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최대의 격전이었다고 평가받는 전투는
22만 대군을 동원한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전도,
동군 10만, 서군 8만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도 아닌...
카와나카지마 4차전이라고 합니다.
그럼 카와나카지마 4차전에서 몇 명의 군세가 격돌했느냐...
우에스기군 18,000명과 다케다군 20,000명....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에스기군 13,000명과 다케다군 20,000명이 격돌했다고 봐야합니다...
* 우에스기 켄신이 5,000명을 후방의 젠코지(=절)에 두고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았으므로....
양 군의 병력도 크지 않은데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전국시대 최대의 격전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전투가 개시하자마자 1각도 되지 않아서 전상자가 3,000명 이상 나왔다는 것.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후다이 가신(즉, 다이묘를 섬기는 직신으로서 최고 간부)들이 죽어나간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카와나카지마 4차전은
우에스기 켄신이 관동의 무장을 규합하여 10만 병력으로 '호조 우지야스'를 정벌하기 위해 오다와라로 쳐들어가자,
'우지야스'가 동맹국인 '다케다 신겐'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겐'이 '우에스기 켄신'의 근거지인 에치고 바로 턱밑의 '카이즈성'으로 군사를 이동시켰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다케다 신겐'의 북상 소식에 '켄신'은 서둘러 군사를 에치고로 회군합니다.
카이즈성은 북시나노 지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켄신은 18,000 군세를 둘로 나눠 5,000을 후방의 젠코지에 두고, 남은 병력 13,000을 강(사이가와, 치쿠마가와)을 건너
남쪽의 '사이조산'에 진을 치게 합니다. 카이즈성보다 더 남쪽에 진을 친 것이었습니다.
* 사이가와, 치쿠마가와 사이의 삼각지대를 "카와나카지마"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다케다 신겐의 본대 20,000이 카와나카지마로 진출하게 되고...
서로 노려보는 형세를 취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다케다 군사였던 "야마모토 칸스케"와 "바바 노부후사(=노부하루)"가 계책을 건의합니다.
"딱따구리는 벌레를 잡아먹을 때 나무를 쪼아 그 반대편에서 나오는 벌레를 잡습니다..."
이에 신겐은 코사카 마사노부, 바바 노부후사 등 다케다 4천왕에게 12,000 대군을 주고 밤중에 사이조성을 기습할 것을 명했고,
자신은 8,000 병사와 함께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라는 곳에 군사를 이동시켜 진을 세웁니다.
그런데...우에스기 켄신은 이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는 좀 더 일찍 군사를 이동하여 하치만바라로 향하고,
안개낀 새벽에 하치만바라에서 다케다 신겐이 있는 본대를 들이칩니다.
13,000 대 8,000....
우에스기군 선봉은 맹장으로 소문난 "카키자키 카게이에"였고,
켄신은 이 무장을 시작으로 '차현진'을 구사합니다...여러 부대가 빙글빙글 돌면서 끊임없이 공격하는 전법이라고 합니다.
다케다 신겐도 급히 학익진으로 진세를 펼쳐 응전하여 했으나,
우에스기군이 워낙 강하여 계속 밀리게 되고...
신겐의 동생이자 최고 간부인 "다케다 노부시게", 후대이가신으로 역시 최고 간부인 "모로즈미 토라사다" "하치노 겐고로"가 전사합니다.
이어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 방면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참모이자 군사, "야마모토 칸스케"도 전사합니다.
최고간부 분 아니라 유력무장들도 많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불과 1각(2시간) 정도만에 다케다군은 약 3,000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 이전에도 이후에도 짧은 시간 내에 3,000명 이상이 전사한 전투는 없습니다.
정오 쯤 되었을 때, 사이조산으로 쳐들어간 별동대가 허탕을 치고 하치만바라로 돌아옵니다.
별동대의 수는 12,000명으로, 이들을 인솔하던 것은 "바바 노부후사", "코사카 마사노부", "야마가타 마사카게" 등
다케다 4천왕이었으니....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됩니다.
이번에는 우에스기군이 몰려 순식간에 3,000여명의 피해자를 낳습니다.
다급해진 켄신은 직접 말을 몰아 허물어진 다케다 본진을 향해 달려가고...
의자에 앉아 있던 신겐을 향해 칼을 3번 휘둘러 신겐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신겐 역시 군배로 이를 막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날. 카와나카지마 4차전에서
우에스기 켄신이 끌고 온 병력은 13,000명. 전사자 3,400명, 부상자 9,400명이었다고 하고
다케다 신겐이 끌고 온 병력이 20,000명. 전사자 4,600명, 부상자 7,500명 정도였다고 하니...(숫자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름)
얼마나 격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북시나노는 다케다 신겐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갔지만,
우에스기군은 다케다의 최고 간부 여럿과 유력 무장들을 죽인 결과로
양 군은 서로 승리를 주장하며 회군했고...
후대의 평가는 무승부라고 결론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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