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의 폭격으로 북한 땅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북한은 1㎢ 당
18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고 한다.
유엔군의 계속된 공습으로 삶의 터전이 파괴된 것은 물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도시는 거의 전파고요. 그냥 쓸 수 있는 집이 없어요, 거의 전파고.
이리 전파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맨 처음에는 그 폭탄 해가지고 이렇게 가고, 두번째는 소이탄 해가지고 이렇게 갑니다.
이 바둑판, 바둑판 폭격이라고 합니다."
"폭탄 해가지고, 작은 폭탄으로 쭈욱 폭격 해뿔고
소이탄 해가지고 이렇게 가로지르는 겁니다."
"이 지나가니까 나머지 목조건물이 전부 탄 겁니다.
이렇게 싹 불태워 버린다꼬."
전쟁의 화마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됐다.
건물이 모두 무너졌고,
점차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산기슭에 방공호를 파서
그 안에 공장과 시장을 만들었다.
모든 일상 생활이
땅 밑에서 이루어졌다.
후방의 민간인들은 전선의 군인들을 위한
전쟁지원 활동에 매달려야 했다.
땅 밑 공장의 기계는
밤새 쉬지 않고 돌았다.
어린 학생들은 손에서 책을 놨고
그 작은 손을 생산에 보탰다.
남자들이 짓던 농사는
이제 여자들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목숨을 걸고
논으로 나갔다.
언제 유엔군의 공습이
다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는 트렉터를 쓰지 않고 소로 가랭이 메고서 끌잖아요.
그 밭갈이 가댕이라 그러죠. 포삽이 하나 밖에 달리지 않은...
그 이거를 좀 보통, 그 당시까지는 보통 여자는 그런거 못한다."
"남자가 하는 것이다, 하는 이런게 보편적으로, 대대로 내려오면 그렇죠.
말하자면 그 고정관념이 깨졌죠. 그땐 농부도, 노동력이 부족하고 남자들이 없고
그러고 농사는 지어야지, 어떻게 합니까?"
북한은 인구가 적은데다
월남한 사람이 많이 인력이 부족했다.
그만큼 생산량도 적었다.
모자라는 물자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
압록강을 건너온 보급물자는 육로를 통해 전선으로 옮겨졌고
유엔군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쉴새없이 공습을 가했다.
공습이 지나간 곳마다
그것을 복구하기 위한 노역 동원이 펼쳐졌다.
인해전술은 후방에서도 적용됐고
파괴된 철교가 단 6일 만에 복구되기도 했다.
전선의 전투만큼이나 치열했던게
후방의 삶이었다.
전쟁은 암흑과도 같았다.
전쟁 초, 버려진 탱크를 놀이터 삼아
그 위에서 뛰놀던 아이들
그 아이들 중 많은 수가
피난 도중 부모를 잃었다.
부모가 죽어 잃었고
부모의 손을 놓쳐 잃었다.
어른들이 일으킨 이 전쟁의 최대 희생양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버려진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전국의 모든 고아원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한국전쟁 중
약 10만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됐다.
피난 생활이 길어지면서
피난지 곳곳에 학교가 들어섰다.
한국인들에게 교육은 곧 희망이었다.
다른 건 다 파괴되고 약탈당할 수 있지만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은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었다.
산 위에서, 골짜기에서
개천에서 그리고 천막 속에서
남녘 땅 어디를 가든
그곳엔 학교가 있었다.
매일 늘어나는 아이들로
학교는 3-4부제 수업을 진행해야 했고
그만큼 배우려는 아이들이 많았다.
전쟁의 암흑 속에 교육은
어둠 속의 작은 빛이었다.
대학도 다시 문을 열었다.
부산, 광주, 대구 대학들은 각 피난지에서
전시연합대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속 학교에 상관없이
한 데 모여 수업을 했다.
오랜 피난살이는 고달팠지만
배움터에서 만큼은 늘 웃음이 가득했다.
51년 봄
그간 떠돌던 흉흉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