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믈라카트 맘루크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
두 전사가 달려들어 맞붙었다.
그들의 무기는 허공으로 불꽃과 핏방울을 토했다.
요란한 칼부림 소리도, 이런 결투도
사랑의 포로가 된 젊음이 빚어내는 소동
칼은 부러졌다! 우리의 청춘처럼
임이여! 그러나 이와 날카로운 손톱이
배신자의 칼과 단도에 복수하리,
사랑의 원한으로 곪은 마음의 분노여
살쾡이와 표범이 돌아다니는 골짜기로
우리의 주인공들은 한데 뒤엉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의 살가죽에 스민 피는 메마른 가시덤불에 꽃을 피웠다.
이 심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친구들로 가득한 지옥
매정스런 여전사여, 우리는 그곳으로 미련없이 떨어지리라
우리의 격렬한 증오가 영원해 지도록!
<악의 꽃> 중
01.
계절은 3월이지만, 동장군은 엉덩이를 뗄 생각을 하지 않는 나날이다.
입학식을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과 함께 놀장소를 정하기 위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무리가 보이고 이제 막 친해져 서로에 대해 어색한 미소로 간간히 대화를 나누는 무리도 보이지만, 이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춥고, 지루한 학교에서 단 일초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전학생 케이틀린은 그녀의 짝지인, 오리아나가 하얀 실내화를 벗어 신발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뒤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가요?] 신발을 다 갈아 신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케이틀린은 여전히 실내화였다.
[아, 잠깐 나도 신발 좀 갈아 신고.] 전학생은 허둥지둥 신발을 갈아 신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오리아나가 케이틀린을 관찰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인적이 뜨문해진 교정을 걷는다. 케이틀린은 계속해서 옆의 친구를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그렇게 신기한가요?] 오리아나가 시선을 느끼고선 말했다.
[어? 어, 응.]
[오랜만이네요, 이제는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고향이 프렐요드죠?] 케이틀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고향은 여기가 맞는데,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 손에 자랐어, 그래서 자꾸 쳐다보게 되네. 기분 나빴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친구의 다리에서 눈을 때지 못한 체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조금은 부끄러워요.] 케이틀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친구의 다리에서 눈을 뗐다.
[미안.]
[그런데 궁금하네요, 얼마나 시골에서 오래 살았으면, 안드로이드를 본적이 없어요?] 오리아나는 그녀의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은빛의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강판으로 만들어진 손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시선은 사로잡혀 버렸다.
[와......, 되게 잘 움직인다.]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피아노를 치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케이틀린은 현혹되었다.
[상용화 된지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도대체 얼마나 깡촌에서 지내셨나요?]
[아, 전파가 닿지 않는 산골짜기에서 살았어. 만져 봐도 돼?] 오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은 없지만, 케이틀린은 정말 깡촌에서 살았네요, 마력특이체질인줄도 모르고 여태껏 지냈다는 게 저는 더 신기한데요.]
[그러게, 진즉에 알았으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케이틀린의 투덜거림에 오리아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운동장 구석에 있는 호수를 보았다.
호수는 지금도 학생 몇몇이 거리낌 없이 뛰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학교의 정문에도 같은 호수가 하나 있는데, 등하교 시간에 호수로 뛰어들면 반대쪽으로 나오는 편리한 마법호수이다. 다만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몇몇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학우들은 호수에 뛰어 들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치 못한다.
[등교할 때 불편하겠어요.]
[조금 일찍 일어나야지. 근데 신기하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호수에 뛰어들면 정문의 나무 사이로 나갈 수 있는 거지?]
[마법이 다 그런 거죠.] 그들은 잡담을 하며 발을 놀렸다. 학교에서 나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위해 본관의 모퉁이를 돌때 별안간 시퍼런 무언가 튀어나왔다.
[이 씨팔 깜짝이야!] 두 사람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에 파란 머리를 양갈래로 길게 묶은 그녀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그 뒤를 쫓아 곧바로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진, 머리의 양옆을 남자아이처럼 바싹 깍은 여자가 나타났다.
[뭐 해!]
그들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추운 날에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제법 먼 거리를 달려온 듯하다. 키가 작은 쪽이 잽싸게 몸을 날려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 칸 내려간 뒤 몸을 뉘였다. 위쪽에서 보면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처럼 보였다.
[야, 너네 입 닥치고 있어라.] 덩치 큰 분홍머리가 케이틀린과 오리아나를 있는 힘껏 째려본 다음에 마찬가지로 몸을 숨겼다.
[뭐야, 다짜고짜 욕질이네?] 케이틀린은 평화로운 등굣길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법자들이 숨어 있는 계단을 바라보다 옆의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리아나는 몸을 절반쯤 돌려서 뒤쪽을 살폈다.
[야 너네, 뭣 좀 물어보자.] 케이틀린이 친구의 시선을 쫓으려하는 순간 타인의 목소리가 훼방을 놓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과 어울리지 않게도 얼굴은 굉장히 젊어 보여, 얼핏 이 학교에 다니는 여느 고등학생과 착각할 법 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남성용 정장에 보라색 구체들과 함께 떠있는 모습을 제외 하더라도, 자신감 넘치게 펼친 어깨, 여자 치고는 저음의 목소리 들이 그녀의 성별, 나이, 그리고 신분을 넌지시 알려준다.
[예? 아 예]
[혹시 이쪽으로 튀어온 세끼들, 아니 애들 못 봤어?] 케이틀린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신드라를 바라보다 말고 오리아나에게 답을 대신해 달라는 듯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오리아나는 어깨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저쪽이구나!] 이사장은 이를 뿌득 갈고선 재빠르게 두 사람을 지나쳐 날아갔다.
[와, 이사장도 능력자였네.] 케이틀린은 먼지 날리는 도보를 보며 중얼 거렸다.
[나와도 되요, 갔어요.] 기계소녀의 안내에 먼저 고개를 내민 쪽은 분홍머리였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자신을 쫓아오던 신드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일어섰다.
[제법이야.] 그녀가 옷에 붙어있는 마른 풀잎의 부스러기들을 털어 내며 다가오는 동안 뒤 쪽에서는 첫인사로 육두문자를 던진 꼬맹이가 쫄래쫄래 쫓아 왔다.
오리아나는 신경을 쓰지 않는지, 그대로 몸을 돌려 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 뒤지는 줄 알았다고, 한창 재미를 보는 중인데, 그 미친년이 나와서 간땡이가 떨어질 뻔 했다고. 고맙다야, 샌님들인 줄 알았는데 그런 재주도 부릴 줄 아네, 이름이 뭐냐?] 위기에서 벗어나 한결 긴장이 풀린 분홍머리는 그녀를 도와준 친구들에게 넉살좋게 말을 붙였다.
[오리아나, 이쪽은 케이틀린이에요.]
[아, 반가워, 내가 케이틀린이야. 전학 왔어.]
[오호? 신참인가, 어디서?]
[프렐요드 근처]
[불알 쪼그라들게 추운 곳에서 왔네, 난 바이, 이쪽은 징크스]
바이는 징크스를 보더니 허리를 숙여서 옷에 붙어있는 마른풀이나 먼지를 털어내 주었다. 그녀의 손이 어찌나 컸는지, 한번 휘두를 때마다 징크스가 조금씩 휘청거렸다.
[우리 둘 다 이곳 원주민이지.]
[본명인가요?] 오리아나의 억양 없는 맑은 목소리가 주변 공기를 바꿨다.
징크스의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오리아나를 죽일 듯이 보는 동안 바이는 아무 말 없이 친구의 몸에서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렇게 적대할 필요는 없어요. 저도 돼지촌에서 살아요.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스타인데, 저도 몇 번 봤어요.]
[허? 너도 돼지우리에서 살아? 믿기 힘든걸.]
[중턱에 살아요.] 바이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체 오리아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도발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정류장은 낡았다. 벽돌로 모양을 잡은 다음 시멘트로 대충 마감을 해서 벽면에서는 거뭇한 이끼들이 끼었고, 안에 설치되어 있는 의자는 낡아서 건드리기만 하는 것으로 나무조각들이 떨어졌다. 그들은 버스가 오기 전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엔 아무도 없었다. 바이와 징크스가 버스 맨 뒷좌석에 가서 앉자 그 앞에 나머지 아이들이 가서 앉았다.
[너 화끈하다, 온몸을 기계로 바꾼거야?] 뒷좌석에 앉은 바이가 오리아나를 탐색하며 질문했다.
[사이보그는 아니에요, 안드로이드 인데, 오류가 많아서......., 그냥 편하신 걸로 생각하세요.]
[음, 그냥 안드로이드라고 부르지 뭐, 문제없지?]
[일단은요, 그런데 무슨 일을 저질러서 저렇게 이사장이 눈에 불을 키고 쫓아오나요?]오리아나의 질문에 바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곤 주먹을 쥐어 복서처럼 허공에 대고 두어 번 내질렀다.
[가볍게 한 방 먹여 주었지.]
[너네도 아침에 입학식 행사가 늦게 시작한 거 알고 있지?]
[그거 이사장이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그랬다며.] 케이틀린의 대답에 바이는 혀를 내밀고 손 사례를 쳤다.
[개뿔이, 아침부터 우리를 엄동설한에서 벌벌벌 떨게 한 이유가 사고가 아니라, 그 샹년의 게으름 때문이야!]
[게으름?] 케이틀린이 반문 했다.
[그래, 나도 길이 얼었네, 미안하네 어쩌고저쩌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근데 그게 사쿠라였어. 교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그 얼어 죽을 년이 날이 추워서 돼지세끼마냥 집에서 꿈지럭 거리다가 늦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것을 들었지 뭐야.]
그녀는 잠자코 창문 밖을 구경하던 징크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갑자기 야마가 확 올라오더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개 박살을 내줬지.]
[뭘?]
[차.] 징크스의 짤막한 대답에 케이틀린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멋대가리 없는 검정을 락카칠로 조금은 쓸모 있게 만들고, 못으로 문짝에 문신 좀 해줬지. 타이어에 있는 바람 빼주고, 야! 징스 그것 좀 꺼내 봐라.] 바이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두어번 찌르자, 징크스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녀가 꺼낸 것은 V자 모양의 쇳덩이였다.
[알지? 자동차 앞에 달려 있는 거, 하하하하 그래도 다행히 전리품을 챙겼어, 빽미러를 걷어차 모가지를 분질러 놓는 중이였는데 갑자기 그년이 튀어나오지 뭐야.] 바이는 자신의 무용담에 취해서 버스 의자에 미끄러져 내려오듯 몸을 파묻었다.
[저기 바이,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과를 하는 게 어떨까요?]
[그건 뭔 개 뼉따구 같은 소리야?]
[혹시 비싼 자동차에는 블랙박스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아나요?]
오리아나가 염려하자, 지금껏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징크스가 얼굴에 비웃음을 비췄다.
[왜 그래 아마추어 같이, 우리가 이런 놈팽이 짓을 원 데이 투데이 하는 줄 알아?]
[하지만, 요즘은 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케이틀린이 오리아나를 곁눈질하며 걱정해 주었다.
[귀엽네.] 바이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케이틀린의 갈색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자 잘들어 봐. 우선은 락카와 보자기를 준비해.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무용담을 더 늘어놓으려 할 때 버스가 학교의 정문에 도착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야 그게, 김빠지잖아.] 고개를 뻗어 귀를 기울여 집중을 하고 있던 케이틀린이 성질을 냈다.
[야, 넌 통장비밀 번호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주냐? 꺼져.] 아이들은 차례로 버스에서 내렸다.
[너네 지금부터 뭐 급한 일 없지?]
[없어요.]
[없어, 남아도는 게 시간이야.]
[그래? 그럼 신세진 것도 있겠다. 내가 한턱 쏠게. 근데 너 혹시 못 먹는 거 있냐?] 바이가 뒤돌아 오리아나에게 물어보았다.
[부모님이랑 책상 빼고는 다 먹어요.]
[뭔 소리여?]
[아무거나 다 잘 먹는 다고요.]
[그럼 그렇게 말하지, 왜 어려운 말 쓰는데, 그럼 내가 자주 가는 가게로 가자.]
징크스가 기다리기 지쳤는지 앞장을 섰다.
[그런데 좀 그렇네요.] 뒤쫓아서 골목을 종단한 오리아나 말했다.
[뭐가?]
[여제가 자주 들르는 가계라고 하니 뭔가, 굉장히 수상한 냄새가 나요.]
[뭐 임마? 꽉 씨,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바이가 장난스럽게 오리아나의 어깨를 주먹을 쳤다.
[장난이에요, 설마 벌건 대낮에 그렇고 그런데 들어가겠어요?]
[평범한 식당이라니까. 일단 낮에는 말이야.] 그녀는 뒷말을 흐렸다.
그렇게 입학식의 작은 소동이 마무리되고 어느덧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케이틀린은 복도 바깥쪽 창문을 열었다. 한기를 머금은 안개가 짙게 낀 날이다. 얼마나 밀도가 높은지 손을 뻗어 안개를 만지면 모양을 빚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윽, 찐득해라.]
[진보니 어쩌니 해도 일단은 공업도시야, 자운보다는 낫지만. 오, 저기 오는데?] 어느새 케이틀린 뒤로 다가와 같이 풍경을 구경하던 잔나는 턱짓으로 안개 속을 가르켰다.
그는 케이틀린과 마찬가지로 전학을 왔다. 잔나는 집을 구하고 주변의 지리를 익히는 등 도시와 친해지기 위해 입학식 보다 일찍 필트오버에 왔다. 한밤중의 산책을 좋아해, 어느 날 굴다리 밑에서 담배를 피던 바이와 징크스랑 만났고 일종의 기질이 맞았는지 빠르게 친해졌다.
어깨에 마의를 들쳐 매고 셔츠의 앞단추는 두어 개 이미 풀어 헤친 바이는 소매로 연신 이마에서 찐득하게 베어 나오는 땀을 닦고 있다.
[에라이 염병할, 재수가 옴팡지게도 없네, 어떤 빠가사리 같은 놈이 개구멍을 막아 놓았어.] 바이는 마의를 공처럼 말아 잔나에게 던졌다.
[누가 지각하래?] 그녀의 옷을 받고는 잔나는 실실 쪼갰다.
[이 세끼가? 위로는 못해줄 망정 디스질이야, 왐마, 하필이면 삼룡이가 뺑이치는 날에 걸리냐. 아야야야야, 엉덩이에 불나는 줄 알았네.] 바이는 엉덩이를 문질렀다.
[맞았어?]
[10대 처 맞고 계속 엎드려 있었지, 저 저주받을 놈이 숙녀에 대한 매너는 어따 빠다 먹었는지 아야야야, 씨발, 개 쓰라리네.]
[니가 숙녀냐? 저기 지나가던 개가 웃는다.]
[입 여물어, 어째 상태를 보니까 공복이라 헛소리를 하는 것 같다. 매점이나 가자.]
[기달.] 잔나는 만세를 하면서 그녀의 마의를 열려있는 교실의 뒷문을 통해 투척했다.
오리아나, 잔나, 징크스, 바이, 케이틀린은 안개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매점으로 갔다.
아침 자습은 7시 30분에 시작해서 8시 30분에 끝난다. 1교시가 보통은 9시에 시작하니 교사회의가 있거나, 느긋한 성격의 선생님이면 넉잡아 학생들은 3,40분 정도 쉴 수 있다.
제법 긴 토막시간에 숙제를 못해온 아이들은 친구의 숙제를 베끼고,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서 토막잠을 자든지, 배가 고프면 매점으로 가서 그날 하루 일용할 양식을 조달해 오는 것이 일상이다.
[하여튼 근본이 없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세상에 어떤 학교가 7시 반까지 등교를 하라고 해, 사상이 글러먹었어. 늙다리들 이거나, 어른들의 헛소리대로 살지 않으면 죽는 줄 아는 좀생이들만 그때까지 학교에 올 수 있다고.]
[그럼 저는 좀생이 혹은 늙다리겠네요.]
[냅둬, 저 인간은 지 가 못하면 남도 못하는 줄 암, 하긴 좀 일찍 오는 감이 있지.]
[일찍 오는 건 상관없는데, 지각했다고 때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역시, 날 챙겨주는 건 케잉 너뿐이다.] 바이는 케이틀린을 뒤쪽에서 안아 들었다.
[왁, 하지 마.]
매점에는 주인아저씨만 있었다. 아이들은 흩어져서 그날 수업 중 몰래 까먹을 과자들을 골랐다. 양손에 각각 사탕을 쥐고는 어떤 맛을 먹을지 고민을 하던 잔나가 갑작스럽게 바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너는 야자도 안하면서 왜 아침에 못 일어나 지각을 하냐?]
[일했어, 아저씨 이거 계산해 주세요. 다 골랐냐?]
[일? 밤일?]
[미친놈, 콩밥이 그렇게나 맛나 보이던? 아는 사람이 알바를 빵꾸 내서 어쩔 수 없이 대타 뛰어 줬어. 하여튼 뇌가 썩으려면 곱게 썩어야지 저렇게 답도 없게 썩나. 근데 너네는 왜 다 빈손이야?] 바구니를 거의 다 채운 바이가 멀뚱히 서 있는 케이틀린과 오리아나를 보자 의문을 표했다.
[양치했어]
[전 수업시간에 몰래 눈치 보면서 먹는 게 맘이 불편해서 안 먹으려고요.]
[에라이, 맹꽁이들아.] 바이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바구니를 도로 낚아채서 손에 잡히는 대로 부식거리들을 퍼 담았다. 그득해진 바구니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려 하자 징크스가 생쥐같이 잽싸게 달려와서 막대사탕을 바구니에 쏟았다.
[쌩큐.]
[오냐, 일당 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쏜다. 짐은 관대하다.]
[호옹이, 와타시는?] 잔나가 장난스럽게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얼굴을 들이 밀자, 바이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그의 마빡을 강타했다. 잔나는 이마를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 이다.] 징크스는 고통에 사로잡힌 잔나가 웃긴지, 옆에 서서 들개처럼 웃었다.
그들은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돌아왔다. 잔나는 돌아오는 길 내내 바이가 사준 사탕을 입에 문체 그녀의 흉악함에 대해서 봇물과 같은 비난을 쏟아 냈다.
첫 시간은 공용어다. 담당선생은 학생들이 도를 넘은 행동만 하지 않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여서 아이들도 한결 느긋하게 수업을 준비하고 잡담을 나누고 있다.
[아니 시발 저게 뭐야.] 의자에 몸을 기댄 체 앞뒤로 몸을 까닥이던 바이가 외마다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다. 그녀만 동요한 것이 아니다. 교실 전체가 불청객에 의해서 술렁이고 있었다.
언어선생이 아닌 물리담당인 문도가 교실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단짝인 붉은 매를 들고 교탁을 내려쳤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찰음이 교실을 조였다.
[소지품 검사. 가방 까.] 교실이 삽시간에 시장통이 됬다.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소지품들을 책상에 올리거나, 황급히 책상 옆에 매달려 있는 실내화 주머니에 멋진 물건들을 숨기는 남자 애들이 내는 소리는 퍽 시끄럽다.
그는 양 무리에 들어온 한 마리의 늑대다.
앞에서부터 책상위에 올라가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면서 그가 내려왔다. 문도의 발걸음은 케이틀린의 책상에서 멈췄다. 손을 뻗자 이유도 없이 학생은 움츠러들었다. 퉁퉁한 손가락이 책상위의 알사탕 하나를 집어서 그 자리에서 까먹는다. 사탕을 으적이며 겨울잠에서 막 깬 곰처럼 굼뜨게 발걸음을 옮긴 문도는 바로 뒷자리인 징크스와 바이 책상에서 멈추었다.
[나와.]
[쯧.] 바이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돌아.] 그녀가 뒤로 돌자 자신의 매를 책상위에 올려놓은 문도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바이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을 만졌고, 어깨에서 허리까지 훑었다. 마의를 벗었기 때문에 몸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으면, 당연히 보이는데도 그는 스스로의 눈을 믿지 않는 듯 행동했다.
즉, 철저하게 온몸을 구석구석 만졌다.
바이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치마가 아닌 바지를 즐겨 입었다. 치마는 활동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못생긴 손이 허리에서 골반으로 골반에서 허벅지로 최종적으로 종아리까지 흘러내려왔고 그곳에서 탐색을 마쳤다.
[가.] 당연히 문도는 어떤 불건전한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소지품 검사는 수업시간의 절반을 까먹고 담배, 라이터, 만화책, 야한잡지 몇 개를 찾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문도는 검문에 걸린 아이가 남자면 칠판을 잡게 해, 자기가 때리고 싶은 만큼 붉은 매로 허벅지를 내리쳤고, 여자아이면 종아리를 때렸다.
처벌은 의도적으로 천천히 이루어 졌고, 끝났을 무렵에는 1교시가 거의 끝난 시점이었다.
아침부터 비극을 격은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 유쾌할 리가 없다. 그들은 오전 내내 창백한 얼굴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교실에 있어야만했다.
바이는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팔짱으로 자신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다. 이따금씩 꽉 쥔 주먹을 떨 뿐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바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방을 어깨에 빗겨 걸어 매었다.
[어디가?] 잔나가 물었다.
[동방.]
[점심은? 오늘 괜찮은 거 같은데?] 케이틀린이 식단표를 찾기 위해 책상서랍을 뒤적였다.
[생각 없어, 많이 잡수세요.]
바이와 징크스는 오후수업을 몽땅 재껴버리기 위해 동아리방으로 갔다. 교실에 남겨진 잔나, 오리아나, 케이틀린은 두 친구의 빈자리에 가 창문을 열었다.
[하여튼 삼룡이는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데 재능이 있다니까.] 잔나가 혀를 찼다.
[아까 봤어? 미친거 아니야?]
[확실히.] 잔나는 창문에 팔을 걸치고 밖을 보았다.
[저런 일 하면 짤리지 않아?]
[안 짤려, 지가 뭐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렇게 하는 거겠지.] 케이틀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왕방울 만해 졌다.
[다 알고 있을 껄요.]
[뭘?]
[문도는 알고 있는 거에요. 물리는 생각보다 야비해요. 케이틀린 아까 책상위에 사탕 올려 놨죠?]
[왜? 아직 안 먹었는데?]
[원래는 다 뺏기고 맞아요, 다른 친구들처럼 말이에요. 문도는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만 혼내요. 잔나 나 제가 맞는 거 본 적있어요?]
[아니, 오리아나는 그렇다 치고 잔나는 한 번도 못 봤네, 까불거리는 거 보면 한두 번은 볼 수도 있는데.] 잔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겠죠,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거나, 하다못해 부모님이 잘 살면, 절대로 바이나 징크스처럼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요.]
[어찌됐든 나도 특기생 중 한명이니까.]
[뭐야 그게.]
[뭐긴 학교지,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 없는 녀석들만 피 보는거야.]
[하지만.] 케이틀린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보려했다.
[바이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야, 너도 알지, 요번에 입학제도가 많이 바뀌어서 바이나 너나, 징크스처럼 제비뽑기를 해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어]
잔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라이터를 꺼내서 손가락 위에서 굴렸다. 무슨 재간을 부렸는지 용케도 숨겼다. 아니면 그의 말대로 문도가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는 나름 명문, 아니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야. 머리에 똥만 들은 것들은, 이제는 개나 소나 다 온다고 불평하고 있지. 그들 중엔 우리를 눈엣 가시처럼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어 하겠지.]
[반면, 평범한 애들한테는 이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야.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해서 졸업장을 따두면 언젠간 도움이 되면 됐지 해는 않 되니까. 저렇게 참는거야.] 케이틀린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필사적인 학생, 학생을 못살게 괴롭히는 게 취미인 선생이 만났으니 말 다한 거지.]
결국, 점심을 먹고 오후수업과 청소가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의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자율학습이 되자 많은 친구들이 교실을 떠났다.
말이 자율학습인 강제 연장수업에 땡땡이를 치기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 날은 예외적으로 절반에 가까운 학우들이 수업에 불참했고 그중 대다수가 아침부터 누군가에게 맞았던 아이들 이였다.
교실에 남았던 3명의 동아리 부원들은 본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동아리건물로 갔다.
그 건물은 구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정사각형 모양에서 한 변을 뺀 모양을 하고 있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건물 벽은 이제 세월의 때가 껴서 그다지 밝게 보이지 않는다.
동아리방은 맨 꼭대기인 사층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창문으로 누가 다가오는지 제일 먼저 볼 수 있고 통풍과 볕이 잘 드는 곳이다.
[왐마, 여기는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너무 높아] 잔나가 꼭대기 층까지 올라와서 불평을 쏟았다.
[운동되고 좋지 뭐.]
[노친네 같으니라고.] 방문이 열리자, 안에는 바이와 남자아이가 있다.
[오, 땡땡이냐.] 바이가 가위를 든 체 인사를 건넸다.
[땡땡이라니, 그런 불성실한 소리를. 애초에 나는 야자는 커녕 오후 학습을 신청한 기억도 없어. 참나,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자동 참석이라고?]
[하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지껄이던 중학교 담탱이의 얼굴이 떠오르네, 사람은 착했어.] 잔나는 바이의 옆에 앉았다.
[오 이즈리얼이네? 언제 우리 동아리에 가입한 거야?]
[아시는 분이신가요?]
[짝지야. 뭐야? 너 그것도 몰라?]
[아 그게, 아직 가입은 한 게 아니라서.] 이즈리얼이 손사례를 쳤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에요, 커피와 차, 뭐 드실래요?]
[난 패스 아까 마셨어. 밤잠 설칠라.] 오리아나는 가방을 소파에 올려놓고는 옆에 붙어 있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책상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바이는 그 더미에서 한권을 꺼내 휘리릭 살펴보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쪽이 있으면 가위질을 해 그림을 오려 내는 것이였다.
[뭐하냐?]
[독서.] 바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독서의 뜻은 책을 가위로 조각내는 게 아닐 텐데. 한 권 줘봐.] 바이가 잔나에게 왼편에 있던 책을 던져 주었다.
케이틀린은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겉장이 뜯어져 나간 잡지다. 그녀가 손을 모아 책을 펼치려고 할 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즈리얼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여 어깨사이에 파묻었다.
그녀는 의아함을 느끼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바이와 잔나를 보았다. 바이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잡지중 하나를 집어서는 별 생각 없이 휙휙 넘기다 별안간 한 페이지를 찢어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잔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을 하며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는 고개를 파묻거나 의자를 뒤로 젖혀서 멀찍이 바라보기도 하면서 책을 읽었다.
[자, 여기 차에요.]
[아 고마워.] 오리아나가 탕비실에서 음료를 내왔다.
[이건 이즈리얼 꺼에요. 그런데 바이 이렇게 함부로 책을 찢어도 되요?]
[상관없어, 주어온 거야. 아 징크스 잘 자고 있냐?]
[엎어가도 모를 껄요. 그런데 이즈리얼 어쩌다가 오게 됐어요?]
[저, 그게 그냥 책 옮기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해서.]
[맞아, 이게 양이 꽤 되더라고.] 바이는 훑어보던 책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많이 집어 왔어요?]
[신사력이 올라가는 책이지, 아 케잉 탕비실에서 상자하나만 갔다 줘라.]
[어떤 거?]
[대충, 작은 걸로.]
케이틀린이 한때 쌍화차 병들이 담겨있던 작은 상자를 챙겨서 돌아왔을 때는 동아리방이 면학의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이즈리얼을 제외한 모두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아니 얼마나 재미있는 책이어서 모두 독서광이 됐어?] 케이틀린은 아까 자신이 읽으려다가 덮은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얼마안가 얼굴이 빨개져서 책을 덮었다.
[저기 바이, 이거 뭐야?]
[좋지?]
[남사스러워. 망아지만한 여자애가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워워 진정해요 할머니, 화내시면 틀니가 빠져요.] 케이틀린은 오리아나와 잔나를 살폈다.
잔나는 어느새 가방을 비게 삼아 길게 누워 책을 탐닉하고 있었고 오리아나 역시 책상에 턱을 괴고 몰입해 책을 보는 중이였다.
[다 썩었어......,] 케이틀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책상에 엎드렸다.
[진정해 케이틀린, 내가 이런 엄한 잡지를 뒤적이는 덴 슬픈 전설이 있어.]
[뭔데?]
[난 전설 따윈 믿지 않아.] 바이는 뭐가 웃긴지 키득이며 잡지를 계속해서 오렸다.
[긴긴 시간의 끝에서 마침내 복수는 오롯이 내것이 되리라, 이 염병할 놈아.] 바이는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야 케잉, 근데 이건 다 어디다 보관하지?]
[갔다 버려.]
[아까워, 하는 수 없지 저기다 짱박아 놔야겠다. 괜찮지 오리?] 바이는 엄지손가락으로 벽에 걸려있는 족자를 가리켰다.
[왜 그걸 저한테 물어봐요?]
[적어도 대답할 때는 시선을 책에서 때는 게 어때?]
[제 의견에는 변함이 없어요. 설령 이 책이 마음에 들어 사서 보관하고 싶다 해도 말이에요. 되도록 우리는 저 창고에 손을 대면 안돼요.]
[뉘에뉘에.] 바이가 아래턱을 잔뜩 내리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런 오만불손한 태도는 오리아나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장난이 아니에요, 한 세기 전에 이미 유통, 제작, 소유, 개발이 모두 금지된 물건이.....,]
[우와와왕, 버틸 수가 없다.] 별안간 잔나가 소리를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즈리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가지 않겠는가?]
[어딜 말이야?]
[화장실.] 잔나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즈리얼 귀에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야이 더러운 셋키야!] 바이가 들고 있던 잡지를 집어 던져 잔나의 머리를 맞췄다. 그녀는 눈꼬리를 올리며 경쾌하게 웃었다.
[닥쳐, 나는 지금 텐트를 치지 않기 위해 눈알이 옹이구멍이 될 정도로 힘들단 말이야, 어때 이즈리얼, 너도 남자니까 내 기분을 알겠지? 너도 나가고 싶지?]
[아니 저, 그 그러니까.]
[헉, 이즈리얼 설마, 너 이미 크고 아름다운, 오리아나 뭐냐 그 눈빛은?]
[말 걸지 말아 주실래요?]
[참나 농담도 못하나.]
이즈리얼은 잔나와 함께 나갔다. 방문이 닫치자, 두 사람의 빈자리로 가위가 종이를 오려내는 마찰음으로 서서히 차올랐다.
[그냥 창고로 쓰자니까, 왜 그렇게 질색을 하는데.]
[아직 신고도 하지 않았잖아요. 함부로 손대면 뭔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신고?] 바이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누구처럼 곱상하게 자라지 않아서 말이야,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의 주인을 찾아 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아.]
[이건 코흘리개들이 만질만한 물건이 아니에요.]
[무슨 섭섭한 소리야, 이런 건 먼저 줍는 놈이 임자지, 위아래가 어디 있어. 그리고 넌 코흘리개 일 수도 있지만, 나랑 징크스는 아니야.]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지, 손을 펴 목젖아래에서 두어 번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대화에 마침표가 찍혔다.
그날 밤, 바이와 케이틀린은 밤을 틈타서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교무실 앞에 섰다. 선생들은 퇴근을 했는지 아니면, 야자감독을 하는지 교무실에는 불만 켜져 있었다.
[봐, 내가 뭐라 했어. 야밤에 쥐새끼마냥 숨어 들어오는 것 보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게 더 쉽다고 했지, 멍청한 야자시간이 이럴 때 도움이 되네.]
[쉿, 목소리 목소리.]
교무실로 들어온 바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케이틀린에게 말을 걸었다. 케이틀린은 화들짝 놀라서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쳇, 가슴크기 만큼 겁도 많아.] 바이는 가벼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무용수처럼 가볍게 걸어 문도의 자리로 갔다.
[이 꼬랑네 나는 홀아비 변태자식아, 내가 친히 네놈을 위해서 세계각국에서 어염집 규슈들을 모셔왔으니, 내일 아침에 모두 앞에서 자랑질이나 한번 해봐라, 하필이면 그 더러운 취향을 내가 몰라 누드에서 시작해서 마니악한 것까지 다 모아놨으니 천천히 즐겨봐라, 이 똥통에 튀겨 죽일 놈아.]
바이는 장대한 저주를 내뱉으면서 그녀가 긴 시간을 들여서 모아온 잡지 속 미녀들의 나신이 담긴 상자를 그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용수철위에 사진이 잔뜩 올라가 있어 뚜껑을 열면 종이들이 사방팔방으로 날려갈 것이다.
[끝났다. 가자 케이틀린.]
바이가 작업을 한참 하는 동안 뒤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케이틀린은 벽 한켠에 나있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치명적이게도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케이틀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거기 뭐있냐?]
[악, 깜짝아, 기척 좀 내고 다녀.] 케이틀린은 어깨를 움찔하곤 얼굴을 문틈에서 떼었다.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밤손님이 기척을 왜내.]
[어? 들어가게?]
[여기까지 와서 뭘, 오 이렇게 생겼구나.] 바이가 앞장섰다. 그 뒤를 케이틀린이 쫓아 들어 와 문을 닫았다.
[좋은 거 처먹네, 이런 거 사맥일 돈이 있으면, 우리 급식에 벌래 좀 않 나오게 해라 이 망할 이사장 놈들아.] 그녀는 교무실의 탕비실에 있는 과자나, 차를 보면서 불평을 했다. 그러나 몇 개 정도는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어? 바이 일로 와봐, 이 벽 신기하게 생겼다.] 주변을 살펴보던 케이틀린이 낯선 문양의 벽을 보고선 바이를 불렀다.
[뭐래, 이게 뭔 벽이야. 이건 미닫이문이야. 봐봐 이렇게 열면.]
[잠깐 잠깐, 또?]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어. 오오오오, 이것 봐라?]
벽을 사이에 두고 세계가 바뀌었다. 외발을 가진 원탁과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책상위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이 등잔 밑에 걸려 있다. 밖을 향해 열 수 있는 둥근 모양의 널찍한 창문은 누군가 들여다보기 쉬울 것 같았지만, 바로 위에 둥글게 말아 올린 커튼이 있어서 언제든 원하면 시선을 차단할 수 있다. 반대쪽, 복도측에는 글과 그림으로 한 폭 한 폭 교차해 만든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우와, 외국 같다.]
[전부 수제인가? 이야, 돈 좀 썼는데?] 바이는 고개를 숙여 책상의 모서리를 살폈다.
[어떻게 알아?]
[딱 보면 각이 나오지, 이 문양을 봐봐 기계에서 찍어내지 않아서 은근하게 제각각이야. 아마 아이오니아 산일꺼야, 아이오니아 변태들은 기계를 똥 보듯이 해서 웬만한 건 다 손으로 만들어, 뭐 더 정감가긴 하는데 어떨 때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지.]
[대단한데, 그럼 이런 붕어도 다 일일이 손으로 그린거야? 나 같은 흙손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그릴거야 아마.] 케이틀린은 손가락으로 병풍의 붕어를 만졌다.
[인정, 만지지마, 구멍날수도 있어.]
[뭐라 쓴 걸까?]
[설명이 더 필요한지.] 케이틀린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이를 보았다.
[바이 읽을 줄 알아?]
[아니 구라친건데?]
케이틀린이 이맛살을 찌푸릴 때 탕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바이는 케이틀린의 손을 낚아채서 병풍 뒤에 밀어 넣고 자신도 뛰어 들어갔다.
침입자들이 숨자마자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제드와 신드라가 들어 왔다.
[어라, 혼자 살아서 지저분하다고 하더니, 깔끔한데, 방도 잘 꾸며 놓았고.]
[앉아 있어, 마실 거 내올게.] 신드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둥근 의자에 앉았다.
[뭐 있는데?]
[골라 마실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지.]
제드가 문을 닫고 나가자 탕비실에서 유리잔 끼리 부딪치는 소리,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부스럭거리는 소리들이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케이틀린에게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지 그녀의 동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해 있는 케이틀린의 어깨에 바이가 손을 얹자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바이의 손가락이 병풍의 한 지점으로 다가 갔다.
병풍은 낡았는지 군데군데 빛이 세어 들어오고 있었고 그녀가 가리킨 부분은 눈을 가져다 대고 밖을 살필 만큼 충분했다. 이미 침략의 주범은 구멍으로 엿보고 있었다.
신드라는 팔을 괴고 기다렸다. 피곤한지 아니면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는 부스스 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끼었다.
준비를 마친 제드가 그녀의 앞에 유리잔을 놓고 술로 잔을 채웠다. 이사장은 잔이 차오르는 모습을 책상에 볼을 붙인 채 멍하게 바라보았다.
[하나 예상해 볼까?]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뭘?]
[보나마나 물이겠지, 근무 중 이라고 말이야.] 그녀가 턱으로 잔을 가리키자 제드가 허파에서부터 올라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도 늙었어, 그렇게 앞뒤 꽉 막힌 일은 젊을 때나 해야지, 늙어서 하면 똥고집이라 욕먹어. 게다가 오늘같이 오랜 벗이 찾아온 날에는 이 녀석의 도움이 절실하지.]
제드는 손에 쥔 병을 흔들었다. 그러자 신드라는 허리를 꼿꼿이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잔을 코로 가져갔고 향취가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돌부처가 웬일이래?]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지, 교장질을 하다 보니 느는 건 손님대접 뿐이더라.]
[너 이거 쓸데없이 쓰고, 독하고, 껄끄럽고, 진해서 경박하다 하지 않았어? 술이 아니라 독이라며?]
[늙으면 입맛이 변해, 늙으면. 그래 신드라 너는 정말 하나도 안변했구나.] 제드는 자신의 눈 앞에서 잔을 말아진 손을 여유롭게 돌리는 신드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안 변하긴, 같이 늙어가면서 뭘.] 짓궂은 미소로 응답하며 신드라는 팔을 뻗어서 건배제의를 했다.
두 사람의 팔이 허공에서 교차하더니 이내 안쪽으로 굽었고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 졌다.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각자의 잔을 비웠다.
[넌 늙어도 여전하네.]
[뭐가?]
평생 흙 한번 만져보지 않은 것 같은 손이 그의 얼굴을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남자의 옹이지고 잔주름과 상처가 가득한 손이 자신의 턱 끝에서 더 내려가려는 그녀를 막아섰다.
[너도, 하나도 안변했어, 정말로. 이 감촉, 이 향기, 그리고 광채까지, 그대로야.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마치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말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고, 얽힌 손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 우리가 단둘이서만 만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어떻게 잊을 수 있어, 그 일이 있기 하루 전이였으니까, 꿈같았지.] 그는 잠자코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잠을 설치겠는 걸.] 신드라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겨울밤은 길어,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도 많고, 굳이 추억이 아니라도 말이야.] 그녀의 한숨에 잠시 침묵하던 제드가 입에 잔을 털어 넣고 자작을 하려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손에서 병을 나꿔챘다. 그녀는 술을 따라준 뒤 다시 병을 건넸다.
[파하, 독하다 독해,] 신드라는 목을 축이고서는 취기가 서서히 올라오는지 손부채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이 열렸고 방안을 채우고 있던 안락한 공기는 순식간에 야밤의 깨질 듯한 상쾌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상관없어, 그것보다 한밤에 나랑 같이 있는 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좀 그럴라나?] 제드가 입 꼬리를 올렸다.
[언제부터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셨나?]
[영광인줄 알아, 너니까.]
[하하하, 여기서는 내가 대장이야. 누가 수근덕대도 상관없어.] 그의 대답에 그녀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새기는 것으로 답했다.
[곧 바뀌겠지만 아직까진 내가 여기 골목대장이야. 그리고 다음 번 왕은 여왕이 될 것 같은데, 안 그래 신드라?]
[엑, 이쪽에서 사양이야. 이렇게 못된 망아지 같은 애들이 우글거리는 학교는 질색이야.]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누가 날씨 춥다고 방안에서 뭉그적거리면서 게으름 피우래, 멋들어지게 보복을 당해도 싸지.]
[어럽쇼, 지금 교장이라고 학생 편들어주는 거야? 아 슬퍼라.]
[거짓말.] 그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거대한 망치가 되어 방안의 유쾌하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싸늘하고 무겁게 짓눌렀다.
[이거 참, 점점 그리움이 짙어지는데, 이상하게, 항상 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너 뿐이었어, 그날도 그랬고.] 약간의 바람이 그녀의 백발을 흐트러놓았다.
신드라는 창턱에서 내려왔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채, 그녀는 몸을 한껏 앞으로 기울이여 팔로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눈을 흘겼다.
[예산과 인사에 관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고, 교관들의 2/3을 손바닥 뒤집듯이 해고를 한 것도 모자라서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개뼉다구 같은 뜨내기들로 그 자리를 채워 넣더니 이제는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사장이 학교에 오더군,]
[흐음.] 신드라는 콧소리를 내었다.
[최근엔, 내가 퇴직하기를 바라는 윗대가리들이 늘었어. 내려오는 지침도 전부 교사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방향이고, 여기가 뭐하는 곳이었는지 가장 잘 알 작자들이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어, 마치 한 사람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고 맘 편히 휘두르게 해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곧 망나니처럼 권력을 휘두른다는 거네?]
[실로.]
교장의 짧은 대답이었다. 이사장은 손바닥을 서로 맞붙인 체 손가락만 빠르게 맞부딪쳐 박수를 쳤다.
[이야 제드, 너 소설 쓰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혹시 교장을 그만두더라도 먹고살 걱정은 없겠는걸.]
[그거 좋지, 그럼 소설의 장르는 고발소설이려나.] 제드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신드라, 윗대가리가 했던 과오를 또 저지르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신드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제드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깊은 산속에서 간혹 들려오는 사냥감을 발견한 늑대가 희생물에게 공포를, 동료들에게 피의 축제를 알리는 음산한 울부짖음 같았다.
병풍 뒤에서 본의 아니게 세작질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얼어붙었다.
하지만 협박을 받는 대상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생글 웃으면서 조그마한 술잔을 돌렸다.
[있지 제드, 세상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자그마한 것 같아.] 신드라는 겁먹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으며 여유롭게 의견을 개진했다.
[과학은 이제 인류의 손을 벗어나서 스스로 발전하고, 마법은 그 한계를 나날이 새로 써서 신비로움을 더해가며, 주술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싸여 오직 선택 받은 몇 명만이 그 속내를 알아. 세상에는 신비가 너무 가득해.]
그녀가 한마디씩 더할 때마다, 등 뒤에서 검은 구채가 크기와 숫자를 더해가더니 어느새 아이 머리만한 공이 3개가 생겼다. 구체들은 위성처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불규칙하게 공전을 했다.
제드가 병목을 집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잔을 공중에서 천천히 돌리던 신드라가 빈 잔을 뒤집어 책상위에 놓았다.
[음?]
[아, 한번만 쉴게, 좀 피곤해서.]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작을 하는 동안, 그녀의 손가락이 뒤집힌 잔 윗부분을 무대삼아 무용을 펼쳤다.
[곰곰이 생각해봐, 이 모든 신비들을 격고, 누리고, 풀기 전에 죽는다면, 나라는 작은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 것 같아?]
[글쎄, 난 별로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늙으면 죽어야지. 안 그러면 볼꼴 못 볼꼴 다 본다.]
[이상하네, 너라면 나같이 느낄 꺼라 생각했는데. 우린 함께 많은 일을 격었잖아,] 신드라는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제드는 아무 말 없이 독주를 입에 털은 뒤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신드라는 팔만 들어서 잔을 채워주었다.
한명은 사색에 잠겼고, 남은 이는 반응을 기대했다.
[조금은 억울하겠지.] 제드의 대답이 신드라는 몸을 일으켜 새우고 얼굴에는 화색을 불어 넣어 줬다.
[하지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난 억울하지 않은 쪽을 택하겠어.]
[어째서?]
[신드라, 왜 우리만 예외여야 하지? 너의 말대로 우리는 많은 일들을 함께 격고 함께 느꼈어, 그게 좆 같든, 좋 든 말이야.]
[좆같은 일이 대다수였지.]
[죽는 건 매우 좆 같은 일이겠지, 분명히 그럴 거야.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생명들을 대가로 지불하고 억척같이 살아남았어. 당연히 때가되면 공평하게 그 업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해.] 그는 입술을 축였다.
[여전히 대쪽 같네, 아니면 내가 말재주가 없는 건가?]
[아마 둘 다 일걸.]
[음, 조금 다르게 말해 볼까. 제드 그럼 지금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시간이 멈추었다. 책상에 잔을 내려놓으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 매달렸고, 그녀의 구체들은 공전을 멈추었다.
[억울하지는 않겠지만, 그 긴 황천길을 혼자가기에는 조금 적적할거 같은데, 같이 갈 길동무라도 있으면 적적하지 않겠지 아마.] 만약, 누군가가 병풍 뒤에 바늘이라도 떨어트렸으면, 그 천둥 같은 소리에 숨어있던 두 학생은 까무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이는 조용히 케이틀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모두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졌을 때 열린 창문으로 산들바람 한 점이 들어왔다.
[번쩍이는 칼들을 거두도록 하여라, 밤이슬에 녹슬지 않도록] 말 꼬리에 울림이 오래가는 여성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잔나가 창턱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더위와 추위를 타지 않는지 햐얀 천으로된 옷으로 중요한 부위만을 가리고 있었고 긴 금발이 나풀거리고 있다.
[잔나양, 기왕이면 헛기침이라도 해서 기척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그쪽은 입구가 아닌 창문입니다.] 제드가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선 정중하게 그녀를 타일렀다.
[뭐 어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지 안 그래?] 너털웃음이 터졌다.
[무례하네요, 두 사람끼리 할 일이 있으니 잠시 나가주시죠.]
[으이그 신드라, 넌 진짜 여전하구나, 그렇게 신경질 적이니 천하의 제드도 혀를 내두루고 떠났지, 제드는 건강해 보이네.] 잔나는 허물없는 태도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좀 전에 첨예하게 대립을 하던 이사장과 교장은 그 대담함에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눈치를 살폈다.
[에고, 생각해보니 이번 몸은 그때와 하나도 안 닮았지, 나야 라이한.] 그녀가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구체가 굉음과 함께 나타났다.
[배신자!]
신드라는 이를 악문 목소리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워워, 진정하라고.] 또다시 잔나의 뒤쪽에서 구체가 나타났다.
자신의 공격이 연달아 수포로 돌아가자,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위로 구체들이 모여들었다.
[그만둬 신드라.] 제드가 팔을 뻗어 손목을 붙들었다.
[본격적으로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그녀는 뿌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고마워, 제드. 역시 신드라를 말리는 건 너 뿐이야.] 잔나는 바닥에 살며시 내려앉으면서 말했다.
[너 정말로 내가 아는 그 라이한 맞아?]
[참나, 속고만 살았나. 일단 앉자, 이야기가 길어 질것 같으니까.] 잔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리가 새롭게 배치되었다. 의자가 모자라 제드는 벽에 붙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그의 옆에는 신드라와 잔나가 마주보며 앉았다. 책상위에는 잔나가 가져온 표주박이 올려져있고 그녀가 이색적인 병을 기울여 손수 모두의 잔을 은으로 채워주었다.
[으흠, 마땅한 제의가 떠오르지 않는데?] 잔나는 잔을 들고 제드를 바라보았다.
[간만에 세 사람이 만났는데 추억에서 찾아봐.]
[아, 딱 좋은 게 떠올랐다. BLAZE를 위해서.] 생소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단지 낯설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독한 어색함이 세 사람을 에워 쌓았다.
[추억은 과거에.] 제드가 무미건조하게 대꾸했고, 신드라는 그저 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용케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네?] 이사장이 교사에게 쏘아 붙였다.
[야, 말도 말아. 처음에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손발이 저려오고 눈앞이 캄캄해 지더라. 여기에대해선 워낙 좋은 소문만 들어서 말이야.] 교사는 진실로 힘들었다는 듯이 혀를 쑥 내밀었다.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이건 언제 챙겼데?]
[퇴직금이야, 정들었거든.] 교장은 자신의 애장품인 잔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는 교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세상 참 좋아졌다 해도, 요즘 세상에 손때가 묻을수록 고풍스러워지는 물건은 찾기가 힘들어. 뭐든 금방 좋아하고 금방 버리는 게, 미덕이 됐으니까.]
그러자 신드라는 코웃음을 쳤다.
[꼭 너 같은데? 금방 실증내고 배려도 하지 않고 새로운 걸 찾아 떠나지.]
[아놔, 왜 사사건건 트집을 잡어, 맥이 끊기잖아.]
[왜 내가 너랑 하하호호 대화를 나눌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띠껍네?] 잔나의 눈에서 적의가 불타올랐다.
[혀가 왜 이리 길어?] 자신이 약 올리던 상대의 금발이 공중으로 천천히 올라가자 신드라의 뒤쪽에서도 검은 구체들이 하나 두 개씩 생겨났다.
케이틀린은 바늘구멍에서 눈을 때고 바이를 올려다보았다. 바이는 흥미진진한 전개에 몰입한 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쌈박질을 뜯어 말려야겠냐? 각자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제드가 가운데 앉은 이유다. 그의 중제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신드라, 난 말이야 내가 얻은 정보가 잘못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네 나라의 쥐새끼들은 제법 유능하지 않았나?] 신드라는 잔나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인거냐?] 잔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교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양손을 만세 부르듯이 들어 올렸다.
[진짜 하루 이틀일도 아니도 한두 번 정도는 내 예상에서 벗어나 주면 않되? 원래 권력맛을 한번 보면 대가리에 똥만 가득차게 되나? 그 쓰잘데기라고는 개똥보다 못한 걸 얻으려고 그만한 희생을 또 치루려고 한다는 게 말이되!]
[하하하하하하하하.] 가벼운 웃음소리가 별안간 터져 나왔다. 신드라는 허리를 굽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잔나가 화를 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해 웃게 하는 웃음이 아니라, 뼛속 깊이 소름이 돋는 마녀의 웃음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녀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하, 라이한, 넌 정말이지 발전이 없구나, 어떻게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없어. 쓰잘머리 없다고? 와 정말 끝내준다.] 신드라는 검지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뽐내듯 가슴을 내밀었다.
그 다음 벌어진 장면을 본 케이틀린을 비명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었다.
신드라의 손이 가슴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찾아 속을 휘저었다. 두레박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자, 그녀의 손은 피를 뒤집어썼고 시뻘건 혈액이 묻지 않은 군데군데에 흰 피부가 형형하게 빛을 내며 들어나 있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신드라가 자랑스럽게 내민 건 가지모양의 푸른 광석이었다. 살구씨 만한 광석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잔나가 신드라를 노려보았다.
[순수한 아이들, 세상을 아직 충분히 격지 못한 아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루고 만든 여신의 눈물, 잘 알잖아......., 왜냐면 너가 만들었으니까 라이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으면, 여기 앉아있는 모두가 그걸 만들 때 협력했던 걸로 아는데.] 제드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미쳤어, 너도 그렇고 여기, 이곳도 미쳤어. 그딴 걸 왜 더 만들려고 하는 거야, 게다가 너는, 그 과정을 보고서도!]
[무슨 섭섭한 소리야, 이걸 내가 왜 직접 만들어. 시키면 되지.]
[만들지 마!] 잔나가 거의 절규하듯 고함을 질렀다.
[간단하다니까, 아니 왜 이해를 못해. 아니면, 아는데 무시하는 거야?] 그녀가 망연자실해 있는 잔나의 앞에서 자신의 가슴계곡 사이에 광석을 올려놓았다. 여신의 눈물은 육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불멸과 힘!]
한손은 가슴에 다른 손으로는 검은 공을 쓰다듬으면서 신드라가 말했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귀를 귀울여 주고 내 명령이면 목숨까지라도 희생해. 얼마나 좋아.] 그녀는 황홀경에 빠졌는지 눈은 먼 곳을 응시하고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신드라, 그건 기만 당하는 거야. 그들은 널 봐주는 것이 아니라 얼굴 없는 것들을 보는 거야.] 잠자코 있던 제드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원인이 뭐든 그들이 나한테 복종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 속으로는 얼마든지 욕을 하라해, 정신승리마저 빼앗는다면 아, 약자들은 얼마나 괴롭겠어?] 그녀는 뒤로 돌아서 방을 나가려 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신드라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걸 쓸 때마다 무슨 느낌 들지 않아?] 잔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되돌려 보려했다.
신드라는 잠시 멈춰서 있다가 방에서 나갔다. 미닫이문이 닫히기 직전 작은 대답이 들어왔다.
[전혀.]
02.
시계를 거꾸로 걸어 놓아도 시간은 간다.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반장이 늘 하던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맥 빠진 인사를 했다.
점심시간이다. 급우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급식실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급식이 매번 맛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이 시간만 되면 사바나의 물소 때가 복도에 나타나곤 한다.
[얘네 땡땡이를 친 것 같은데. 우리끼리 먹으러 갈까?] 잔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기지게를 켰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때요, 지금가도 기다리는 건 똑같아요.] 오리아나의 제안을 듣고선 그는 교실 맨 뒤 비어있는 두 책상위에 길게 누었다. 잠시 굽은 등을 쭉 펴던 잔나는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오케이 그럼 나는 화장실 좀. 그런데 뭘 하길래, 1 교시에 나간 애들이 점심 먹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냐?]
[뭘 하던 여기에 앉아 있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할 것 같은데.] 케이틀린은 수학교재를 노려보았다.
[글쎄요.] 오리아나는 책상 밑에서 공책을 꺼내 펼치고선 손을 놀려서 그림을 그렸다. 대상은 옆자리에 앉은 케이틀린 이였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어 모델을 살피지도 않고 그림을 슥슥 그려나갔다.
케이틀린도 서랍에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2장 정도 읽고 몰입감에 반쯤 빠지자, 잔나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디밀었다.
[야 애들 왔다. 가자.] 나름의 세상에 빠져있던 두 아이들이 복도로 나왔다.
[요, 삽질 잘했냐? 오늘의 메뉴는?] 바이가 케이틀린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오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닭 강정이에요, 그런데 하루 종일 뭐했나요?]
[매번 나오는 그 빨간 고기가 아니네.] 바이는 대충 대답했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표정으로 징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지퍼를 잠그는 흉내를 내었다.
급식실은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정신이 없다.
학생회장 선거 때문에 푯말을 높게 치켜들고 그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학생선거원단이 원흉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직접 고안해낸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불러서 혼돈을 가중시켰다.
앞장서서 가던 바이가 개판 오 분 전인 그 광경을 보고 설득을 시작했다.
[돼지우리도 이것보단 조용하고 깨끗하겠다. 걍 매점 갈까?]
[닭 강정.] 징크스가 선거인단이 나누어준 찌라시로 종이비행기를 접으며 내뱉었다.
[젠장맞을. 너네는?]
[매점이나 여기나 도진 객진이지, 그냥 먹어.] 나머지 두 사람도 바이의 험악한 시선에 맞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위장 속에 들이 붓고 운동장에서 놀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남자애들을 밀치면서 바이는 길을 만들었다. 입구만 잔뜩 북적였지 배식하는 부근은 한산했다.
[지겨워 죽겠네.] 돌파임무를 훌륭히 소화해낸 바이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데 빨간 고기의 정채가 뭘까?] 퇴식구에 잔반을 쏟아버리는 장면을 바라보던 케이틀린이 갑작스럽게 의문을 표시했다.
[뭐긴 빨간고기지, 난 그것보다 도대체 저놈의 감자, 두부, 콩나물, 무, 버섯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데나 막 들어가 아주 그냥.]
[인정한다. 저번 주 인가? 무밥은 충격과 공포였지. 영양사 자격증을 가라로 땄어.] 바이의 투덜거림에 잔나가 맞장구 쳤다.
[있지, 저번에 재미있는 이야기 들었다. 학교 지하에서 버섯이랑 무를 기르고 옥상에는 양식장이 있어서 그렇게 생선이 많이 나오는 거래.]
[오, 양식장은 개소리 같은데, 나머지는 그럴싸한데.] 학생들은 급식을 대차게 비판했다. 그때까지 대화에 끼지 않고 있던 오리아나가 조그맣게 웃었다.
[훗, 고작 미각 따위에 흔들리시다니, 다들 아직 수행이 모자라시네요.] 그녀는 턱을 들어 올리고 양손을 허리에 올린 후 가슴을 활짝 폈다. 자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나왔지만, 주변의 친구들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 음, 있지 잔나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케이틀린은 한껏 뽐내는 오리아나를 보며 망설였다.
[그, 웃으면 된다고 생각 해, 아마.]
[어, 안 웃겼나요.] 친구들이 자신이 생각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오리아나는 허둥거렸다.
바이는 시선만으로 오리아나를 모욕했고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리아나 옆에서 가만히 구경을 하던 징크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바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즈리얼 아냐?] 모두의 눈동자가 징크스의 손가락 끝이 머무는 곳을 쫓았다.
반에서 항상 조용한 그는 켜켜이 쌓인 식판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었다. 창백해진 양손이 무게가 꽤나 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들, 사과 심지, 식빵귀퉁이, 살점이 조금 붙어 있는 닭 뼈 같은 것들이 잔뜩 있어서 자칫 잘못해 넘어지기라도 하면 온 복도가 엉망진창이 될게 분명해 보인다.
그는 운반에 집중을 해서인지 아니면, 멀찍이서 바이의 큰 키를 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껴서 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늦게 급식실에 들어온 무리를 지나쳤다.
[이즈리얼이 맞네요.]
[나도 눈깔은 제대로 박혀 있어, 아니까 닥쳐.] 바이는 필요 이상으로 이를 세웠다.
[식판은, 아마 저희가 들어올 때 운동장으로 뛰쳐나간 애들 꺼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오리아나는 자기 할 말을 끝까지 했다.
[하여튼 그 새끼들은 뇌까지 근육이라니까.] 잔나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탐탁지 않은 장면을 목격한 뒤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대화를 하는데 입을 사용하지 않았다. 배식을 받고, 먹고, 잔반을 버릴 때에도, 장난을 치거나 수다를 떨지 못했다.
점심시간은 그럭저럭 긴 편이라, 이들처럼 늦게 식사를 하더라도 시간이 꽤나 남는다. 보통은 산책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지만, 오늘은 떨떠름한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흡연자들은 식후땡을 하기로 결심했다.
학교 귀퉁이엔 와지점이 있다. 그곳에는 개나리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고 그 덤불 뒤에는 100살은 먹은듯한 거대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나무의 그늘 아래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해서 커다란 공터가 생겼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가 애연가들의 아지트이다.
먼저 흡연자들이 덤불을 해치고 공터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케이틀린과 오리아나가 꼬리가 깨끗한지 살피고선 들어갔다.
[뭘 봐.] 그들을 반겨준 것은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징크스와 바이의 앞에는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애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고, 그 뒤쪽에 앉기에 적당한 널찍한 바위에는 거구의 사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다.
[뭘 봐. 이 썅년들아, 뒈지기 싫음 꺼져.] 근수가 꽤나 나가 보이는 남자애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동작이나 태도에서 적개심이 뚝뚝 묻어 나온다.
[귀에 좆 대가리를 박았나, 꺼지라고.] 맨 앞에 있던 두 사람이 소 닭 보듯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멸치 같은 아이가 만만해 보이는 징크스의 오른쪽 어깨를 밀쳤다.
징크스는 순순히 뒤로 밀리면서 왼발을 치켜 올려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커지더니 외마디의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뒤편에 서있던 케이틀린과 오리아나의 시야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얼굴을 낙엽이 잔뜩 쌓인 땅에 파묻고선 굼벵이같이 웅크리고 있는 학생이 나타났다.
동료가 쓰러지자 바위에 앉아 있던 거구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이내 바이가 던진 짱돌에 얼굴을 맞았고 그가 반사적으로 손으로 상처를 덮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진 못했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맹수가 희생물을 덮쳤다. 바이는 발을 들어 올려서 사냥감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그는 개구리처럼 발랑 뒤로 넘어졌다. 상처를 부여잡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팔꿈치를 관절 반대방향에서 걷어찼다.
약탈이 시작됐다. 바이는 순식간에 배 위에 올라타서 손가락의 중간 마디만 구부려 개발처럼 만든 뒤 그의 목젖, 갈비뼈, 인중, 같은 명치를 난타했다.
친구를 돕기 위해 멸치가 일어났지만 징크스가 처리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발로 그의 턱을 걷어 올렸고 하늘 위로 이가 몇 조각이 날아갔다.
[기절한 거야.] 징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희생자에게 다가가서 호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습격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끝났다. 약탈자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서 손을 풀었다. 사냥감의 얼굴은 피떡이 되었고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피와 함께 흘러나왔다.
[꺼지는 건 너네야.] 전리품을 마저 챙기기 위해 징크스가 다가왔다. 그녀는 공평하게 뚱보의 주머니에서 담배, 라이터, 지갑을 챙겼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그녀가 손가락을 밟았고, 뚱보는 막을 힘도 없는지 팔을 허공에 올려 허우적거렸다.
바이는 멸치의 머리채를 잡고 짐을 끌듯 그를 끌고 와선 덩치위에 패대기쳤다. 잠시 뒤 두 사람은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저주받은 곳에서 벗어났다.
[잇힝, 제법 짭짤한데.] 징크스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흔들자 동전끼리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바이는 머리를 한번 긁고선 바위에 앉았다. 성공한 반역자가 왕좌에 앉듯이 가슴을 피고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야 괜찮아? 애들 갔어, 일어나 봐봐.] 어느새 잔나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친구의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냅 둬.] 징크스가 그의 귀를 잡아 당겨 일으켜 세웠다.
[아야야야야, 왜?] 그는 몸을 비틀어서 징크스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잽싸게 쪼그리고 앉았다.
[이봐 친구, 조금 있으면 수업시작인데, 그런 꼬라지로는 들어갈 수 없잖아. 일어나서 좀 씻고. 왘!] 그때, 잠자코 있던 그가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고 그 바람에 잔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옷에는 진흙이나 썩다 남은 낙엽이 붙어 있고, 얼굴은 얻어맞았는지 한쪽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찢어진 입술 끄트머리에 목까지 흘러내린 피는 추운 날씨 때문에 어느새 굳어 있었다.
이즈리얼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전속력으로 케이틀린 오리아나를 지나 도망쳤다.
[넌 어떻게 그렇게 눈치가 소치냐? 딱 봐도 사내새끼인데 고추달린 놈이 남자의 마음에 대해 밴댕이소갈딱지 만큼도 모르냐?] 바이가 공중으로 연기를 뱉었다.
[사내새끼가, 삥 뜯기는 것도 쪽팔리는데, 계집애들이 싸워서 구해주면 존나게 자랑스러워 하겠다.] 잔나는 한동안 짝지가 뛰쳐나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는 징크스가 건네주는 담배를 받았다.
[니가 어딜 봐서 여자냐.] 잔나는 불을 붙이며 궁시렁 거렸다.
그들은 충분히 어슬렁거려 냄새를 뺀 뒤 수업시작 시간에 임박해서야 교실 근처에 왔다.
[잠깐,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좆같은 기분이 드는데?] 바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잉, 혹시 이번 시간이 저 멍청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는데다가 뇌까지 근육인 주제에 물리를 가르치는 구제할 길 없는 삼룡이의 수업이야?]
[어, 불행히도.]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바이는 장탄식을 내 뱉었다.
[염병, 난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해도 세상이 협조를 하지 않네, 동방에 짱 박혀 있는다.] 바이와 문도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가 손수 장만했던 함정은 하필이면 교직원회의 때 작동하는 바람에 기대 이상으로 문도는 창피를 당했다. 전술은 기대이상으로 성공했지만 전략에는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했다.
당연히 문도는 앙심을 품었지만, 물증이 없고 심증만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볼 때 의심스럽다 하면 무조건 못살게 괴롭히곤 했고 그 희생자 목록 속엔 바이와 징크스 잔나가 포함이 됐다.
[아직 1시인데?]
[지금 가나 이따 가나 도진 객진이지.] 바이와 징크스는 가방을 잽싸게 챙겼다.
[어휴, 답도 없다. 왜사냐?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그게 그거지.]
[뭐래 병신아, 그럼 제군들 아디오스.] 바이는 중지를 눈썹에 붙여 경례를 하고 교실에서 탈출 하려 했다. 그 순간 안타깝게도 문도가 바로 그 순간 교실 뒷문으로 들어와 버렸다.
[젠장!]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자리에 도로 앉았다.
[숙제 검사한다.] 문도는 교실을 종단한 뒤 교탁을 매로 내리치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옆자리가 비어있는 잔나의 공책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잔나는 수업에 성실하거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천재가 아니었지만, 수완이 있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귄 친구들이 많은 그는 숙제를 베껴서 해결했다. 그는 물리난제를 보듯 공책을 노려보는 문도에게서 시선을 돌린 체 딴청을 피웠다.
붉은 매가 학생의 볼을 찔렀다. 갑작스런 접촉에 화가 난 그가 고개를 돌려 무례한 선생을 노려보았지만, 문도는 소소한 반항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비웃음을 던졌다. 꼬투리 잡을 만한일이 없기에 그런 무례한 일을 저질러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선물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가 검사를 마치고 다음 희생양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나자 잔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들어올렸다.
숙제 검사는 어떤 면에서 공평했다. 교실은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인간이 아닌 반인반수,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 사람의 외형을 흉내낸 동물들, 오리아나처럼 종 자체가 다른 아인종, 그냥 오래 살아 신통력을 얻은 영물들처럼 각양각색의 학생들이 있었다.
확실히 문도는 모든 학생의 숙제를 검사하긴 했지만, 숙제를 하지 않은 모든 급우가 앞으로 불려나가지는 않았다.
붉은 매로 머리를 가볍게 때리는 것은 앞으로 나가있으라는 그만의 신호였다. 덫에 걸려 앞으로 끌려 나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인간이었다.
[에라이 시팔, 체육복 가저올걸.] 바이가 엉덩이를 주무르며 뇌까렸다.
[난 숙제도 했다고.]
[지랄 마, 어차피 베낀 거잖아.] 잔나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엎어.]
그의 한마디에 교실 앞으로 나간 아이들의 어두운 표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치마를 입은 여자들은 칠판의 난간을 붙잡았고 남자들은 바닥에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바이는 치마를 잘 입지 않아 남자애들 줄 맨 끝에 엎드렸다.
야만의 시간이 도래했다. 빨간 테이프를 칭칭 동여맨 각목이 살점을 내려친다. 소녀들은 한 대만 맞아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 경우가 있는데, 문도는 그럴 땐 넘어간 다음 끝에서 다시 돌아와 처벌을 다시 진행했다.
처형인의 곤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고통을 참기위해 이를 부득이고,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오고, 아픔으로 가득한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운 좋게 재앙을 피한 나머지 아이들은 공포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인간인 경우에 한해서였다. 절대로 맞을 일이 없는 개체들은 다른 일을 하거나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지켜보듯 처벌을 구경했다.
매타작이 끝나자 남자줄 맨 앞에 있던 잔나가 어금니를 꽉 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잉.] 정말 내키지 않는 억양이지만, 괜히 인사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고 또 맞는 것 보단 낫다.
이것을 신호로 피해자들은 어기적거리면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 나왔다. 그새 엉덩이에 멍이 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리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분필을 꺼내 칠판을 글자로 가득 채웠다. 이것이 그의 악명을 올리는데 큰 공헌을 한 수업방식이다.
[거기 너. 풀어.] 문도가 붉은 매를 찌르듯 뻗어 징크스를 가리켰다. 그녀는 혀를 차곤 말없이 책상위에 올라갔다.
지옥의 빙고가 시작됐다.
그는 한 명 한 명 지목해 문제를 풀게 했고, 풀면 그대로 앉아 있고, 그 반대의 경우엔 징크스처럼 책상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있게 했다. 그렇게 빙고가 시작 되 하나가 완성되면 책상위에 올라가 있는 학생 중 한명이 무작위로 허벅지를 맞았다. 말이 무작위지 사실은 물리선생이 싫어하는 학생을 정당하게 채벌하기 만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규칙이다.
이건 여러모로 곤욕을 치른다. 재수가 없으면 꼼짝없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시큰거리는 무릎, 저려오는 다리, 언제 허벅지로 날아들지 모르는 매, 같은 것에 고통받아야한다.
[너 왜 움직여!] 문도가 고함을 지르며 바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않 움직,,,,,아 씨......] 바이의 말이 입 밖에서 문장을 이루기도 전에 붉은 매가 그녀의 얼굴을 지나쳐 허벅지를 3연속으로 강타했다.
피해자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 5번 푼다.]
[몰라. 크흡!] 다시 한 번 곤봉이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바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문도를 노려보았다. 신음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은 우연인지 때마침 울린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려졌다.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감사합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인사를 받은 문도는 교실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기 무섭게 볼멘소리와 쌍욕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왔다.
[닝기미, 감사는 얼어 죽을 놈의 감사, 길가다 자빠져 뒤져라.] 바이가 의자를 있는 힘껏 걷어 찾다. 징크스는 창가에 등을 기대고 책상위에 발을 쭉 뻗고 있었다. 오리아나는 몸을 돌려 그녀의 뭉친 다리를 풀어주고 있다.
[귀신은 뭐 하냐, 저거 안 잡아가고?] 잔나가 고개를 숙여 바이의 책상 밑에서 과자를 꺼냈다.
[뭔 수작이냐? 니꺼 처먹어.]
[아까 다 먹음.] 그는 과자봉지를 책상위에 펼쳤다. 그들은 과자 한입에 쌍욕 한바가지를 문도에게 퍼부으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시간,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은 동아리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자밥, 감자튀김, 으껜 감자, 감자 국, 감자조림 메뉴가 온통 감자 투성이다.
[아니 아직 감자 철이 아닌데 도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거지?]
[모르겠네요. 아마 사고가 난 게 아닐까요. 그래서 대충 있는 걸로만 어떻게 만들어 보려고 하니 이렇게 된 것 같네요.] 오리아나가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읭? 아무도 없네.]
[탕비실엔요?]
[없어, 어디 나갔나 봐. 오리아나 뭐 먹을 꺼야?]
[케이틀린이 먹는 거랑 다른 걸로 주세요.]
동아리방에 딸려있는 작은 방엔 가스레인지와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동아리 부원들은 돈을 모아서 군것질거리나 오늘처럼 급식이 처참한날에 대비해 비상식량을 쟁여 놓았다. 컵라면의 포장을 뜯어서 물을 붓고 기다리자, 벽에 걸어 놓은 긴 족자가 들리면서 나머지 동아리 원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 내꺼야?] 잔나가 컵라면 뚜껑을 건드렸다.
[찻장에 있어요.] 끼니의 수호자는 구렁이 담 넘듯 미끄러져 들어오는 침략자의 손을 젓가락으로 응징했다.
[아여튼 저 세끼는 염치가 없어, 낫 닝겐이다.]
[와, 컵라면 하나에 인간성을 모욕하네.] 나중에 합류한 아이들은 티격태격하며 각자의 몫을 준비해왔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 뒷정리를 미루고 나른한 포만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 맞다, 바이 뭣 좀 물어봐도 돼?] 케이틀린의 머리를 퍼뜩 치켜들었다.
[어 지껄여봐.]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체 바이가 대답했다.
[저기에 있는 거 전부 팔 거야?]
[가능하다면, 와?]
[아니 몇 개정도는 우리가 챙겨도 되지 않을까 해서, 기념으로 말이야.]
[안 될 소리에요.] 오리아나가 치고 들어왔다.
[하하하, 챙겨서 어따 써먹으려고, 아서라.] 바이는 밝은 목소리로 케이틀린의 소박한 소망을 거절했다.
[왜 장식용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거창한 거 말고 활이나, 도끼, 방패 같은 건 벽에 걸어 놓으면 고풍스럽고 멋있어.] 거절에 부딪쳤지만, 그녀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데. 바이, 생각해봐, 저런 먼지 낀 구닥다리 무기들은 누가 사려고 하지 않을 껄. 차라리 장식을 해놓으면 더 간지 날듯.]
[허나 거절한다, 이 바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자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에게 'No' 라고 거절하는 것!]
[뭐냐,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나는 인간을 그만두겠다. 잔나, 나는 인간을 초월 할 것이다!]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대화를 한 후 잔나와 바이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바이, 정말로 저것들을 팔 생각인가요?]
[걱정 마 오리아나 N빵 하기로 했어.] 잔나가 참견했다.
[잔나 지금 돈이 문제 인가요?] 오리아나가 족자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병기에요. 애들의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로,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도구에요.]
[워워, 진정해. 우리가 누굴 조지려는 건 아니잖아.]
[조지고 싶은 놈은 많지만 말야.] 징크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것 봐요, 우리 손에서 있으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야 내가 똥오줌도 못 가릴 것 같아? 그저 팔아 치우는 거야. 곰곰이 생각해봐. 우리가 저걸 내버려 두고 이 엿 같은 학교를 졸업하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찾아낼 꺼야. 우리 같은 돌대가리도 찾았는데 안 그래?] 오리아나는 묵묵히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학교에서 저런 끔찍한 것들을 치워버리면, 그 봉사와 희생정신에 대한 대가로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금전적 이익은 최소한의 예의로 치면 안 될까?]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꽃봉오리를 모방했다.
[꽤 짭짤할 꺼야.] 징크스가 허공에서 양팔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결국 돈이 목적이네요.]
[뭐 어때, 그렇다고 갔다 버릴 수도 쓸 수도 없잖아, 일이 복잡해져.] 의견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최초로 논쟁의 불씨를 당긴 당사자가 절충안을 내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바이 왜 못써? 어차피 암시장에 판다고 했지? 그럼 조금 쓰더라도 상관없잖아. 역추적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저걸 어따 써.] 잔나가 대꾸했다.
[하긴, 여긴 사냥감도 없으니까. 할아버지한테나 하나 보낼까. 포수이시거든.] 케이틀린의 별 생각 없는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변화를 불러왔다. 바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쓸데가 없지, 정말로 말이야.]
[야, 바이 너 이사이에 고춧가루 꼈다.] 그녀는 흉악한 미소를 띠운 체 혀로 고춧가루를 뺐다.
03.
그날도 야자를 땡땡이 치고 아이들은 동아리 방에서 시간을 때웠다. 아직 겨울이 완전히 가지 않았는지, 대기에는 냉기의 잔재가 남아서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체 곰처럼 어슬렁이며 걷던 바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야, 저 좆같은 뒤통수는 문도 아니냐?]
[이런, 너 밤눈 좋다. 저거 오늘 야자 담당일 텐데 여기까지 웬일이지.]
[교사가 땡땡이 질이야.] 바이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그녀의 불평이 그를 내쫓아, 물리선생은 동아리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자취를 감추었다.
[오! 신이시여, 왜 저딴 세끼를 아직 거두어가지 않는 겁니까. 천국에는 집 지킬 강아지들이 너무 많은 건가요? 이제는 저희의 유일한 안식처인 흡연장 까지 저놈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바이는 가끔 엄청나게 유창하게 말하는 거 아세요?]
[평소에도 말 잘하거든.]
[개뿔이, 근데 딴 데로 가자, 괜히 불똥 튀길라.] 잔나는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야, 기다려. 그냥 지나가는 거 일수도 있어.] 그녀는 모퉁이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햐 씨발, 간 떨어 질 뻔 했네. 저 세끼는 왜 저기서 튀어나오냐?]
[몰라 시발, 그나저나 이 씨발 놈아, 아까 뭐하려 했냐?] 모퉁이 너머에서 날아온 가시 돋친 말들이 그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잔나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은 징크스가 조심스럽게 벽에 몸을 붙이고선 고개를 살며시 벽 너머로 내밀었다.
[대답 안 해?] 둔탁한 파열음이 들린다. 정말 미약한, 고통을 안간힘을 써서 참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게 작은 소리였음에도 누구하나 놓치지 않았다.
[왜 이야기, 하는, 중이라고, 말을, 못해?] 한 대, 두 대, 세 대 그리고 네 대 연이어서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소리가 들린다.
[야, 우린 친구 아니냐? 응? 긴장 풀어 이 세끼야.]
[악, 아, 아파.]
[친구가 어깨 풀어주는데 이거 서운하네.]
누군가가 삥을 뜯기고 있었다.
[어우야, 저건 좀 아프겠다.] 먼발치에서 탐색을 벌이던 두 여성은 어느새 담벼락에 등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잔나만이 얼굴을 반쯤 벽에 숨기고 사건의 현장을 관찰하는 중이다.
모든 일이 현재 진행형이다. 자칼처럼 신경을 긁는 비웃음 소리, 빈번하게 들려오는 주먹질과 발길질의 마찰음 같은 폭력의 그림자가 그들을 에워쌓았다.
[다 피면 바로 돌아가요.] 오리아나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굳이 친절하게 지껄이지 않아도 알아.] 바이가 신경질을 부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케이틀린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에요.] 중성적인 기계음이 케이틀린의 양심을 얼렸다.
[호구세끼 돕는 일도 하루 이틀이야.] 징크스가 두 손을 털고 벽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쯧, 세상은 호구들한테 너무 각박해.] 잔나도 역시 혀를 차면서 관찰을 중지했다.
[넌 안 피냐?]
[됐어, 동방에서 창문 열고 필래.] 징크스와 잔나가 현장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놀렸다. 그 뒤를 냉정하지만, 현명한 오리아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쫓았다.
바이는 아쉬움이 남았는지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안 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케이틀린이 바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딜? 동방 아님 저기?] 그녀는 짜증을 내면서 엄지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하여튼 시발, 삼룡이 세끼랑 그냥 상종을 말아야해.] 바이가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모두의 발목에 양심의 족쇄가 채워졌지만,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무겁진 않았다.
[음? 근데 문도가 우리 앞에 있지 않았냐?] 앞장서 가던 잔나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생각해 냈다는 듯이 모두에게 문장을 던졌다. 우연히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그 문장은 모두의 마음에 뜻밖의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면, 와 그 개새끼는 저걸 보고 그냥 지나친 거야? 와 시발, 이런 쓰레기를 보았나?]
[설마요, 아무리 문도라고해도 그렇게까지 비겁하겠어요. 어쩌면 그가 지나가고 나서부터 시작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아까 라고 했어.] 징크스가 오리아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들 주위의 공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폭력의 속삭임이 서서히 더 크게 울부짖었고, 두려움, 무력, 죄책감, 자괴심으로 뭉친 종기가 터져 고름이 그들 각자를 뒤덮었다.
바이는 눈에 불을 키고 발걸음을 돌렸다.
[뭘 하려고요?]
[나와바리 관리하러 간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흙을 한줌 쥐고선,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며, 상관하지도 않는 자세로 유유자적 희미한 가로등빛을 받고 있는 정자로 다가갔다.
[저건 뭐하는 미친년이냐?]
[야, 꺼져.] 어둠에 묻힌 얼굴 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막으려 했다.
[어, 이런 밤일 뛰는 중이였네, 방해해서 미안한데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냐?] 그녀는 무기를 쥔 손 반대에 미리 꺼내놓은 담배를 흔들었다.
[이런 미친년이 쳐 돌았나?]
[야! 잠깐만, 그 썅년 아니냐?] 자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악의 소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번에 바이에게 신명나게 얻어맞은 두 불량배 중 뚱뚱한 쪽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너 잘 걸렸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워워워, 진정하라고 친구, 그때 일은 미안했어, 지금은 그냥 불만 빌려 주면 조용히 사라질테니까, 얌전히 누워 있어라 십세끼야.] 그녀는 손을 휘둘러 그의 큼직한 얼굴에 흙을 뿌리고는 그가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동안 발로 가슴팍을 차서 넘어트렸다.
[악 내 눈, 이 비열한 년......]
[뭐래 삥이나 쳐 뜯는 놈이, 아닥 해.] 그녀는 그의 턱을 걷어찼고 공중으로 이빨이 몇 개 날아갔다. 하지만 징크스처럼 기술이 깔끔하지 못했는지 돼지 멱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 썅년이, 네년의 모가지를 따주마.] 그가 턱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자 동료는 분노했다. 같은 수작에 두 번이나 당한 게 분하기도 했을 것이다. 찰칼 금속이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이는 뒤로 돌아 전속력으로 도망을 쳤고 다른 한명이 어둠을 단검으로 찢으며 튀어 나왔다.
[야이 미친놈아, 그거 도로 집어넣어!]
[네년의 허벌보지를 쑤시기 전에는 그리 못하겠다.] 남자는 칼을 치켜들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바이가 친구들이 있는 모퉁이를 돌자 추격자도 의심 없이 모퉁이 너머로 들어왔고, 도로 튕겨져 나갔다.
잔나가 모퉁이 구석에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뛰어올라 어깨로 그를 있는 힘껏 넘어트렸기 때문이다. 위험한 녀석이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 채고 일어나려 하자 오리아나와 징크스가 뛰쳐나가 그의 칼을 빼앗았다.
[잔나, 피!]
[이런 뜨끔 하더라.] 잔나의 어개죽지가 위에서 아래로 자상을 입어 벌어진 틈 사이로 피가 흘러 나왔다.
[어떡해? 상처가!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구급상자 가져 올게.] 케이틀린이 정신없이 혼잣말을 하다 벌떡 일어서 동아리 방으로 가려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잔나가 붙잡았다.
[가지 마, 너만 있으면 되.]
[어? 하지만, 피, 피가.]
[아직도 모르겠어, 나에겐 너만.]
[염병, 이 상황에 드립이나 치는 거 보니 멀쩡하네.] 바이가 잔나의 뒤통수를 걷어붙이고는 고개를 숙여서 상처를 살폈다.
[야, 나 다친 사람이야. 좀 살살 다뤄.]
[그렇게 깊진 않아, 병원 갈래?]
[필요 없어, 빨간약 바르면 나아. 그리고 일 괜히 커진다.] 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담배 곽을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징크스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리아나에게 눌려 반항하지 못하는 포로를 놀리고 있다.
[저번에 그렇게 맞고 정신 못 차리네. 남은 불알 한쪽마저 빠개줄까?]
[개 같은 쌍년아, 너네가 이렇게 하고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줄 알아! 내가 누군지 몰라?]
[알지, 저번에 우리한테 존나 털린 놈들 아냐.] 바이가 그의 손을 짓이겼다.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켜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학생회 놈들이랑 좀 어울리고, 일진 놈들이랑 어울리는 거 같던데?]
[미친년들, 너넨 아주 좆 된거야, 밤길 조심해라. 내가 아는 형님들한테 말하면, 너네 같은 년들은 평생 창녀촌에서 뒹구는 건 일도 아니야. 너넨 좆 됐어.]
[등신이, 니 놈 칼에 저 세끼 등 찢어졌어.]
[어쩌라고 시비는 너네가 먼저 걸었어.] 그의 형편없는 대답에 바이가 코웃음을 쳤다.
[난 너네 같은 애들이 부럽다. 아는 형님? 하하하하하, 너랑 어울리는 거 보면 같은 수준인데, 고딴 저급한 놈들이 참 잘도 도와주것다. 한 번, 학교 갈 거 같으니 복수 좀 해주십사 하고 빌어봐라.] 징크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입으로야 얼마든지 해주겠다며 온갖 약속을 다 하면서 경찰 조사 받으면서 자기 이름 불지 말라 은근하게 협박 할 껄? 학교에서 뺑이 치고 막상 나와 보면 연락이나 되려나?] 그는 바이를 노려보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야, 병신 짓 그만하고 저거랑 집에 가서 딸이나 치고 자라, 그리고 너 상납금 받지? 그거에서 50%떼서 가져와. 저 세끼 병원비에 쓸 테니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가져오면 되. 됐어, 오리아나 놓아줘.] 그때가지 양 무릎으로 그의 팔을 누르고 있던 오리아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깽 값치곤 싼 거야.]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에서 흙을 빼려 안간힘을 쓰던 다른 동료를 부축하며 멀어져 갔고 징크스는 그들을 놀렸다.
[담배를 끊던가 해야지, 이렇게 한 대비 피기 힘들어서 쓰겠어?]
[지랄, 니가 담배를 끊으면 내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본다.]
[미친 세끼. 어깨는?]
[출혈이 멈춘 거 보니까 그렇게 심각한건 아냐, 그래도 깽 값은 좀 받자.] 아이들은 정자로 걸어가며 담소를 나누었다.
자그마한 정자 아래에 피해자 둘, 목격자 넷, 그리고 아이들 다섯 명이 모였다. 그 한가운데에는 손으로 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올린 체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최초의 피해자가 있다.
[염병, 꼭 쓰레기들이 누가 착하다고 칭찬할까봐 엿 같은 짓만 골라 해요.] 바이가 머리꼭지에 불이라도 붙었는지 사납게 털었다.
[기절한 거 아니에요?]
[아냐, 기절하면 힘이 빠져서 옆으로 누웠겠지, 그나저나 너 은근히 눈치 빠르더라. 거기에서 징스랑 같이 튀어나갈 생각을 다 했어.]
[돼지촌 출신이면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죠.] 오리아나의 말을 듣고 케이틀린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겁이 좀 많아서.]
[됐어,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은 게 어디야. 신경 쓰지 마.] 징크스는 바닥에 아빠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잔나가 허리를 숙여 불을 붙여주려 했지만, 라이터를 놓치고 말았다. 그걸 바이가 주워대신 점화했다. 오리아나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빠져 나갔다.
[야 어디가?] 입 꼬리에 꽁초를 붙여서 잔나의 발음이 뭉개졌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대신한 오리아나가 돌아올 때는 비를 맞고 다시 마르기를 반복해 남루해진 커다란 종이 상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그를 덮었다.
[추워보여서요.] 그녀가 손바닥을 털자 얇은 금속판이 경쾌하게 부딪쳤다.
한바탕 날뛰고 흡연을 하고난 뒤라, 한층 더 안정되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진 바이였지만, 표정은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단 1g도 이해되지 않아 보였다. 의뭉스런 시선을 느꼈는지 오리아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렇게 상자를 덮어주거나 비닐 봉투를 씌워주면 훨씬 덜 추워요, 신문지를 우그러트려서 넣어준다면 더 따뜻하겠지만,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려서 찾을 수가 없네요. 흠, 바이는 잘 알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오리아나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의 이마에는 두 개의 큰 주름이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손으로 가위모양을 만들어서 잔나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는 말없이 한 까치를 끼워주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데,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잔나가 상자를 힐끔 내려 보았다.
[그렇다고 옷을 벗어주긴 좀 그렇지 않나요.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나요?]
잔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더니 상자를 치우고 아직도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그의 옆에 가서 같은 자세로 웅크렸다.
[저기 잔나, 뭐하는 거야?]
[펭귄이 이렇게 서로에게 밀착해서 체온을 나눈데. 책에서 읽었어. 자 너희들도 어서.] 보다 못한 징크스가 잔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참나, 난 지금까지 내가 개새끼인줄 알았는데, 여기 참개새끼들이 많네.] 그녀는 바닥에서 지갑을 주어 바이에게 던져 건네주었다. 바이는 날아오는 가죽나방을 낚아챈 후 걸레 짜듯 비틀어 보았다.
[오, 평범한 돌대가리들이 아니었네, 이 비싼 지갑을 두고 현찰만 들고 튀려한 건가?]
[현찰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나 보네.]
[비싼 거야?]
[꽤나.]
[우와 부자네.] 케이틀린이 순수하게 감탄하자 바이가 비웃었다.
[망한 거지, 부자에 호구면, 어이구 맙소사 여기 걸어다니는 ATM이 있네.] 그녀는 허리를 굽혀서 지갑을 주인의 마의 주머니에 집어 넣어주고 손을 털었다.
[얼어 뒤지겠다. 가자.]
[이대로 놔두게?]
[냅둬, 추우면 지가 알아서 기어들어 가겠지, 해줄 만큼은 해줬어.]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체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저기 바이, 있잖아.] 케이틀린의 미약한 목소리가 모두를 잡았다.
[그게, 얘 부자 맞지? 그러면 우리 동아리에 넣는 게 어떨까?]
[뭣 하러? 이 세끼 터는 놈들이랑 또 엮기게?]
[그게 아니라, 우린 다 빈털터리에 가난뱅이잖아, 그러면 동아리에 한명정도는 지갑이 빠방한 애가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 아, 뜯어 먹자는 게 아니라, 음 그러니까.]
[빌리자고?] 꼬마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맞아.]
[야, 그거 나랑 바이가 짝패 이루어서 삥 뜯을 때 치던 대사인데?] 징크스의 사악한 미소에 오리아나, 케이틀린, 잔나가 바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옛날이야기야, 이제는 그딴 코흘리개들 돈 안 뺏어.]
[혐의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바이가 오리아나의 옆구리를 꼬집으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손해 볼 건 없잖아, 동아리 부원 하나 늘면 예산도, 코딱지 만해도 들어올 테고.]
[쳇. 분위기 뭐 같네, 눼눼 고작 동아리장이 위대하신 동아리 부원들의 만장일치에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그녀는 연기하는 배우처럼 두 팔을 벌려서 공중에서 휘젓고는 돌아가 그의 앞에 섰다.
[야, 다 들었지. 우리 존귀하신 동아리 원들이 제발 와주십사 하고 있다. 에잉,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계 머리 노란색이던데?]
[아가리또.] 그녀는 괜히 잔나에게 화를 냈다.
[쫄보 세캬. 서로 윈-윈 하자, 오지랖 부린 거랑 동아리에 들어오는 거 퉁치자, 활동을 하든 말든 그건 니 꼴리는 데로 해.] 동아리 장은 상대방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어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음에도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설득을 했다.
[주둥이 좀 놀려봐, 뻘쭘 하잖아.] 순간 가로등의 옅은 빛 사이로 그녀의 평소 찌푸린 표정과 언제든지 화를 낼 준비가 되어있던 눈썹이 금방이라도 뺨을 타고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비애가 서린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오 썅, 실어증이라도 걸렸냐, 몰라 시발, 난 할 거 다했어. 야 니네가 싸지른 똥이니까 구워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해.] 일순간 이였다. 그녀는 곧바로 성을 벌컥 내고는 뒤돌아섰다.
[어디가?]
[스트래스 풀러.] 바이는 정자뒤편의 어둠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그 뒤를 징크스와 잔나가 쫓았다.
남겨진 두 사람은 그에게 다가갔다.
[너도 참, 그렇다. 깡패한테 후드려 맞다가 더 쎈 깡패에게 도움을 받고, 상자에 갇힌 다음에, 동아리 강제 가입이나 당하고.] 케이틀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사이 오리아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단지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뿐이었는데도 그는 어느새 깍지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즈리얼!] 포수의 손녀는 핏줄에 어울리지 않게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왼쪽 눈썹아래 넓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었다. 넘쳐흐른 피는 그의 얼굴 절반을 덮었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검붉은 늪지대처럼 되어 버렸다. 다만 눈물이 흐른 곳만 아직도 붉고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고 충격으로 이빨이 입술을 안에서 밖으로 찢은 흔적이 역력했다. 목은 누군가 졸라서 손가락 모양의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고, 셔츠의 단추는 위에서 3개까지 뜯어져 나갔고, 옷깃은 너덜너덜했다.
[가요.] 오리아나는 그의 한쪽 팔을 어깨에 올렸고 그제야 소심이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대쪽에서 부축을 했다.
그들은 이즈리얼을 여자화장실로 데려갔다. 세면대 앞에서 그는 혼자서 손을 모아 물로 입을 행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케이틀린이 컵을 가져와야만 했다.
[혼자 할래.] 그가 기어들어가는 말로 다가오는 수습가의 손을 정중하게 밀었다.
[무리에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셨다. 오리아나는 도자기를 닦듯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닦았다.
[바본가, 컵 가져올 때 약상자도 가져왔으면 됐는데 말이야.] 케이틀린은 혼잣말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왔다.
적절하지 못했다. 이즈리얼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다. 남아있는 남자로써의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목 놓아 울지 않으려고 양쪽어금니를 악다문 체 안간힘을 쓰며 눈물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잠시만 나와 봐요.] 오리아나가 어리둥절해 하는 케이틀린을 대리고 화장실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이즈리얼은 세면대를 붙잡은 체 무너져 내려앉았다.
[한동안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화장실문을 마주보며 흐느낌을 듣던 오리아나가 중얼거렸다.
[많이 힘들었겠지?]
[그렇겠죠.]
[잘한 일일까?] 케이틀린은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최소한 잘못한 거 같진 않네요. 동아리방에 먹거리가 뭐가 있죠?]
[음, 별로 없어, 이번 주에 채워놓으려 했잖아.] 케이틀린의 대답에 오리아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먹는 건 좋은데, 먹고 알려줬음 하네요.]
[동감이야. 매점 갔다 와야겠네. 신입부원이 왔으니까 뭐라도 먹여야지.]
[아직도 거기 있을까요? 누구 한명은 같이 있어 줘야 해요.]
[내가 컵 가지러 갔을 땐 동아리 방에 없었어.] 두 아이가 정자로 가는 길의 모퉁이에 다 달았을 때 별안간 호통이 날아왔고 그들은 쭈그리고 앉았다.
[또 너희들!] 기차화통을 삶아 먹은듯한 목청이다. 문도는 단 일초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발을 놀려서 정자로 다가갔다.
[설마 걸린 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세 명 다 36계 줄행랑에는 도가 텄는걸요.]
[그치?]
그늘에 숨어 희생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던 그들 앞에 등장한 운수 없는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바이, 징크스, 잔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작태냐! 학생이 담배를.] 그는 공격적으로 손가락질을 바이의 얼굴 앞에 내찔렀다.
그리고 문도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이 아니라 바이가 그의 면상에 훅 하고 연기를 뱉었기 때문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고 오리아나는 벌떡 일어섰지만, 케이틀린이 잡아 끌어 도로 앉혔다.
[어디서 처 배워먹을 버릇!] 그는 반항아의 뺨을 후려쳤지만, 소리는 몽둥이로 고깃덩어리를 내치는 것처럼 둔탁했다. 놀랍게 그 같은 강력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바이는 손가락에서 꽁초를 놓치지 않았다.
[불 꺼!] 문도가 윽박질렀다.
[뭐 어때, 가는 길에 한 대 괜찮지 않아?] 바이는 경멸을 담은 미소를 지여 보고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물어서 한 모금 빨았다. 주황색 유성이 검은 밤공기를 자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한층 더 힘을 실은 그의 손바닥은 그녀의 입에서 꽁초를 뱉게 하기엔 충분했다.
[너를 낳고 부모님이 미역국을 먹었을지 아니면 인생을 저주했을지 궁금하다.] 문도는 마치 더러운 것에 손을 대었다는 듯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바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문도를 노려보았다.
[아차, 가정교육을 판타지 책으로 배웠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정사를 생각해보니, 이딴 행패를 부리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 내 사과하지. 근본이 썩었는데 제대로 살아가길 바란 내 잘못이었다.]
[별말씀을. 저도 담배연기로 당신의 썩은 뇌의 기생충을 죽이려 했거든요. 그러면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기생충문제가 아니라 그냥 뇌까지 근육이시네요.]
[아무렴, 그렇겠지. 흡연, 음주, 풍기문란 교칙에 의해 최대 정학.] 의외에 반격을 마주친 문도는 아무렇지 않게 교칙을 거들먹거렸다.
[교칙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교칙.] 옆에 있던 징크스가 시선만 돌린 채 큰소리로 외쳤다. 문도는 대답으로 그녀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징크스는 외견만큼이나 약하다. 때문에 바이처럼 강공을 두 차례나 받아내고도 서 있을 수 없었으며 고통 때문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음, 너희들의 부모님이 존경스러워 지는군, 상당히 식견들이 높으셨는지 어떻게 지 새끼가 이렇게 못되게 클 줄 알고 미리 버렸다. 굉장히 현명하시군.] 물리선생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징크스를 보고 웃었다.
예의 그 미소다.
그는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비꼴 때 항상 얼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아름다운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우리가 보자기로 보여? 이 시방세가 야마 터지게 하네? 니 세끼가 그렇게 잘났냐?] 바이가 폭팔하자 관전을 하던 케이틀린이 심장이 떨려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한 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리까진 막을 수 없었다.
[오호? 아까 태운 게 마약이었나 보군, 음 그 정도는 돼야지 엠생이라 부를 만하지.]
[짖고 있네 미친놈이.] 바이의 폭팔에 발맞추어 징크스도 분노를 터트렸다.
[야, 너 아까 꽁지 빼더라. 왜 남자 양아치 두 마리는 너무 세냐? 놀랍다 놀라워, 난 적어도 네놈이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냄새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개인걸, 강한 놈 냄새만 맡으면 꼬리를 말고 깨갱하면서 찌질이 냄새는 어찌 그리 잘 맞나 몰라. 우쭈쭈 바둑아 손.]
징크스가 갈대처럼 휘청였다.
그녀가 강아지에게 하듯 손바닥을 위로해 손을 내밀자 문도는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갈겼기 때문이다.
[퉷, 병신. 말빨이 딸리니까 무식하게 주먹이나 휘두르는 놈이 교~오~오~칙? 야 헛소리에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야 컼.] 바닥에 쌀 포대가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우락부락한 그의 근육에서 나오는 힘과 애 머리통만한 주먹의 조화가 그녀의 배에 꽂혔다.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 바락바락 대들며 육두문자를 날려 화가 났는지 내장에서부터 끄러모은 힘으로 바로 응징한 것이다.
[사회의 암 덩어리 같은 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그 비루한 삶을 끝내라. 괜히 살아서 남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물리선생은 손을 털었다.
[이 좆같은 호로 새끼야, 반듯이 죽여버릴 꺼야. 지금처럼 깜볼 수 있을 때 마음껏 깔봐둬, 나중에 오줌지리면서 빌어도 숨통을 끊어 놓을꺼니까.] 문도는 바이의 저주에 피식 웃었다.
[그러려무나, 응원한다.]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징크스를 부축해 일으키고 있는 잔나 옆을 지날 때 그와 눈이 마주치었다.
[음? 너는 아까 맞고 있던 찌질이가 아니구나. 얘네들 기둥서방이니?]
[글쎄요, 일단 친구라고 해두죠.]
[쯧쯧, 이 남창 녀석아 너도 이딴 걸레들이랑 어울리는 걸 보니 그닥 쓸모 있는 거 같지는 않는다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살면 공장에서 일자리라도 구할 수 있을 거다. 단 그 공장은 자운에 있겠지만.] 스스로의 농담에 만족했는지 그는 웃었다.
[가슴에 깊게 새겨듣지요 선생님, 평소 선생님의 성품과 언행을 보면 직접 격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해주시는 거 같네요, 구구절절 주~옥 같은 말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도는 한동안 묵묵히 잔나를 보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군.] 그는 범죄의 현장을 유유자적 빠져나갔다. 그제야 그늘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저기.......] 케이틀린은 올라가자고 바이에게 제안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문도가 사라진 방향을 활활 타오르는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 힘이 풀렸는지 징크스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리아나는 그런 징크스를 앞으로 안아 올리고는 앞장서서 동아리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모두가 따랐고 마치 곡 없는 운구행렬 같았다.
04.
지하실은 어둡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칠흑이 모든 공간과 시간을 물들이고 있다. 병장기들은 그편이 더 좋다. 지난날에 자신이 사용되었던 추억을 곱씹어 음미하기엔, 어두운편이 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 준다.
그들은 주동자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참고인들이다.
성벽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계병의 목을 단숨에 꿰뚫는 명사수를 만난 일을 장궁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와 마누라를 억울하게 빼앗긴 어떤 농부는 단검을 매일매일 갈았고 10년 후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지주의 항문을 쭉 찢고 내장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썼다. 단도는 그 냄새를 안다. 수백 명의 죄수의 목을 내리친 큰 도끼의 날에는 녹이 잔뜩 슬었다. 그의 주인, 처형인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손잡이에는 아직 그의 땀이 배어있고 죄수들의 피가 스며있다. 도끼는 감촉을 잊지 않았다.
날붙이들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고 그때마다 신경을 긁는 금속성의 마찰음을 퍼트렸다.
살생부는 자신의 몸에 적힌 기록들을 천천히 다시 읽어 보았다. 왕권을 교체하기 위해서 그는 반역자 무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의 몸에 이름이 적히면 강력한 저주에 걸려서 제명에 못살았고 그 덕에 반역자들은 정의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떡갈나무 지팡이는 이곳의 웃어른 중 한명이다. 그녀의 주인은 최근까지 살아있었고 그녀를 애용했다. 한번은 그가 자신에게 인격을 주려 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이 되었다. 마법사는 생각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족속임을 그녀는 추억했다.
방패, 투구, 갑옷 같은 보호구들은 수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휘둘려 피를 마시는 것 보다는 살과 살을 맞대고 오랜 시간 함께한 동지의 몸을 지키는 일에 보람을 더 느꼈기 때문이다.
이 무리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무기들은 상당히 들떠있다. 최근까지도 실전에 나가서 화약 냄새를 맡고, 진흙탕에 빠져 녹슬 걱정을 하던 이들이고, 붉은 피 외에도 파랑, 보라, 검정, 등의 갖가지 종족의 혈액을 보았고, 가장 최근에 이곳으로 보내진 친구는 피 대신 전류가 흐르는 새로운 종족과 싸워봤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을 한 마법, 주술 도구들이 있다. 이들은 사람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모양새가 아니다. 구슬, 거울, 뿔잔, 모자, 인형 같은 생활에 친숙한 물건들이며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거나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듣게 이야기한다.
거의 모든 이들은 한동안 수다를 떨 일이 별로 없었다. 이 방은 요즘은 훈련에 쓰지도 않는 폐급 무기들이 모이거나, 아니면 누구도 사용할 줄 몰라서 그 가치가 매우 심각하게 평가절하 된 마법무기나 공학무기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방문자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모두가 눈여겨보고 기억할 만한 일이 벌어졌었다. 어린 인간들이 이 비밀의 방을 찾아낸 것이다. 그들은 창고의 물건들에게 매혹당한 게 틀림이 없었다. 아니면 그냥 사적인 장소가 필요했거나.
머리가 분홍색이고 키가 큰 여자아이는 빨간책을 잔뜩 가져다 놓고서는 까먹었다. 반면, 키가 작은 징크스라 불리는 소녀는 종종 헝겊때기를 가져와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창고의 주민들에게 이들은 흥미로운 대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 짧은 금발의 남자아이는 마도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분명 자신들을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었지만, 단 한 번도 부름에 응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마법사면 눈이 뒤집힐 만큼의 가치를 가진 그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뻐꾸기를 무시하는 그가 괘씸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들의 안목이 너무 오랜 세월 먼지를 맞아 멀어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기도 했다.
아이들을 뜨거운 감자였다. 그리고 이 뜨거운 감자들은 새로운 친구를 한명 이끌고 창고를 방문했다.
[그래, 똘마니들이 다 잘 있나 볼까?] 바이가 주머니를 더듬어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녀는 가지고온 석유램프에 불을 붙였고 그러자 어둠들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미약한 빛은 병장기들 위로 불규칙하게 떨어져 형체를 일그러트렸다.
[좋아, 좋아, 궁둥이 딱 붙이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셨네, 귀여운 것들, 조금만 기다려 이 언니가 홍콩으로 보내줄게.]
[변태 같은 년, 이즈리얼 신경 쓰지 마, 제 원래 저래.] 바이가 주변을 돌며 무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동시에 아기 대하듯 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회의할 준비를 했다. 잔나는 구석에 세워둔 책상을 이즈리얼과 함께 끌고 왔고 징크스는 배낭에서 과자를 주섬주섬 꺼내 그 위에 올린 다음 자신이 여벌로 준비한 등유램프에 불을 붙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바이가 자리에 앉았다.
[자, 그래 찌질아. 여기 처음 와 보는 건데 어때 소감이?]
[음, 그게, 그 생각보다 어두워.]
[멍청아 지하실이니까. 그런 사소한 거 말고 더 구체적인 거. 뭐 없어?] 바이는 이즈리얼의 입으로 문장을 억지로 뽑아내려 했다.
[그냥, 너님 지존 짱짱맨임, 이라 해주면 되. 보기보다 아첨을 좋아해.]
[어?]
[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라. 이건 아첨이 아니라 정당한 칭찬이다. 이런 환상적인 비밀기지를 발견하고 우리의 원쑤 에게 크고 아름다운 한방을 먹일 계획을 세운 나님에 대한 정당한 칭송이란 말이다.]
[어련하시겠어요, 징스 하나 먹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막 해도 될라나? 오리아나나 케이틀린은 어떻게 하려고?]
[쳇, 알게 뭐야 그런 쫄보들.] 바이가 머리위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잘 나갈 가능성이 높은 녀석들까지 역고 싶지 않아. 계들은 우리랑 달라. 좀 더 건실하고 행복하게 자랐어. 충분하게 앞으로도 사회에서 잘 살꺼야.]
[뭐냐, 나랑 이즈는 그럼?]
[제 발로 들어와 놓고선,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난 한 번도 강요한적 없어, 언제나 제시 했을 뿐이지, 뭐 지금 와서야 후회해도 늦었지만 말이야.] 바이가 맞은편에 앉은 이즈리얼을 살갑게 노려보았다.
[응? 무슨 뜻인지 알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이상 좋던 싫던 우린 한배에 탄 동료들이야.]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다. 그리고 이즈리얼은 그 뼈가 어떤 종류의 뼈인지, 예컨대 죽어서도 적이 밟기를 기다리는 전투민족의 반 토막 난 뾰족한 정강이뼈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재빠르게 흙으로 돌아가는 물렁뼈인지 구별할 줄 알았다.
등불이 두 사람의 거친 숨결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징크스의 과자 먹는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한동안의 정적이후 바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알아들었겠지. 그럼 오늘의 할 일을 해볼까나.]
[야, 이즈리얼. 너 이름이 출석부 위쪽에 있더라?]
[어? 엉. 그게 왜?]
[밥팅아, 출석부에 이름이 위쪽에 있을수록 학교 측에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는 소리야. 언제 시간이 나면 한번 살펴 봐. 케이틀린, 바이, 징크스가 어디쯤에 있는지 말이야. 아무튼, 그럼 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즈리얼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잔나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면서 은밀한 속내를 털어 내려 했다.
[빽인가 봐.] 잠자코 있던 징크스가 손가락에 묻은 과자 양념을 빨아먹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부모빨 인거지.]
[흠흠, 아니 난 혹시 무슨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나 해서, 그러면 여기서 도구들을 고를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나처럼 말이야.] 잔나는 고개를 푹 숙인 이즈리얼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팔을 크게 벌려 과장된 몸짓을 해보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이즈리얼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잔나를 보았다.
[너도 능력자야?]
[빙고, 보여줄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선 잔나는 징크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가볍게 일어나면서 그녀의 파란머리를 조금씩 위로 띄웠다.
[꽤나 재능 있거든 이래 뵈도. 이렇게 섬세한 조작은 힘들어.]
[작작해라, 다친다.] 징크스가 새빨간 눈으로 잔나를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그는 한술 더 떠서 양갈래로 땋인 머리를 풀어 버렸다.
[와하하하, 파란 미역 같은데 징크스?]
[오, 사, 삼, 이,]
[워워워, 알겠어.] 경고가 시작되자 잔나는 잽싸게 공중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댕기로 만들었다.
[나중에 오리한테 손 봐 달라해. 양갈래는 조금 힘들어서.]
[이런, 징크스 그건 뭐냐? 굉장히 차분해 보인다. 야, 이즈 일로 와봐, 대충 골라 놨으니까.] 이즈리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이가 손짓을 하는 곳으로 가자 잔나도 덩달아 쫓아갔다. 그가 발을 때는 순간 징크스가 발을 걸어 넘어질 뻔 했다.
신참은 무기들 앞에 섰다.
[맘에 드는 걸로 골라봐, 일단 너는 근육이 없는 거 같으니까. 가벼운 것 위주로 골랐어.] 바이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해 보려는 듯이 그의 팔뚝을 밀가루 반죽하듯이 만졌다. 우악스러운 손이 가느다란 팔뚝을 주무르자 이즈리얼은 통증을 느꼈다.
[으, 아파.]
[아, 미안. 운동 좀 해라, 남자애 팔뚝이 무슨 이렇게 얇아?] 바이는 고통을 준 게 머쓱해 도리어 훈수를 두었다.
[아무튼 자 봐, 이 장갑은 보통 힘의 몇십 배 이상의 힘을 내게 해주는 무기야. 마법 무기인줄 알았는데 나도 쓸 수 있는 거 보면 공학무기인거 같은데, 휴대하기도 편하고 무게도 가벼워 좋지. 써 봐.] 바이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장갑 한쪽을 이즈리얼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징크스에게서 음료수 캔을 받아 장갑을 낀 오른손 위에 올리고선 오므렸다. 알류미늄캔의 밑동이 우그러지더니 그녀가 손을 펼치자 손 주름 모양을 따라 최대한 압축되어선 바닥에 떨어졌다.
[한번 해봐, 야 캔 또 없어?]
[이거 어때?] 옆에서 구경하던 잔나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좋지, 받아.] 그녀는 엄지를 퉁겨서 동전을 이즈리얼에게 던졌다. 그는 동전을 받고 우물쭈물 거렸다.
[왜?]
[아니 그게 아니라, 굳이 지금 해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뭐 어때, 걍 한번 해봐.]
그는 주저하면서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잡고선 천천히 조여 보았다. 금속은 고무라도 되는 양 쉽게 구부려졌다.
[오오, 처음치고 잘 되는데, 좋아 너 재능 있는 거 같다. 이것저것 한번 시도해 볼까나?]
그녀는 신이 나서 이즈리얼을 대리고 이것저것 실험을 해 보았다. 그동안 징크스와 잔나도 자신에게 맞는 도구들을 찾기 위해 창고를 뒤적였다. 무기고는 간만에 북적였다.
[야, 너 진심이냐?] 바이는 한동안 이즈리얼과 이것저것 입어보고 내려놓고를 반복한뒤 그에게 우려와 짜증이 잔뜩 섞인 투정을 던졌다. 대답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하........, 야 일로와 봐,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이즈, 혹시 옥수수 좋아해?]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는......,]
[내가 잘 아는 사람 중 옥수수를 굉장히 좋아하는 비폭력 주의자가 있거든.] 잔나가 허리를 숙여서 갈색신발을 주워서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말했다.
바닥에는 신발을 비롯해서, 망토, 방패, 정강이 보호대, 팔꿈치와 무릎보호대 따위가 가지런히 줄맞추어 놓여있었다. 하나 같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보다 타인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 후 도주하기 알맞은 도구들이다.
[한번 쫄보는 영원한 쫄보인가.] 징크스는 솥뚜껑만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바이 옆에서 이죽거렸다.
[얌마, 이게 최선이냐?]
[그치만.]
[이즈리얼 벌써 초심을 잃었어? 이제는 장난이 아니라고, 내가 말했잖아.] 바이가 그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자 이즈리얼은 안 그래도 좁은 어깨를 더욱 움츠러트렸다.
[귓구멍 씻고 잘 들어. 그 거시기 작은 놈들은 이제 발정기 침팬지 마냥 널 괴롭히려 들꺼야, 안 봐도 뻔할 뻔 자지. 좁밥 털다가 지들 강냉이가 털렸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그렇다고 내가 캥거루 마냥 널 데리고 다닐 순 없잖아. 안 그래?]
[볼만 하겠는데?]
[그치.]
[아가리 해 이건 존나 심각해, 궁서체다.] 바이가 캥거루처럼 이즈리얼을 넣고 다니는 상상을 한 두 사람이 구석에서 낄낄거렸다.
[알아, 하지만. 그래도 바이가 주는 건 전부.] 그는 소심하게 말꼬리를 내리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말했다.
[앙? 뭐야 뭐가 불만인데?]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그는 또 움츠러들었다.
[니 미적 취향, 미친년아. 보나마나 답도 없이 무식한 거 쥐어 줬겠지.] 잔나가 구석에 세워저 있던 거대한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검이라 하기엔 너무나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겁고, 그리고 조잡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철괴였다.] 징크스가 뭐가 좋은지 혼잣말을 하고 히죽거렸다.
[남자잖아?] 바이가 반문했다.
[우와, 여기 정말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네.]
[그래, 그래, 오천만보 양보해도, 이런 것들로 어쩔 건데? 최선의 공격은 방어다 같은 개소리 하지 말고.]
[방패 있잖아.] 이즈리얼이 허리를 숙여 접힌 부채를 주워서 펼치자 은색 둥근 방패가 나타났다. 그는 잠깐 우쭐해 졌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 까먹는 소리하네. 니 눈에는 제들이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뵈냐? 어이구 복창이야. 막기만 해서 어떻게 이겨?]
[올챙이 개구리 적 기억 못한다더니. 애들이 다 너처럼 타고난 쌈꾼인줄 암?]
[저기 잔나, 개구리 올챙이 적.]
[나대지 마, 아무튼 방어구도 나쁘지 않아. 전략적 후퇴!]
[니미, 영혼까지 탈곡기에 들어간 것처럼 탈탈 털려봐야 저런 개소리가 않나오지.] 결국 이즈리얼은 자신이 고른 품목 중에 신발과 방패를 건졌고 바이가 바득바득 우겨서 어쩔 수 없이 바이의 장갑 한쪽을 받아야 했다.
[저런 허접들은 한 손으로도 충분해.]
[카메라도 없는데 허세 떨기는.] 잔나는 괜히 참견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
결국 바이의 고집은 옳았다.
사건은 늘 그렇듯이 밤에 일어났다. 케이틀린과 이즈리얼 그리고 웬일인지 잔나는 야자를 했다. 야자를 마치고 나서 케이틀린은 책을 반납하고 몇 권을 빌려오기 위해서 도서관으로 갔다. 하굣길을 함께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서 두 남자아이는 까짓것 시간도 별로 안 걸리니 같이 들렀다 가기로 하였다.
[이야, 케이틀린 이 기세면 졸업하기 전에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는 거 아냐?]
[아마 아닐껄? 수학이랑 철학은 당최 무슨 소리 하는지 몰라서 아예 읽을 마음도 들지 않아. 하지만, 문학은 가능할지도. 아, 이즈리얼은 외려 그쪽 책들만 읽으니까 둘이 합치면 어쩌면 도서관 책을 전부 읽을 지도 모르겠다.] 케이틀린이 옆에서 걷던 이즈리얼은 자신의 이름이 대화에 언급되자 어색함을 느꼈는지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어이, 거기 그림 좋은데?]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그들은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 패거리와 마주쳤다.
[와......, 내가 저 문장을 들어본지가 한 200년 전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뭘 야려, 눈 안 깔아? 앙?]
[......., 야 케잉 혹시 빨대 있어? 함 꽂아보게. 석유가 나올 것 같은데.] 오직 잔나만 그 상황 속에서 여유와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한 쌍의 건달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가락을 우득우득 꺾으며 다가오고 있었고, 남은 한 쌍은 다가오는 위험분자가 일전에 바이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이 왜 하교가 끝났음에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렴풋 알았다. 그래서 이즈리얼과 케이틀린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중이었다.
[이봐 친구들.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건데 지금 우리한테 시비 걸고 있는거 맞지?]
[뭐래 저 또라이 세끼는. 너넨 다 뒈졌어.] 뚱뚱한 녀석이 웃자 앞니가 두 개나 없는 것이 드러나 보였다. 잔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입을 가려야 했다.
[새끼 상황파악 오지게 못하네.]
[아, 미안 미안, 존나 귀엽네. 야 이즈 가지고 있지?]
[어? 응.] 그의 대답에 잔나가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케이틀린의 손을 잡았다.
[선빵을 치는 녀석이 게임을 지배한다.] 코딱지만큼만 도움이 되는 조언을 남기고선 그는 케이틀린을 데리고서 학교 옥상위로 날아 올라갔다.
[어? 야 너 안 내려와? 어? 야 너 내가 거기 올라가면 뒤진다. 어? 좋게 이야기할 때 내려와라 이 좇만한 세키야.]
[응? 뭐라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찐따라 안 들리는데?] 잔나는 옥상위에서 혓바닥 까지 내밀면서 약 올렸다.
[야, 이 병신들아. 이쪽에 신경 쓸 거면 앞이나 똑바로 보시지? 눈이 네 개면 뭐하냐?]
[잔나!] 케이틀린이 들고 있던 책으로 잔나의 등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비행으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만, 그가 이즈리얼의 도주를 알리자 화들짝 놀란 것이다.
한밤중에 경찰과 도둑이 시작됐다.
이즈리얼은 싸울 생각이 단 1g도 없었고 뒤돌아 전력질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생각보다 꺽다리의 뜀박질 솜씨가 좋았다. 그는 이제 바로 뒤에서 달음박질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선택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본능이 알아차렸다.
[이 세끼, 잡았다!] 꺽다리는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먼저 복부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야 너 뭐해? 그 세끼 잡아!] 바이한테 당한 일에서 무언가를 배웠는지 뚱보는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고 동료를 살피는 한편 얼이 빠져 자신이 벌인 일을 파악하는 이즈리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세끼, 저거......., 우 욱.] 말라깽이는 배를 부여잡고 무리하게 일어서려다 그만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내었다.
[미, 미안. 그렇게 세게 치려던 건 아닌데.] 겁먹은 가해자는 어쩔 줄 몰라서 변명을 했다.
[이 세끼가 사람을 깔봐도 유분수지!]
거한이 이즈리얼에게 뛰어들었다. 요행수로 이즈리얼이 자신의 동료를 고꾸라뜨렸다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이미 바닥을 기는 그들의 싸구려 명예가 회복될 수 없는 전치 100주 정도의 타격을 받을 것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즈리얼은 겁을 먹었다. 난생처음 사람을 엉겁결에 처 본 것이다. 자신이 폭력을 저질렀으며,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아버렸다. 남에게 피해주기를 극도로 꺼리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그의 가치관을 가진 자신과, 지금 그에게 성난 황소처럼 돌격해오는 불량배가 똑같다는 의식에 빠져 그는 혼란스러웠다.
결국 뚱보는 이즈리얼을 깔아뭉개는데 성공하고 바이가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 하게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어떡해, 어떡해, 잔나 어떻게 좀 해봐.] 케이틀린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기다려 봐,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밤 11시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저러다 죽겠어.] 그녀는 주먹으로 잔나의 등을 마구 때렸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빌려온 책, 약 800쪽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을 뚱보를 노리고 던졌다. 하지만, 그 책의 모서리는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신음을 흘리던 말라깽이의 머리를 찍어 버렸고 그는 있는 힘껏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처음 두어 대를 맞고 난 후에 그는 이것이 괴롭힘이 아님을 알았다.
괴롭힘은 선을 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주변의 시선들이 있을 때 최대한 효과적으로 한 개체를 괴롭혀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그친다. 그러나 이즈리얼의 주변에는 무심한 관중들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깔아뭉개 피떡을 만들려고 하는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건 괴롭힘이 아니었다.
그가 왕주먹으로 그의 코뼈를 빠개는 순간 이즈리얼을 반격을 개시했다. 손을 뻗어 적의 손목을 잡았다. 적은 놀랐지만 이내 자신의 공격이 하찮은 찌질이에게 막혔다는 사실에 눈이 빨개져서 그의 목을 조르려했다. 물론 그의 손은 목에 접근하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즈리얼의 장갑 낀 손이 그의 손목을 으스러트렸고 뚱보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억누르며 이즈리얼의 손목을 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완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는 손목을 물어뜯었다.
살을 꿰뚫고 들어오는 통증에 그는 손을 뿌리쳤고 살점이 조금 뜯어져 나갔다.
이제 두 사람 모두 공포와 고통에 휩싸여 버려 분노가 그들의 머리를 조종하고 폭력이 사지를 침식해가는 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승자는 이즈리얼이었다. 그가 얼마나 잔인하게 적을 무찔렀는지 위에서 방관하고 있던 잔나가 그의 능력으로 정신을 잃은 습격자를 떼어 놓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가장 큰 죄 중 하나를 어린 나이에 지었을 것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있다. 이즈리얼은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되려 잔나가 떼어놓자 정말 서럽게 울었다.
[아파, 아프다고.] 울고불고, 간간히 아프다고 서럽게 하소연하는 그를 데리고서 잔나와 케이틀린은 급한 대로 동아리방으로 갔다.
문제가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케이틀린은 길을 절반정도 걸었을 때 마땅히 안고 있어야 하는 책이 없음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잔나는 자신이 잽싸게 다녀온다 했지만, 이즈리얼의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한 그녀는 사양하고서 책을 주우러 되돌아갔다.
책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즈리얼과 싸움으로 아직도 바닥에 누워 있는 뚱보와, 그녀가 던진 책을 맞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홀쭉이는 어느새 동료의 옆에 가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케이틀린은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구석에 숨어서 두 사람이 얼른 몸을 추스르고 책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리를 뜨기를 기도했다.
그때 신드라가 교무실이 있는 오른쪽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두 명의 환자에게 다가갔다.
앉아있던 쪽이 고개를 들고서 이사장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패배했다는 감정이 그 두 사람에게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으흠? 아직 밖에서 자기엔 날씨가 너무 춥지 않니?]
[남이사, 신경 끄고 갈길 가시지?]
[하하, 그렇게 이야기 하면 간지나 보일 거 같아? 꼬리 내린 개가 짖네.] 신드라가 허리를 숙여서 두 불량배를 살폈다. 말라깽이는 짜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맞섰다.
[우린 졸라 막나가거든, 이사장이든 나발이든 다치기 싫으면 그냥 갈길 가시지?]
[으엑, 너네 몇 살이니? 쓰는 단어가 무슨 노땅들이나 알아들을 법한데.] 신드라가 혀를 내두르며 검지로 그의 마빡을 두어 번 밀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선 손을 치켜들어서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누르는 긴 검지손가락을 낚아채려했다. 그 뒤 힘을 주어서 마디를 꺾어 버리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마 죽는 날까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멸치 같은 불량배는 손을 반쯤 올린 체 굳어졌다. 신드라가 서서히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그 남자는 솜털마냥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케이틀린은 입을 틀어 막아야했다.
같은 반에도 신기한 일들을 벌이는 친구들이 많다. 잔나는 날아다닐 수 있고, 오리아나는 외형이나 내부구조나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구성되어있다. 겁쟁이 이즈리얼 조차도 방금 전 전투에서 알 수없는 힘을 발휘했다.
그녀와 가까운 친구들도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알쏭달쏭한 일이 눈앞에 벌어져도 케이틀린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로 단련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신드라가 들어 올려진 학생의 가슴에 손을 찔러 넣은 장면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신드라는 예전에 자신의 가슴에서 보석을 꺼낼 때처럼 학생의 가슴 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으흠, 어디 있을라나?]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갈비를 더듬고 심장을 찔러 보았다. 생각보다 그녀가 원하는 무언가는 깊이 숨어 있었다. 위장을 쓰다듬을 쯤에는 어느 정도 몰두를 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빙고!] 함박웃음과 함께 그녀가 손을 뽑아 올리자 그녀의 손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가공되지 않는 원석이 있었다. 신드라는 입맛을 다시면서 원석을 주머니에 넣고선 사내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도 바닥에서 사태 파악 못하고 신음을 흘리던 다른 아이도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같은 방법으로 신드라에게 들려진 다음 한참동안 속이 손에 의해 헤집힘을 당했다.
[어럽쇼?] 한참 남의 속을 뒤적이던 신드라는 고개를 갸웃하고선 손을 집어넣은 체 뚱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마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서 이번에는 양손을 그의 몸뚱이에 가차 없이 쑤셔 넣었다.
[이야! 월척인데?] 그녀의 양손은 아기 머리만한 원석을 그의 몸에서 발굴해 내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몸에서 광물을 분리해 내기위해서 발로 그의 몸통을 누르며 당겨야 했었다.
물건이 워낙 컸기에 먼저 번처럼 주머니에 넣을 수 없었고 옆구리에 끼어야만 했다. 그녀는 손을 털어서 피를 털어 내었다.
두 아이들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신드라는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걸어가는 길 위에는 케이틀린의 책이 있었다. 만족감으로 가득 찬 신드라는 올 때와는 다르게 목표에 온 신경을 쓰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았고 당연히 책을 발견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워들었다.
케이틀린의 뇌는 그날 하루 너무 많은 일을 보고 겪었기 때문에 과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별로 현명해 보이지 않는 판단을 내리기에 최적화 되어있었고 그 결과로 신드라가 주워간 책을 지금 당장 몰래 가지고 나오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학교에 이사장실이 있었나?]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층에는 어떤 방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케이틀린은 2층에서 복도를 쭉 훑어보았고, 한 방에서 불빛이 세어 내오는 것을 발견했다.
[교장실이잖아?] 케이틀린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교장실로 접근했다. 안에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나왔고 그녀는 귀를 벽에 가져다 대었다.
[........,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이 방을 쓴다. 뭐? 알바야 알아서 밖에서 자고 와. 왜 좋잖아 젊었을 때 추억도 곱씹어 보고 말이야. 아무튼 끊어 나 손 좀 씻고 오게, 이게 냄새가 가시지 않네.] 신드라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었다. 케이틀린은 곧 신드라가 손을 씻으러 나올 것을 알아 차렸다. 하필 교장실은 복도 한가운데 있어서 어느 쪽으로 도망가던 걸리기 쉬웠다. 그녀는 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복도에 있는 신발장 맨 아랫단으로 기어들어 갔고 그녀가 숨을 죽이는 동안 교장실의 문이 열렸다. 발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녀는 잽싸게 그러나 소리 없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이미 한번 들어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침투에 성공했고 책상위에 3개의 물건들이 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케이틀린은 책을 끌어안고 한동안 두 원석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릴 쯤 그녀는 치마 호주머니에는 작은 돌맹이와 치마와 허리사이엔 책을 끼운 체 창밖의 배수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였다.
바닥에 착지 하자마자 똥줄이 타도록 빠르게 그녀는 범죄의 현장에서 달음박질 쳐서 벗어났다.
05.
일요일 동아리 방에는 바이와 징크스를 제외한 나머지 부원들이 각자 나름의 할 일을 하면서 자율학습 시간을 때우고 있다.
[으아악, 난 휴일의 자율학습을 신청한 기억이 단 1g 도 없다고!] 트럼프 놀이를 하던 잔나가 별안간 책상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놀이상대를 해주던 이즈리얼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젠장! 월화수목금금금이 무슨 개 같은 시간표야! 휴일에는 좀 쉬자고, 저 위에 계신분도 지구를 만들고 하루는 쉬었다고.]
[무슨 소리야?]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게 바라보던 케이틀린이 되물었다.
[지루함에 대한 발악이지요. 그런데 이즈리얼 다친 데는 괜찮아 졌어요?]
[아, 어, 괜찮아.] 이즈리얼의 대답이 못미더운지 오리아나는 노트에서 고개를 때고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말 별의 별 소문이 다 돌더라, 특히 징크스는, 어휴 조직의 항쟁이니, 마약의 부작용이니, 두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짜증나.]
[그 정도는 약과다 내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고약했던 건, 징크스가 밤에 그렇고 그런 알바를 하는데 웬 변태 같은 손님에게, 으아아악,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음탕한 손동작, 즉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로 구멍을 만들고 왼손의 검지로 그 원을 꿰뚫으려는 동작을 취하던 잔나의 손을 강철인간이 힘껏 으스러트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바이와 징크스는 한동안 바빴다.
이즈리얼에게 호되게 당한 머저리들은 드디어 그가 마법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선 손톱을 깨물었다.
이런 재미난 사건을 넘길 잔나가 아니었고 그는 온 동네방네에 두 껄렁이가 이즈리얼에게 얻어 터졌다고 소문을 냈다. 그것도 그의 찌질함을 한껏 부각시켜서 말이다. 이 사실은, 소문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아 전교에 퍼지는데 까지 오전 수업이면 충분했다.
쥐꼬리 만한 명예에 먹칠을 한 두 건달은 한강에서 뺨맞고 압구정에 가서 화를 냈다.
바이와 징크스는 적어도 인간이다.
먼저 당할 뻔 한건 징크스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깡패들에게 시비가 걸렸는데 마침 지나가던 경찰이 아니었음 아마 갈비뼈가 두어 대는 나갔을 것이다. 얼굴 몇 대 맞았을 때 경찰이 뛰어와서 그녀는 위기를 약간만 맛봤다.
바이는 골목길 친구들을 모아서 보복을 했고 한동안 보이지 않는 으슥한 골목은 전쟁터로 바뀌었다.
[닝기미 시부럴!] 동아리방의 문이 엄청난 기세로 열리면소 화가 머리꼭대기 까지 치밀어 올라 분홍머리카락이 더욱 밝아 보이는 바이가 들이 닥쳤다.
[바이, 그렇게 난폭하게 문을 학대하면, 조만간 유리창이 깨질거에요.]
[꺼져.] 맹수는 으르렁 위협을 하고 창가로 갔다. 그 뒤를 골이 잔뜩 난 꼬마가 쫓는다.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발!] 바이가 열린 창문으로 있는 힘껏 욕을 토해냈다. 목청이 얼마나 큰지 고함은 동아리건물 안뜰에서 메아리쳤다.
[왜 저래?]
[아침에 문도한테 걸렸어.]
[또?]
[사복등교 하다가 걸렸데, 하여튼 이 멍청한 학교는 지 좆대로야. 교칙에 주말에는 사복등교를 허용한다, 라고 떡하니 적어 놓았으면서.]
[입고 다녀도 되잖아?] 케이틀린이 잔나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입술 끝을 뒤틀면서 비웃었다.
[한 번 해봐.]
[그런데 교복은 어디에서 난거에요? 사복등교 했다면서요.]
[몰라, 삥이라도 뜯었나보지.] 화풀이를 끝낸 그녀는 뒤로돌아 용의자들을 둘러보았다.
[이중에 쥐 세끼가 있어.]
[워워워, 왜 화풀이야, 뺨 맞은 건 저쪽인데 왜 여기 와서 생지랄이야.] 잔나가 손사례쳤다.
[그야, 건물이 워낙 낡았으니 한두 마리 정도는 있겠지, 왜? 봤어?] 시골에서 살다온 그녀의 눈에는 별일 아닌 일처럼 보였다.
[그 쥐 세끼가 아니야.]
[저기, 징크스,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건데. 부담스러워.] 카드를 정리하고 있던 이즈리얼을 징크스가 한쪽팔만 책상에 올려놓은 체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똥통에 튀겨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고자질했어. 고자는 남자만 될 수 있는 거니까, 케잉은 용의선상에서 제외가 되지.]
[진심이세요?] 오리아나가 되물어 보았다.
[우리가 담배 핀 건 쏙 빼고 억울하게 맞았다고 저어기 위쪽의 높으신 분들에게 꼰질렀다는데, 씨부랄.] 바이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나나, 징크스가 주변에 편먹고 있는 건실한 어른들이 없거든, 그럼 이게 무슨 개소리냐면, 누군가 우리 이름 팔아서 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거지.]
[그런데, 그럼 좋은 거 아니야? 그날 문도는 너무 했잖아, 저어어기 높으신 누군가가 내려오면 징계 받지 않을까?]
[그 인간 성격에 징계 받은 다음에 참 잘도 우리를 놔두겠다, 그치?]
[왜 날 봐? 말은 케잉이 꺼냈어.]
[지금 말하면 정상참작해서 반만 죽여 놓을게.]
[너나 나나 도진개진인데, 너가 주변 어른한테 자랑할 만큼 훌륭한 위인이냐?] 잔나가 빵끗 웃었다.
[이번엔 제 차례인가요?] 바이의 시선이 오리아나에 머물렀다.
[대가족 식탁에서는 온갖 잡다한 일들이 전부 이야깃거리지 아마.]
[맞긴 한데, 인간은 불행이도 입이 하나여서 식탁에서는 먹거나 말하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죠. 특히 대가족 식탁에서는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푸성귀만 먹게 되요.]
[넌 음식을 안 먹잖아.] 자세를 바꾸어서 책상위에 널부러저 있던 징크스가 심드렁하게 타박을 주자 오리아나는 과장스럽게 두 팔을 벌려 보이고 가슴위에 포개었다.
[그런 차별적인 발언을 하다니, 저 상처 받았어요.]
바이가 이제 남은 용의자중 한명인 이즈리얼에게 고개를 돌렸다. 겁먹은 양은 도리개질로 자신을 변호하려했지만,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다가갔다.
[아......, 혹시 난가?] 케이틀린이 문득 끼어들었다.
[움직이지 마,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지금부터 움직이는 새끼가, 놐.] 자못 진지해 지기 시작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야단스럽게 움직이던 잔나의 목에 바이의 손날이 날아들었다.
바이는 케이틀린의 뒤로 돌아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선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선 그녀의 옆에 앉아 팔꿈치를 공격적으로 뻗고 반대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어떻게 된 일인데?] 그녀가 쏘아 붙였다.
[그게 간만에 부모님이 전부 저녁에 집에 있어 함께 밥을 먹었거든, 그러다가 학교에서 뭔 일 없냐고 물어보셔서 엉겁결에 선생이 학생을 막 때린다고, 그게 조금 신기하다고 대답했거든.]
[우리 이름은?] 바이가 책상을 피아노 건반처럼 두드리고 있다.
[절대로.]
[더 자세히.] 맞은편의 징크스가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아니, 별건 아니었다니까,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징크스가 떠올라서, 아니 나도 바보는 아니라고. 너희가 문도에게 걸레짝이 되도록 얻어맞았다고 알려줘 봤자 우리만 피곤해지는 거 알고 있다고,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이야기 했어.] 케이틀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문도가 애들을 부당하게 때린다고만 했어.] 분위기에 눌려 그녀는 변명을 강조했다.
[아, 망했어요, 망했어요.] 잔나가 마빡에 손을 올렸다.
[왜 망한 건데, 두 분도 내 이야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
[그건 니 생각이고, 아무튼 난 사상검증을 마쳤으니 장실 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잔나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동아리 방을 나갔다. 징크스는 이즈리얼의 손에서 카드뭉치를 받아서 천천히 섞었다. 플라스틱카드의 얇은 마찰음이 주위를 매웠다.
긴장감이 서서히 차오르다 폭팔하려는 순간 동아리방문이 열렸다.
[오호?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네, 들어가도 되지?] 방문이 열리고서 잔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미 들어 왔으면서 무슨.] 바이의 투덜거림을 한귀로 흘려보내고선 그녀는 교실로 들어왔다. 잠깐 문을 열 때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저번 주에 문도한테 털렸다면서.] 억양의 강약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녀는 모두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뭐니, 그 똥씹은 표정은?]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오리아나가 바이대신 대답 겸 질문을 했다.
[아, 별건 아니고, 뭐랄까, 나는 말이야, 그 나이에 이리저리 사고를 많이 쳐보는 게 나중에 가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불장난도 적당히 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해.]
잔나는 구렁이처럼 느긋하게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그런데 다른 재미없는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해, 특히 문도. 산삼이라도 찾은 심마니처럼 방방 날뛰더라, 덕분에 숙취와 두통이 더 심해졌어. 어휴 꼴 뵈기 싫어.] 그녀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쳇, 벼락 맞을 놈.] 징크스가 나지막하게 읊었다.
[정학이네 퇴학이네, 부모님이네 경찰이네 어이구 2주 전 일을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나랑 교장이 간신히 뜯어 말렸네, 상담으로 그냥 퉁쳤다.]
[2주전?] 바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징크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시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한동안 보이지 않는 항쟁을 하던 중 문도의 귀에 소문이 들어갔을 거라 지례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2주 전이면 문도가 이즈리얼을 모른 체하고 지나간 일 빼고는 힘을 써본 적이 없었다.
[어, 너네가 담배피고 삥뜯는 데다가 반에서 왕따를 만들고 있다던데?] 잔나는 이즈리얼을 흘끔 보았다.
[난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아니 이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이 세끼는 뱃속에 내장 대신에 구렁이를 키우나? 지가한일을 쏙 빼놓고 뭐? 웬 말뼉다구 같은 소리야!] 바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아아아앙담? 에라이 시팔, 상담은 그 정신병자가 받아야 되는 거고, 미친놈! 언덕위의 하얀집에 입원이나 하라고 해, 가자. 아니지 여긴 우리 동아리 방이니까 나가.]
[바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요. 선생님에게 너무 무례해요.]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성난 물소처럼 씩씩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자를 발로 한번 걷어차고 머리를 벅벅 긁은 다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 거칠게 숨을 내 쉬었다.
[다했냐? 냉수한잔 먹고 속이나 차려라. 두 분 모셔올 테니. 끽해야 30분이다.] 잔나가 문을 반쯤은 열어 두고 갔다. 복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그 틈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교장, 이사장, 동아리 담당 선생이 들어왔다.
[그래, 다들 아침은 먹고 왔니?] 책상을 사이에 두고서 어색한 대립을 하고 있는 고착상황을 제드가 간편한 인사로 깨었다.
[아? 예, 챙겨먹고 있어요.] 딴생각을 하던 케이틀린이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그래 건강에 좋은 거야. 그런데 한명이 안보이네, 6명 아니었나?]
[잔나는 지금 화장실 갔어요.] 오리아나의 대답에 제드는 옆에 앉은 잔나를 바라보았다.
[어째 이름이 똑같은 사람끼리는 닮나 본데, 운도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 징크스 치통은 많이 나아졌니? 통증 때문에 수업 내내 엎드려있어도 신경쓰지 말라고 문도선생이 친절하게도 알려 주시더구나.]
[쯧.] 바이가 모두가 들으라고 혀를 찼다.
[아, 왜 지난 2주간 엎드려 있는 징크스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지 알았네요, 사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 반 친구들조차 수근 거렸어요.] 오리아나가 비꼬았지만, 앞뒤사정을 모르는 그에겐 그냥 맞장구일 뿐이었다.
[여자아인데 얼굴에 신경 써야지, 그런 것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지만 말이야.] 호의로 남의 속을 뒤집자, 징크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케이틀린, 이즈리얼, 학교생활은 할 만하니?]
[음, 다닐 만해요. 친구들도 잘해주고요.] 케이틀린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고, 이즈리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닌 것 같은데?] 교장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신드라가 갑자기 난입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응을 잘한다면서 이렇게 선생님들이랑 면담을 하게 되면, 앞뒤가 안 맞지, 안 그래?] 그녀는 슬슬 물꼬를 터가던 대화의 분위기를 한 번에 우그러트려서 창밖에 던졌다.
[그건......] 케이틀린은 말을 잇지 못했고, 이즈리얼은 무엇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근묵자흑이라는 사자성어를 아니?]
[고자되기는 알지.] 바이가 틱틱 거렸다.
이사장은 망나니의 비아냥을 흘려들었다.
[하긴, 알고 있으면 이렇게 살고 있겠어, 잘들어, 더 이상 너희들은 어린이가 아니야. 물론 아직은 학교나 가정 같은 사회적 울타리가 지켜주고 있지만, 길어봤자 3년이야. 그 뒤로는 아무도 너희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
[지금도 뭘 해주긴 하나?] 징크스가 삐딱하게 참견했다.
[지금의 3년이 너희 80평생을 좌우한단다.] 신드라가 팔짱을 끼고서 꼰대질 일발 장전했다.
[지금 어떤 성적을 받느냐에 따라서 평생 노예처럼 살던가 아니면 책상에 앉아서 펜이나 긁적이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사는지가 결정이 되. 지리멸렬하게 살다 비참하게 죽거나, 있는 호강 없는 호강 다 누리고 살다 아쉬움 없이 죽나, 이게 여기에서 결정이 된다고.]
전 세계에 어떤 아이들이 잔소리 듣는 것을 좋아할까. 청자들은 나름대로 잔소리를 견뎌내기 위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드라는 자신의 진심어린 충고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그들의 영혼없는 표정에서 눈치 챘다.
[하아,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나 본데,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되지?] 이사장은 진실로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표정의 가면을 썼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일지, 나뭇가지로 신체를 조각 조각내 죽일지 고민하는 심술쟁이의 눈동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만해 신드라, 애들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아냐아냐, 이 얼굴을 봐. 죽은 동태 눈깔이야. 절대로 이해 못한 게 틀림없어.] 신드라는 고문도구를 고르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그래,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이해하겠지. 지금 너네처럼 어른이 하지 말라는 거 하면서 자유니 뭐니 떠들고 허세에 취해 살아 3년을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나중에 취직도 못하고 돈도 못 벌어, 결국 갑갑해서 술과 마약에 손을 대겠지.] 그녀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징크스를 보았다.
[뭐 지금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폐인의 삶에 다가가는 거야. 그러다 어쩌다가 실수로 애가 생길지도 모르지, 근데 고작 핏덩이 하나 생긴다고 그동안의 삶의 버릇이 고쳐지겠어? 그렇게 평생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차에 치이거나, 길거리에서 얼어 죽거나, 술에 취해 개천에 코 박고 익사, 혹은 조금 용기 있으면 자살이라도 하겠지. 그럼 남겨진 핏덩이만 불쌍해지는 거지.]
[그만, 이사장님, 말이 지나친 것 같군요.] 듣다 못한 교장이 이사장을 조용하게 윽박질렀다.
[사실을 말한 거뿐인데 뭐.] 그녀는 교활하게 웃어넘기었다.
[아무튼 이만큼 하면 알아듣겠지.] 신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곳에서 나가려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종의 아쉬움이, 딸기 케익의 장식용 딸기를 먹지 않은 것과 비슷한 아쉬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정 이해가 안 되면, 거울을 보렴. 그러면 과거와 현제, 그리고 미래의 미래까지 다 보일걸? 안 그래 징크스, 바이?]
적의가 가득 발린 비수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고아들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자 번개 같이 바이가 물이담긴 종이컵을 던져 동아리 방에서 나가려던 신드라의 뒤통수를 명중시켰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야,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란 잔나가 그간의 침묵을 깨고 뛰쳐나가려 했지만, 신드라가 손을 들어 막아섰다.
모든 게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모욕을 받은 징크스와 바이의 눈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신드라는 반대로 수치심과 복수심으로 오한을 뿜어냈다. 오리아나는 허리를 꼿꼿이하고 가슴을 펴 당당함으로 친구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들처럼 굳센 건 아니다. 이즈리얼은 겁에 질려서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가 병적으로 보일 정도로 창백해 졌고,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멍청한 표정으로 케이틀린이 앉아 있었다.
잔나는 전전긍긍하면서 그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었고, 교장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바이?]
[왜 갈보년아, 깜보다 한 방 먹으니 대꿀멍이냐?] 징크스가 신이나 조롱했다. 그녀의 백색의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거 참 이상한데, 난 의무로써 너희에게 조언을 해준 기억 밖에 없는데, 언제 깜 봤지?]
[눼눼눼, 어련하시겠습니까. 야 너 사자성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엄이도령 이라고 아냐? 같다 붙인다고 다 말이 되는 건 아니야.] 용감한 투수가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치면서 이사장을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얼마든지 들어주고 짓밟아 줄게.] 신드라는 흐르는 물에 신경을 쓰지 않은 체 대꾸했다.
[하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징크스가 팔을 들어 만세를 하고는 그대로 절을 두 번 했다.
[90먹은 똥꼬에 힘 풀린 노인네도 처음 보는 애들한테는 존댓말 쓰고 예절을 지치는데 네년은 얼마나 나이를 잘 처 잡수셔서 첫 대면에 다짜고짜 면전에 대고 고따구의 말들을 주둥이를 놀려서 뱉으시나이까?]
[글세? 뭐 눈에는 뭐만 보이나본데? 난 단 한마디도 돼지처럼 꽥꽥이며 비속어를 쓴 적이 없는데, 그리고 너희들이 잘못한건 맞지 않나?]
[잘못은 얼어 죽을 놈의 잘못.]
[출신이 그래서 그런지 예절, 책임, 성실, 의무, 규칙 같은 단어는 전혀 모르나 보네, 하지만 안심하렴, 앞으로 3년간 내가 이런 가치가 무엇인지 친히 가르쳐 줄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오리아나가 질문을 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이렇게 규칙과 법을 사랑하는 이사장님이 오시다니,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맘대로 하렴.]
[감사합니다. 일부 선생님들 중에, 물론 일부에요, 학생을 개 패듯이 패고 별거 아닌 일에 트집을 잡고, 성추행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입은 욕쟁이 할머니인데다, 교칙을 전혀 준수하지 않는데다 자신의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왕따로 고통 받는 아이를 무신경하게 돌보지 않는 선생님이 있답니다.]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비록 자신에겐 없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좋으신 이사장님이 오셨으니 다행이네요. 곧 있으면, 차마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그 사람이 짤리겠네요.]
신드라는 새로운 적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할 말은 다했니?]
[신드라, 애들이랑 기 싸움해서 뭐가 좋다고. 가자.] 제드가 신드라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진정을 시키려 했지만, 신드라는 그의 손등을 잡고 자신의 어깨에서 치웠다.
[별로 화난 거 아니야, 살짝 머리에 피가 몰린 것 뿐이에요. 지금 나는 매우 냉정한 상태야. 게다가 이미 물은 엎어졌어. 나중에 변명조차 못하게 여기에서 못 박아 놔야지.]
[참나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유치한 것 보소.]
[하나만 물어보자, 너네는 뭘 믿고 어른들을 그렇게 깔보니?]
[그만 하시죠 이사장님, 애들이랑 싸우면 보기 안 좋아요. 너네도 사과하렴, 아무리 못된 말을 하도 이사장님이셔. 어른이고.] 잔나가 어떻게든 중제를 해보려 했지만 양쪽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참나, 나이가 벼슬인 걸 내가 까먹고 있었네.] 징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드라의 머리위에 별안간 검은 구슬 3개가 나타났다. 잔나가 번개같이 아이들과 신드라 사이를 막아섰고 제드는 신드라의 왼손을 붙잡았다.
[힘도 없고, 머리에 피도 안 말랐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인기나 매력이 있나? 건강하지도 않아.]
[야이, 만년 히스테릭아 이건 도가 지나쳐!] 교사 잔나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앞에 검은 구체가 굉음을 울리며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 모든 걸 덮어 줄만한 보호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어 뭐가 있어. 심지어 너네는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멀쩡한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쉬는 시간 종이 복도를 울렸다. 그러나 누구도 출입하지 않았다.
[참나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하네, 맞아, 난 고아에다가 배운 거 없고, 못 먹어서 건강하지도 않아. 성격도 지랄 맞아서 항상 문제아니 불량하다니 그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사회성도 쓰레기지. 심지어 가진 건 불알 두 쪽뿐이란 말에도 해당사항이 없어.] 바이가 사뭇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자 옆에 있던 케이틀린이 실소를 내뱉었다.
[알긴 아네.]
[가진 게 좆도 없어, 근데 그거 알어? 쌈박질 제일 잘하는 놈은 양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놈이야. 빈손만이 주먹이나 짱돌을 쥘 수 있고 양손으로 목을 조르고 관절을 꺾거나 분수 모르고 놀리는 혓바닥을 뽑을 수 있지.] 바이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하하하하, 뭔 대단한 소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정신승리였네, 참나 그래 그렇게 평생 자위나 하며 살아라.] 신드라는 공중에서 배꼽을 잡고 웃은 뒤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중에도 웃나 함 보자.] 바이가 함박웃음으로 맞섰다.
[하아, 간만에 웃었네, 그래그래 행운을 빌어 줄게, 참나 나도 주책이야, 뭣 하러 저런 헛소리에 일일이 대응해 줬지.] 신드라는 방을 나가면서 검지와 중지를 꼬아보였다.
[행운을 빌어 줄게, 하, 뭐 빈손이 어쩌고 저 째, 푸흡.]
태풍의 핵이 방을 나가고 그 뒤를 제드와 잔나가 따라 나려했다.
[신드라....., 이사장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때론 어른들이 더 멍청할 때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담배는, 좀 끊었으면 하는데, 건강에 안 좋고 나중에 아이한테도 해로우니. 이런 너무 영감쟁이 같은 말만 하나.]
[실제로도 나이를 잡수실 만큼 잡수시지 않았나요.]
[하기야.]
그렇게 방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잠시 후 잔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왔노라, 보았노라, 튀었노라! 이것들아, 누군 앞으로 자빠져도 뒤통수가 깨지지. 하지만 난 아니지롱.]
잔나는 통쾌하게 웃으며, 우울이 잔뜩 뒤덮고 있는 방을 가로질렀다. 그는 기력이 다해 책상위에 쓰러지듯 엎어진 이즈리얼의 등을 두드려 주고선 창가로 다가갔다.
[크핫핫, 그러니 평소에 착하게 살아, 똥 싸고 오는데 똭! 그 3명이 들어가는 게 보여 고대로 뒤로돌아 안전한 곳에 은신해 있었지. 이것들아 욕봤다, 매점가자 내가 한턱 쏠께.] 그는 정말로 자신의 행운을 즐기는 듯했지만, 주변을 덮고 있는 점도 높은 우울을 태워버리기엔 그의 유쾌함은 너무나 미약했다.
바이가 벽에 걸려있는 족자로 다가갔다.
[뭐하려고요.]
[증명.] 바이가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족자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범죄에요.] 오리아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걸린다면 말이지.] 바이가 차분하게 족자를 때자 벽에 움푹 들어간 커다란 무대가 등장했고 그 위에 거대한 동상이 주연으로 출현했다.
동상은 오른손에 하회탈을 쥐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러나 허리 뒤에 숨긴 손에는 단도가 쥐어져 있다. 옷을 입지 않은 근육질 가슴에는 [인내와 시간은 복수의 열매를 더욱 농익히며, 긴 치욕과 고난의 강을 넘어서 마침내 원수는 그대의 것이 될 지어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빠질 놈은 빠져.] 바이는 몸을 돌려 부원들을 보았다.
[누구 마음대로요, 전 절대로 두고 보지 않아요. 현명해지세요. 시간이 흐르면 오늘 있던 일도 악몽이던 추억이던 그저 있었던 일로 남을 것이 틀림없어요.]
[아니, 강요 하는 게 아냐, 그저 선택만 해.] 징크스가 조그맣게 속삭였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이건 정신 나간 짓이에요. 경찰에 신고 할 게에요.]
[마음대로.]
[우린 저 망할 년 놈 들의 후장을 딸꺼야, 그러니 겁쟁이와 멍청이는 빠져. 안 그래 케이틀린, 이즈리얼?] 너무나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두 사람은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어?]
[그래 너네 둘!] 별안간 징크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 졌다.
[알고 보니 너네 둘 꽤나 잘 살더라, 어쩐지 부촌으로 가는 버스에 타더라, 왜 그날 우리랑 겸상하기 싫었나 보지?]
[야 꼬맹이 말이 심한데.] 잔나가 끼어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의 중역에, 정치판에 끄나풀도 꽤 많더라, 와 정원 딸린 저택에 가정부, 강아지 까지, 인맥에 재력에 명성에 뭐 하나 꿀리는 게 하나 없네, 아차 학력까지. 에에에에에엑 썰런트.] 화난건지 웃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기괴한 표정을 지으면서 펼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증오와 울분이 너무나 거대했는지 고아는 말하는 내내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개는 안 기르는데, 우리 집이 그래?]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케이틀린이 그나마 입을 놀려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으려했다.
[야이 시팔년아, 니가 입을 함부로 놀리니까 피 보는 건 우리잖아!] 징크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원래 빨갛던 눈이 증오로 더욱 새빨개졌다. 케이틀린은 차마 원한을 받아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닥쳐!] 징크스가 변명의 허리를 잘랐다. 정적이 찾아왔다.
[그냥 그동안 걸어온 길이 틀린 거야, 잠시 교차로에서 만난 것뿐이지, 이젠 각자의 길을 가자. 잔나 넌 어떻게 할래?] 바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했다.
[그래, 원망하진 않을게 상놈아, 이젠 내 눈앞에서 모두들 사라져.]
처음은 이즈리얼이였다. 그는 벽을 짚고 간신이 걸을 정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에 잔나가 황급히 부축해 주지 않았으면 쓰러졌을 것이다.
[비열한세끼.] 징크스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하지만 다음번에 왔을 땐,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오리아나가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케이틀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글쎄다.] 두 명의 불량청소년을 남기고 4명의 학생이 복도로 나왔다.
[케이틀린 그만 울어요.]
[그치만, 히끅, 내가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닌데.]
[뚝, 일어날법한 일이 재수 없게 일어났을 뿐이에요, 우리도 다 알아요, 케이틀린이 잘못한건 하나 없어요.]
[근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훌쩍.]
[우리 잘잘못은 따지지 말아요, 그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요. 아무런 의미 없고 피곤만 해져요.] 심장이 없는 친구의 위로는 그녀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해 봐요, 병에 걸린 병아리를 살리려고 약을 먹이는데 부리로 쪼면, 케이틀린은 어떻게 할레요. 아프다고 내팽개칠 건가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쪼이더라도 참고 치료해 줘야죠. 징크스나 바이나 둘 다 많이 아픈 병아리에요. 그동안 옆에서 보았잖아요. 거친 모습과 반대로 작은말에도 상처입고, 외로움을 잘 타는데다가, 항상 주변사람을 생각하는 섬세함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타인을 위해서 위험을 무릎 쓰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요. 모두 착한 친구들이에요.]
[아마 지금쯤이면 후회하고 있게 확실해요.]
[에잇, 야 케잉 이것 좀 받아봐. 젠장, 여기서 돌아가면 꿈에 나오겠어, 바이 표정이 말이야.] 잔나가 어깨동무하고 있던 이즈리얼을 케이틀린에게 건네주고 복도를 역주행해서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06.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편 가르기를 한 뒤 동아리원들은 서로 데면데면한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당연히 주말이나 남는 시간에 동아리 방에 들어갈 수 없었고 아이들은 새로운 아지트를 찾기 위해 동서분주했다. 그 결과 도서관 꼭대기 층의 가장 구석에 있는 공부방이 새로운 둥지가 되어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에는 재미없는 책만 가득해서 불편해.] 케이틀린이 자신이 읽을 소설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왜요, 기술서나 물리학, 수리학을 보면 흥분되지 않나요.]
[으으, 난 문과야,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만 하면 되지.]
[그렇게 치면 말만 할 줄 알면 되지 뭐 하러 글을 읽으려 하나요.]
[하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살며시 드러내는 동안 독서가들은 조용히 책을 읽었다.
오리아나가 누군가 복도를 따라 그들의 안식처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요, 다들 살아 있구만.] 잔나가 쾌활하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 뒤에는 이즈리얼이 오리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아까도 봤잖아 잔나.]
[뭐 어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누가 알아, 음 여기가 새로운 은신처야? 나쁘지 않은데.] 잔나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창문, 책상, 의자만 있는 공간을 휙 둘러보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그게, 오는데 갑자기 안내 좀 해 달라 해서......,] 이즈리얼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중대한 할 이야기가 있어, 모두들 자리에 앉아봐. 특히 오리아나.] 방문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자 덩달아 그들도 몸을 수그려 귀를 기울였다.
잔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주저했다.
[사실 오리아나, 나는 너를, 너를,......]
케이틀린의 낯빛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즈리얼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 그런 거면, 있지, 자리를 좀 비워줄게 그 중요한 일이잖아. 가자 이즈리얼.]
[잔나, 거기까지 하세요, 마음은 알겠지만, 그 마음은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 끝까지 듣지도 않고.]
[사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리아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서 잔나의 뒤로 방을 나가고 있는 케이틀린의 뒤통수를 보았다.
[지금 방을 나가는 여인이에요.]
고백 받은 여인의 손은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남자 아이 와 책상에 엎어져 마찬가지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친구 한 명이였다.
[어?]
[프하하하하하, 나이스 오리, 어떻게 개떡 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냐.]
[잔나의 생각이야 뻔 하죠, 그런데 이렇게 월척을 낚을 줄은 몰랐네요.]
웃음의 바다에서 한동안 얼이 빠져있던 케이틀린은 자신의 순정이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는 분노를 주먹에 담아 원흉인 잔나를 응징하고 간교한 오리아나를 처형했으며 이를 방조하고 즐긴 이즈리얼에게도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다.
[하, 좋은 드립이었어.]
[대가가 좀 쓰라렸지만.] 이즈리얼이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한번만 더 그따구로 낚아봐, 아주 그냥.] 케이틀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상황 봐서, 그런데 이번엔 진짜야. 드디어 날짜를 정했어.]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거 봤지, 학교 곳곳에 교기를 달기위해 깃대를 설치하고 있잖아, 근데 어제 우연하게 한 정보를 입수했어, 설치가 다 끝나가서 이제는 깃발을 달려고 하는데 다음 주 월요일 그러니까 3일정도 뒤에 학교에 중요한 손님이 오나봐. 그래서 오늘 밤 몇몇 남자 선생님들이 학교를 돌면서 깃발을 달기로 했어.] 잔나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요.] 오리아나가 차갑게 대꾸했다.
[오늘밤이야.]
[저번에도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말리겠다고요.]
[그랬었지 아마?] 케이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알려주는 건가요?] 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10시쯤 시작할 거야, 그 전에는 덤불에 숨어 있을게야. 일찍만 온다면 막거나 설득할 수 있지 않아?]
[잔나가 하지 그래?]
[할 수 있으면 벌써 했지, 내말을 씨알도 안 먹혀. 아마 오리가 마지막에 와서 흔들면 조금 넘어가지 않을까 해서.] 그는 체념한 표정을 말을 마쳤다.
[아무튼 그래, 그렇게 됐어.] 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가려했다.
[두 사람의 증오를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발목을 잡았는지 그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좀 해봐, 불안해 뒤지겠어. 게넨 지금 진심이라고.]
[그래서 저도 더 이상 참견하거나 말리지 않는 게에요. 진심이라면, 정말로 증오가 가득 차올라 도저히 적의 피가 아니면 식힐 수 없다는데 거기에 제가 무슨 근거로 참견할 수 있지요.]
[친구잖아.]
[아니요, 우리의 관계는 그것보다 더 가벼워요. 만약 친구였으면, 저는 그 두 사람의 복수를 도왔겠죠, 말리는 게 아니라.] 잔나가 몸을 휙 돌려 오리아나를 노려보았다.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어, 심장마저 기계야.] 그리고 그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방에 남겨진 아이들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참, 슬프네요.]
[왜?]
[비겁해서요, 도와줄 수가 없으니 무시하면 되는데 돼려 못된 말만 뱉어버렸네요. 어쩜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강자 앞에서는 떨고 찍소리 못하면서, 자신보다 약하고 친절하게 대해준 친구에게는 이리 야박하게 행동하다니, 차라리 완벽한 기계여서 이런 인간성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네요.] 오리아나는 입주변을 만지작 거리면서 창밖을 쳐다 보았다.
[저기 오리아나.] 이즈리얼이 늘 그렇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가 없어, 그냥 약할 뿐이야, 나처럼.] 그의 목소리가 잠겼다.
[나도 두 사람을 돕고 싶어, 하지만, 너무 위험해. 바이와 징크스 그리고 잔나는 엄청 강해. 어쩌면 선생님들 만큼 강할지도. 그래서 저렇게 위험한 일을 벌이는거야.]
이즈리얼은 숨을 죽였다.
[나도 계네처럼 용감하고 강했으면, 나를 괴롭히던 애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워후, 너 보기보다 음험한데?] 케이틀린의 딴죽에 이즈리얼이 눈을 치켜 떳다.
[넌 몰라, 정말로 되도 않는 이유로 괴롭힘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는게, 정당하게 따지고 들면 더 큰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닳는 일은 정말 정말, 난 이해할수 있어. 주변의 어른들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다 내탓으로 돌려버리지.]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튼 오리아나, 넌 잘못하지 않았어,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야, 오히려 잘못하고 있는건 우릴 이상황까지 몰아세운 다른 누군가야, 절대 자신을 탓하지마, 그건 정말 독약이야.] 오리아나는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고마워요, 잠깐 못된생각에 사로잡혔네요.]
[뭘, 우린 친구잖아.] 이즈리얼의 결정타를 날리자 오리아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맞아요, 우린 친구에요.]
그렇게 결전의 날 오전과 오후가 지나갔다.
케이틀린은 그날도 평범하게 학원과 학원과 학원을 돌며 학습을 강요 받는 동안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 앉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일과를 마치고 운명의 10시가 다가오기 2시간전 침대에 앉아 사색에 빠졌다.
그렇게 침대에서 30분 동안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 침대에서 튀어오르더니 장롱을 열고 천으로 돌돌돌 말아놓은 막대기를 꺼냈다.
그것은 사냥용 옆총이였다. 소녀는 익숙하게 잠금장치를 풀고 쌍대속을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총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방아쇠를 몇 번 당겨보고 마무리 지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무기를 책상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는 시트를 걷고 침대의 머리맡 오른쪽 매트 지퍼를 열고 빨간 상자를 꺼냈다.
빨간 원기둥모양을 산탄들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주머니에 쟁여넣었다.
자전거 한 대가 밤길을 헤치고 학교 정문에 다달은 것은 결정적인 시간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이였다. 버스가 왔지만 그녀는 타지 않았고 버스가 떠나자 희미한 가로등 빛에 의지해 학교로 자전거를 몰고 들어 갔다.
동아리방들이 모여있는 건물에 케이틀린은 자전거를 세웠다. 그녀는 자전거를 묶어 놓고 동아리방으로 올라가려했다. 하지만, 맨 꼭대기 가운데에 있는 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이미 늦은건가, 아냐. 산길로 가로 지르면 앞지를 수도 있어. 마침 달빛도 충분하니까.]케이틀린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오솔길을 따라 본관까지 가는 첫 걸음을 떼었다.
낙옆 밟는 소리가 미행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은 악마의 속삭임을 흉내내며, 가끔씩 밤잠없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밝은 보름달 빛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속 공포심을 부추겼다. 마침내 그녀가 본관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도착했을 때 식은땀으로 등이 흥건했다.
언덕 아래에서는 문도와 몇몇의 선생들이 작업을 하는게 보인다.
저격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옆총을 반으로 꺽어 조심스럽게 탄알을 2개 집어 넣었다. 그 어느때 보다 큰 걸쇠잠기는 소리에 그녀의 팔에는 닭살이 돋아올랐다.
선생무리는 오른쪽 끝의 깃대에 깃발을 올리고선 어슬렁거리며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블리츠크랭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선 그의 팔을 수풀로 던졌다. 그 국어선생은 기계로된 몸을 가지고 있다. 기계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신체의 각 부위를 부품바꾸듯이 갈아 끼울수 있는데 그날은 길게 뻗어나가는 손을 장착하였다.
수풀에서 손이 돌아올때 그 아귀에는 가면을 쓴 분홍머리가 있었다.
[이런 엠병!] 외마디의 비명에 케이틀린은 방아손잡이를 꽉쥐었다.
[고약한 말버릇이다, 고치도록.] 블리츠크랭크가 무뚝뚝하게 말하고선 주먹을 문도에게 내밀었다.
[학교는 아까 끝, 왜 미행 우리를. 너 혼자가 아니다. 수풀에 누구!]
[닥쳐 삼룡이.] 수풀에서 징크스가 튀어나왔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시끄럽다. 몸도 걸래, 입도 걸래.]
[교사주제에 말도 똑바로 못하면서.] 말 그대로 적의 손아귀에 있는 바이는 좋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죽였다. 하지만 만용의 댓가는 컷다. 솥뚜껑만한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반동으로 고개가 돌아갈 법도 했지만, 폭력을 예상하고 목에 힘을 뻣뻣이 줘 분노의 시선을 문도의 얼굴에서 돌리지 않았다.
그리곤 있는 힘껏 그 남자의 얼굴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왜 시발, 사실을 말하니까 찔리냐?] 문도는 얼굴에 묻은 모욕을 어깨로 훔쳐낸 다음에 주먹을 머리 뒤로 최대한 땡긴 다음에 허리를 비틀었다. 희생양이 최대한 공포를 만끽하게 배려하는건지 그는 동작을 최대한 천천히 했다.
케이틀린은 견착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벌에 쏘였는지, 문도는 갑자기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바이를 지나쳐 블리츠크랭크뒤에 숨었다. 그러자 돌맹이들이 깡통을 치는 가벼운 금속성 소리가 경쾌하게 주위를 채웠다.
[이런 젠장 저 망할 고철덩어리! 징크스!] 수풀에서 잔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안되겠소, 쏩시다.] 그녀는 기대에 가득찬 목소리로 무언가를 던지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파동을 타고 먼지가 언덕 위 까지 올라 와서 케이틀린은 손으로 눈을 가려야했다.
[잔나잔나잔나잔나 나 한방더 까도되?]
[야이 정신나간년아 이름 부르지 마.] 먼지구름속에서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대화들이 오고가더니, 마침내 먼지가 가라앉았다.
바이가 블리츠크랭크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풀더니 이윽고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는 마취 총이라도 맞았는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상황은 목표물도 마찬가지였다. 문도는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뻗어 있다.
바닥에 내려와 몸을 이리저리 몸을 풀며 바이가 문도에게 여유롭게,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더니 그의 머리끄댕이를 잡아 그대로 들어돌려던졌다. 문도는 금속인간의 등에 부딪치고 다시 땅에 떨어졌다.
[미친놈들, 마법공학무기, 징역이다.]
[피차일반이지, 누가 그러니까 선빵치래?] 바이는 물리의 얼굴을 짖밟았다. 그러자 수풀에서 잔나가 나오고 징크스와 함께 문도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멍석말이를 시작했다. 온갖 욕설과 발길질을 하면서 그동한 물리에게 당한 억울함을 야만적인 방법으로 풀었다. 언덕위의 정찰병은 안심을 하고 총알을 약실에서 꺼내려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본체없는 그림자가 멍석말이의 현장으로 접근을 했다.
[앗 따거, 벌써 모기가?] 잔나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뒷목을 치자,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엎어졌다.
[뭐여 잔나? 지금 잠이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잔나를 내려 보자마자 그녀는 몸을 날려 징크스를 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이 닿지않는 어둠으로 숨었다.
[이런시발, 누군진 몰라도 에미없는 겁쟁이 세끼야, 나와서 일대일로 붙자!] 바이가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부라렸다.
[꼴, 좋다. 소년원 3끼준다. 너 인생 끝.] 말하는게 힘들었는지 문도는 평소보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엄띄엄 말하면서 천천히 비웃었다.
[닥쳐!] 징크스가 주머니를 뒤적여 다시 한번 무언가를 던졌다. 연막탄은 문도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추고 위로 튀어올라 연막을 뿌렸다.
[토셔.] 바이는 연막을 가로질러 잔나를 들처 엎어매고는 도망쳤다. 그뒤로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문도의 턱주가리에 발길질을 먹이고 오느라 늦은 징크스가 쫓았다.
그들은 본관으로 도망쳤다.
[늙어서 그런지 잘 안보이네 차라리 옥상에 올라갈껄 그랬나.] 케이틀린은 눈에 힘을 잔뜩주고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을때 너무 놀라 방아쇠를 당길뻔 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는 낙엽 밟는 소리하나 내지 않고 접근한 괴인을 확인했다. 제드다. 그는 위험한 청소년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언덕 아래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휴, 관리자는 이래저래 할게 못 되. 특히 이처럼 총체적으로 개판인 곳에서는 더 더욱이 말이지, 저 아래 소동을 일으킨 주범들은 케잉의 친구들이지?] 케이틀린은 총신을 꽉 쥐고는 교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새끼고양이가 아주 격렬하게 위협하는 모습을 본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선 그것 좀 내려놓으려무나.]
[뭘 믿고.]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렇게 현명한 친구를 두었는데 저런 무모한 일을 벌이다니, 고래심줄을 삶아 먹었나.] 교장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케이틀린의 총신이 자신의 심장을 향하건 말건 앞으로 걸어나가 언덕 아래를 턱짓으로 가르켰다.
[이미 한번 뒤가 잡혔으면 더 이상 경계할 필요가 없지 않니? 그것보다 저 아래를 한번 보렴, 친구들이 위험하겠는데?] 하지만 케이틀린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경계를 풀지 않은체 그의 옆에 섰다. 그 태도를 보고 제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유유상종이구나, 한 고집해.] 그리고 교장은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도는 그렇게 쓰길 꺼려하던 약물을 트위치에게 건내 받고 있구나, 어지간히 화가난 모양이야. 블리츠크랭크, 저 친구도 부품을 갈아끼우려고 하는거 같은데, 트위치는 이제 막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저래보여도 다들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니 힘들겠는걸?]
교장은 상념에 빠졌다.
[그나저나 마법공학 무기들은 어디에서 얻었니?] 케이틀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좋은 무기들이지, 재래식무기처럼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까. 다만 쓰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조금씩 망가진다는게 문제지. 뭐 죽는것 보단 낫기야 하지...... 죽는것 보단....... 그나저나 이제부턴 어떻게 할꺼지?]
[꼭 대답해야 하나요?]
[아니, 자유야.]
[그럼 제 대답은 침묵이에요.]
[아주 바람직한 대답이야, 이 나라의 미래가 밝군. 안심이야. 하지만 미래의 꿈나무야, 이건 알아두렴. 나도 일단은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고 일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저 개판의 뒷수습을 해야지.] 교장은 발걸음을 돌렸다.
[친구들을 어떻게 하려고요?]
[말했잔아, 난 녹봉받는다고, 돈주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일을 해야지, 구덩이를 매꾸고, 선생을 진정시키고, 불량학생을 잡아들여야지. 아 소문도 소리소문 없이 불식시켜야하니 힘든일이 되겠어.]
[우린 잘못한게 없어요.] 케이틀린이 사납게 소리쳤다.
[알어, 아이들이 잘못하는 일은 드물지.]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때까지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은거죠?] 그녀의 질문에 제드는 잠시 생각을했다.
[그야, 너희들이 이렇게 망가지기를 대다수의 어른들이 원했으니까. 너희들이 경쟁하고 서로를 물어뜯어 나약해지길 바랬으니까, 너흰 그걸 거부했고 이제 댓가를 치루는거지.]] 그는 그대로 언덕을 내려갔다.
[아참, 올라오다 보니 오리아나와 이즈리얼이 신드라와 대치하고 있더라, 그녀는 대다수의 어른들중 한명이지, 물론 나처럼 사건을 소리소문 없이 덮으려 하겠지만, 그 과정이 내것과 많이 다를껄? 너도 알잔아, 그녀는 잔인해.]
그의 뒤통수를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케이틀린은 혼란에 빠졌다. 방아쇠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이 점점 풀리면서 적을 겨누고있던 총신은 점점 바닥을 향했다. 그때 멀리에서 또 다른 폭음이 들려왔다.
[돌아갈까, 지금이라도 집에가서......] 이번에는 굉음과 격발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냅다 소리를 지르고선 케이틀린은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과감하게 돌격했다.
의외로 그녀는 소란이 한창인 본관의 오른쪽 건물로 곧장 가지 않고 반대쪽인 버스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까지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정거장에 다가간 그녀는 교장이 경고한 위험요소를 만났다.
[에휴, 쯧쯧쯧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신드라가 팔장을 끼고서 이즈리얼과 오리아나를 막아서고 있는중이다. 희미한 가로등빛 아래에서 오리아나의 금속성윤택이 도는 피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무슨소리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교실에 두고온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가는길일 뿐이에요.]
[어머나, 이게 무슨 우연의 일치람? 나도 마침 망나니들을 찾으러 왔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너 그거 기억하니?]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날, 다시 생각해도 화가나네, 난 내 차를 망가트린 범죄자들을 쫓고 있었는데 모퉁이를 돌자 너가 나타났지.]
[아, 그때 그런일이 있으셨군요, 전혀 몰랐어요.]
[너스레를 잘 떠는구나, 걱정마렴, 오늘 그때의 범인들을 잡을수 있을거 같으니. 마음 같아서는 공범자를 같이 집어 넣고 싶지만, 물증이 없으니 어쩔수 없네.]
신드라는 천천히 자신의 주변에 검은색 구체를 만들었다. 행성들은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불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였다.
[이즈리얼, 알죠?] 오리아나가 자세를 낮추면서 뒤에 있는 이즈리얼에게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불안한 눈빛을 다잡았다.
[정말 눈물난다 얘, 특히 이즈리얼,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참 좋아하실거 같은데 않그래? 저번주에도 오셨는데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더라.] 이사장은 고양이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내뻗었다.
순식간에 구체가 튀어나가 하나는 오리아나의 얼굴로 다른 하나는 이즈리얼에게 날아갔다. 오리아나는 손바닥으로 공을 막아 냈다.
그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사장은 당황해서 주위를 살펴 보았고 곧바로 자신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달박음질 소리를 잡아냈다. 오리아나는 받아낸 공을 투포환선수처럼 어깨 뒤까지 팔을 끌어당겨서 되던졌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사장의 몸통을 노린 공은 어처구니 없게도 직선이 궤적을 곡선으로 바꾸어 그녀를 가볍게 지나쳐 이즈리얼의 등을 후려쳤다. 그 힘을 못 견딘 그의 몸통은 구르는 돌처럼 바닥을 굴렀다. 벼락같이 오리아나는 신드라를 지나쳐 이즈리얼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그의 얼굴을 잽싸게 살피고선 신드라를 노려 보았다.
[거참, 대단한 의리야.] 그녀의 주변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수의 구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진짜로, 비웃는게 아니라, 요즘애들 치고는 의리도 있고 깡다구도 있어. 그 정신으로 공부좀 하면 얼마나 좋아.]
[이즈리얼, 할 수 있겠어요?] 눈앞의 적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비를 구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복싱선수처럼 주먹쥔 두 팔로 방어할 준비를 하면서 이즈리얼에게 말을 걸었다.
[가까운 거린 되.] 그는 통증 때문에 안간힘을 써 대답을 했다.
[그만두지 이즈리얼, 넌 마법을 잘 못쓰잖아, 괜히 다친다.] 그녀는 구체 하나를 끌어당겨 검지 손가락 위에서 돌렸다.
[이사장님, 질문 좀 할께요. 왜 지난 세기 대전 이후 공학무기들이 전부 금지가 되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이사장은 여유로운 태도를 거두고 긴장을 온몸에 풀어 놓았다.
[책에는 너무 비인도적이라서 모든 나라에서 금지 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무수히 많은 노예들을 만들 수 있는 무기인데 권력자들이 쓰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오리아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꼬마야, 거기까지해라. 지금 까진 잔쯤 장난이였는데, 만약 호주머니에 있는게 내가 생각하는게 맞다면 손을 꺼내는 순간, 그 뒤의 일은 나도 장담 못해.]
[그럼 답은 몇 개 남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무기들이, 권력욕의 화신들을 위협할 만큼 강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였다는 의견에 조금 동의해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경이 그녀의 오른손에,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낼지 알 수 없는 그 손으로 집중되었다.
[꽝!] 본관의 벽이 뚫리면서 벽돌들이 긴장을 깨트렸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즈리얼은 또 어딘가로 사라졌다. 쏟아지는 돌틈에서 잔나를 엎고 있는 바이와, 숨을 헐떡이는 징크스가 튀어 나왔다.
[좇됬다. 시......] 뒤를 돌아 기물파손의 결과를 살피던 바이의 옆구리에 구체가 꽃혔다. 징크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 구체는 다행히도 몸을 날린 오리아나의 가슴에 맞아 두사람이 바닥에서 함께 구르는 결과를 만들었다.
[네놈들!] 그리고 동굴에서 표효가 한바탕 울리더니 책상이 교과서와 갱지를 휘날리며 날아와 풀숲에 처박혔다. 그리고 한층 더 우락부락해진 문도가 성난 황소처럼 뛰쳐나와 눈알을 듸룩듸룩굴리며 먹이를 찾았다. 천만 다행히도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아이들을 먼져 찾기전에 이사장을 먼저 발견한 그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사장! 무슨 시간 이 지금.] 그는 어순이 맞지 않게 자신의 감상을 표현했다.
[이렇게 소란을 피워 놓고 그게 무슨 말이야. 됬어. 비켜봐.] 신드라는 지면에서 살짝 뜬채 문도의 옆을 지나갔다.
오리아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 뒤에서 바이는 옆구리를 부여 잡은채 다리를 떨며 서 있었고, 짐짝처럼 내팽겨쳐진 잔나를 깨우기 위해 징크스가 뺨을 때리고 있었다.
[정말, 지리멸렬하네.]
[이런 미친, 저 샹년과 넌 왜 여기 있는건데.] 바이가 오리아나의 뒷통수를 째려보았다.
[바이, 여기에서 빠져 나갈 방법, 혹시 가지고 있나요?]
[있겠냐?] 바이는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호흡을 다잡았다.
[할말, 나 이사장.] 문도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진정해라.] 무한궤도를 굴리며 블리츠크랭크가 아이들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의 어깨 위에는 야밤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는 트위치가 있었다. 트위치는 폴짝 뛰어내려 네발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잔나를 살펴보고는 문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등에 매고있던 가방에서 조그만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입에 물고 거대한 쥐는 문도의 등을 타고 올라가 그의 목에 주사를 한방 놓아 주었다. 그러자 길길이 날뛰던 문도는 진정되었다.
[이사장님, 징크스,바이,잔나 불법무기사용, 기물파손, 및 폭행상해입니다. 법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들 선에서 끝냅니까.] 블리츠크랭크가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기계음색으로 아이들의 죄목을 알리고 처벌을 요구했다.
[어때? 뭐가 더 마음에 드니?] 신드라는 방긋 웃었다.
[변태새끼, 칼 맞아 죽나 돌 맞아 죽나 그게 그거지. 이미 엎어진 물이야.] 바이는 퉤하고 침을 뱉고는 뛰쳐나갔다. 그러나 신드라의 구체에 맞고 그녀의 앞에 쓰러졌다. 그 뒤 곧장 하늘에서 수직으로 공이 하나 더 덜어지더니 그녀의 허리를 적중했다.
[컼.] 바이는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바이!] 징크스가 비명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서 어깨에 빗겨매고 있던 바주카를 들쳐 올렸다. 성인의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총구가 오리아나의 손에 의해 막혔다.
[징크스 잠시만요, 선생님들 선에서 처리한다면, 어느 정도 인가요.]
[아이 샹년아 그게 말이냐 방구냐.] 산채로 몸통에 핀셋이 꽃힌 바퀴벌래처럼 바닥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바이가 신음을 내뱉었다.
[음, 글세 일단 제일큰 피해를 입으신 문도선생의 의견을 들어볼까?] 물리는 약기운을 빌어서 반쯤 깨어난 정신으로 바닥에서 신음하는 바이와 뒤쪽의 패잔병들을 살펴보았다.
[찣어 죽인다. 잔챙이들 가루로 만들어 주마.] 평소의 말더듬이는 사라지고 복수의 희열에 사로잡힌 문도가 말했다. 그러곤 바이의 머리 끄댕이를 잡아 그녀를 집어 던졌다. 오리아나와 징크스, 바이가 다시한번 바닥을 굴렀다.
[그 이전에, 한가지만 물어보자.] 첫 번째 복수를 마친 문도가 손가락의 관절을 풀었다.
[도대체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냐.]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던 케이틀린은 쌍욕을 내뱉을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이, 일이 심각해 졌어요, 전 싹싹 빌어서 교내처벌로 끝내려 했는데, 머리를 다쳤나봐요.]
[무슨소리야, 우린 머리 때린 기억은 없어.]
[약을 너무 한거 아냐?] 징크스가 트위치를 바라보았다.
[난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할 정도로 나쁜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희들의 얼굴을 곰곰이 살펴도,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할만한 일을 한적이 없는데 말이야.] 아파서인지 아니면 억울해서인지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하소연에는 울음이 약간 섞여 있었다.
냉정한 현실에 의해 꺼져가던 아이들의 복수심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듣자듣자 하니까 끝이 없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잔나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너 살아 있었냐.]
[무지개다리 보라색을 건너려는 참이였는데, 도저히 저 헛소리를 흘려들을 수가 없더라고.] 바이가 주먹쥔 손을 내뻗자 잔나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니까, 내 귀가 병신이 아니면, 그러니까 한마디로 기억이 안 난다는거네?] 잔나가 비척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정말 모르겠다.]
[음, 다행이야, 내가 이런 증상을 앓는 친구들을 많이 알아서 치료법도 알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효능이 입증된 훌륭한 치료법이야. 바로 매다!]
그가 쥐고 있던 짱돌을 던져서 문도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이 맹꽁이 같은놈아, 당연히 때린놈은 잊어도 맞은 놈은 잊지 않아! 기억이 뭐가 어쩌고 어째? 고아라고 징크스랑 바이를 비아냥 거리고도 모자라, 숙제를 핑계삼아서 줘 패고, 가끔씩은 가슴도 만지고 튀더라 미친새끼야?] 잔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선 화를 대신 내 주었다.
문도는 이마에 손을 올려 흘러내린 피를 훔쳤다.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이런 일을 벌여?] 음색에 분노가 서서히 침투했다.
[겨우? 이세낀 진짜 답이 없다, 겨우?] 잔나가 발치에 있던 돌맹이를 줍기위해 허리를 굽힐 때 굉음이 터졌다. 문도가 집어던진 구체는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 가로수를 부러 트렸다.
[난 선생! 너넨 학생!] 그의 고함이 하늘을 가로 질렀다.
[나 더 많이 맞았다, 나 때 더 심해, 머리 빡빡이, 여자 치마, 숙제? 몽둥이 찜질, 너네 변기 햝아봤어! 이런일 쥐꼬리 대들다니! 정신이 썩었어!] 그의 등에는 이미 트위치가 꽃은 주가기가 몇 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학생은 복종만 하면되 어디서 대들어!]
다짜고짜 문도는 잔나에게 달려 들었고 블리츠크랭크나, 신드라는 방관하고 있었다. 그는 기세좋게 고철인간에게 부딭쳤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 있다면, 뼈조각 하나 성하지 못할 것이다.
[엠병하고 자빠졌네! 전국노예자랑은 니세끼 친구들 앞에서나 해, 왜 우리한테 질알인데! 결국 때린놈이 너보다 쎄니까 짖을 용기조차 없어서 우리한테, 약한 우리한테 화풀이 하는거 아냐!] 바닥에 발랑 넘어져 있던 잔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면서 말했다.
[진정하렴, 트위치 빨리 주사좀 가져와주게. 정신을 잃었을 때 미리 투약을 해놔야지, 애들 상대로 이게 무슨 꼴이야.] 제드는 잔나를 발로 차서 문도에게 부딫치지 않게 한뒤 그대로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트위치가 건내주는 주사기를 그의 목에 몇 개 꽃아 놓은다음 그는 블리츠 크랭크를 보았다.
[물리선생좀 교직원 실에 가져다 놓아 줄수 있나? 여기는 내가 처리하지.] 블리츠 크랭크가 신드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잔업을 하려 남았다가 봉변을 당한 세 사람은 자리를 떳다.
[어쩐일이야 제드?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신드라가 비꼬았다.
[보는대로 엄청 바뻐, 애들이 사고친거 뒷 수습도 해야하고, 후질러 놓은것도 청소해야되서, 당신도 바쁘지 않으면 도와줄수 있나?]
[물론이지, 그렇다면 난 저 녀석들을 맡지, 문도선생을 대신 해서 말이야.]
이사장의 주위에서 멈추어 있던 검은 구체들이 서서히 공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오리아나와 바이는 주먹을 쥐었고 잔나는 아까 주운 돌을 손바닥위에서 퉁겼고, 징크스는 바주카를 고처매었다.
[아니 기왕이면 평화적으로 해결 했으면 하는데. 그러니까 얘들이 무기를 버리면 출처는 묻지 않고 교내봉사 2년정도로 끝내는게 어때?]
[내가 왜? 요리보고 조리봐도 지금 제들은 맞아 죽는다 해도 할말이 없어, 이 좋은 기회에 내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나.]
[와 인성보소.] 잔나가 탄성을 내뱉자 오리아나가 그의 발등을 밟았다.
[제발 철 좀 드는게 어때.]
[싫어 난 평생 철없이 살 거야. 그리고 걱정마 제드, 나도 윗 선에서 눈살을 찌푸릴만큼 흉악한짓은 하지 않아, 왜냐면 난 뒤처리가 매우 깔끔하거든, 너도 알잔아.]
제드는 신드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신드라, 알아서해. 얘들도 상당한 각오가 있었으니까 이런 일을 벌렸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은신한 케이틀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작은 조약돌이 떨어졌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즈리얼의 노란 머리가 본관 옥상에서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로등을 가르킨 다음에 재떨이로 쓰는 흙이 담긴 항아리를 보여주었다.
케이틀린은 본능적으로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 들었다. 그녀는 안전장치를 풀고는 호흡을 다듬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와 같은 일은 벌이지 않겠다고.] 제드는 신드라의 가슴골을 가르켰다.
[그러지 뭐.] 그녀는 선듯 대답을 하였다. 제드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였다.
[거짓말이네.] 그는 작은 한숨을 남기고 자리를 떳다.
신드라 주변에 구체들이 점점 빨리 궤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 줄게.] 그녀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케이틀린은 자리에서 벌떡일어 났다.
공이가 총알을 치자 총성과 함께 가로등이 깨졌고 그 직전에 이즈리얼은 항아리를 뒤집어 모래와 담배꽁초, 재 등등의 더러운 연막을 이사장의 머리위에 쏟았다.
총성은 어둠을 불러왔다. 동시에 아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져서 도망을 쳤다. 눈에 흙이 들어간 신드라의 공격들은 사방팔방을 닥치는대로 후려쳤지만, 그 어느것도 아이들을 맞추지는 못했다.
도망치는 아이들은 즐거운지, 아니면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인지, 혹은 성공적으로 목적이 복수던 구출이던 관계없이 무사히 성사시켜서인지 각자 나름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07.
바벨탑이 무너졌다.
폭력으로 점철된 사건이 있던 다음날 점심에 동아리 아이들은 오리아나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으로 밥을 먹으러갔다.
집은 너무나 혼잡했다. 말라붙은 검은 이끼가 있는 시멘트벽에 녹슨 대문을 가진 집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찬 달동네 중턱에 그녀의 집이 있다.
아이들은 오리아나의 안내에 따라서 미로 같은 골목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즈리얼은 중턱에 다 다르기도 전에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개처럼 헐떡였다.
집에 도착해서 오리아나는 손님들을 거실에 데려다 준 다음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삼면에 문이 나있고 방안에는 가구하나 없는 거실이다.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분주하게 문을 통해서, 심지어는 나머지 한 면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앉은뱅이 식탁, 식탁보, 숟가락 젓가락, 물 컵, 물 병 술 병, 음식이 담긴 접시, 앞 접시, 휴지, 허드렛일을 거드는 아이들, 괜히 들떠 우르르 몰려다니는 꼬맹이들, 들뜬 개, 심드렁한 고양이, 할아버지, 삼촌, 할머니, 이웃 아주머니가 들락날락 거렸다.
혼돈은 아이들을 휩쓸어 적재적소에 떨구어 놓았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어, 놈팽이. 마침 잘 왔다.] 옆구리에 돌돌 말은 양탄자를 두 개나 끼고서 거실로 들어오려던 바이가 방에서 나오려던 잔나를 보고는 자신의 짐을 던졌다.
[왁, 무거워라. 어디가?]
[잘 깔아놔. 뭐 가져올게 또 있데.] 잔나가 툴툴대며 양탄자를 방 한가운데에 까는 옆에는 케이틀린이 앉아있다.
그녀는 속박되었다. 벌려진 양손을 주황색 털실이 칭칭 감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고 실의 끝에는 양탄자를 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머님이 엉덩이를 벽 쪽에 붙이면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가야 그건 벽 끝에 딱 붙여야 한단다.]
[아? 예 알겠습니다.] 할머님의 명령에 잔나는 군말 없이 따랐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혼돈이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식사는 무질서였다.
식탁에 다다르지 못한 이즈리얼은,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애들이 가져온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람에 밑도 끝도 없는 ‘왜’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징크스는 빼빼마른 몸 때문에 아주머니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물밀듯이 밀려드는 음식을 먹어야만 했으며 잔나는 삼촌들과 할아버지가 벌린 술판에 휘말려 경청을 강요받는 중이다. 바이는 뭐가 즐거운지 아이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도떼기시장 같은 곳에서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헷갈릴 정도다.
[아가야 이것도 먹으려무나.] 실 잦기를 마친 할머니가 알밤을 까는 족족 바이의 앞에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단한 것을 먹기에는 어제 입은 상처가 덜 아물었다.
[내가 먹어야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웃는 바이를 보고 잔나는 날름 밤을 집어 오도독 씹어 먹었다.
[아이고 어머님, 몇 번을 말해야되요, 이 애는 지금 죽밖에 못 먹는다고요.]
[덱! 내가 그 나이 때는 강철도 씹어 먹었어.]반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할아버지가 별안간 식탁을 내리치면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옆에 앉으신 할머니가 깐 알밤을 과도 끝에 끼워 건네주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쯧, 세상말세지, 아직도 그딴 선생이 교편을 잡고 있으니.] 어른들의 탁자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던 이웃집 아저씨가 혀를 찼다.
[마냥 덮어놓고 욕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식사에 초대받은 연구원이 바이를 흘끔 보며 의견을 내밀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러면 애새끼들을 당나귀마냥 쥐어 패는 게 칭찬할 일인가?] 동네 아저씨가 연구원을 나무랐다.
[아,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폭력은 물론 나쁘지만, 옛말에 매를 아끼다 애를 망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연구원이 잘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바이는 무례한 발언을 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들답게 자신이 선생을 후드려 팬 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제 막 죽을 먹기 시작한 막내의 식사시중을 들던 오리아나가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랑의 매 운운 하시는 분이, 교사들을 믿지 못해서 저를 연구소로 데려가는 게 말이에요.]
[오리아나, 넌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줄 아니?]
[그 우리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녀의 심술에 피곤을 느낀 연구원은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난 불안하다. 아무리 공학이 발달해도 자연스러운 오류를 가진 인공지능들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제 아무리 명문이라도 선생이고, 학생이고 쓰레기는 반듯이 있지, 혹시 우연에 의해서라도 잘못되기라도 하면.] 남자는 진실로 자신의 실험체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무한한 가능성이 그저 싹수 노란 녀석들의 장난질에 희생이 된다면, 생각해봐 그 얼마나 큰 손실.......]
[아가야, 내 나이의 절반도 못 미치는 덜 익은 풋사과 같은 녀석이 뭐라는지 털끝 하나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할머니는 마지막 알밤을 칼끝에 끼워 연구원에게 위협적으로 들이 밀었다. 그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수락해 밤을 입에 넣고 씹었다.
[이리 오려무나.] 할머니는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바이를 불렀다.
[이리 온, 어구구 어디한번 보자.] 그녀는 바이를 무릎에 뉘이고 얼굴을 유심히 살피어 보았다. 바이는 어색한지 시선을 자꾸 돌렸다.
[쯧쯧쯧, 어린것이 뭔 죄가 있다고 그리 때렸누. 거 연구원 양반, 어디한번 보소, 어디가 그리 잘못되었는지 이 늙은이는 모르겠구만.]
[저 어머님 제 말은......] 그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옆에 앉은 불콰한 할아버지가 투박한 손으로 그의 허벅지 안쪽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장가 안 가는 거랑 여기에 올 때마다 혀가 길어지는 것만 빼면 참 좋은데 말이야.]
[아이들은 말이야, 그냥 그렇게 크는 게야. 다 알아서 지 할 일 찾고 커 가는데 괜히 밥 먹고 할 일없는 어른들이 뭣 좀 가르친답시고 별 시답잖은 일로 애들에게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참견이지. 안 그러니 아가야. 입 좀 벌려 보렴.]
바이는 고개를 돌려서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지만 누구도 그 자애로움 앞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는 입을 벌렸다.
[쯧쯧, 염증이 났구나. 어멈아 약상자 가져와라. 이그, 다쳤으면 보여주면 되는 걸 꽁꽁 싸매고 있으니 이렇게 덧나지.] 억장이 무너지는 목소리로 할머니는 아이의 서러움을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약상자에서 알보칠을 꺼내, 정성스럽게 입안의 염증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꽉 주먹을 쥐었다.
[어이구, 이런 벼락 맞을 놈을 보았나. 귀신은 뭐하나 저런 거 안 잡아가고.] 치료를 마친 후에 그녀는 바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리선생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어멈에게 이야기 다 들었다. 저 짝 구석에서 눈치보고 있는 너도 잘 들어라. 또 그 정신 나간 놈이 개수작질 부릴 거 같은 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쪽으로 도망쳐쳐라. 그리고 연구원 양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어. 도대체 세상에 어떤 애가 싹수가 노래?]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잔인한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이고 저 똥강아지 고집은 쇠고집이네.] 할머니는 바이의 엉덩이를 두어 번 쳐서 내려 보낸 뒤 지팡이를 쥐고 일어섰다.
[애들이 뭘 보고 배웠으면 그리 영악하고 잔인해 졌겠어? 다 주변 어른이 가르친 게지. 나는 어제 까다 말은 나물이나 마저 까련다.] 그녀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부엌을 나갔다.
밥상머리의 짧은 촌극은 주연배우의 퇴장으로 끝이 났다. 종장이후에도 식탁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식사는 서서히 끝났고 아이들은 오리아나의 방으로 가서 그녀가 설겆이와 뒷정리를 마칠 동안 기다렸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케이틀린이 말했다.
[하긴, 누가 알보칠 원액을 정성스럽게 발라줄 생각을 했겠어? 괜찮냐?]
[죽을 것 같아. 한번 바르자마자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주먹을 내지를 뻔 했어.] 고통을 떠올리자 바이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오리아나는 올라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쟁반에 막과자와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다과회를 열었다.
[일단, 이 말은 해야겠어요.]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차를 한잔 마신 후 운을 뗐다. 오리아나가 어떤 잔소리를 할지 대충 예상한 아이들은 긴장해 몸을 움츠렸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안도가 담긴 말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일순 풀렸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에요. 더 이상 이런 만행은 없어요. 두 번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제 앞에서 다들 맹세하세요.] 오리아나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참이나 그녀의 시선을 받은 바이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까짓것 맹세하지.]
[진심으로요?]
[어, 야 징스. 너도 해]
[장난치지 말아요.] 바이가 오른손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왼손을 손바닥이 보이도록 들어올렸다. 그러나 목소리에서나 손동작에서나 진중함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게 오리아나의 신경을 건들었다.
[장난치지 말고요.]
[아, 나 진지해. 궁서체라고.] 바이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폈다.
[그래도 말이야 오리아나, 와줘서 고맙다.] 바이가 선서를 마치고선 오리아나를 보았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어. 앞뒤가 꽉 막혔잖아, 그리고 케잉이나 이즈도. 고맙다 야.]
[난?] 잔나가 막과자를 씹으면서 진지해 지는 바이에게 물었다.
[넌 꺼져. 과자나 처먹어.] 그녀는 장난스럽게 그의 허벅지를 쳤다.
[이거 섭섭하게 왜 그래? 동아리 방에서 거의 울상 짓고 있다가 내가 돌아 왔을 때처럼 웃어 달란 말.......,]
[닥쳐!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 버리겠어.] 바이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두르자 나머지 아이들도 실실 웃었다. 분위기가 풀렸다. 그들은 이전처럼 장난치고 농담하며 시간을 같이 흘려보는 사이로 되돌아왔다.
[아, 맞다. 이것 좀 봐줘. 몇 일 전 이사장의 방에서 가져온 건데.] 케이틀린은 가방에서 푸른빛이 도는 돌멩이를 꺼냈다.
[이게 뭔데?] 잔나가 광석을 잡아 눈앞에서 요리조리 살폈다.
[몰라. 하지만 이게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 케이틀린의 질문에 바이는 일전에 보았던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케잉, 그거 혹시 이사장.]
[맞아. 그런데 신드라 건 아니야.] 그녀는 이즈리얼이 싸웠던 날, 그녀가 그 이후 보았던 일들을 친구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특히 이사장이 몸속을 휘젓는 부분은 두 번 반복해 설명을 해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 들고 도망쳤지. 배수관을 따라 내려온 다음에 미친 듯이 달렸어.]
[너도 앵간히 강심장이다.] 잔나가 혀를 내둘렀다.
[다 너희들 덕이지, 아무튼 이게 뭘까?]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어보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뭐가 되었든, 일단 집어 치우고 말이야, 한 가지는 분명해. 이사장, 신드라를 가까이 해서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거지.] 바이는 광석을 째려보며 이 기묘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오리아나는 저녁도 먹고 가라 했지만, 가족과의 저녁식사 때문에 케이틀린은 먼저 나왔다.
[같이 있고는 싶은데, 나 사실 여기 온지 3개월째인데 가족들이랑 외식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해서....., 두 분이 맞벌이라 바쁘셔서.]
[세상에나, 뭐 그리 바쁘시데. 쩝,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잔나가 그녀를 위로했다.
케이틀린은 자못 아쉬운 듯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식사를 하러 가는 자동차에는 아버지, 어머니, 딸, 그리고 어색함이 있었다. 대화는 맥락을 가지지 못한 채 학교, 공부, 친구, 꿈, 따위를 맴돌았다. 수박 겉 핥기 같은 대화다.
식당은 으리으리했다. 높은 천장에 영롱히 빛나는 물방울들이 가득달린 커다란 전등이 곳곳에 매달려 있었고, 한파가 아직 완전히 가지 않았음에도 어찌나 더운지 가슴이 푹 파이거나 어깨가 훤히 들어나는 무도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들도 꽤나 있다.
[케이틀린, 뭐 먹을꺼니?] 어머니가 차림표를 덮으며 말했다.
[어, 음,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무거나 주세요.]
[어라? 케이틀린 문화어를 모르니?] 어미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읽을 줄은 아는데 뜻은......] 케이틀린의 자신 없는 대답에 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초 중에 기초인데, 그럼 학교수업은 어떻게 따라가니?]
[아 그건 괜찮아요, 공용어로 하거든요.]
[앞으로 많이 바쁘겠구나, 문화어는 교양이야, 모르면 부끄러운거란다.] 어머니는 종업원을 부르고는 딸이 알아듣지 못하는 문화어로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문화어로만 대화를 했다. 케이틀린은 묵묵히 주어진 음식을 최대한 천천히 먹으면서 지루함과 싸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목을 축이기 위해 앞에 놓은 잔에 포도주를 채우는 틈을 타서 케이틀린은 내내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원래 여기에서는 선생이 학생을 때려도 별 문제가 없어요?]
[왜 그러니? 누가 때리던?] 공중에서 잠시 병이 떠 있다.
[그게 아니라, 같은 반 친구가 좀 심하게 맞아서요.]
[왜 맞았지?]
[숙제를 하지 않아서요. 아마 5대 정도는 맞은 것 같은데.] 케이틀린은 사실대로 말하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 질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구나.] 어머니의 대꾸였다.
[으흠.] 애비는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그 선생이 물리를 가르치거든요, 근데 성격이 괴팍해서 그러니까 숙제를 하지 않은 얘가 있으면 십자가모양으로 주위에 있는 얘들 전부 무릎 꿇고 책상위에 올라가게 만들거든요.]
[너도 맞았어?] 아버지의 표정이 일순간 험악해 졌다.
[너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 맞은 거냐?]
[아, 아니요, 저는 숙제를 해가서, 가끔 제수가 없으면 책상에 올라가긴해도 맞진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별 문제 없어 보이는 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케이틀린은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닌 거 같구나, 숙제만 고분고분 해간다면 맞을 일은 없어. 그 정도의 단체체벌은 애들 장난이지. 나 때는 더 심했어. 애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박박 기어올라, 결국 위계질서가 무너지지.]
[그렇지만, 고작 숙제인데.] 자식은 항변했다.
[학생의 의무는 공부이고 선생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데 있단다. 의무를 소홀히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아버지는 이미 답이 나왔다 판단하고 식사에 집중을 했다.
[그이의 말을 듣거라, 그런 애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의 할 일에 집중하면 된단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에요.]
[그런 친구는 필요 없단다. 보나마나 성적도 저 바닥에서 놀 것 같은데. 그런 영양가 없는 아이들과 어울릴 생각 말고 훗날 성공할거 같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려무나. 그래 그럼 우선 문화어 실력부터 늘려야지.]
[3년 보고 말 사이야.]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부모는 자식을 내버려 두고 나름대로 떠들었다.
케이틀린은 다시 한 번 설명을 하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친구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케이틀린은 불안감과 계속 한 이불을 덮고 있을 수 없었다.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몸을 조금은 피곤하게 만들려고 그녀는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걸었다.
대도시엔 밤이 없다. 거리의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는 북적이는 인파들로 가득하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춥지만, 활보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고등학생은 그런 거리를 혼자 걸었다. 몇 번인가 인파 속에서 어깨를 부딪쳤지만, 두 사람모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제 가던 일을 간다.
케이틀린이 발걸음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가려했다. 몸이 적당하게 달아오른 게 이대로 집으로 도착하면 곧바로 잠에 빠질 수 있을 만큼 피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번화가의 끄트머리 구둣방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시야의 끝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고 말았다.
문도다.
그녀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동작으로 몸을 전봇대 뒤로 숨었다.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면 될 문제인데 그동안의 체험이 물리선생을 보면 피하라는 본능을 심어주었다.
골목은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서면 막힐 정도로 좁았다. 넓은 물리선생의 등짝은 입구를 가리기에 충분했고 큰 키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막을 수 있었다. 케이틀린은 피곤도 잊고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살폈다. 별안간 그가 무릎을 꿇었다.
두 번 보았던 광경이 또 펼쳐졌다. 이사장이 피범벅이 된 손으로 푸른빛을 내는 광석을 잡고 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은 전번 것 보다 표면이 매끄러웠지만, 이사장의 소유물 보다는 표면이 거칠고 크기가 다소 컸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한쪽은 동공이 커졌고 다른 한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드라는 가볍게 웃고선 관객이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가로등의 주황빛을 받아 검게 보이는 한두 방울의 핏방울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골에 내려진 광석은 천천히 살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의식을 마친 이사장은 고개를 숙인 문도를 타고 넘어서 학생에게로 다가갔다. 겁에 질려 꼼짝 못하는 그녀의 뒤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시선만 던지고선 모두가 지나쳤다.
[불금이라 놀러 나왔어?]
[아, 아, 아.] 가벼운 질문에 대답하기도 힘든 그녀였다.
[저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봤네? 골치 아파졌는걸.] 신드라는 뺨을 긁적이며 케이틀린을 살폈다.
[무, 무섭지 않아.] 그녀가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서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상대방을 협박하는지 모를 말을 했다. 그러나 신드라는 한쪽 뺨을 올리고선 당혹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잡아먹는다는 게 아니야. 다만 이렇게 인파가 붐비는 곳에서 학생에게 마법을 쓴다는 게 맘에 걸릴 뿐이지, 아 안심해. 아프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사장은 말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검지로 케이틀린의 이마를 눌렀다.
케이틀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자신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한쪽 눈을 살며시 떴다. 신드라가 골목길에서 문도를 일으켜 세우는 게 보였다.
그는 한쪽으로 부축을 받고 반대쪽으로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케이틀린의 앞으로 왔다.
[너! 지금 몇 시, 당장 집으로 가!] 케이틀린의 앞에선 문도는 평소처럼 고함을 쳤다. 그제야 인파 중 몇몇이 그들에게 작은 관심을 보이고선 발걸음을 멈추었다.
갑작스런 사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도망쳤다. 신드라는 그 모습을 보고 밤거리를 쏘다니다 호랑이 선생에게 걸려 도망치는 모습으로 비췄지만, 실상은 다 잡은 물고기를 풀어주는 형국이었다.
기밀은 그렇게 달아났다.
00.
어느새 봄이 한결 진해졌다. 학생들이 책상위에 올라가 있는 교실 밖의 갈색 나뭇가지엔 녹색 부스러기들이 잔뜩 달라 붙어있다.
[정말 좋은 날씨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에 문도 같은 선생은 지옥에서 불타야해.] 창밖을 바라보며 책상위에서 봄날을 감상하던 케이틀린은 바이의 불평에 고개를 돌렸다.
[지옥에 가도 소용이 없을 걸, 그 난리를 치루고 다음 날 멀쩡히 학교에 나타난 걸 보면.]
[미친, 병원도 안 간 것 같은데, 몸 단백질이 아닌가?]
[기분 나빠요, 동급 취급하제 마세요.] 의자에 앉아있는 오리아나가 경고를 했다.
[너, 4번 풀어!] 문도가 늘 하던 대로 교실을 휘젓다 책상위에 올라가있는 학생하나를 붉은 매로 지목했다. 그는 아이들한테 실컷 두드려 맞고도 개선되지 않았다. 문제는 여전히 말도 안 되게 어려웠고, 숙제의 양은 변함이 없었다.
지목을 받은 학생은 문제를 풀지 못했고 다행인지 그때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문도는 치켜 올린 매를 그의 허벅지로 내리꽂았다.
톡, 가져다대는 수준의 약한 훈육이다.
[다음에 해 온다.]그는 눈을 한번 흘겨보곤 경례를 받지도 않고 교실을 나갔다.
[역시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였어.] 잔나는 책상에서 내려와 실실 쪼개면서 허벅지를 마구 문질렀다.
[그럼 넌 쫌 맞아야겠다.] 그는 바이가 던진 지우개를 손바닥으로 쳐냈고 이즈리얼의 뒤통수에 가서 맞았다.
[왁, 미안, 미안.] 바이가 양손을 모아 합장해 보였다.
[근데 바이, 그거 처리했어?] 케이틀린이 바이의 뒤에 돌아가서 안마를 해주었다.
[엄, 그게 있지, 아 시원하다 조금 옆으로 그래 거기, 아야야야야, 살살해 살살.]
[처리는 개뿔이. 망했어.]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징크스가 얼굴만 들어 대답했다.
[장물애비 아저씨가 하필 그날 사고를 당해서, 지금 행불이야.] 바이가 대답했다.
[그럼, 내가 빼놔 달라던 그건?]
[꺼낸 장소에 그대로 있지. 쩝, 간만에 한탕하나 했더니. 에잉 재수가 옴 붙었어.] 친구들의 대화를 듣던 오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점 가냐? 같이 가. 이즈 내가 사과의 의미로 쏠게 따라와.]
[아니요, 동아리방에 가려고요.]
[어? 땡땡이야? 너가?] 잔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움직이지 마, 손모가지 날아가 붕께, 털끝하나 건들이지 말아.] 징크스가 눈치를 체고 의자에서 튀어 오라 오리아나를 덮쳤다. 그녀는 친구를 업고 아무렇지도 않게 복도를 걸었다.
[또 다시 이런 일을 격으려고요? 이번에 제가 이 두 손으로 전부 없엘꺼에요.]
[않되, 비싼거야.] 바이가 그녀의 배에 등을 대고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잔나는 장난스럽게 발목을 양손으로 잡아 매달렸다. 그 흐뭇한 모습을 뒤에서 이즈리얼과 케이틀린이 바라보았다.
복도는 순식간에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해 졌으며, 실로 학교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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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작정 써보니 정말 두서없는 글이 나오네요, 비판, 개선점, 생각해 볼 사항, 등 의견을 남겨 주실 수 있나요?
다음 번 글은, 더 나았으면 해서요.
다시 한 번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