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 세 번째 겨울
휴전회담의 꺼진 불씨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전투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전쟁의 화마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건
전선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바람은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국의 휴전이
유엔총회에서 논의됐다.
52년 12월 3일
한국의 휴전을 위한 해결책으로 인도 결의안이 제시됐다.
송환거부 포로를 중립국 관리에 맡기자는 인도 결의안은
유엔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됐다.
한편 한국전에서 유엔군을 총괄 지휘하던 리지웨이가
나토(NATO) 사령관으로 부임해 유럽으로 날아갔다.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방위도 신경써야 했던 미국은
유럽에서의 군사동맹 나토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그 때 동독에서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경제 악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소요로 이어졌고
수천만의 농부와 사업가들이
서방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식량부족으로 배급제가 시행되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으로 치달았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끝나면
미국이 서유럽 재무장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을 우려했다.
그는 전쟁을 최대한 끌어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 놓고자 했다.
'북한은 인적 손실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인내와 끈기를 가져라.'
'미국은 북한을 이길 수 없다.'
스탈린은 중국에게 강경노선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유세가 한창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가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
당시 미국 내에선 반전여론이 확대되고 있었고
대선 공약에서 한국전쟁은 빠질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 직후 아이젠하워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인들은 한국에 처음으로 온
미국의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
아이젠하워는 곧장 전선으로 향했다.
한국에 머문 3일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엔군 지휘관들과 함께 보냈다.
전선을 돌며 미 3사단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를 만나기도 했다.
전선 시찰을 마친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선
더욱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 강경책의 첫 행보는 한국군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기로 잠정 결정한 것이었다.
"... 미국이 이 한국전쟁을 갖다가 종식을 할려면은 대량의 예비 병력을 여기 투입해서야,
그러지 않는 이상은 해결할 수 없다고 해가지고...(중략)...
한국군이 이때까지 10개 사단 25만명이 있던 것을, 20개 사단을 2년 내에 이것을 만든다.
두 달에 한 개 사단을 만든다..."
53년 2월
아이젠하워는 대만해협 봉쇄를 철회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것은 중국과 대만 사이에 있던 보호장벽을 거둠으로써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대만의 장개석은
본토 재탈환의 의욕을 보였다.
중국은 대만해협에 미 7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장개석이 본토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한국전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만의 공격에도
대비해야 했다.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이미 중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기근과 흉작이 계속됐고
중국으로선 한국전쟁을 끝내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북한 전역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주요 시설물들은 모두 파괴됐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북한으로선 무엇보다
전후복구 작업이 시급했다.
그러나 판문점은
여전히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강철의 사나이라 불린
공산권 최고통치자의 죽음
그것은 곧 전쟁 종결이
머지 않았음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