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령관
[내일 밤 찾아봬도 될까요?]
그게 오늘 아르망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이후로 한 토막의 말도 없이 업무 끝날 때까지 일만 했으니까.
“휴우…….”
보통 이렇게 맘이 싱숭생숭하면 일이 손에 안 잡혀야 정상인데 왜 오늘은 밀린 업무가 하나도 없을까. 아르망이 찾아 준 자료 덕분에 오전 전략 회의도 아주 빠르게 끝났고, 점심은 여유로웠으며, 심지어 저녁엔 할 일이 없어서 묵혀 놨던 안건 가지고 지휘관들끼리 빠르게 회의 한 번 더 열었을 정도였다.
[각하, 이러다 몸이 상하진 않으실지 걱정입니다.]
[몸이 상하긴……. 옛저녁에 끝냈어야 할 거 지금 겨우 하는 건데 뭐.]
[마리 대장의 말이 맞다, 사령관. 중요한 것만 처리하고 쉬어라. 이 정도면 나머진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으음, 너무 티 났나. 괜히 눈치 보이게 한 건 아니겠지?”
답답하긴 한 모양인지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뭐, 솔직히 눈치 보이게 했겠지. 생전 안 하던 일을 했는데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있나. 물론 내 사정을 대강 아는 레오나는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지만 말이다.
“휴우.”
그리고 두 번째 한숨.
진짜 얼마만인진 모르겠는데 10시라는 (내 기준에선) 감동적일 정도로 이른 시간에 방에 들어온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질 못하고 한숨만 한 바가지씩 내쉬고 있었다. 제길,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놀 줄 안다고 혼자 있으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다른 대원들 방에 놀러간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지금 기분으론 차마 그러기도 뭣하고, 뭐라도 먹으려면 소완이나 아우로라를 신경 쓰게 할 것 같고. 물론 걔네들이야 내가 부탁하면 기뻐하면서 뭐라도 만들어주겠지만, 지금 누군가를 마주칠 기분이 아니었다.
똑똑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어째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에 누가 찾아오는 걸까.
[폐하, 저…아르망입니다. 들어가도…될까요?]
“아르망?!”
거짓말 안 치고 몸이 침대에서 용수철 튀듯 튀어 올랐다. 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일단 방문부터 열었다. 문 앞엔 아르망이 펑퍼짐한 하얀 잠옷을 입은 채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 서 있었다.
“평안하신지요, 폐하.”
“어, 어어, 평안해. 어서 들어와.” 나는 일단 아르망 먼저 방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근데 내일 밤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님 내가 잘못 들은 거야?”
“폐하께서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제가…그렇게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아르망이 애써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불안해서, 그저…폐하께서 절 그저 다독여주실까봐…….”
“……?”
평소의 아르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맥락이 맞지 않고……. 마치 평범한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처럼 고민거리를 가지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진정부터 시키자. 얘기도 좀 해보고. 난 아르망이 들고 온 음식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마침 잘 됐다. 출출했는데. 나랑 먹으려고 가지고 온 거야?”
“…네. 폐하께서 저녁 만찬을 많이 드시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소완 님께 부탁해 드실 것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소완이 신경 쓰게 만들었지. 참 여럿 불편하게 하는 데만큼은 도가 텄구나, 나……. 나중에 사과하러 갈 대상이 또 하나 늘었다.
아르망이 가져온 건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막상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배가 안 고파서가 아니었다. 공복감이 느껴지긴 했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아르망을 눈앞에 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같이 샌드위치나 먹을 순 없었다. 아르망도 그걸 바라지 않을 터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말문을 연 건 나였다. 어쨌든 내가 먼저 뭘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오늘은 미안했어.”
“남들의 험담으로부터 절 지켜주지 못하셔서요?”
“…맞아. 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유로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어설픈 동정이나 이해 따윈 금물이다. 동정은 이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니까. 난 아르망을 정면으로 대하고, 혼나고, 그리고 사과해야 한다. 그게 아르망에 대한 나의 의무이자 예의다.
“실은 그런 것 따윈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요, 폐하.” 아르망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폐하의 옆자리에 있는 한 남들에게 선망과 시기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제가 그런 시기에 상처 입으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제겐 그런 시기와 선망이, 폐하의 옆에 서 있는 자로서 느끼는…일종의 고양감으로 다가옵니다.”
그 말을 하며 아르망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미소를. 그렇다. 아르망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연약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아르망 역시 이 오르카의 일원이자, 자랑스러운 부관이란 점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건 오히려 나였다.
“널 어린애라고 무시하던 건 오히려 나였구나. 내가 제일 멍청했어. 널 보호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든.”
“절 아껴주시는 폐하의 마음은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폐하, 그건 제가 원하는 형태의 마음이 아니랍니다.”
아르망은 그 말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껐다. 아까 켜 놓은 수면등의 불빛만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출 뿐, 이 작은 세계는 깊은 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하고 어두워졌다.
깊게, 그리고 느리게, 아르망의 어깨에서 얇은 잠옷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아, 아르망?”
“…폐하.”
희미한 빛을 등지고 아르망이 서 있었다. 속살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한 네글리제가 아르망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죽 뻗은 희고 고운 팔다리, 부드럽게 봉긋한 가슴은 내 안에서 있던 아르망의 모습을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얼빠진 놈처럼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난 아르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가, 이래도 그저 애로만 보이시나요.”
“…….”
목소리에서 단맛이 난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일까. 그렇지만 아르망의 목소리는 꿀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농밀하고 달았다. 끈적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 향기는 내가 아르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고…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언제부터?”
두서도 맥락도 없는 한 마디였지만, 아르망에겐 그걸로도 충분한 듯했다.
“모르겠어요. 깨달았을 땐 이미 폐하께 맘을 뺏긴 뒤였으니까요.”
한 걸음, 아르망은 내게 다가왔다.
“테마파크 이후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첫눈에 봤을 때부터 폐하를 사랑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계기 따윈 아주 소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 이미 폐하께 푹 빠져 있는 걸요. 폐하의 행동, 약간 낮은 목소리, 가끔 보여주시는 철없는 모습, 그러면서도 자기 할 일에 언제나 성실하시고, 전투 때는 누구보다도 우리를 아끼시는 믿음직한 분. 그 모든 게 어우러져 폐하를 이루고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분을요.”
다시 한 걸음. 아르망의 눈동자가 보였다. 불안과 애정으로 가득 찬 그 눈은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
“폐하를 웃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폐하께 자랑스러운 신하로 있고 싶었어요. 폐하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는 짐을, 제가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었어요. 폐하의 뒤를 따르는 게 아닌 옆에 서고 싶었어요. 당당히 폐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폐하를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아르망은 내 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올려다보는 아르망의 눈동자는, 분명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 부족했어요. 폐하의 짐을 덜어드리긴커녕 그저 길을 제시해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폐하께 책임을 떠넘기는 주제에, 그래도 평소에 열심히 도와드린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바보 같죠? 고작 재주라고 해봤자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정리하는 것뿐인데.”
“널 그렇게 폄하하지 마, 아르망. 넌 늘 잘해줬어. 언제나 침착하게 길을 제시해주는 넌 내 자랑이고…내 희망이었어. 네게 부끄럽지 않은 ‘폐하’가 되기 위해 난 노력할 수 있었어.”
“영광이에요, 폐하. 절 그렇게 아껴주셔서. 하지만 폐하께서 절 아껴주시는 만큼 전 제 마음을 더 꽁꽁 감춰야만 했어요. 폐하께서 절 아껴주시는 이유가…절 이성으로 보시질 않기 때문이란 걸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
아르망의 그 떨림 가득한 말에 난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 되도록 노력했으니까. 난 아르망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라도 그랬다간 날 부담스러워할까 봐 두려웠다.
단순히 일적인 면을 떠나서도 아르망은 내게 소중한 존재였다. 마치 조용한 햇살처럼 내 곁을 지켜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난 어쩌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힘들 때 말없이 곁에 있어 주고, 내 실수를 바로잡아주려 노력하며, 또 설령 실수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노력해줬으니까. 그런 아르망이 고마웠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아르망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아마 그녀가 원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형태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원래는 제 마음을 절대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미 폐하께는 용 님이 있으시니까요.”
그래, 내겐 용이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르망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이 순간에도 가슴 한편에선 저 멀리 있을 용에 대한 죄악감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어요. 그저 충실하고 성실한 부관으로 남아있으려고 노력했어요. 폐하께서 절 사랑해주신다면, 절 아껴주신다면……. 그게 비록 제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만족하려고 했어요. 제 욕심대로 고백을 해서 폐하에게 당혹감을 드리기 싫었어요. 아니, 그 전에 무서웠어요. 그 순간을 예지하면, 언제나, 언제나 그리고 또 언제나……. 폐하께서 절 거부하시는 모습밖에 보이질 않았으니까요.”
아르망의 예지는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원치 않는 미래도 봐야만 했다. 예지는 그녀의 감정과 상관없이, 그저 주어진 정보와 행적을 계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보여줄 뿐이었으니까. 바뀌지 않는 그 미래 앞에서 아르망이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어떻게든 찾아보려 애를 썼는지 내가 알 노릇은 없었다.
단지, 지금 아르망이 뇌수가 타들어 갈 정도로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어요. 참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폐하에 대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어요…! 폐하께서 절 여자로 보지 않으시니까, 영원히 제 마음은 닿을 수 없을 거라고, 실낱같은 희망조차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까, 아까 레오나 님과 대화하실 때도 폐하의 마음이 보였어요! 단 한 순간도 저를 여자가 아닌 애로 걱정하는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났어요! 화가 났는데, 그런데…그런데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그다음이 보이지 않아서 무서웠어요. 폐하께서 절 내치실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아르망…….”
촉촉하게 물기가 있었던 아르망의 목소리는 점차 오열로 바뀌어 갔다. 나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서운함과 두려움……. 그 모든 게 절절히 느껴졌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아르망은 울음소리를 속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게 더 안타까웠다.
우리 사이는 겨우 주먹 하나 들어갈까 할 정도로 아주 가까웠다. 조금만 손을 들면 아르망의 볼을 감싸줄 수 있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다. 아르망을…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꼭 보이지 않는 밧줄로 꽉 묶은 듯 그저 울고 있는 아르망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미칠 것 같았어요! 폐하께서 절 그저 어린애로 보시는 것도, 제 마음이 안 전해질 거라는 것도, 저는 결코 보답 받지 못할 거라는 것도 전부 미칠 것만 같았어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거기엔 예지를 바탕으로 언제나 담담하던 아르망의 모습은 없었다.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저 어쩔 줄 모르며 자신의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놓는…그저 한 명의 사랑하는 소녀만 있을 뿐이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폐하. 그게 제 단 하나뿐인 소원이에요.”
“…….”
내 입에서 별생각 없이 나왔던 그 한마디 말이, 그녀에겐 실낱같은 구원이었을까. 이거라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르망의 절망은 내게 아플 정도로 부딪히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건 저도 알아요. 폐하의 상냥함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그런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용 님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도 알고, 이런다고 폐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폐하. 화내지 말아주세요. 제발 저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
아르망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이 소녀는, 가엾은 아르망은 이 순간까지도 자기에게 유리한 말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자신의 진심을 있는 힘껏 부딪히며 내게 선택을 맡길 뿐이었다.
화내지 말아 달라, 그리고 자신을 내치지 말아 달라. 아르망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건 예지 따위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아르망의 마음을 짓밟고 용에 대한 신의를 지킬 것인가.
용의 사랑을 외면하고 아르망을 안을 것인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지금 멀리 떨어져 있는 용에게 이 상황을 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르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오롯이 나에게 있었다. 나는 아르망을 바라봤다. 매력적인 금발의 소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 소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첫 만남을 떠올려 보면 아르망은 어른인 척하는 어린애 같았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는 것치곤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어서 그게 귀여웠다. 꼭 폐하의 도움이 되겠다고 작은 주먹을 꼭 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아르망이 처음부터 부관 업무를 잘 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을 늘어놓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예지의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린 적도 있었다. 그 중에서 내게 필요한 길만 제시해주기 위해 아르망은 무던히도 노력했다. 가끔 찾아가 본 아르망의 방엔 소녀 취향의 인형이나 화장품 대신 여러 종류의 교본과 필기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각하, 아르망 님은 참 훌륭한 분입니다. 스틸라인 전쟁사와 교전 교리를 알려달라고 해서 가르쳐 드렸더니 며칠 사이에 전부 외우셨더군요. 다른 지휘관들도 찾아다니며 배우는 것 같던데 정말 대단한 열정입니다. 각하께선 정말 훌륭한 부관을 두셨습니다.]
마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르망이 그렇게 노력하는 것도 몰랐을 터였다. 언젠가 유난히도 힘들어하는 아르망이 너무 걱정돼서, 근래에 아르망과 차 한 잔 했다는 마리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답변해줬으니까. 마리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힘든 내색 안 하는 그 고집은 꼭 레오나에게서 배운 것 같다고 한탄 아닌 한탄까지 했다. 다른 지휘관들에게도 슬쩍 물어보면 모두 말은 비슷했다. 그러나 아르망은 결코 그것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 내게 티를 내는 것도 싫어했고 내가 알아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리에게 물어본 그날 난 잔뜩 삐져 있는 아르망을 달래려고 정말 진땀을 빼야 했다.
아르망의 그 모든 능숙함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인 ‘예지’만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예지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노력, 오로지 노력이었다. 내 부관이라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아르망은 늘 노력했다.
[주인님, 오늘은 아르망 님께 차 시중을 들게 해보는 건 어떠세요? 며칠 전에 배워보고 싶다고 하셔서 가르쳐 드렸거든요. 호호, 정말 깜짝 놀랐어요. 찻잎의 종류부터 시작해서 주인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만한 간식까지 얼마나 세세하게 계획을 짜 놓으셨는데요. 저희들이 모르는 척 말씀드리는 것보다 주인님께서 권해주시는 걸 더 기뻐하실 거예요. 꼭 한번만 말씀해주세요.]
그래, 콘스탄챠도 그렇게 칭찬했었지. 콘스탄챠뿐만이 아니었다. 용도, 아스널도, 금란이나 소완도, 아우로라도 아르망을 호의적으로 봤다. 이번에 찾아온 레오나도 실제론 아르망이 걱정되니까 찾아왔던 거겠지. 일부러 자기가 싫은 소리를 하는 역할까지 감수하고서 말이다.
아르망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견했고, 주변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웠다. 그런 아르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하는 아르망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하는, 항상 올곧게, 나만을 바라보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는 아르망의 모습이…….
“…내가 진짜 둔하긴 하구나.”
아아, 그래.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까. 내가 왜 다중 부관이란 문제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걸까. 왜 아르망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애꿎은 레오나가 소리까지 치며 화를 냈던 걸까. 해답은 우스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고, 김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아르망.”
“폐하…….”
나는 이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애써 피해오던 내 진심이었다. 나는 아르망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대하듯.
“이건 작별 인사야. 내가 아이로 봤던 아르망에 대한.”
“……?”
날 바라보는 아르망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처음이다, 아르망이 이런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건. 그 표정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아르망의 얼굴에서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이다. 나는 아르망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얼굴을 맞댔다. 가느다란 떨림이 내 손끝을 넘어 심장까지 통하는 듯했다. 아르망의 살짝 벌린 입가에서 뜨겁고도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지금의 아르망에 대한, 내 대답이야.”
“네? 읍…….”
아르망이 뭐라 하기도 전에 내 입술은 아르망의 입술을 덮고 있었다.
전기 충격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용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달콤하고도 따뜻한 감각이 입술을 통해 전신에 돌고 있었다. 바짝 굳어 있던 아르망의 가녀린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어느새 그녀의 두 여린 팔은 내 목을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음, 응…….”
아이로서가 아닌, 어른의 입맞춤. 나의 각오. 그리고 아르망에 대한 사랑. 그 모든 걸 담아 난 아르망의 허리를 꼭 잡으며 혀로 상냥하게 그녀의 입술을 두드렸다. 망설이듯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하던 아르망의 입술은 내 집요한 구애에 결국 틈을 내주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혀는 아르망의 혀를 찾았다.
“앗, 폐, 하아…….”
혀를 얽을 때마다 아르망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나를 찾는 혀는 상냥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내 목에 두른 팔은 부드러운 강철처럼 단단했다. 잠깐잠깐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아르망은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그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한 아르망의 숨결이 내 이성을 찬찬히 마비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사랑해, 아르망.”
“폐, 폐하…….”
“마음을 감추고 있던 건 나였어. 늘 열심인 네게 내 마음은 너무 부담스러울 것만 같았어. 그래서…널 여자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저는, 폐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랬던 걸요.”
“서로 너무 배려를 많이 했나보다, 그렇지?”
“후훗, 폐하의 말씀에 이렇게까지 공감이 가는 건 처음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의 입술은 겹쳤다.
“으응…….”
먼젓번의 입맞춤이 터져 나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다급했다면, 이번 입맞춤은 그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웠다. 아르망은 가볍게 내 뺨을 쓰다듬으며 작은 새가 모이를 쪼듯 내 입술을 계속 찾았다.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서로의 혀를 탐했다. 핥고 또 핥아도 채워지지 않는 달콤함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르망은 내 무릎에 올라 탄 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망의 사랑한다는 마음과, 아르망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정복감과 배덕감이 내 가슴 속에서 마구 뒤섞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
아르망이 올라 탄 자세 그대로 귓불까지 새빨개질 정도로 얼굴을 붉혔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걸 느꼈겠지. 사실 아까 아르망에게 입을 맞출 때부터 한계치였다. 거기에 아르망을 장딴지 위에 태우고 쉴 새 없이 입을 맞춰댔으니 내 사타구니는 한계를 넘어 아플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기뻐요, 폐하. 저로 이렇게 되어 주신거죠?”
“윽…….”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망은 바지 위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내 분신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아르망의 작은 손이 내 것을 어루만진다는 죄악감 비슷한 쾌감이 등골을 타고 용암 같은 흥분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 아르망.”
그만 두라는 애원인지 참을 수 없다는 재촉인지 모를 신음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르망을 덮치고 싶은 욕망을 참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혹여나 너무 거칠어서 아르망이 다치면 어쩌나 하는 마지막 이성의 조각 덕분이었다. 아르망은 그런 내게 생긋 미소 짓더니…가볍게 입을 맞췄다.
“폐하…….”
그 다음은 턱, 그리고 목덜미, 쇄골……. 셔츠의 단추를 한 번 풀 때마다 아르망은 내 몸에 입을 맞춰 나갔다. 가슴에서 배로, 그리고 다리까지. 아르망은 내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봤다. 내 허벅지 안쪽을 살며시 쓰다듬는 그녀의 손은 비단으로 만든 바이스처럼 무의식적으로 오므리려던 다리를 넓히고 있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고혹적이었기에…….
나는 꼴사납게 허리를 내민 채로, 그저 그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선 가만히 계셔주세요. 제가……. 봉사해드리겠습니다.”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아르망의 숨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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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렸으면 성공이고 아니면 실패
보완할 점 있다면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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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편은 19금게에서 뵙겠습니다 아 현기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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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야하게 쓴 거 같나요 | 21.08.23 15: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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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8.23 17: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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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끊으시다니 치사빵구예요! 소녀 아니 여자의 사랑이 이렇게 결실을 맺는군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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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야한가요 | 21.08.23 15: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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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8.24 13: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