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날판타지 15, 다크소울3, 스카이림, 위쳐 3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녹티스 루시스 카일룸의 가장 큰 비극은 그가 오픈월드 게임의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가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까운 예를 찾아봅시다.
다크소울3의 주인공, ‘재의 귀인’이 있군요.
‘태초의 불을 계승하는 자’ 엔딩을 본다면 재의 귀인의 여정은 아주 비극적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태초의 불을 계승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할 운명이었죠. 녹티스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녹티스는 처음부터 세계를 위해 희생될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이 오픈월드 RPG가 아니고, 다크소울3처럼 게임의 세계관이 녹티스의 희생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녹티스의 최후도 더 납득이 가고 비장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녹티스는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괴리감이 발생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또 다시 가까운 예를 가져와보겠습니다. 오픈월드 RPG ‘위쳐3 와일드 헌트’의 주인공, '리비아의 게롤트'입니다.
게롤트를 둘러싼 운명도 자못 심각합니다. 세계가 멸망할 위기도 있고, 사라진 시리를 찾아야 하고, 그 와중에 각 나라 간의 권모술수에 휘말리기도 하죠. 여기까지는 녹티스와 얼추 상황이 비슷하군요. 하지만 게롤트의 미래는 어떤가요? 그 많은 역경을 이겨낸 게롤트는 어떻게 되었나요?
소지금은 썩어 넘치고 검술 실력은 하늘을 찌르고 로취의 안장에는 수백마리의 몬스터 머리가 주렁주렁 달려있죠. 어쩌다 보니 거대한 포도 농장도 하나 생기고, 세계 최강의 궨트 마스터가 되었으며, 선택에 따라 부유한 귀족, 혹은 왕들과 커넥션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 애인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 못해 별의 별... 여기까지 하죠.
게롤트가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은 보통 저렇습니다. 스카이림의 도바킨을 볼까요? 도바킨과 비교하면 게롤트가 얻은 것은 정말 사사로운 이익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각 지역 마다 자기 집이 있고, 마법대학에서는 대마법사가 된 후에 자기 연구실도 생기고, 각 길드 마다 한 자리 꿰어 차니 아지트가 한 두 개가 아니죠. 어디 그뿐입니까? 황제도 암살한 다음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고, 뱀파이어 여친도 사귀고 나중엔 용들까지 지배하면서 용 타고 여행도 다니고 그럽니다.
도바킨이 유별난 걸까요? 아니요.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은 보통 저렇습니다.
오픈월드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무언가를 얻어나갑니다. 처음엔 백수 거지라 해도, 세계가 광대하기 때문에 넓은 지역을 여행해가며 부와 명예를 쌓아나가죠. 그러면서 최후엔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오픈월드의 주인공입니다. 다른 오픈월드 게임인 GTA 5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녹티스는 정반대입니다.
녹티스는 시작할 때 가진 게 가장 많습니다. 일단 왕자고, 아빠가 쓰던 차까지 있죠. 게다가 자신을 호위하는 동료도 셋이나 됩니다. 한 명은 사진사고, 한 명은 요리사고, 한 명은 보디가드죠. 오픈월드 주인공 치고 정말 부유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아빠가 죽고 나라를 잃습니다. 네. 뭐 여기까지는 스토리상 그럴 수 있다 칩시다.
약혼자를 잃습니다.
초코보도 잃습니다.
자동차도 잃습니다.
기찻길에 무기도 잃어서 바보로 만듭니다.
13장 마지막에 들어서니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년을 잃어버립니다. 청춘도 잃습니다.
10년 만에 돌아와서 세계를 구했는데, 마지막엔 자기 자신마저 잃습니다.
모든 것을 얻어야 할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이 도리어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입니다.
철저하게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와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길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와 등대 앞에서 프롬프토가 사진을 찍어줄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와 캠프를 즐기며 이그니스의 요리를 같이 먹을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와 낚시를 즐기며 잡담을 할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들은 세계를 구하면서 죽지 않습니다. 왠만해선 안 죽습니다.
왜냐고요? 이제 발등에 급한 불 다 껐으니까 즐길 일만 남았거든요. 대부분의 오픈월드 주인공들은 여정을 진행하며 얻은 부를 기반으로 여유로운 후일을 보냅니다. 그들은 대부분 느긋합니다. 급할 게 없죠. 녹티스가 파이날 판타지 15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다른 게임의 주인공이었으면?
세계는 구했으니 이제 저기 한적한 곳에 가서 캠프 치고 사진 찍고 낚시나 하고 다녔겠죠. 동료들과 시시덕거리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녹티스에게 그런 자유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는 죽었으니까요. 이게 정말 너무한 겁니다.
녹티스에겐 이 여자 저 여자 치근덕거릴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스토리 내내 재상의 손아귀 내에서 놀아나다가 마지막엔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녹티스를 꼭 죽여야만 했을까요? 아마 개발진의 사정이 있었겠죠. 죽일 수 밖에 없었으니 죽였겠죠. 그런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정말 녹티스를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이라 생각한다면, 죽이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녹티스가 세계를 구한 다음에, 루나프레나가 되었건 아이리스가 되었건 아라네아가 되었건 시드니가 되었건, 레갈리아 옆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든 하늘을 날든 할 수 있었어야 됩니다. 여행을 다니며 등대든 화산이든 카테스의 접시든 여기저기 가서 사진도 많이 찍고요. 추억도 많이 남기고, 요리도 많이 먹고 루나프레나든 아이리스든 시드니든 와 이 요리 너무 맛있네~ 이런 반응이라도 좀 보여주고요. 그랬다면 우리가 미친듯이 아라네아 영입 버그에 집착할 일도 없었겠죠.
그런데 그게 정상적인 오픈월드 RPG가 아닌가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시작해 부와 명예와 새로운 동료를 얻으며 마지막엔 가장 강하고, 부유하고, 자유롭게 되는 게 오픈월드의 매력 아닌가요?
그런데 왜 녹티스는 무언가를 얻긴 커녕 가지고 있던 것 마저 빼앗기는 걸까요.
이 게임의 오픈월드는 녹티스를 배신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은 환상일 뿐입니다. 녹티스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은 알티시에로 떠나기 전일 뿐이죠. 우리는 그 환상 속의 시간대에서 영원히 살아갑니다. 실제 녹티스는 이미 죽어 없어졌고요. 너무 냉소적인 접근일까요? 다른 오픈월드 RPG의 주인공들은 절대 이렇지 않았습니다. 엔딩 보고 돌아와서, 자신이 구한 그 세계에서 자유롭게 여행합니다.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강아지에게 빌지 않아요.
이런 녹티스의 절망적인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상징도 게임 속에 있습니다. 바로 악명 높은 푸티오스 던전이죠.
녹티스의 인생은 푸티오스 던전과 같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던전으로 들어가자 마자 혼자 남겨지죠. 녹티스는 이 어둡고 음침한 곳을 혼자서 헤맵니다. 왕가의 능력인 시프트 능력까지 봉인 당합니다. 시프트 능력을 쓰면 바로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왠지 못 씁니다.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막아놓았습니다. 혼자서 도망 다니는 13장처럼 말이죠.
하지만 녹티스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신병 걸릴 것 같은 곳에서, 가시에 찔리고 바닥에 수천번 떨어지고 의미도 없는 퍼즐을 풀고 풀어 마지막에 도달하죠.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 보물상자를 열어 흑두건을 얻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빠져나왔다~! 같은 환희에 찬 독백도,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글자도 뜨지 않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이 혼자서 고통 받고 어둠 속에서 뛰어다니는 여정이었죠. 마치 이 게임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배신감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스토리의 빈약함에 배신을 당했다고 여겼죠. 기차를 타자마자 펼쳐지는 밑도 끝도 없는 미완성 전개가 결정적인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엔딩을 보고 난 후에 느껴지는 이 공허함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다른 오픈월드 게임의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걷는 녹티스의 저주받은 운명 때문이죠.
만약 녹티스가 죽지 않았고 루나프레나도 죽지 않았고 엔딩을 본 후 오픈월드에서 알콩달콩 잘 살며 녹티스가 오픈월드를 자유롭게 즐기는 과정이 나왔다면, 이렇게까지 허무했을까요? 이렇게까지 비난 받았을까요?
강아지에게 빌어서 과거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세계를 구하고 그 후의 세계를 만끽하고 다녔으면, 이렇게까지 배신감과 허무감이 느껴졌을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게임의 주인공은 유저가 가장 몰입하는 대상입니다. 적어도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엔, 게임이 미완성인 것과는 별개로 유저는 녹티스의 분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녹티스의 일생을 살아가다 보니 이 세계가 참... 녹티스에게 너무나도 잔인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군요. 게임의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입니다. 녹티스가 뭔가를 잃어갈수록 유저도 뭔가를 잃어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을 느낍니다. 녹티스가 죽었으니까요.
개발진은 유저가 녹티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동정해주길 바랬던 걸까요? 그래서 유저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하게 만든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그저 이 게임이 정말 정상이 아니고 일그러진 오픈월드 게임이란 것만 느꼈습니다. 마치 푸티오스 던전처럼 말이죠.
파이날 판타지 15가 오픈월드 게임이 아니었다면, 녹티스의 희생은 좀 더 빛나고 아름답고 장엄하게 그려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파이날 판타지 15는 오픈월드 게임으로 나왔고, 녹티스 루시스 카일룸은 그대로 저주받은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둘 중 누가 잘못한 걸까요? 오픈월드? 아니면 녹티스? 그건 모르겠지만 이 둘이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건 분명하군요.
구구절절 길어졌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합니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와 드라이브 한번 못 하고 죽었군요. 오픈월드 게임인데 말이죠.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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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세계 최강의 궨트 마스터" 에서 뿜었습니다. 글잘읽었고 여러모로 공감이 가네요. 글솜씨가 부러워요.. 친구들에게 이 요상한 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어도 어휘력이 너무 짧아서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못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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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쓰시네요.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하신 내용이라 그런지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내용도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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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세계 최강의 궨트 마스터" 에서 뿜었습니다. 글잘읽었고 여러모로 공감이 가네요. 글솜씨가 부러워요.. 친구들에게 이 요상한 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어도 어휘력이 너무 짧아서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못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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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감되네요 ㅋㅋㅋㅋㅋ 만약에 안죽고 병맛같이 살아나면 감동조차없어서 평점 더깎였을듯 | 16.12.27 1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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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쓰시네요.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하신 내용이라 그런지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내용도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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