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다수당인 한민당의 지지 속에 90%가 넘는 득표율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48년 8월 15일 해방된 지 3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의 절반이 제외된 남한만의 정부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통치하고 있던
북한 역시 공식적인 정부 수립에 나섰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함께 사용했던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올려졌다.
이제 남과 북은 각자의 깃발 아래 따로 서게 된 것이다.
8월엔 남한의 좌익세력 일부가 비밀리에 황해도 해주에 모였다.
해주에서는 남조선 대표자 회의를 열어 최고 인민회의 남한 대표를 선출했다.
이것은 북한이 한반도 전체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 정부 수립 열흘 뒤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해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1차 최고 인민회의가 소집됐다.
내각 수상으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이 선출된다.
48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들 두 정부의 공식적인 수도는 모두 서울이었다.
똑같이 서울을 수도로 한 두 개의 정부는
하나의 레일 위에서 마주보며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위험한 관계였다.
남한 정부 수립 후 곧바로 한미 간에 행정 이양식이 이어졌다.
3년 간의 미 군정의 시대도 끝이 났다.
이제 모든 것을 한국인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정부 수립에 맞춰 국군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국가 주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군대였다.
국군의 모체는 1946년 1월에 창설된 국방 경비대였다.
당시 무장과 편제에 있어 군사 조직이라기 보다는 치안 예비조직에 가까웠다.
국방 경비대를 모집할 때의 전형은 신체검사와 구두시험 뿐이었다.
지원자에 대한 사상검토나 신상조사는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의 탄압으로 차츰 활동영역이 좁아지고 있던 좌익 세력에게 군대는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미 좌익이 불법화된 국가에서 이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같은 존재였다.
우려가 현실화 된 것은 여수에서 였다.
제주 사태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 좌익 군인들이 출발 직전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경제 악화와 부패한 경찰에 불만이 쌓였던 일부 주민들이 가담하면서
순천까지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수백명의 경찰과 공무원, 우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처형 당했다.
출범한지 2개월 밖에 안되는 이승만 정부에게 여순사건은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정권의 사활을 걸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 병력의 4분의 1이 동원됐다.
광주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와 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여수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반란과 진압의 혼란 속에 시가지는 지옥으로 변했다.
양민과 폭동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억울한 희생자들이 잇따랐다.