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토벌군은 여수 전역을 탈환했다. 반란군과 그에 가담한 좌익 세력도 검거됐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여순 사건이 이승만 정부가 스스로 존립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됐다.
토벌군에 밀린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남로당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이듬 해 2월 계엄이 해제되었고 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처형도 진행됐다.
반란은 진압됐다. 그러나 좌익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전체 군인의 5%에 달하는 4천 7백 여명의 국내 좌익 세력이 숙청됐다.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사상 강화 등 여순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반공 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북한은 정부 수립에 발맞추어 소련군의 철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100일 만인 10월 말까지 철군을 끝낸 건
모스크바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아직 남한에 남아 있는 미군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다.
남한 정부 수립 후 미군 역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내전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철군을 연기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까지 철군을 마무리한 상황에서 미국은 더이상 철군을 미룰 수는 없었다.
48년 말부터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38선의 경비는 남한군에게 맡겨졌다.
38선을 그은 장본인들은 떠나고 38선을 원치 않았던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남북의 완충 역할을 했던 미-소군을 대신해
남한과 북한의 군대가 38선에 마주 섰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자를 그듯 인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형적인 특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산과 강 위로 그어진 38선은 그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두 개의 군대가 마주서자
물리적인 충돌이 시작됐다.
당시 충돌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개성 송악산 전투였다.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처음으로 연대급 병력이 투입됐다.
개성에서 시작된 전투는 멀리 황해도 옹진까지 확대됐다.
지리적으로 남한과 떨어져 고립된 옹진지구는
남북 간의 충돌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다.
남한은 옹진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사령부까지 설치하고 연대급 병력을 투입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적대감이 깊어 갔고
남과 북은 그 어느 쪽도 물러서거나 자제하지 않았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도 있었다.
옹진반도에서 북한군이 점령한 두락산은 이남, 남한군이 차지한 국사봉은 이북에 있었다.
38선에서는 1949년 부터 1년 반 동안 무려 760건에 달하는 충돌이 벌어졌다.
이곳은 당시 세계적으로 격화된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이미 작은 전쟁은 시작됐다.
이 무렵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옹진반도에 있는 한국군을 소멸시키고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옹진과 해주의 점령이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공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남북한의 싸움은 38선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춘천 지역을 지키던 두 개 부대의 대대장이 대대원들 일부와 가족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북한은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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