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어떤 일이든 그의 바램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의 허락 없이도 단독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그간의 경고를 입증한 셈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무슨 소리냐, 새가 날아가고 싶으면 가뒀던 그것을 열어서 내보내는게
이게 인간의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그러니까 다 내줬다. 그게 뭐가 나쁘냐. 너가 나쁜 놈이다.'
거꾸로 막 반박하셔서..."
한미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적쟁 직후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대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52년 부터 검토한
이승만 제거 계획에 재시동을 걸었다.
이 계획의 목표는 쿠데타를 감행해
이승만을 감금시키고 휴전협정을 매듭짓는 것이었다.
제거가 아니면 타협이었다.
미국은 클라크 유엔사령관과 로버트슨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한국전쟁 발발 3년이 되는 53년 6월 25일
로버트슨 특사가 한국에 도착했다.
이튿날 부터 이승만과 로버트슨 사이에
작은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보름 간에 줄다리기 끝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15억불의 경제원조를 한다.
한국군 정규 20개 사단, 예비 10개 사단과 여기에 상응하는 해공군을 계속해서 지원을 한다."
"그 다음에 제네바 평화협상에 있어서 90일이 지나도 결말이 안지게 되면은
한국과 미국은 공동으로 여기서 철퇴를 한다고 하는 협상에 성공을 해가지고,
그 대신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 각서를 줘 가지고..."
휴전 조인을 눈앞에 둔 7월
공산군의 마지막 대공세가 펼쳐졌다.
공산군의 공세는 한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 금성지구에 집중됐다.
남한의 유일한 전력 공급원
화천 발전소가 그곳에 있었다.
이 시기의 포탄 소비량은 전쟁기간 중 최대치를 기록했고
사상자도 15만명에 달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거기서, 참... 우리나라 전투에서 다부동을 제외하고는
아마 화천발전소를 얻기 위한 전투도... 손가락 안에 세어 둘거예요."
"우리나라에는 이북에서 송전을 끊친 다음에 발전소가 없었습니다.
그거 하나 만은 이박사가 어떻게든지 확보하라는 거예요."
"심지어는 김일성이도 화천발전소를 안 놓칠라고
거기다 중공군까지 2개 군단을 집어 넣습니다."
"그 중공군을 잡기 위해서 미군이 그냥 화천발전소를 깰라고
그 댐에다가 500키로 짜리 네이팜탄을 수백개 터뜨렸습니다."
"그래도 안 깨지더만요. 우리 정부는 저걸 확보해야 되겠고
미군은 깰라고 그러고. 이게 참 얼마나 힘듭니까?"
"한 대대 진지에 하룻밤 사이에 13,000발의 폭탄이 떨어진 것은
아마 한국전쟁 개시 이래, 유사 이래 처음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선을 마지막까지 화천에서,
군단 위치를 춘천까지 옮겨 달라고 테일러 장군이 간청을 하는 것도
제가 반박을 하면서 그 위치를 마지막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지금 화천이 남은거죠. 그 때 후퇴했더라면
화천댐도, 춘천 앞까지 아마 휴전선이 갔을 겁니다."
전쟁의 끝
그 날이 왔다.
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59회 본회의를 끝으로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양측 대표들은 2년 전 첫 회담 때처럼
인사 한마디 없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협정문서에 서명했다.
이 날 협정의 정식명칭은
정전협정이었다.
협정문은 '한국 충돌을 정지하기 위하여'라고 언급된 전문과
5개조 63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자리
그러나 조인식장 어디에서도
남한 관계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석대표들의 서명 후 정전협정문은
군사 지휘관들에게 전달됐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문산 유엔군 전방사령부에서 협정문에 서명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날 오후 10시
평양에서 서명했다.
다음 날 개성에서 중국의 펑더화이가 서명을 함으로써
휴전 조인이 마무리됐다.
이승만 만이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국전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함께 지나온 병사들은
이제야 비로서 서로를 향해
웃어줄 수 있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나니까...
믿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오늘 하루도 또 새로운 작전 명령이 떨어져 가지고,
아마 오늘이야말로 내가 죽는 날이다..."
"그렇게 막 각오를 하고... 있던 과정인데...
휴전을 맞이하게 됐죠."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병사들에겐 꿈같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
적이라 부르던 북녘
서로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전쟁으로도
남북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38선 대신 휴전선이 그어졌고
그것은 여전히 남과 북을 가르고 있었다.
한반도에 주어진 평화
그것은 불안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