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수에 나선 인민군은 16일 새벽까지 완강히 저항했다.
맹렬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인민군은 끝내 항복을 하거나 후퇴했다.
모두가 실패를 장담했던 인천상륙작전은 24시간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모한 모험으로 치부했던 사람들에게
맥아더는 완전한 승리로 되갚아 줬다.
작전 개시 하루만에 유엔군은 인천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인민군의 경계가 결코 허술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민군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리부터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약 20일 전인 8월 26일
인민군에게는 유엔군 상륙에 대비한 인천방어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이 날 김일성은 인민군 전선지구 경비사령부를 인천방어지구 사령부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인천방어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된 박훈이는 전투명령 1호를 통해
9월 15일까지 인천에 대한 방어설비를 완료하라고 지시한다.
9월 15일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바로 그날이었다.
인민군은 어떻게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알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의 경고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이 있는 인천지역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인민군은 상륙작전을 사전에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에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낙동강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유엔군이 후방을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군산이라든지 인천이라든지..."
"... 예상되는 상륙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집중포격을 앞세운 유엔군은 하루만에 인천을 점령했지만
서울로 진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인민군이 서울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해병사단의 뒤를 이어 상륙한 미 보병 7사단은 경인지역 남쪽을 공격하는데 투입됐다.
유엔군은 본격적으로 서울탈환작전에 들어갔다.
9월 18일 아침
인천상륙작전 3일 만에 미 해병대는 김포 비행장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날 오후부터 유엔군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이착륙하기 시작했다.
한편 낙동강 전선의 워커는 인천상륙작전 바로 다음 날인
9월 16일을 총 공격일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내린 폭우와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사리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3일째 되던 날
마침내 낙동강 전선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밀리에 부쳐졌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그토록 완강하던 인민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38선까지 후퇴하라! 전달! 뒤로 전달! 38선까지 후퇴!"
"... 이게 뭐야? 아니 38선까지 거리가 얼마요?"
"후퇴하라! 후퇴하라! 명령이다! 그러면서 뭐라 하나면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인천에 상륙했다. 빨리 후퇴하라!"
"... 그러니까 그 때 겁이 나갔던 인민군은 혼비백산이여, 정신이상자여, ..."
"북으로! 북으로! 북으로!"
패잔병들의 투항은 인민군의 떨어진 사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장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이학구 총좌는 한국전쟁 중에 투항한 최고급 북한 장교였다.
"이학구가 사단장하고
'후퇴합시다! 이제는 공격도 못하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후퇴합시다.'
그러니까 최용진(사단장)이 하고
'못한다!', '한다!' 싸움이 나서 '너 죽여삔다'라는 말을 사단장이 했어요.
"그니까 이학구가
'너가 나를 죽여? 내가 너를 죽인다. 너를 죽여야지 이 몇 천명 사병을 살릴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쐈습니다."
"최용진이 팔을 맞았어요. 그리고 '아이구' 하고 나가 자빠질 때
학구가 그 막사를 뛰어 나오면서 거기 있는 연대장 보고
'후퇴하라! 내 명령이다! 후퇴하라!' ..."
국군과 유엔군은 앞을 다투어 진격했다.
인민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지연작전을 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도망병이 오는데 그 최용진 사단장이 '저 놈 잡아오라' 그래서 잡아 왔는데
아, 국군이 바로 뒤에서 쫓아온다 이겁니다."
"... 그럼 왜 전투 안하고 쫓겨 오느냐 그러니까
하두 많이 오니까 도저히 뭐 저항할 길이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국군이 아주 강하냐니까 '어우 뭐 포 쏘고 뭐 오니까' ..."
"... 그 저녁부터 후퇴가 시작되는 겁니다. 오합지졸입니다.
명령도 없어요. 후퇴하라는 말도 없어요. 그러고 사단장이 그냥 참모들하고
서랍함을 메고, 비밀 서랍이죠. 그거를 가지고 그냥 떠나가 버려요. ..."
"... 그럼 너희는 어떻게 하라는 말도 없어요.
그러니 뭐해야 됩니까. (중략)... 그때부터 명령계통도 없고 오합지졸입니다."
국군 8사단은 태백산맥의 요충지인 안동을 공략하고 영주에 접근했다.
미 24사단은 주 공격로인 김천을 이틀 만에 돌파하고
영동과 옥천을 거쳐 대전에 도달했다.
인민군은 전라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패잔병들을 엄호하기 위해 대전에서 강력히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9월 28일
미 24사단이 대전을 점령함으로써 2개월 전 당했던 쓰라린 패배를 씻을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미 1기병사단과 인천상륙작전 부대인 미 7사단은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