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 순찰을 돌던 톰슨은 기지의 입구위병소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보스?”
톰슨이 부르자 보스라고 불린 남자. 전술지휘관은 고개를 들었다.
“톰슨. 순찰 중입니까?”
“그래. 여기서 뭐하는 거지?”
“1박2일 외박 때문에 차를 불렀는데 아직 안 오는군요. 마침 잘 왔습니다.”
지휘관은 보던 책을 덮고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지휘관으로서 명령합니다. 차가 올 때까지 제 대화상대가 되십시오.”
“하핫. 뭐야, 그게. 명령하지 않아도 대화상대는 얼마든지 해준다고.”
“당신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당신은 지금 순찰근무중이고 순찰근무중에 저와 사담을 나누는 것은 근무태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의 명령으로 저와 대화를 나눈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앉으십시오.”
말하는 꼴을 보면 전술지휘관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인 톰슨에게 원칙주의자는 상극이겠지만 톰슨은 꺼리는 기색 없이 전술지휘관의 옆에 앉았다. 톰슨이 전술지휘관을 꺼리지 않는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전술지휘관은 말없이 톰슨을 바라보았다. 톰슨의 얼굴이 아니라 톰슨의 하반신을.
톰슨은 자신의 이름인 무기로 지휘관의 시선이 향하는 게 분명한 곳을 가리며 동시에 그 무기의 총구를 지휘관에게 향하며 말했다.
“어이, 보스. 지금 어디 보는 거지?”
지휘관은 고개를 들어 톰슨을 바라보았다.
“흰색은 순결함, 순진함, 완전함, 성스러움을 나타냅니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흰색드레스를 입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지요. 그런데 흰색이 전쟁터에서는 상대에게 자비를 바라는 의미로 흰색의 깃발로 쓰지만 또한 눈 혹은 얼음처럼 냉혹함과 혹독함, 무감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톰슨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지휘관에게 ‘무슨 헛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톰슨의 경험대로라면 지휘관은 마지막에 톰슨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할 것이다. 뭐 흰색에 대해서 말을 꺼낸 것을 보면 결말이 예상되기는 했다.
“그런데 검은 색은 대다수의 문화권에서는 어둠과 연관되기에 불길함을 상징합니다. 또한 검은색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요. 상복은 대부분이 검은색이고 영구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사신들은 검은색복장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서브컬처에서도 악의 제국은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연스럽게도 우리의 주적인 철혈의 인형들도 검은색복장을 입고 있지요.
하지만 검은색은 권위와 카리스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보면 적지 않은 수가 검은색이지요. 특히나 자동차가 그렇습니다. 또한 기름진 땅 대부분이 검은색이기에 검은색은 풍요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풍요로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산입니다. 다산이라 함은 자연스럽게 성적인 매력으로 이어지지요. 그래서 검은색의 속옷은 섹시하게 여겨집니다.”
지휘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원칙주의자의 얼굴과 말투로 이렇게 내뱉는 것이다.
“순결함의 상징인 흰색 속옷도 좋지만 톰슨의 섹시한 검은색 속옷은 언제 봐도 저를 흡족하게 만듭니다.”
지휘관은 톰슨의 속옷을 당당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톰슨이 지휘관을 불편해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지휘관은 원칙주의자처럼 말하지만 가식 없이 본능에 충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 미친 보스야.”
말투는 험악했지만 험한 것은 말투뿐이었다. 톰슨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톰슨의 평소 복장이 바지의 앞 단추를 풀고 지퍼를 다 내려서 속옷이 보이는 것이다 보니 속옷을 봤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살쪄서 그렇게 다니는 거라면 바지를 큰 걸 입는 게 어떻습니까?”
이건 화내도 된다.
“보스. 때려도 되나? 한 대만.”
“횟수뿐만이 아니라 강도와 도구사용의 유무, 구타부위와 일시를 명확하게 알려주시면 고려해본 후에 답해드리겠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대는 안하는군?”
“쳐 맞을 소리를 했으니까요. 흠. 그런데 생각해보니 톰슨이라면 도를 넘은 폭력은 행사하지는 않겠군요. 좋습니다. 때리십시오.”
이것도 신뢰라면 신뢰라고 할 수 있기는 할 텐데.
“……흐유!”
톰슨은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지휘관의 볼을 찰싹 쳤다. 이 지휘관은 화내는 것도 쉽지 않게 만든다.
“섬세하지 못한 소리해서 죄송합니다.”
지휘관은 톰슨에게 맞은 볼을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그러나 지휘관의 만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맞으면서 갑자기 든 의문인데 말입니다.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주창한 로봇3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1원칙이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척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그리고 제2원칙은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한다.’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지휘관은 여전히 원칙주의자의 얼굴로 내뱉었다.
“마조히스트가 로봇3원칙을 따르는 로봇에게 ‘나를 때려라’라고 명령하면 로봇은 이 명령을 따라야하는 걸까요?”
“…….”
“…….”
지휘관과 인형사이에서 상당히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에 톰슨이 간신히 말했다.
“미안, 보스. 나 지금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어.”
“역시 인형에게도 딜레마를 불러일으키는 문제였군요.”
“아니 지금 문제는 보스 같은데.”
“오해하신 거 같은데. 제가 마조히스트라서 물은 거 아닙니다.”
“아니. 그 의미가 아니라……외박동안 뭘 할 거지?”
톰슨은 이 수렁 같은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기에 억지로 화제를 바꿨다. 다행스럽게도 지휘관은 거기에 맞춰줬다.
“쇼핑할 겁니다.”
“카리나에게 주문하면 되지 않나?”
“다양한 걸 조금씩 사는 거라 카리나 씨에게 주문하면 카리나 씨가 절 씹어 먹으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카리나 씨를 통해서 사면 곤란해서 말입니다.”
“뭘 사려고?”
“수면용품, 깔창, 초콜릿 바 같은 여러 간식, 콜라, 보드카, 아이스팩, 족제비용 영양제……”
이 즘에서 톰슨은 지휘관이 말하는 목록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인형들 선물인가?”
“선물이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제 사비를 써야하지 않습니까. ‘인형들의 사기진작 및 작전효율증대를 위한 비품’이라고 해주십시오. 공금으로 처리할 겁니다.”
“그런데 돈은 회사 돈인데 감사는 보스가 받게 되지 않나.”
“긍정적인 부작용입니다.”
“횡령으로 붙잡혀 가지나 말았으면 좋겠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톰슨은 지휘관이 당당하게 말해서 ‘우리 회사가 이렇게 인형들의 복지를 생각해주던 회사였구나.’하고 애사심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회사 돈으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까 잡혀가더라도 횡령죄가 아니라 배임죄로 잡혀가는 겁니다.”
“……난 아직도 보스가 성실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
“성실이라는 미덕은 지배자와 고용주가 자신들의 이익추구와 피지배자와 고용인을 통제하려고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저는 만들어진 미덕에 저를 억지로 맞추지 않을 겁니다.”
지휘관은 성실한 얼굴로 성실에 대해서 논한 후 덧붙였다.
“전 잘리지 않을 만큼만 성실할 겁니다.”
톰슨은 웃었다. 정말로 잘리지 않을 만큼만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귀한 휴가를 써가면서 휘하의 인형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톰슨은 여기에 대해서 농담을 하려고 했지만 웃느라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톰슨도 필요한 게 있습니까?”
“뭐야? 입막음용 뇌물인가?”
“뇌물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상부상조, 윈윈전략에 따른 증여라고 해주십시오.”
“좋은 말이군. 나중에 나도 써먹어야겠어.”
톰슨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없군.”
“문샤인(미국 금주법시대의 밀주)은 어떻습니까?”
“그런 싸구려 술을 마시면 몸만 축난다고. 사오려면 제대로 된 아메리칸 위스키를 사오라고.”
“공금으로 처리한 금액이 너무 많으면 감사에서 들킵니다. 아차. 실언했습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이미 늦었어, 보스. 이거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있는 거지?”
“‘시카고 타자기’답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익숙하시군요. 알겠습니다. 위스키를 사오도록 하지요. 하지만 술 마실 때 꼭 절 불러주십시오. 맛이라도 봐야 덜 억울할 거 같군요.”
“하하하하핫! 거래 성립이군.”
그렇게 한 가지 화제가 끝날 즘에 차 한 대가 지휘관과 톰슨 앞으로 달려와 멈췄다.
지휘관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차가 왔군요. 제 시간 때우기에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톰슨. 원래의 임무로 돌아가십시오.”
“언제든지 부탁하라고. 보스랑 대화하는 건 싫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톰슨.”
“몸 성히 다녀오라고, 보스.”
지휘관을 태운 차는 천천히 기지 부지를 벗어났다. 그러나 차는 기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빠른 속도로 지평선을 향해 달려 나갔다.
톰슨은 지휘관이 탄 차를 바라보았다. 차를 바라보는 톰슨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톰슨이 지휘관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지나치게 깐깐한 원칙주의자 같은 모습 때문에 꺼린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기계적으로 지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정론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톰슨은 앞으로의 생활이 빡빡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휘관이 그 깐깐한 원칙주의자의 모습으로 엉뚱한 짓을 여럿 저지른 것을 본 지금은 그런 거부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톰슨에게 지휘관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다면 톰슨은 ‘이상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을 ‘싫어한다.’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톰슨은 지휘관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이 말로는 부족하다.
“흐흐흥~♪”
톰슨이 나중에 지휘관과 함께 할 술자리를 기대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톰슨이 지휘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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