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한 온도차로 인해 생겨난 작은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는 불과 얼음이 양립하고 있어 뒤엉키고 있는 당사자들도 지금 주변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을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무기와 손이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터졌다.
붉고 섬세한 손톱이 인상적인 손이 불길을 뚫고 들어와 다른 손을 붙잡았다. 붙잡힌 쪽은 악력 때문에 쩌적 갈라지며 불티를 튀기는 게 평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손이었다. 그대로 꽉 쥐면 부스러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되거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3자가 난입했다.
급한 나머지 치르노가 휘두른 건 무기라고 하기엔 많이 조악한 모양새였지만 기능상 문제는 없었다. 두꺼운 얼음봉이 플랑의 손목을 내리침과 동시에 박살났다. 덕분에 소름 돋는 소리가 나기 직전까지 갔던 마루의 손이 빠져나왔다.
부러진 조각들이 땅에 떨어져 더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질 때쯤 쌍방의 거리가 벌어졌다. 잠시 그대로 거친 숨을 고르는 시간이 되었다. 붙잡혔던 손목은 꼭 다 탄 장작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손자국 모양의 균열이 팔찌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힘겹게 돌릴 때마다 재가 떨어져나갔다. 마루는 이게 자신의 피부 같은 게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흑, 손목 괜찮아?"
"움직이는 거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감각이 좀 없지만..."
그래도 불이 붙고 나니 몸이 더 튼튼해지고 힘이 세졌다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저런 괴력을 상대로 주먹다짐을 해냈으니 몸이 갈라지고 불타는 외견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팔다리야 말할 것도 없었고, 얼굴이 엄청 얼얼한 게 이목구비가 제자리에 안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를 아는 데는 거울이 필요 없었다. 마루가 피투성이가 된 입가를 문지르자 손등에 요상한 감각이 돌았다. 녹슨 고철에서 떨어지는 시뻘건 녹처럼 검붉게 불타 말라붙은 피는 가루가 되어 묻어나왔다. 옆에서 치르노도 비슷한 걸 털어내고 있었다. 이쪽은 눈꽃처럼 언 주홍빛이 독특했다. 플랑에겐 피가 흘러나올 상처는 하나도 없었지만 몸 곳곳에 뻘건 자국들이 올라와 있었다. 저 중 어떤 게 동상이고 화상인지는 분간이 어려웠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도망만 치던 이전과 달리 마루와 치르노는 아주 공격적인 태도였다. 쫓기면서 도망치는 것보다 저 집요한 추적자를 떼어내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굵고 짧게 아프고 힘들기만 하면 끝이라는 점에서 구미가 당길 만 했다. 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잠깐 사이에 플랑의 동상과 화상은 다 나았다. 당연히 플랑은 둘이 더 여유를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 암묵적인 휴식이 갑자기 끝나려는 걸 마루가 먼저 알아챘다.
"어어! 잠깐! 갑자기 왜..."
"날아! 빨리!"
판단에 비해 소통이 늦었던 탓에 치르노는 느닷없이 마루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허공에 내던져졌다. 이러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게 익숙해질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마루는 얼굴을 가렸다. 땅을 가르는 폭염이 마루를 덮쳤고, 치르노는 뜨거운 강풍에 대처할 틈도 없이 밀려 날아갔다. 폭발이 걷히자마자 뭔지 모를 괴성이 울려퍼졌다.
정황상 비명 소리긴 했지만 그걸 들은 치르노는 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으아아아 뜨거뜨거뜨거!"
지옥이 떠오르는 불구덩이에 서서 활활 타고 있는 마루였지만 반응을 보아 하니 그에겐 가볍게 데인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작열하면서 빛나는 피부가 평범한 피부보다 더 많아지긴 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온몸이 숯덩이처럼 타오르고 숨쉴 때마다 잿불을 뱉어내는 걸까? 이쯤 되니 플랑도 궁금해졌다.
자신이 한 행동을, 마루가 한 행동을 되돌아 보면서 무엇이 저런 요상한 존재로 만든 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의구심은 둘을 때려잡는데 꼭 필요하지는 않다면서 나중으로 미뤄져 버렸다.
괴력? 불꽃? 아니면 다른 마법 같은거? 다시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나려던 차에 선수를 잡은 건 고지를 점하고 있던 치르노였다. 확실히 불타는 사람은 멀찍이 있던 치르노와 물웅덩이에 비해 주의를 잘 끌 수 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플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근처에서는 수많은 얼음들이 부서져 녹아 있었다.
석순이 자라는 과정을 매우 빠르게 진행시킨 것처럼, 땅에서 얼음 기둥이 솟아올라 철창을 이루었다. 아래에 맞춰 위에서 폭포수 같은 고드름 무더기까지 더해지자 마루에게 필요한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로 변하긴 했지만 그가 익숙하게 다루는 건 따로 있었다. 지금 치르노가 잘 막아주고 있다고 믿으면서 침착하게 힘을 끌어모았다.
곧이어 투포환을 던지듯 팔을 내질러 엄청난 기세로 그걸 쏴붙였다. 소리만으로도 화산이 뿜어내는 듯한 저 하얀 게 그냥 안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짙은 눈보라처럼 겉모습은 새하앴지만 증기 안에는 엄청난 열기가 숨겨져 있었다. 목구멍이 지글거리자 플랑은 본능적으로 상승했지만 어디로 가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막아내던 얼음 세례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기 속에서, 한눈에 봐도 플랑은 지금까지 중 가장 힘들고 무방비해 보였다.
저대로 지쳐떨어지길 바라면서도 그리 될 리가 없다 생각하며 마루는 주변의 불길을 훑어 모양을 빚었다. 어떤 건 체력을 불태울 올가미가 되어 뻗어갔고, 어떤 건 크고 작은 포탄이 되어 증기를 뚫고 날아갔다. 탄막의 선두가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증기가 터져나갔다. 흩어졌던 증기가 다시 플랑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모여들 때쯤 많은 것들이 사방팔방 쏟아져 나왔다. 마치 붉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듯한 온갖 종류의 날붙이들, 이미 몇 번 맞아 보기도 한 광탄, 불길, 광선 등등.
그럼에도 증기 속으로 쏟아지는 결사적인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지금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데.
...
도서관에서 정숙이 깨진다면 대개는 기분이 불편해지겠지만 여기서는 훨씬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책장 같은 장애물이 없다면 지평선도 보일 것 같은 이 넓은 곳에서, 아주 멀찍이서 큰 소음, 그것도 폭발음 같은 게 들렸다면? 때문에 '파츄리 널릿지'는 최대한 빨리 소음의 근원지로 향하고 있었다. 책장들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위를 가로지르던 파츄리는 얼핏 책장 사이에서 날아다니는 불빛을 보았다. 파츄리는 자신의 각도에서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처음에 본 건 뿌옇게 퍼진 안개였고, 그곳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무언가를 본 파츄리는 헐떡거리는 숨을 쥐어짰다.
"이게 무슨 짓이야! 플랑!"
발견과 동시에 파츄리가 힘겹게 외쳤지만 당사자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야 숨까지 참으면서 눈앞에 있는 마루를 두들기는데 정신 팔려 있어서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데도 기어이 위치를 알아내 집요하게 마루만을 두들겨 균열을 확장시켰다. 거기엔 상쾌한 공기를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처절한 막주먹과 불의 칼날을 받아내다 보니 마루는 죽을 맛이었다. 이렇다 할 상처가 나질 않으니 계속해서 체력을 갉아먹긴 했지만 플랑은 쉽게 나가떨어져 줄 생각이 없었다. 많이 지치긴 했지만 증기와 불로 지져도 이 정도라니, 대체 뭐가 플랑의 약점일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증기는 마루의 손을 떠나 멀리멀리 흩어졌다. 하지만 눈이 트인 건 파츄리도 마찬가지였다. 플랑과 누군가가 지면으로 내려오는 게 똑똑히 보였다.
연신 혹사당한 마루의 팔은 감각이 거의 없었지만 손맛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문양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빛의 장벽에 공격을 막힌 플랑도, 손발이나 날개를 얼리면서 마루의 부담을 덜어주던 치르노도,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그만!"
이렇게 마법까지 쓰면서 끼어들고 나서야 다들 파츄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난간을 넘은 파츄리는 신속하면서도 완만한 속도로 두둥실 바닥으로 내려왔다. 낯선 이가 서서히 다가오자 마루와 치르노를 여러모로 숨이 콱 막히게 했다. 저 사람은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일까? 도와주기는 할까?
사투 중에 날아간 눈먼 불씨는 종이책으로 가득한 이곳에서는 위험했다. 다행히 책장들은 일전에 미리 쳐둔 방어 마법 덕분에 멀쩡했지만 그 외는 파츄리의 손길 밖이었다. 피인지 멍인지 온갖 빛깔로 범벅이 된 게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간이 구겨지는 몰골이 된 두 사람, 그리고 바닥이 갈라진 흔적과 사그라드는 불길을 흘겨보고는 파츄리가 다그쳤다.
"저 둘은 뭐고,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건데?"
"개인적인 일이니까 신경쓰지 말아줘! 금방 끝낼 테니까!"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에 대한 꾸중은 말 대신 마법으로 행해졌다. 소리 없이 땅에서 솟아오른 나무줄기가 세 사람을 단단히 에워싸 구속했다. 평등하게 3명 모두 묶어버렸다는 것을 근거로 마루는 적어도 파츄리가 당장 플랑을 거들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것만으로도 갑갑함은 참을 수 있었다.
"내 일이라니깐! 저것들만 손봐주면 다 끝날 일이라고!"
"진정해! 그 손봐줘야 할 일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걸 말해!"
"저 녀석이 우리를 잡아 죽이려고 해! 도와줘!"
언쟁이 오가던 중 치르노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꽂아넣었다. 파츄리의 머릿속에서 대략의 전후 사정이 그려졌다. 여기서 파츄리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단단하고 확실하게 묶어뒀어야 했는데.
저 굵디 굵은 나무줄기가 뜨거운 폭발과 함께 부서지면서 마력으로 돌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파동은 마력에 익숙치 않은 마루와 치르노의 몸을 통과하면서 찌릿거리는 느낌과 울렁거림을 남겼다. 플랑의 파괴력은 끝을 알 수 없었고, 그게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나무 속에 갇힌 채 또 실감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마루의 입은 똑바로 움직였다. 당장 플랑이 나무째 박살내려고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이거 풀어줘요 빨리!"
가뜩이나 좁은 시야가 더 많은 나무들로 가려지자 마루는 불길해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파츄리의 판단이 옳았다. 빛으로 흩어지는 나무파편들과 함께 마루는 뒤로 날아갔지만 치명적인 타격은 없었다. 바닥을 구르던 와중에 마루는 창을 보았다. 치르노를 감싼 나무는 사라져 있었고, 그 잠깐을 노리고 플랑의 등에 수많은 얼음창이 날아들었다. 대부분은 받아쳐냈고 그나마 박힌 것도 곧바로 부러져버렸다. 자기가 만든 창자루에 얻어맞은 치르노는 내동댕이쳐졌지만 아직 창끝이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별로 깊게 박히지 않았다는 걸 알자마자 마루는 뭘 해야 할지 감이 왔다.
있는 힘껏 달려든 마루는 그대로 정을 내리치는 망치처럼 주먹으로 창끝을 때려박았다. 불타는 주먹과 얼음 말뚝 모두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마치 홀씨를 터뜨리는 것처럼 자신의 일부를 뿌렸다. 그것들은 몇 방울의 선혈과 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까지 흘린 핏값을 조금은 돌려받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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