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유엔군이 어떻게 결정하든 만주 국경을 목표로
진군을 멈추지 않을거라고 선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 결의에 의거해서 38선이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느냐
남침한 군대를 유엔에서 적으로 규정했으니..."
"... 적을 쫓을라면 압록강까지라도 만주까지라도 쫓아야 되지 않느냐.
그것이 이 박사의 지론이고..."
당사자 간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미국의 입장이 최종적으로 정리됐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맥아더에게 전달됐다.
이 문서에는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38선 이북에서 작전할 권리를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단, 중국 또는 소련과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금지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10월 1일
강릉 북쪽에 있던 국군 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넘었다.
이 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이 제정됐다.
국군을 환영나온 주민들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 전선에 있는 미군, 한국군 할 것 없이 총공격을 하라.
그 라인은 평양 바로 북쪽 청천강이다. 이렇게 목표를 정해줬어요."
"근데 어떻게 우리 국군이 사기가 올랐던지 미국 기계화 부대보다도
하루 앞서서 항상 전진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기계화 부대장인 가이즈 소장, 또 다른 군단장들이
한국 사병에게는 다리에 쁘로뻴라가 달린거 아니겠느냐..."
"... 저렇게 빨리 전진할 수가 없는데, 왜 저렇게 빠르냐고
후퇴할 때도 빠르더니 전진할 때도 빠르다고 농담까지 했어요."
국군이 38선을 넘은 다음 날
유엔군도 38선을 넘었다.
북진하는 맥아더의 의지는 확고했다.
맥아더는 적이 항복할 때까지 한반도 전체를 군사 작전지역으로 간주한다고 강조했다.
10월 9일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 무렵,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려 했다.
그러나 원산 앞바다에는 수많은 기뢰들이 부설되어 있었다.
기뢰를 제거하는 동안 미 10군단은 배 위에서 1주일을 보내야만 했다.
오히려 육로가 빨랐다.
10월 10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에 입성했다.
한편 원산 앞바다에 기뢰 제거를 위해서 일본 소해대가 비밀리에 동원됐다.
기뢰 제거 작업은 위험했지만 미군 점령 하에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일본은 미군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기뢰 제거 도중에 폭발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부 함정은 도중에 일본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국군이 원산에 입성했던 다음 날 10월 11일
김일성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민군의 사기를 독려하고 나섰다.
(북한방송)
"전쟁 위기 상황의 실현을 주동적으로 타개해 나가시려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0월 11일 방송 연설을 통하여..."
"...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기 위한 영웅적 항전으로
온 나라를 힘차게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일부 인민군 부대가 국경선 인근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국군의 북진은 가속화 됐다.
유엔군과 국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북진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앞두고는 그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한국군 제 1사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해 나갔다.
서울을 되찾았을 때와는 또다른 기대를 안고 평양으로 향했다.
"먼저 가는 부대에다 무슨...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상을 걸어 놓은 걸로 기억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위로 올라가서 우측으로 해서 신계, 곡산, 수안으로 해서
쭈욱 평양을 지나서 올라가 갔고... 거기가 그 고랑포 여울목에 대동강이 얕았어요."
"얕은 그 지역으로 물로 건넙니다. 그 날이 18일 날 오후였어요."
드디어 10월 19일
한국군 제 1사단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10월 20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고 발표했다.
발빠른 주민은 유엔기를 걸고 환영했다.
평양을 점령하자 맥아더는 북진 한계선을
압록강 남쪽 60km 까지 하는 새로운 목표선을 정했다.
새로운 북진 한계선을 설정한 맥아더는 숙천 공수작전을 펼쳤다.
인민군 수뇌부와 주력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 부근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를 구하는 것이 숙천 공수작전의 목표였다.
현장에서 낙하산 병의 투하를 직접 지켜본 맥아더는
적을 함정에 몰아 넣을 것이라며 만족했다.
그러나 인민군 주력은 이미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한 뒤 였다.
공수작전의 성과는 5명의 미군포로를 구출한 것 뿐이었다.
불과 넉 달 전, 서울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승만은
김일성이 버리고 간 평양에 입성했다.
10월 30일
이승만은 5만 명이 모인 가운데 평양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평양을 점령했다는 상징적 의미는 잠시였다.
평양을 누가 통치할 것인가를 두고 미국과 한국은 또다시 갈등 상황에 놓였다.
이승만은 한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인 만큼
당연히 북한은 한국 정부가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애치슨은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38선 이남 지역에 한에서만 대한민국이 통치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