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다수 포함.
오늘 나가베의 작품, [바깥나라의 소녀]를 다 읽었다. 1권을 아마존에서 처음 보게 되었고, 2권부터 10권까지는 국내 번역본으로, 마지막 11권은 이번 권이 막권임을 알게 되어 아마존에서 전자책(영판)을 구매했다.
- 우선 첫감상은 퍼리 BL로 유명한 나가베치고는 굉장히 자기 욕구를 절제한 작품이었다.
물론 주인공이나 바깥 사람들, 극후반의 그 자의 디자인을 보면 인외 취향이 어디가나 싶긴 하지만
숫사자와 병약 미소년의 사랑얘기에 비하면 일반인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편이기에 나가베 작품 중에서는 유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 페티쉬에 대해서는 끊고, 장르로 넘어가면 이 이야기는 잔혹동화다.
세상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눠져 있고, 안쪽 사람은 바깥 사람과 닿으면 저주받는다. 감각을 잃어버리며, 모습이 변형되며, 기억이 지워지고, 종국에는 나무가 된다.
그래서 안쪽 사람은 바깥을 용납할 수 없다. 바깥과 닿았다고 의심받는 것만으로 목숨이 위태롭다.
한편, 바깥은 어떠한가. 바깥 사람의 어머니, 바깥세계의 신은 안쪽에게 자신의 혼을 빼앗겼다. 그녀의 자식인 바깥 사람들은 어머니의 혼을 돌려드리기 위해
안쪽으로 향한다. 그들에게는 혼이 결여되어 있지만, 어머니의 혼을 되찾는다는 사명으로 그들은 움직인다.
그런 세상에 바깥 사람인 선생님과 안쪽 사람인 소녀가 만나서 함께 지낸다.
소녀와 선생님. 안쪽 사람과 바깥 사람, 순결과 저주. 대비되지만 동시에 유사가족을 이룬 두 사람은 서로가 행복해지기를,
그러면서도 할 수 있으면 되도록 둘이 함께 지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않다.
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 앞의 시련은 더욱 거대해지고, 두 사람이 작품이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침내 시련은 신과 운명, 그리고 두 사람을 교차하는 잔혹한 진실은 비수가 되어 그들의 인연을 잘라내려 하고, 그들의 가슴을 후벼판다.
침묵, 은닉, 도주, 갈등,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으로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얼룩져가며 최후에 쟁취한 것은 며칠 사이의, 최후가 예정된 마지막 휴식일 뿐이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은 며칠 동안의 유예였다.
해피엔딩이라기에는 지독히도 꼬아놨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 그럼에도 가치가 있는 건,
그 모든 시련과 이를 넘기 위해 희생해야 했던 것들 - 선생님의 다리라던가, 뿔이라던가, 소녀의 스포일러 덩어리라던가-이 무의미하지 않은 건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소녀를 사랑한다. 이는 희미해져 가는 추억과 자신의 인간성을 붙잡아 준 것이 소녀였기에,
설사 소녀가 원래는 한 존재로 실존하지 않았던 존재였을 뿐임을 알아도, 소녀였던 자가 자기 자신이 소녀임을 부정해도 결국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허상에 가까웠다 하더라도 소녀와 보낸 나날은 확실히 있었고, 마주잡은 손은 아직 거기 있기 때문이다.
소녀도 선생님을 사랑한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선생님을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나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를 깨달았을 때 소녀는 선생님이 희생했던 무언가를 되돌려 줌으로써 소녀였던 자가 남았다.
소녀였던 자는 소녀의 애정이 자기 것임을 부정하고, 나아가 소녀가 자기였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가슴은 뛴다. 선생님이 줬던 꽃을 놓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떠오르는 얼굴이 있고, 그렇기에 소녀였던 자는 자기가 소녀였음을 인정한다.
고뇌 끝에 둘은, 바깥사람이었던 자와 안쪽사람이었던 자는 손을 잡는다. 함께 일어서 간다. 마지막을 향해. 그들의 집으로.
- 그래서 주제는 무엇인가?
안쪽과 바깥, 삶과 죽음, 빛과 어둠 등 동전의 양면성처럼 한쌍씩 붙어있는 개념들은 대립항이 존재치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며, 혹은 기묘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기도 하며 세계에 공존한다.
인간,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나로 규정지음으로써 타인으로 분리되며, 독자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홀로 오롯이 완전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연약하고 무력하다.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존재다. 나의 좁은 세계를 비집고 다른 자가 침범해 들어온다.
사상, 이념, 사랑, 우정, 헌신, 증오, 분노 등 여러 형태로 들어온 외부의 자극은 나를 바꿔놓는다. 결국 나란 존재는 나와 동시에 타인들이 빚은 탑이다.
물론 이 탑도 언제든지 재공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미완성에 머물러있다. '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나'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설계자, 적어도 시공업체 관계자는 되며, 타인이 그 사람일 수 있도록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하는 능동적인 자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은 서로 부딪히고, 깨졌다. 그리고 깨진 부위로부터 흘러넘친 것을 서로에게 주며, 다시 서로를 빚었다. 그 형태는 처음과 많이 다를지 모른다.
어쩌면 더 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롭게 빚어진 나이며, 또한 내게 들어온 너의 일부분이다.
사람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을 용인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둘은 사랑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어쩌면 값싼, 편리한 소재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사랑이 그만큼 설득력있는 감정이란 것 아닐까?
이만 잡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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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에 사이드 스토리 나온다는데 후일담 좀 있으면 좋겠다. 그 후 둘은 사이좋게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런 거 말고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