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4. 족쇄
[야호, 오빠. 부탁한 것의 분석이 끝났어.]
며칠 전
어두운 함장실에서 통신을 연결하자 사령관의 귀에 쾌활한 닥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걸렸네, 꽤 복잡한 거였나 봐?”
[음, 정확히 말하자면 반대야. 생각 이상으로 ‘원시적’인 기술이라서 분석이 오래 걸린 거야.]
꼬마 천재 바이오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태연하게 말한 후, 분석 결과 몇 가지를 전송시켜서 그의 태블릿에 띄워줬다.
[일단 설명해주기 전에 중요한 건 리리스 언니의 상태인데, 하아…… 난 1세대 언니들을 볼 때마다 참 착잡한 심정이 들어.]
“착잡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게, 라비아타 언니도 그렇고 티아멧 언니도 그렇고, 멸망 전부터 살았던 언니들은 전부 어딘가 병들어 있더라고. 몸이나 정신 중 한쪽이 말이지.]
그 말을 한 후, 닥터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특히 리리스 언니는…… 티아멧 언니랑 비슷하거나 더 심하더라구.]
“티아멧보다 더…….”
[응. 대체 이 언니는 이 상태로 어떻게 오빠를 보좌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조직재생에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건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거든.]
“조직재생에 문제라고? 간단히 설명해봐.”
[한 마디로 철충에 공격당하거나, 하다못해 실수로 식칼에 손가락을 베여도 상처가 회복이 안 되거나 아주아주 느리게,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되지 않은 인간보다도 느리게 재생된다는 소리지. 이거 엄청 심각한 문제다?]
“네 기술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야?”
[힘들어, 난 의학 전공이 아니라 공학에 특화된 바이오로이드거든. 이건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기도 해서 이렇게 문제를 찾아내는 게 한계고. 그래서 건의하는 건데, 상담 치료소가 필요할 거 같아. 리리스 언니 외에도 저런 언니들이 분명 더 있을 거 같거든.]
사령관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바이오로이드를 보살피는 걸 소홀히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뭐 하여튼 오빠가 듣고 싶어 하는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내가 리리스 언니의 구속구를 분석하면서 새로 알아낸 게 있어. 우선 첫째, 오르카의 리리스 언니의 목과 팔에 달린 ‘감정제어 장치’는 양산형과는 달랐다는 것.]
“그게 무슨 말이야, 프로토타입에 도입된 것들은 보통 양산 타입에 그대로 적용되는 편 아니야?”
상상도 못 한 첫 번째 말에 사령관이 되묻자 닥터는 한숨과 함께 답해줬다.
[그게 좀 달라. 일반적인 양산 타입에 적용되는 유형이었다면 언니는 스스로 그걸 해제가 가능했을 거야. 당장 리리스 언니가 리오보로스의 섬에서 수영복 입었을 때를 생각해보라구, 오빠.]
“그러고 보니…….”
단순히 심리적인 구속구에 불과했다면, 나름대로 패션에 신경 쓰는 리리스가 그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놔둘 리가 없었다. 특히 그녀가 그토록 견제하는 오르카의 주방장까지 수영복을 입고 나왔던 여름의 그 날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뭔가 이상해서 리리스 언니의 수복기록을 다 뒤져서 남아있는 스캔 기록을 통해 내부 구조를 확인했거든. 그 결과가 이거야.]
리리스의 목과 팔에 장착된 쇳덩이와 그 내부 구조를 보여주며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자, 내부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스스로 풀 수 없는 구조야. 무조건 인간의 손길이 있어야지만 해제할 수 있는, 완벽한 구속구.]
“맙소사.”
천재 바이오로이드는 또 다른 데이터를 보여줬다.
[두 번째는 그것이 지금도 언니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야. 쓸데없이 튼튼하게 만들어선…… 이게 1세기 넘은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아직도 전기충격을 가하고 호르몬을 주사하고 있어.]
내부 구조를 찍은 사진에서 몇 가지 부품들을 짚어주며 닥터는 골치 아프다는 투로 말했다.
[이건 억지로 힘으로 절단했다간 큰일이 날 거야. 외부는 티타늄 합금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는 텅스텐에 탄소나노튜브를 섞어서 만들었지. 아마 이걸 힘으로 뜯어내려면 타이런트가 물어뜯는 거 외엔 방법이 없을 거 같거든.]
“야, 그럼 리리스가 죽잖아?!”
자신의 말에 사령관이 기겁하자 닥터는 진짜로 난감한 듯, 펜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해줬다.
[내 말이. 그러니까 이건 절대 힘으로 못 푼다는 거야. 진짜 이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차고 있으라는 거지.]
“…잔인한 놈들.”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오빠도 데이터를 봐서 알겠지만, 삼안의 블랙 리리스 모델의 ‘결함’으로 지적된 것 중 하나가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성향이라는 거 알지? 그런 결함이 보통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에게선 생길 이유가 없거든. 알다시피 우리는 ‘제품’이라 육체가 상하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니까.]
그 말을 한 후, 천재 소녀는 예시로 들기 위해 몇 명의 얼굴을 화면에 띄워 보였다.
[오히려 알렉산드라 선생님 외 몇 명처럼 사디스트적인 성향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고, 제조 단계에서 발생하는 피학 성향은 정말로, 매우 드문 결함이야. 이 정도면 대충 이해가 가지?]
“듣고 보니 그러네. 진짜로 그런 성격을 가진 애들은 손에 꼽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그 결함이 발생한 이유에 대한 해답이 나온 거 같아.]
채찍을 팡, 하고 잡아당기는 금발의 선생을 대표로 지금도 주방에서 심심풀이 삼아 파티시에를 괴롭히고 있을 주방장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닥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 봐봐. 이 구속구는 경호대상이 당할만한 공격을 대신 받아내면 쾌감을 느끼도록 호르몬을 주사하고, 스스로의 안위를 생각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호르몬을 주사하도록 만들어졌어. 내가 아까 아주 원시적인 기술이라고 했지? 리리스 언니를 만든 인간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언니를 철저하게 조련시키고 굴복시키려 한 거야.]
한탄하듯이 닥터가 한 말에 사령관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다.
닥터는 이내 화면 너머에서 손가락을 척, 하고 그를 향해 치켜들었다.
[결론을 내려주자면, 이건 오빠가 풀어줘야 하는 거야. 유일한 인간이잖아? 오빠만이 자격이 있다구.]
“그래, 그렇구나……. 분석해줘서 고마워, 닥터.”
고글을 쓴 소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헤헤, 천만에. 바로 해제하는 법을 보내줄게. 고맙다면 대신 원하는 걸 하나 들어 줘, 오빠.]
“도와줬는데 당연히 원하는 거 들어줘야지. 과하지만 않음 된다.”
[헤헤, 그럼 내 성장약 개선 프로젝트에 대한 건데…….]
◐
다시 현재.
“그래, 다음번엔 꼭 갈 테니까 화 풀어. 응, 사무업무는 남아있어. 그래, 수고하고 끊는다.”
‘삑-.’
나이트 앤젤을 통해 메모리를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삐질 대로 삐진 멸망의 메이를 달래느라 혼쭐이 난 사령관은 차갑게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건강상의 문제라 써뒀는데도 바로 연락하다니, 설마 내 거짓말이 들통난 건가?
어찌 생각하면 리리스의 예측이 옳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벌써 메이한테서 이렇게 연락이 들어와서 언성을 높일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 문제였지만.
이렇게 되면 로열 아스널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졌다. 중요한 때 고민하고 주저하는 메이와는 다르게, 아스널은 일단 밀고 나갈 테니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에게 따로 연락할 필요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함장실 앞에서 공성전을 하려고 진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세워둔 계획이 들통 날 확률도 올라간다. 최악의 상황에는, 아예 그녀가 분위기를 휘어잡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녀가 이번 깜짝 작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사령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 준비한 깜짝 작전을 망치느니 차라리 맨몸으로 별의 아이를 때려잡으러 가는 게 더 나았다. 페로와 하치코, 펜리르가 더 고생하게 되겠지만, 사랑스러운 동물 경호원들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
【4시간 후 갈 테니 준비 시작.】
사령관은 페로에게 조용히 짤막한 메시지를 넣었다.
“주인님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도착시각은 앞으로 4시간 후입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소에 항상 진지하던 페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고, 산만하던 펜리르 역시 바짝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그때, 머리카락 색이 흑백으로 반반 나뉜 강아지 소녀가 손을 들어서 물었다.
“페로, 그럼 이제부터 준비에 들어가는 거야? 연습한 대로?”
“맞습니다, 일주일간 철저히 연습한 대로 준비에 들어갑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준 CS 페로는 리리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주일간 연습을 하며 모아온 것들을 숨겨둔, 침대 매트리스 아래를 드러냈다. 그것을 보며 잔뜩 긴장한 개와 늑대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자 그녀는 단호하게 다시 쐐기를 박았다.
“연습할 때도 말한 거지만 최대한 실수를 줄이는 겁니다. 하치코, 펜리르. 언니에게 우리가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알겠어, 하치코 노력할게!”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되는대로 해보면 되겠지 뭐!”
각오를 다지며 의지를 불태우는 자매들을 보며 페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이 백 년간 살아온 언니에게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작은 선물입니다.”
--
리리쮸 액세서리(↗간 혐성 영구귀속템)
(IP보기클릭)125.182.***.***
(IP보기클릭)1.236.***.***
멸망 후까지 이어지라는 뒤끝 | 20.08.03 01:44 | |
(IP보기클릭)118.33.***.***
(IP보기클릭)118.33.***.***
그러므로 다음편을내놓으십시오! 산채로잡아라! | 20.08.03 02:4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