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1403년. 스칼리츠 침공 당시
지기스문트 왕의 헤트만(최고사령관)이자 프라하 성 성주(성관백작) 마르크바르트 폰 아울리츠 경. 1403년. 탈름베르크 성앞에서
(실존인물 마르크바르트 폰 아울리츠는 1402년에 사망했으며 이 시점의 실제 프라하 성의 성주는 탈름베르크의 디비쉬 경이였다. 1403년 시점을 다루는 이 게임에서 그가 등장하는 것은 게임적 허용으로 보인다)
지기스문트가 고용한 쿠만인 용병들. 1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지기스문트는 대군을 운영할만한 자금이 없었기에 쿠만인 용병들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쿠텐베르크를 침공해 대대적인 약탈을 벌였다
여담으로 게임 시점에서 18년이 지난 1421년. 실질적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지기스문트가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후스파 강경파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전 동유럽에서 모은 십자군의 규모는 8만명에 달했다. 이 8만명은 어중이떠중이 농민병이 아닌 전원 기사, 용병, 맨앳암즈 등으로 구성된 전문 군사인력들이었다. 일설에는 십자군의 총병력이 20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8만명 정도로 여겨진다. 물론 이것도 시대를 생각하면 엄청난 대병력이다.
1411년. 얀 후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에게 파문당했으며 4년 후인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출석을 요구받았다. 출석하면 재판이 벌어질 것이 뻔했기에 후스는 출석요청에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당시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되어 사실상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지기스문트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여 후스는 공의회에 출석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후스가 지기스문트로부터 받은 안전통행증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재판에 넘겨 처형하였는데 이로 인해 후스의 사상을 따르던 수많은 체코인들이 분노하였고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트로츠노바의 얀 지슈카는 후스의 사상과 가르침에 심취하던 군인으로 후스 전쟁 이전에도 보헤미아 내전에서 활약한 용병이었다.
후스 전쟁 이전의 그의 대표적인 행적으로는 로젠베르크에 대한 게릴라 전이 있으며 램버그의 얀 쇼콜, 드보이츠의 라드직 코빌라 등의 벤체슬라스 4세를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 벤체슬라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로젠베르크의 하인리히 3세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해왔다
(킹덤 컴 딜리버런스를 해본 사람이라면 램버그의 얀 쇼콜도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며 드보이츠의 라드직 코빌라 라는 이름은 매우 익숙할텐데 바로 헨리의 주군이자 스칼리츠 영주인 라드직 코빌라가 맞다. 킹덤 컴 딜리버런스의 코덱스 항목을 보면 라드직 코빌라 경이 강도귀족 노릇을 했다는 기술이 있어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실제로는 이때 얀 지슈카, 얀 쇼콜 등의 동료들과 함께 벤체슬라스 왕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로젠베르크의 하인리히 3세를 대상으로 게릴라전을 행한 것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후스가 처형당하면서 분노하게 된 후스파는 지기스문트의 탄압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교황의 압력에 못이겨 지기스문트에게 의견을 양보함으로 인해 후스파 교회를 3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한 벤체슬라스 왕의 발표에 분노가 폭발하게 된 후스파들에 의해 제1차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벤체슬라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결국 사망하고 지기스문트가 형 벤체슬라스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위까지 차지하게 된다. 지기스문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던 후스파는 강경파가 힘을 얻게 되었고 그들의 지도자인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타보르파"가 결성되어 후스 전쟁이 발발한다
얀 지슈카의 군사적인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고 지기스문트는 그와의 대결에서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지기스문트는 프라하를 점령하기 위해 총 8만명,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농민병을 징집한 게 아니라 기사, 용병, 맨엣암즈 등 전문 군인들로만 구성된 8만명으로 동유럽 각지에서 십자군을 조직해 프라하 점령을 시도했으나 프라하 측면에 자리한 비트코프 언덕에서 후스파의 대응에 대패. 십자군의 예봉이 대폭 꺾이고 지기스문트의 대군도 지기스문트 본인이 프라하 공성을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전염병이 창궐하고 용병들도 급료를 받기 힘들어질 거라는 현실을 깨닫자 전장을 이탈하는 등 결국 십자군은 와해되고 지기스문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프라하에서 철수해야 했다.
사기가 대폭 오른 후스파는 몇달 안가 보헤미아 왕국 대부분을 장악했고 얀 지슈카는 20명의 후스파 지도자들로 구성된 정부 구성을 주도.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얀 지슈카는 1424년에 사망했으나 얀 지슈카가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나도록 지기스문트는 후스파를 꺾지 못했고, 결국 그들의 관습을 인정하는 등의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후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433년. 지기스문트는 비로소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리고 신성 로마 황제로 정식으로 즉위하였고, 황제로 재임중인 1436년에는 후스파에 대한 양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후스 전쟁이 마무리 되지만, 이듬해인 1437년. 황제로 선출된지 4년만에 70세로 사망한다.
지기스문트는 아들을 남기지 못해 룩셈부르크 가문은 대가 끊기고 말았고, 신성 로마 황제는 지기스문트의 사위인 알브레히트 2세가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된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가게 되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군주들의 여명. 얀 지슈카 캠페인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