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것도 다 나았고 '오늘은 되는 날이다!'라며 최상의 컨디션을 주장한 마루는 마리사의 손을 잡고 정오 즈음에 홍마관으로 나섰다. 사흘 전과 달리 든든한 동행도 있으니 레이무는 별 걱정 없이 둘을 배웅해줬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 조용하기도 했고 떠들썩하기도 했던 신사는 또 다시 레이무 혼자만의 조용한 신사로 잠시 돌아왔다.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레이무는 이렇게 신사에 혼자 있는 게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전까지 여러 사람이나 요괴가 신사에 들러붙어 레이무의 속을 긁어대는게 부지기수였기에 크게 신경쓴 적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결국엔 다들 자기 갈 곳으로 다시 돌아가곤 했으니까.
여기서 레이무는 자연스러운 생활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런 녀석들과 마루의 차이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여전히 마루는 달리 갈 곳 없는 아이라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그리 생각했던 레이무는 잠시 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정정했다. 이젠 여기가 마루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럿이 있는 것도 좋은 거라 생각하며 레이무는 자기 할일을 하기로 했다. 무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돌아올 사람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
그렇게 느즈막해진 밤이 새벽으로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다들 돌아올 곳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내일쯤에야 돌아오는 걸까 생각하던 차에, 둘다 잔뜩 지쳐 비틀비틀 반쯤 추락하는 걸 보자 레이무는 황급히 뛰쳐나가 이들을 받아줘야 했다. 저녁 식사는 제때 했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그렇다고 간신히 대답은 했지만, 야식 밥상을 조금 과한 속도로 해치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레이무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밥도 안 먹고 작업한 건 아니겠지 하면서.
"저녁은 제때, 먹긴 했는데. 그새 또 배고파져서요 으읍."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말해도 되니까 천천히. 그러다 체한다."
숨 넘어갈 것 같던 식사 직후 마루의 행동은 꽤 볼 만했다. 극심한 시장기를 해결하고 나니 눈까지 감은 채로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세수하고 이 닦고 이불에 드러눕기까지는 꼭 졸졸 흐르는 물줄기처럼 부드럽고 쉴새 없이 이어졌다. 좋은 생활습관이 몸에 배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는지 레이무는 묘하게 뿌듯해했다.
잠들 준비를 전부 다 했으니 누구도 이들의 기절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꿈도 없는 잠에 빠진 두 사람을 토닥여주며 레이무는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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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에서 깨어난 마리사는 '내가 어쩌다 잠들었더라' 싶은 표정이었다. 정신 차리는 데 좋은 찬 공기를 찾아 문을 열고 나오자 레이무가 한창 툇마루 위 다과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따뜻하게 입었다지만 쌀쌀하게 여기 나와 있냐는 마리사의 표정을 보며 레이무는 차 한 잔을 따라 건네줬다. 가끔 이렇게 쌀쌀한 곳에서 따뜻하게 차 마시는 건 평소 레이무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좋은 즐거움을 공유하던 중 마리사는 어제 챙겨왔던 중요한 물건을 배낭에서 꺼내고는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표지에 잔뜩 새겨진 문양만 봐도 마법이 담긴 책이라는 건 확실했지만 생긴게 조금은 달랐다. 보통 그런 건 크고 두껍고, 보기만 해도 곰팡내가 날 것 같은 오래된 것들이다. 하지만 저건 비교적 작고 얇은 데다가 깨끗한 새것이었다. 새파란 쪽빛의 표지가 인상적인 저 책의 밑부분엔 마루의 이름이 마치 고열의 광선으로 새긴 듯한 형태로 적혀 있었다. 여러모로 독특하게도 생겼고 실제로도 독특한 이건 바로 일기장이었다.
"원인은 못 찾았어?"
"적어도 머리를 다쳤다거나, 마음의 병 같은 것도 아니야. 우리도 모르는 해괴한 무언가라고 생각하고는 있어."
"그럼에도 저 일기장으로 고칠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어떻게?"
"당연히 마법이지. 마법으로 못할 게 뭐가 있어?"
잘난 듯 으쓱대는 마리사를 보며 레이무는 싱긋 웃는 걸로 받아쳐주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마루의 기억을 최대한 되감아본 모습은 당연히 마법사들을 난감하게 했다. 기억을 책에 비유한다면 정말 모든 방법을 다해 비가역적 파괴를 가한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을 먹칠하고, 찢어버리고 불태우는 등등 도저히 건질 게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형체를 알 수 없게 박살났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아니라며 낙담 대신 한 줄기 활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루 종일 그 고생을 하면서 완성한 게 바로 저 마법의 일기장이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기억 사이의 함수적 종속성, 그걸 역으로 행하는데 필요한 정신 해석과 마법 원리 등은 굳이 알 필요 없으니 생략하면서 마리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은 이 일기장에다 기록하면 돼. 직접 손으로 써넣지 않아도 저절로 적히기도 한다?"
"일기를 쓴다고? 듣기에는 엄청 쉬운 거 같은데, 그런다고 기억이 돌아와?"
"'그런다고'라고는 하지 말아줘. 온종일 자료를 뒤엎어대면서 의식을 몇 개씩이나 준비하고, 마루는 그 위에서 몇번이고 머리가 깨져라 집중을 해야 했다니까. 일기장에 자기 정신을 잇자마자 잠깐 기절까지 했어. 진전이 좋다고 다들 오늘 하루만에 끝내보자고 열심히 한 거야."
"알았어. 다들 고생 많았네.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단순한 일기를 쓰는 것만은 아닐 거라는 거지. 정확히 어떤 걸 써야 하는데?"
"가장 좋은 건 정말 다양한 기억들. 그 중에서도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오래토록 잊지 못할 기억들을 많이 담아둔 다음에, 몇 번 더 손을 봐줘야 해."
쓰레기만도 못한 기억의 잔해를 다시 온전한 책으로 되돌리기 위한 거꾸로의 기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것 또한 거꾸로라는 건 참 마법 같은 이유였다.
"파츄리 그 녀석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어떤 걸 추천해줬을 거 같아? 알 거 같아?"
"다양하고 강렬한 기억이라 하면, 난 여행이 떠오르는데."
"정확하게 맞췄네요."
"오, 이제 일어났어?"
부스스한 얼굴을 비비며 끼어든 마루에게 마리사가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그걸 보물처럼 양팔로 꼭 끌어안으면서 마루가 자리에 앉았고, 또 하나의 찻잔이 채워졌다.
다양한 장소, 여러 사람들, 독특한 경험들. 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마음이 향하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어가며 사색하는 자신만의 여행. 이게 파츄리가 말한 일기장에 담기 좋은 여행이었다. 여행이라. 그 한 단어만으로 여러 생각이 떠오르던 레이무는 본인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며 입을 열었다.
"마루는 여행을 좋아하나?"
"딱히 해보지도 않았고, 해본 기억도 없지만. 해보고 싶어요!"
"만약에 저 일기장이 없더라도? 기억 문제 때문에 억지로 가고 싶어하는 건 아니지?"
아주 중요한 이유가 빠져나간 경우를 가정하자 마루는 갸우뚱하며 고민했다. 그래도 고민을 그렇게 길지 않았다.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레이무 또한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전처럼 위험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도와줘야겠지?"
"그런 걱정이라면 어제 둘이서 조금 얘기했었지. 그래서 레이무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잠깐잠깐, 말하지 말아봐. 이번에도 뭔지 맞출 수 있을 거 같아."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맞춰요? 관심법인가?"
"전부 눈치와 감이지. 누나는 이런거 맞추는 거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
왜인지 마리사는 레이무에게서 조금 전에 마법의 유용성을 자랑하던 자기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레이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춰냈다. 문제의 정답은 유사시를 위한 훈련이었다. 환상향은 어린애가 여행하기 위험한 세상임은 확실하지만 레이무와 마리사 모두 같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루는 여러모로 기대되는 싹수가 있었고,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심지 있다고 말이다.
이들이 해줄 건 저 떡잎이 밟혀 꺾이지 않고 잘 자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노력과 정성만 있으면 이것이 어렵지 않을 거라 다들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부터 해도 상관없다는 의견과 함께 훈련 계획이 하나 둘 세워지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도, 배워야 할 것도 많아질 것 같았지만 다들 기분은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