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중국군 반공포로들이
배를 타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으로 가는 길 위에
화교들이 나와 환호를 보냈다.
장개석 정부는 반공포로들을 수송하기 위해
15척의 수송선과 4척의 구축함을 지원했다.
마지막까지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7,600여 명의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들이 남한에 남았다.
이들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넜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포로들의 처리가 정치회담에서 논의됐다.
그러나 정치회담에서도 이들의 향방이 정해지지 않자,
그 결정권은 중립국 감시위원단에게 넘어갔다.
북한 출신 74명, 중국 출신 12명
그리고 남한 출신 2명
그들에게 주어진 나라는
제 3국 인도였다.
인도관리군과 함께 88명의
마지막 포로들이 인도행 배에 올랐다.
자신이 나고 자란 모국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는 이들
가진 모든 것을 버릴만큼
전쟁의 기억은 지독한 것이었다.
"나는 2개의 조국에 충성을 드리다가
2개의 조국에 다 충성을 못 드리게 된 사람."
"2개의 조국을 위하다가 내 신세를 망친,
이런 신분의 내가 갈 곳은 어딘가. 그 때 생각하기를..."
"...전쟁은 다신 없어야 할거고, 내 자신이 비참한 전쟁. 다시 고통 겪기도 싫고...
또 나는 죽이고 죽는, 피를 보는 이 세계를 벗어나야 되겠다.
"그렇다면 나는 중립국에 가는 길 외에 없다. 또 내가 이 땅에 있으면은...
내가 어머님, 동생들 버리고 간다는 건 참지 못 할 일이지만은."
"내가 이 땅에 있는 한은 내 마음은 얼마나 괴로움이, 아프기도 할거다.
나는 푸른 하늘 밑에서 노래 부르며 농사하는 그런 자유의 땅에 가고 싶다."
"또 좁은데서 와락와락 개구리, 올챙이처럼 싸움만 하는,
이것은 나는 정말 견디기 싫다."
"나는 머언데, 아주 먼데, 지구 끝이라도 가서... 막 혼자래도.
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다.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런 마음에서 제3국 행을 택했죠."
전쟁도 협상도 포로송환도
모든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남과 북 그리고 제3국
그 어느 곳도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던 잊혀진 이들이 있었다.
북한군 중 일부는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돼 이북으로 후퇴하지 못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산으로 들어가
전투를 계속하다 유엔군에게 포로가 됐다.
"후퇴 뭐... 그니까 포위 당한,
후퇴로가 차단된 정규군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포로가 되었을 때는,
그 완전히 우리는 그... 국제법에 있는, 의한... 전쟁포로거든요."
포로협상에서 이들에 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다.
남에 남겨진 북한 병사들은 이후
평생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북한쪽... 포로수용소에 갔지. 그러니까 그... 그 우리는 그것만 해도,
우리를 포로, 포로수용소에 집어 넣을 땐 포로이기 때문에 넣었을 것 아니요?"
"그런데 포로수용소에 있는데 갑자기...
한, 한 10개월 쯤 있었는데 각 형무소에 모두 배치... 하더라고."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처럼
남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국군포로였다.
북한은 전쟁 초
6만 5천여 명의 한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휴전 후 실제 남한으로 돌아온 포로는
8천 3백명 정도였다.
5만 명 이상의 국군포로가 증발한 것이었다.
전쟁 중 공산측은 포로의 상당수를
북한군으로 편입시켜 포로명단을 교환할 때 이들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유엔측은 서둘러 협상을 끝맺기 위해
공산측이 축소한 포로명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국군포로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밤에, 그 평양 쪽에서 밤에 여름에 하는 축포라 그럴까
이게 많이 올라가더라고. 그 보니까, 저 뭐인가? 하니까. 그 지휘관한테 물어보니까."
"휴전되서... 평양에서 아주, 말하자면 승리의 축포를 올리는 거라는 거야.
그래서 저는 아, 이제는 휴전됐으니까 뭐 쌍방에 포로들도 있고 그러니까
응당 교환되서 가리라는 그런 희망을 가져댔어요."
"그런데 결국은 거기서 무슨 얼마 안 있어서... 남쪽으로 간다든가 무슨 심사를 한다든가
이런 것도 없이 덮어놓고 북송하더라고. 북쪽으로. 그래서 어딜 가는가.
평양북도 선천군 그... 철산군. 글로 끌고 가더라고. 거기 뭐인가 그 모나즈 광산이라는 광산이 있어요.
거기다 갖다 일을 시키더라고..."
북을 원하느냐, 남을 원하느냐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고 싶소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평생 조국의 품을 그리며 살았다.
"내가 북한에 있으면서... 그 어려운 고비 때마다 생각이 난게 뭔지 아세요?
내 군번이었어요. 221966번이라는 그 군번, 절대 잊을 수 없었..."
"그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물어보세요. 물어볼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그 사람 군번 잊어버린 사람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올거고
조국은 잊지 않고 있으리라는 기대감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어, 우리를 통솔했던 지휘관들도 있고, 또 대한민국 정부가 있으니까
언젠가는 우리를 데리러 올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참고 견뎌보자."
"뭐, 아무렴이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년까지 가겠냐?
하고 있은 것이 결국은... 10년, 20년 몇 십년이 간거지..."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러나 한반도에 채워진 이념의 족쇄는
국군포로의 자유를 지금껏 허락치 않고 있다.
3년 1개월의 전쟁 기간 중
협상으로만 자그만치 2년을 끌었다.
정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길목에 이념이 버티고 있었다.
견고한 이념 앞에 전선의 병사들과
포로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졌고
이념은 그때서야 비로서 길을 터 주었다.
그 길 끝에
정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