 함께 치밀하게 계산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 분명했다. 최소한 아르망은 포함되어 있겠지. 삼안 산업의 걸작, 라비아타 프로토타입도 이 계획에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사령관이 혼자서 생각해낸 계획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이런 악랄한 함정을 생각해냈단 말인가?
“사령관다운……. 해결책이네요…….”
다이카는 느긋한 목소리로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이트 앤젤은 불안감이 앞섰다. 설마 옆에 있는 이 망할 꼬맹이 대장이 저 함정에 휘말리지 않을까? 설마 저 함정을 간파하지 못 할까?
“......나이트 앤젤, 다이카.”
“예?”
“네에?”
그런 그녀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하고 있던 메이는 이를 악물고, 둠 브링어의 지휘관으로써 명령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둠 브링어가 그 땅개 캐노니어보다 먼저 반지를 받아야 한다. 실피드랑 지니야들한테도 반드시 전해.”
“하지만 그건 원한다고 되는 게…….”
메이는 주먹으로 지휘실의 책상을 쾅 내리쳤다.
“시끄러워! 네가 말 했잖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경호대장한테 선수를 빼앗긴 것도 속이 뒤집히는데, 캐노니어한테까지 뒤처지게 되면 내가 절대 용납 못 해!”
악을 쓰면서 외치는 메이의 그 말에 빈약한 가슴의 부관은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지 받을 생각 이전에 진도나 더 나갈 것이지 양심이 둠이터에게 후르륵 빨려나갔나.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말하면 이성을 잃고 불타오르는 메이에게 기름을 더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그러니 조금 진정하면 차근차근 말해보자. 일단은 그렇게 해보자고 그녀는 다짐했다. 로열 아스널과 멸망의 메이는 출발점이 너무 다르기에, 저렇게 투지만 불태운다고 해결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생각이 가능할 때 잘 달래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게 해야 했다.
그래, 그게 최선이자, 둠 브링어가 더 고통 받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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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 효과 쩌네요!
처음 써봤던 개그성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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